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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17세기 스코틀랜드 교회 생활
서 창 원
들어가는 말
청교도 운동과 언약도 운동이 동시대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17세기는 그야말로 영적 가치가 최고조에 달하였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잉글랜드에서 청교도들의 활동은 영국 전 사회의 얼굴을 바꾸었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종교적 활약상은 가공할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적인 세파에 좌우되는 아픔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들이 남긴 영적 유산은 지금까지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도들은 17세기 중반까지는 적어도 잉글랜드 청교도들과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661년 잉글랜드의 왕정 복귀 이후와 특히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1648) 이후 언약도들의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남과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이 그 동안 유지해 왔던 일치된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극단적인 노선을 견지한 순수한 언약도들에 의하여 장로교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그들의 수고와 순교의 피로 인하여 1688년 명예 혁명이후 장로회주의가 재형성되면서 스코틀랜드는 오늘날까지 장로교 국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에서 언약도들은 장차 견고하게 세워지게 될 장로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들이었고 국가와 정치 및 사회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력 역시 막강하였다. 비록 그들에게 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의 문턱을 넘나드는 일들이 있었지만 혹독한 겨울철에 만발하게 된 그들이 보여준 은혜의 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도전과 감동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그들의 삶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는 것은 경건한 자가 점점 사라지고 의인을 찾기 힘든 우리 시대에 크나큰 도전이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1. 교 회
17세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성직자가 할 교회 행정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모든 원칙은 지역의 대 지주 혹은 토지 소유자들에 의하여 움직여졌다. 즉 그들은 주민들에게 집과 제분소 그리고 학교와 교회 및 목사와 목사의 사택과 생활비를 전부 제공하는 자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극도로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대지주의 손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목사들조차도 이들 후원자(patrons)들에 의하여 청빙되었고 교회 법안들이 그리 소용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목사는 백성들의 영적인 문제와 그 밖의 많은 일들의 조언자가 되었다. 목사는 마을에서 가장 잘 교육을 받은 자였었고 사회적인 지위도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성도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늘 모범을 보여야 할 자였다. 경건하여야 했으며 양떼들을 세심히 살필 줄 알고 친절한 목사는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목사는 장로들의 조언을 들었고, 장로들은 각 지역에서 선출된 덕망 있고 존경받는 자라야 했다. 장로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어야 했고, 심방을 통해서 교구민들을 잘 이해할 줄 알아야 했으며, 공평하고 자애롭게 돌아보아야 했었다.
당회는 교인들이 교회당에 오는 것을 감독하였고 교회는 성도들을 깨우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종을 울렸으며 두 번째 종이 울릴 때에는 오전 예배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미 집을 나서 교회당으로 향하고 있어야 했다. 어떤 악기나 찬양대도 없이 회중은 앉은 채로 시편 찬송을 불렀다. 이 때 대체로 학교 교장 선생이 강단 밑에 있는 선창자 자리에서 찬양을 인도하였으며 회중은 그의 인도에 따라 몇몇 시편 곡조에 맞추어 찬양하였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예배의 첫 부분은 이 선창자에 의하여 인도되었었다. 세 번째 종이 울리면 검은 가운을 입은 목사가 등단하였고 기도하고 설교를 하였다. 설교는 아주 길었고 강단에 있는 30분용 모래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였다. 설교는 아주 신중하게 준비하였으나 설교할 때는 원고가 없이 설교하였다. 청중들에게 약간의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도록 요구하였으며 신학적 내용도 알고 있도록 하였다. 로마 교회에 대한 공격과 정치적인 문제들을 설교에서 심심찮게 다루었다. 설교 본문은 특별한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성경의 한 단락 정도 되었고 매 주마다 이어서 강해하는 설교였었다. 성경 한 권이 몇 달씩 설교되기도 했던 것이다. 본문은 당회록에 기록되었었다.
교회당들은 산뜻한 건물이 아니었다. 예배 의식도 교회당처럼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시편 찬송을 부를 때는 자리에 앉아서 했으며 대표 기도할 때에 회중은 일어서서 함께 기도했으며 이 기도는 긴 기도였고 내용에 있어서 성경적이고 즉흥적인 기도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오랫동안 목사가 하는 설교 외에 성경을 한 장 읽고 그 말씀을 설명하는 일종의 강좌가 예배 시간에 있었다. 오후 예배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요리문답 공부를 시켰다. 헌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드렸으며, 때로 공공시설의 수리나 다리 건설 및 노예를 속량하기 위한 헌금도 드려졌다.
