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근대화가 낯설지 않은 세대라 별다른 감흥 없이 무덤덤하다.
광복로와 관사골이 이어지는 길목에 '근대등록문화재'란 훈장을 단
'풍국정미수'와 '영광이발관', '제일교회'가 이웃해 있다.
1940년대에 문을 연 '풍국정미소'는 2009년부터 운영을 멈춘 채 먼지가 쌓였다.
목재 구조물에 기계를 설치했다.
천정이 높고 공간이 넓어 위풍당당하다.
기계 보존 상태가 양호해 공학도들이 견학을 온다는 것.
주인 우길연씨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1960년대부터 운영해 왔다.
고향에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던 물레방앗간이 있어 도정(搗精)의 공정을 지켜보았다.
공이가 달린 방앗간이 아니라 톱니바퀴와 피뎃줄이 돌아가는 정미소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물레방아는 밤낮없이 돌았다.
쌀겨를 벗기는 기계음 소리가 요란했고, 쌀겨와 먼지가 얼굴을 뽀얗게 분칠했다.
어른들은 밤샘 작업을 하면서도 불어나는 쌀가마니에 피로를 잊은 채 즐거운 표정이었다.
'영주제일교회'는 이 지역에서는 유일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가치가 높다.
1907년 기독교 신도들이 기도 모임을 가진 것이 효시로 교회의 역사는 깊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반대로 목사와 전도사 등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 전쟁 때 예배당이 소실되었다.
1954년 5월부터 교회 신도들의 노력봉사가 보태져 1958년 준공됐다.
옛날 방식으로 이발하고 면도하고 세발하는 '영광이발관'은 1930년대부터 이어온 노포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시온이발관, 국제이발관으로 상호가 바뀌었을 뿐 그 자리를 지켰다.
지금의 주인은 1970년부터 운영해 온 이종수씨다.
빛바랜 이발사 면허증과 손때 묻은 이발 기구에 시간이 멈춘 듯하다.
그는 '옛날 이발관을 찾아오는 사람은 뜸해도 이용업의 생활사를 간직한 공간이라 문을 열고 있다'고 한다.
반세기 동안 외길을 걸어온 자긍심이 묻어난다.
광복로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길로 접어들면 '관사골'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은 일본식 관사다.
틀에 맞춰 찍어 낸 듯 규격이 비슷하다.
창틀이 바깥으로 튀어나왔고, 시멘트기와지붕이다.
외벽은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했다.
두 동의 관사가 중앙의 담을 공유하는 형태로 각각 독립된 생활 공간이다.
작은 텃밭이 딸린 것도 일률적이다.
이 건물은 중앙선 철도 공사에 참여한 기술자들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1930년대 중반에 지어져 관사촌이 형성됐다.
현재 남아 있는 9동의 관사 건물 중 보존 상태가 양호한 5호와 7호가 등록문화재로 등재됐다.
영주가 근대도시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되고 영동선과 경북선 철도의 요충지로 자리 잡으면서다.
1973년 영주역이 이전된 후 관사촌은 쇠락했으나,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관사골 벽화마을'로 되살아났다.
추억의 만화 '은하철도 999' 등 다양한 벽화가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어들인다.
또 하나의 근대문화재는 영광중학교 서편 길 아래 '영주동 근대한옥'이다.
본채는 없어지고 별채만 남았다.
지붕이 낡고 허름한데 사람이 살고 있다.
근대역삼누화거리의 풍경 밖으로 나오면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라면 사양하겠다.
그 시절의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할 때 아름답다. 이규섭 시인 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