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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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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꿀뚝 스크랩 부석사
스토리텔러 추천 0 조회 2 15.01.24 09: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요즘 풍기에서는 인삼축제가 열리고 있다

풍기는 정감록에서 난리, 질병, 기아를 피할 수 있는 열 군데 중 하나로 꼽히는 바람에 이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 정착한 곳이다

그래서 서부냉면집의 물냉면은 '원형 그대로의 평안도 맛'이라 하여 서울에서 이북 출신 노인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맛을 보러 오는 집이다

 

인삼도 이북 출신들이 심기 시작한 것이란다

그러니 풍기에 가서 냉면 먹고 인삼 먹고 '정 도너츠' 가게에 가서 생강도너츠 사 먹고 인견으로 만든 옷 하나 사고..이 정도는 되어야 풍기 구경 제대로 한 셈이 된다

거기에다 요즘은 맛있기로 이름난 풍기사과까지 곁들이면 더할 나위없는 호사가 되겠다

 

풍기에 간 김에 부석사를 들렀다

부석사는 갈 때마다 아련한 그리움이 솟는 곳이다

안양루에서 남으로 내려다 보는 연봉連峰들의 모습은 마치 부석사를 향하여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보는 것 같다

산 능선 뒤에 또 다른 산의 능선, 그 뒤의 또 다른 능선..

5-6겹의 능선이 겹쳐 보이는 이 모습을 '산그리매'라고 하던가?

 

부석사의 주 전각은 국보이기도 한 무량수전이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하여 부석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도 있지만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모신 전각은 모두 무량수전이다

아우라지 하면 정선의 아우라지만 떠올리고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만 떠올리지만 사실 아우라지는 두 강이 어우러지는(합쳐지는) 곳이고 대원군은 자신은 왕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왕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들이다

무량수전도 마찬가지.

 

부처님..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만 있는게 아니고 아미타불도 있고 미륵불도 있고 비로자나불도 있다

부처님 중에서 극락에 계시는 분이 아미타불(=무량수불)이다

극락에 계시니 수명이 제한이 없고(無量壽) 밝기가 한정이 없다(無量光)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산스크리트어의 '아미타유스'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상으로 친근한 부처님이 바로 아미타불이다

우리가 흔히 읊조리는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에게 귀의(나무)한다는 뜻이다

'나무아미타불'만 열심히 읊조리면 극락에 갈 수 있다 하니 무식한 대중들에게는 이것보다 더 쉬운 극락행 열차표가 없었고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불교 대중화의 요체였다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극락행을 보장해 주시는 아미타불이 앉아 계신데 뜻밖에도 아미타불께서는 정면에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니고 건물 왼쪽 벽쪽에서 오른쪽 벽쪽을 보고 앉아 계신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아미타불께서 몸집이 너무 커셔서 장방형의 건물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계시면 균형이 좀 맞지 않을 듯 하네

 

부석사에는 절 하나 안에 국보가 자그마치 5개가 있다

아마 국보가 6개 있는 불국사 빼고는 우리나라에서 국보가 이 만큼이나 많은 절은 부석사가 으뜸이 아닐까 한다

구례 화엄사도 국보가 4개나 있는 절이지만 부석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왠만한 자치단체에 국보가 하나도 없는 곳이 부지기수인데.. 대단한 절이 아닐 수 없다

무량수전 말고도 부석사의 국보는 법당 앞의 석등, 무량수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당, 조사당의 벽화(따로 떼내어 다른 건물에 보관하고 있다)가 더 있다

 

부석사는 통일신라 초기,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전국에 있는 절 중 절반은 의상 아니면 원효가 세운 절이란다

그 분들이 건축가도 아닌 승려들인데 평생을 전국을 돌아 다니며 그 많은 절들을 세웠을 리는 없고 단지 그분들의 후광을 빌린 곳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참외..하면 성주고 고추..하면 영양이고 마늘..하면 의성이듯이 절..은 의상이 세웠다 해야 폼이 나는 모양일세

 

그러나 부석사는 의상이 세웠다는 것이 기록에도 나오고 조사당祖師堂이라는 고려시대 건물에는 의상의 소조상塑造像이 모셔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의상이 중국 유학하던 시절, 의상을 흠모하였다는 중국 처녀 선묘善妙가 우리 나라까지 쫓아와 바위로 변했다는 부석浮石까지 절 뒤편에 있으니 이건 의상이 세웠다고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의상은 중국 처녀가 바다 건너까지 쫓아올 정도였으니 道力도 높았지만 아마 인물이 좋았던 모양일세(중국 처녀가 의상의 도력을 보고 쫓아 오지는 않았을 터이니..)

인물이 좋았던 법정 스님도 따르는 신도의 90%가 여자였다나..

 

부석사라는 이름의 연유가 되는 부석浮石은 그 밑에 실을 넣고 당겨보면 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허공중에 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단다

그 바위에 浮石이라는 글씨도 새겨져 있다

이 바위 덕에 절 이름이 부석사가 되고 이 동네 이름이 부석면이 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오른쪽 위로 올라가면 의상을 모신 조사당이 나온다

조사당은 고려 우왕 때에 건립되었다 한다.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라는 영예를 한 동안 누렸다(지금은 수덕사 대웅전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조사당 앞에 골담초 한 그루가 철조망 안에서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비실비실한 모습으로 서 있다

골담草라는 이름이지만 풀이 아니라 어엿한 나무다

가지를 달여 먹으면 뼈(骨)에 좋다(擔)고 이름이 골담초다

그런데 절에서는 나무 이름을 선비화로 달아 놓았네

양반, 선비 할 때의 그 선비가 아니고 禪扉花다. 참선(禪)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扉)에 있는 꽃이라는 뜻이다. 불교식의 작명이고 식물도감에도 없는 창작품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사당 옆에는 외인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선방禪房이 있다

이 깊은 소백산 기슭에 자리잡은 절로도 모자라 절 맨 윗쪽 조사당 옆에 선방을 들여놓고 머리가 터지도록 궁리하는 그 道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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