주일은 장로교나 감독교회가 다 엄격하게 지켰다. 공 예배 지침서에 언급된 것을 보면 이와 같다: ‘주일은 성도들의 안식일로서 주님께 성결한 날로 지켜져야 한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 목적에 따라 온 종일 불필요한 노동으로부터 거룩한 휴식이 있어야 하고 운동이나 오락뿐 아니라 모든 세속적인 말이나 생각을 억제해야 한다.’ 당회는 모든 성도들의 행동들을 감독해야 하고 개개인들은 주일에 일하거나 장사하거나 오락을 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술 마시는 것 때문에 제재를 받았다.
세례는 교회당 안에서 거행되었고 세례 용기는 강단 옆에 달려 있는 고리에 걸어 놓았다. 결혼식도 엄숙하게 교회당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 있어서 하관시에는 예배가 집전되지 않았다. 당회는 관을 덮는 천을 제공하였고 장례행렬이 지나갈 때 손에 든 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성찬식은 매우 특별한 행사였다. 이 예식은 일 년에 한번 또는 두 번 거행되었는데 성찬식이 임박해 오면 목사는 교구의 모든 지역을 심방하면서 성도들의 영적 지식과 상태를 점검하였다. 성찬 참여자는 적어도 사도신경과 십계명 및 주기도문을 암송할 수 있어야 했다. 성도들의 행동이 점검되었다. 누가 이웃과 불화하고 있는지 당회는 파악하고 화해시키며 끝까지 화해하지 않을 경우 성찬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장로들은 성경 지식과 행동 점검에 합격한 성도들에겐 납으로 만든 성찬 토큰을 나누어주었고 성찬식에 거행되는 주일에 이 토큰을 가지고 오는 자라야 교회당 중앙에 마련된 성찬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그들에게 떡과 잔이 돌려졌다. 이 성찬기간은 대체로 두 주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한 교구에서 다른 교구로 옮겨 간 자는 당회에서 이명서를 받아 가야했다. 이러한 성찬식은 18세기에 와서는 이웃 교회들의 성도들이 대거 참여하는 등 그야말로 영적 대 부흥이 있게 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7세기 성찬식 전 날은 대체로 금식하며 준비하였다. 그리고 성찬이 끝나면 월요일과 화요일에 성찬 감사 예배가 있었다. 이때는 대체로 말씀 사경회 성격이 짙었고 이웃 교회 목사들이 협력하였다.
2. 평신도들의 생활
그 당시에는 주일학교가 없었다. 종교개혁자 존 낙스의 ‘한 마을에 한 학교, 한 교회 운동’에 힘입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시켰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편 찬송을 배웠으며 주일이면 부모와 함께 교회에 나왔다. 학교 과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 과목이었고 대개 담임목사가 가르쳤다. 교회에서 사용된 성경은 제네바 성경이었으나 1611년 제임스 성경이 나온 후로는 점차적으로 제임스 번역본을 사용하였다. 어린이들은 칼빈의 요리문답을 배웠었으며 후에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만든 소요리 문답이 가르쳐졌다. 예배 시간에 한 소년이 요리문답 질문을 하면 다른 소년이 답하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어른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집에서 그 주일 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고 답해야 했다. 그리하여 어른들이나 아이들이 잉크병을 가지고 와 목사의 설교를 받아 적어야 했다. 그래야만 집에서 부모들이 물을 때 아이들이 설교 내용을 잘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마쳐질 무렵에 목사는 종종 주중에 잘못된 행동을 하여 당회에 보고된 사람들에 대한 공개적인 책망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예배 시간 내내 일종의 ‘참회석’에 앉아 예배해야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잘못된 죄를 범했으면 하나님의 사유하심이 확증될 때까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타나야만 했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하여 깊이 뉘우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몸에 베 한 조각을 걸치고 있기도 하였다.
당회는 단순히 교인들의 도덕적 행동들만 감독한 것이 아니라 미신적인 것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거룩한 우물물로 간주하는 장소를 순례하는 행위들, 자기 땅 한쪽 구석을 경작하지 않고 귀신에게 바치는 행위들, 창이나 방패 혹은 열쇠나 성경을 가지고 마술을 행하려는 것과 같은 미신들을 척결하려고 애를 썼다. 모든 사람들이 마녀를 믿었다. 그리하여 당회는 이웃 사람들이 자기들의 소에 마술을 걸거나 질병을 유발시키는 자라고 의심받는 늙은 노파들을 때때로 조사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마녀로 낙인 되어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마지막 마녀 사냥은 1727년에 있었다.
