시공간의 흐름에 정체된 정체자의 낯섦.
삶 속에서 가장 맞닿아 있으면서 친숙한 것은 시간과 공간입니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태어난 후 직접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친구들은 지금에 '나'라는 존재가 성장하기까지 한 일생을 함께했습니다. 어렸을 적 생일 파티라던가,
수학여행이라던가, 사랑이라는 첫 감정과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처음으로 느꼈던 순간에도 시공간은 함께했습니다.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 같이 변화하는 자신을 보고 때로는 감탄하고, 순수했던 어렸을 적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지요.
코로나19가 창궐한 2020년. 방역시스템에 맞춘 교육 시스템은 기존에 환경과는 다르게 매우 변화하였고, 자가에서만 인터넷 강의를 통한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주어진 자유는 매우 달콤했습니다. 평소 기상해야 할 시간에는 숙면을 하고, 부랴부랴 일어나 밥을 먹고, 잠시 스마트폰을 만지다 뒤늦게 대체 강의를 듣는데, 대체 강의도 꼼수를 부려 옳지 않은 행위 등 정상적인 학업을 행하지 않고, 끝내 사회로 내던져졌습니다. 21년도 사회는 그리 다르지 않았고, 더 한 자유를 얻은 본인은 개학 전까지 술과 게임 등 자극적인 유흥만을 행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개학 후 부분적인 대면 수업으로 인해 몇 차례 등교하게 됐습니다. 넓은 부지를 가진 학교에 비해 학생 수는 매우 적었고 모두가 여전히 마스크를 쓴 채로 엄숙한 분위기에 수업을 들었습니다. 너무 놀았던 탓인지, 수업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고 학기 초부터 과제 제출 기한을 지키지 못하는 등 학업도 제대로 행하지 못했습니다. 학창시절에 생각했던 대학생으로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이었고, 이러한 현실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 맞서지 못한 채
결국 저는 회피라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익숙한 것이죠. 그럼에도 지금 이러한 시공간의 흐름은 내게 매우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의 상태는 1년 전과도 같은데. 시공간의 흐름은 계속된다. '왜?' 나는 아직 준비되지 못하였는데, '왜 시간은 먼저 출발을 하는거지??', '년도와 나이를 나타내는 숫자는 어느새 1이 올라간 거지???'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한거지?'
시공간의 흐름은 역행하지 않은, 진보적인 성격을 띠며 이러한 성격에 맞춰 함께 나란히 성장하던 자신이 어느새 주저앉아, 멀리 나아가는 시공간을 바라보며 낯섦을 느꼈던 것입니다.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을 의미있게 활용하지 못함과 발전하지 못한 채, 정체된 '정체자'로서의 나에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과 '빠르게 변화해가는 공간'은 숨 막힐듯한 중압감과 자아비판이라는 길로 들어서게 만듭니다. 현대 사회에서 정체는 위기이자 패배자의 노선이며, 자연스러운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나의 목을 옥죄어올 때 그러한 낯설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회피하고 말았습니다. 일시적으로는 마음이 편했습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이 가지는 시간과 행위들은 나를 구속했던 일체의 것들에서 나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슬프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뉴스와 SNS 등 사회관계망을 통한 주변 친구들의 소식들이 들려올 때면 방안에서 투정 부리기만 한 자신의 목을 스스로가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걱정과 후회가 떠밀려 왔고,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결정하였습니다. 어긋난 방향성으로 인한 이탈과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속죄로 현대 사회의 경쟁에 다시 합류하기 위한 재정비를 위한 기간을 가지기로 하였고, 시간과 공간이 멈춰있다고 일컬어진, 언젠가는 꼭 가야만 하는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낯설기만 한 공간이지만, 마음만은 친숙했습니다. 꼭 행해야만 했던 의무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사회에 대한 불안감과 걱정은 한동안은 잊고 살았으나, 시간이 지나 사회에 나갈 시기가 되자. 또다시 불안과 걱정이 엄습했습니다. 나이를 나타내는 숫자는 어느새 1이 또 늘었고 그러한 사실이 분하였으나, 이전과는 달리 같은 처지에 있는 동기들의 응원과 더 이상 도망치지 말고 맞서보자고 다짐하였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맞서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 회피를 해봤자, 일시적인 정신적 회복에 불과하지 더 한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고, 복학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이전과는 달리 정상적인 학업을 행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상대적이지요. 누군가에겐 지금이 정체기일 수가 있고,은퇴기일 수가 있습니다. 혹은 이제 시작일 수도 있죠.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나, 그 흐름은 각자의 선택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흘러갑니다.
이제 저는 깨달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친구가 잠시 앞에서 저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정체 되어있던 저를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앞에서 기다린 것입니다. 이제 저는 다시 그들과 나란히 나아가려 합니다.
우리는 낯섦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친숙했던 것에서 어느 순간 낯섦을 느끼는 순간은 모두에게 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터닝포인트입니다. 친숙하게만 느껴지던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의미가 변하고, 형태가 변하고, 가치가 변해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그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똑같은 의미와 형태와 가치를 지니고 있었을 뿐이고 그러한 본질에서 자신이 바라보고자만, 자신이 원했던 그러한 부분만을 봐왔기에 편협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내적인 변화 혹은 외적 상황에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친숙하게만 봐오던 부분이 아닌, 그동안 바라보지 않았던 다른 이면이 더 확장되어 다가왔기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 부분만을 봐오던 편협한 시각에서 다른 부분의 이면까지 살펴볼 수있는 '시각의 확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각의 확장을 경험하고, 이것을 유지한 채 다시 '재 익숙화'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 자신과 그것에 대한 관계를 다시 정립해 볼 수 있으며, 지금껏 알지 못하였던 사실이나, 우리가 잊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시공간은 존재의 방식이면서 결과이기도 합니다. 존재는 시공간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며, 시공간은 존재를 통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이미 그렇게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 섬 등의 공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입니다. 시간도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흘러갔고, 흘러가며, 흘러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숙하게 생각하지만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도, 공간이 변함없이 유지된다는 것도, 다시 되돌이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야 될 이유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친구가 잠시 앞에서 저를 기다렸다는 사실"이라는 멋진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친구는 한 번도 내곁에서 떠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