당회는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도 하였다. 당시 대부분이 가난하였기 때문에 헌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불량 주화들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 돈들이 자주 교회 헌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대체로 헌금은 꼭 돌아봐야 할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돈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교회는 상당한 구제헌금을 지니고 있었다.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고아, 과부, 정신적 결함이 있는 자들이 당회의 후원을 받아야 했다. 가끔 멀쩡한 사람들이 걸인이 되어 마을 외딴 곳에 살면서 행인들에게 겁을 주곤 하였기 때문에 당회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하여 종종 건장한 청년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걸인들은 구걸에 대한 허가로 몸에 뺏지를 달고 있어야 했다. 워터 스코트 경이 쓴 ‘에디 오킬드 츄리’ 라는 책에서 이러한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교회는 가정 예배를 권장하였다. 대체로 성도들은 교회의 지도하는 대로 가정에서 예배하였다. 시편 찬송을 불렀으며, 성경을 한 장 읽었으며 기도하였다. 총회는 1647년에 가정예배 지침서를 발간하여 장로들에 의하여 각 가정에 배포하였다. 스코틀랜드의 가정예배광경이 가장 잘 묘사되어 있는 것은 로버트 번스 시인이 쓴 <Cotta's Saturday Night>라는 글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실지 18세기 장면이다.
교구에서 신앙생활이 잘 진전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노회가 정기적으로 교구들을 방문하면서 점검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교구 목사는 노회 감독관들에게 장로들에 대하여 학교 선생들에 대하여, 교구 직원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들을 받았다. 장로들은 목사에 대하여, 목사의 성격에 대하여, 설교와 심방 사역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다. 교회 건물 상태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 현황 및 교육을 위한 재정지원과 예배, 성도들의 출석률, 성찬기와 성찬 예식 참여 문제들도 질문의 대상들이었다.
3. 17세기 목사들
설교는 목사의 사역 중 가장 주요한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참된 설교야말로 참된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라고 존 낙스는 믿었다. 낙스 자신도 영혼을 움직이는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깨어나는 사람들은 500명의 트럼펫 주자가 동시에 불어댈 때 그 소리에 의하여 잠에서 깨어나는 자들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그 이후 로버트 부르스(Robert Bruce,1554-1631) 목사는 에든버러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으며 전 지역을 통해서 큰 불빛을 발한 설교자였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그의 선포된 말씀과 더불어 나타났다. 이처럼 17세기 설교자들은 대다수가 탁월한 설교자였고 복음의 진수를 온 천지에 진동케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증거 하였다.
17세기 목사들은 신학 공부를 위하여 오랫동안 훈련을 받았다. 라틴어로 강의를 들었고 시험을 치렀다. 교회 논쟁사항들을 가지고 교회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이 그들의 설교 사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들의 설교에는 분명한 대지들을 가지고 전파하고자 하는 말씀을 논리 정연하게 증거 하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목사들은 한결같이 본문에서 파생한 교리에 관한 요점들을 제기하면서 논리에 의하여 그 교리적인 요점들을 입증하려고 하였으며, 교리적인 가르침을 분명하게 하는 사용방안(use)들을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의 실제 삶에 적용하였다. 그것은 교훈과 책망, 훈계와 위로, 자기점검을 위한 적용이었다. 또한 그들의 설교는 성도들의 영적 삶을 위한 적절한 지침들과 도움을 주는 내용들을 가지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설교였다. 이러한 설교를 성도들은 잘 순응하여 영적 성장을 도모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설교를 다 잘 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지루하게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교구 직원들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다가 잠자고 있는 자들을 깨우기도 하였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모든 시대에 다 재미없고 비효율적인 목사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시된 장로교 목사의 웅변력’(Presbyterian Eloquence Displayed, 1692)은 그 시대의 설교에 대한 풍자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그런 비난을 받는 설교자들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탁월한 능력을 나타낸 자들이었다. 잉글랜드나 심지어 불란서에서조차도 훌륭한 설교자들이 많이 있었던 설교자들의 시대였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그 시대의 설교자들을 그 어느 시기 때보다도 더 자랑할 만한 분들이었다. 예를 들면, David Dickson(1583?-1663) 목사는 영혼을 깨우는 놀라운 설교자였으며, 매우 감동적이고 강렬한 설교자였다. John Livingstone(1603-72), James Guthrie(1612-1661), Samuel Rutherford(1600-1661) 목사 같은 이들은 언약 사상을 굳게 붙든 언약도들의 지도자들이었다(루터포드 목사의 사역에 대해서는 “진리의 깃발” 제 45호 참고). William Guthrie(1620-1665) 목사는 신비적인 유형의 사람이었지만 복음 선포에 있어서는 호소력이 탁월한 설교자였다. Andrew Gray(1633-1656) 목사는 글라스고에 있는 인너 하이쳐치(Inner High Church)예배당을 사람들로 가득 메운 설교자였다. 제임스 더람(James Durham, 1622-1658) 목사는 그레이 목사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많이 받은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시내 외각 교회당에 군중들이 가득 들어서게 한 설교자였고 그의 설교를 들으려 모인 숫자는 그레이 목사에게 모여든 숫자보다 더 많았었다. 그 모든 위대한 설교자들 중 한 분은 휴 비닝(Hugh Binning,1627-1653) 목사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저술들은 매우 지적이었고 독창적이었으며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깊이 한 것들이었다.
언약도들 외에 감독교회 설교자들 중에도 유명한 설교자들이 있었는데 갈로웨이 주교였던 윌리암 쿠퍼(William Cowper, 1568-1619)와 성 니콜라스 교회 감독인 James Sibbald(1647년에 아일랜드에서 죽은 자로서 언약 사상에 서명하는 것을 반대한 7명의 애버딘 박사들 중 한 사람이었음) 및 Robert Leighton(1611-1684)과 그의 친구 제임스 Nairn(1629-1678), Laurence Charteris(1625 -1700) 등이 그들이다. 이 외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후기 언약도 운동사의 주역들인 옥외집회 설교자들이다. 알렉산더 패단(Pedan, 1626-1686)목사, Richard Cameron(1648-1680) 목사와 어쩌면 최초로 스코틀랜드에서 오늘날의 주일학교 형태를 가지고 어린이들을 위한 탁월한 사역을 감당한 John Brown( of Priesthill, 1627-1685) 목사, Donald Cargill(1627-1681) 목사 및 언약도들 중 마지막 순교자인 제임스 렌윅(James Renwick, 1662-1688) 목사 등이다. 이들은 정부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언약 사상을 붙들고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수장 권을 인하여 핍박과 순교의 고난을 친히 감당한 지도자들이었다.
이 외에도 스코틀랜드 교회를 교회되게 한 영향력을 발휘한 작품들을 남긴 자들이 많이 있다. 조지 헛치슨(of Edinburgh, George Hutcheson, 1615-1674) 목사이다. 그는 언약도였으나 왕 문제로 인하여 지지자들과 항거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 지지자들에 가담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감독제도에 서명하지 않는 것 때문에 1662년에 목회지에서 추방당한 훌륭한 설교자였다. 그가 남긴 요한복음 주석과 욥기 주석 등은 스펄젼 목사가 아주 높이 평가한 작품들이었다. 헛치슨과 Kilwinning의 James Ferguson(1621-1667) 목사는 데이빗 딕슨과 제임스 더람 목사들과 견주는 훌륭한 목사요 성경 강해자들이었다. 그 외에 학식이 많은 신학자들 중에는 글라스고와 에딘버러 대학 총장을 지낸 로버트 보이드(Boyd, 1578-1627), 7명의 애버딘 박사 대표인 John Forbes(1593 -1648)가 있다. 논쟁적인 저자들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아주 박식하였다. 가장 어린 나이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 스코틀랜드 대표로 참석한 조지 길레스피(Gillespie,1613-1648)와 그의 형제로서 글라스고 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항거자들을 이끈 패트릭 길레스피(1617-1675) 목사가 그 대표자들이다.
역사학자로 명성을 날린 장로교도 데이빗 칼더우드(Calderwood,1575-1650)와 감독주의자인 존 스포티스우드(Spottiswoode, 1565-1639) 등이 있었다. 책으로서는 납달리(1667)나 A Hind Let Loose가 핍박받고 있는 언약도들의 내적인 심령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애버딘의 젊은 교수였던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l, 1650-1678)이 쓴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란 책은 전혀 다른 유형의 경건 서적이었다.
이 시대에는 목사들에 의하여 아주 탁월한 소책자들이 많이 발간되었던 시대였다. 설교집들도 상당히 많이 출간되었었다. 이 시대의 목사들은 무엇인가 할 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할 말들을 능히 표현하는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 모든 저술들은 문학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것들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리고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은 관심을 끈 것들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시대에 대한 그들의 예리한 관찰력과 놀라운 성실성 및 강한 확신에 찬 그들만의 모습을 그려내기에는 충분한 것들이었다.
4. 17세기 강단 사역
17세기 스코틀랜드에 있어서 강단 사역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요소였다. ‘설교 시간’ 하면 대체로 예배시간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가장 핵심 요소였다. 이러한 사상은 칼빈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교회의 참된 표지 역시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첫째였고 올바른 성례와 정당한 권징 시행이 그 뒤를 이은 것이었다. 실지로 종교개혁 시대 이전의 교회에서는 하나님 말씀 선포사역이 결핍되어 있었다. 성직자들의 무지가 극에 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재발견은 자연스럽게 말씀에 대한 강해를 요구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자고 했을 때 지도자들이 발견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 및 기독교회의 확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설교 사역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에서 설교야말로 교회 개혁의 핵심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 낙스가 다 위대한 설교자였고 제사장이라기보다는 선지자들이었다. 르네상스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신선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자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제는 계시와 진리 및 복음에 대한 관심이 최전방에 나서게 되었다. 목사는 이제 더 이상 사제의 기능을 감당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설교 장로(preaching elder)로 인식하게 되었다. 모든 성도들은 성찬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그 전에 세례 받은 여부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 정도를 점검하였다. 예를 들면 십계명과 주기도문 및 사도신경 같은 것을 물었다.
목사는 높은 지식수준이 요구되었으며, 임지에 부임하게 되면 성경과 교회당 열쇠가 주어졌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기 위하여 그리고 설교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교육 시설을 준비해야 한다고 느꼈다. 설교는 칼빈의 경우처럼 대체로 강해 설교였다. 설교 없이는 성례가 집전 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기도와 찬송가운데서도 복음주의적인 가르침 등을 주입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흥행했던 신앙 강좌(Lectureships)는 목사의 가르치는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다. 따라서 종교개혁 이후 목사의 주된 업무는 설교하는 것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설교 작성과 전달 사역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여기에 하나의 혁명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중세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주로 예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던 것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에는 교회당에 오면 예식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목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성도들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더불어 설교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를 창출하였다. 당시의 설교자들에게는 성경에 박식하여야 했으며 신학적인 논지들을 잘 강론해야 했으며 라틴어와 중세시대부터 성행하던 수사학 및 종교개혁자들의 글들을 충분히 섭렵하도록 하였다.
교회당은 내부나 외부 장식에 있어서 아주 단순하였고 강단은 항상 교회당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감독주의자들이 지도적인 위치에 있을 때는 강단이 회중석 가운데 있도록 옮겨지기도 했으나 장로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면서 강단 역시 교회당 중앙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목사가 중앙에 있는 강단에 서서 예배를 인도하고 선창자가 아래 강단에서 찬양을 인도하였으며 장로들은 회중석에 자리 잡고 앉았었다. 목사는 까만 가운을 입고 예배를 집전하며 설교하였다.
설교는 길었다. 이 당시 예배는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첫 한 시간은 독경사에 의하여 주로 성경을 읽는 시간이었고 목사는 기도와 찬양 및 설교를 맡아 진행하였다. 물론 설교시간은 대체로 한 시간 정도였다. 설교자들의 열정과 능력 있는 설교는 종종 회중들로 하여금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였고 어떤 때는 두세 시간 동안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 감독들 중에도 에든버러 초대 감독인 윌리암 포버스는 한번은 6시간 동안 강론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장로교 목사들의 설교와 목회기도는 매우 길었다. 그렇다고 항상 한 시간 이상 넘어가는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 한 시간 이상 설교를 하였다.
존 리빙스톤 목사는 1630년에 그가 Shotts 교회에서 설교할 때 에스겔 26:25, 26절 말씀을 가지고 한 시간 반을 설교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설교 결론부분에 와서 그는 권면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또 다른 한 시간이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The life of Mr John Livingstone, Wodrow Soc. Select Biographies 1, p. 138f.). 그러나 리빙스톤 목사는 평상시에는 30여분을 넘지 않는 설교를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대체로 두세 시간씩 설교하는 몇몇 사례들을 제외하고는 이 당시의 설교 시간은 일반적으로 한 시간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곳은 한 시간을 넘으면 벌금을 가한다는 교회도 있었다(1642년 Turriff 노회 결정).
성도들은 설교를 들으며 받아 적도록 권장되었고 학생들은 그들이 주일에 들은 설교가 무엇이었는지 학교에서 시험을 보아야 했다. 리차드 백스터 목사의 권면대로 목사의 설교가 가정에서도 반복되도록 교육시켰던 것이다(그러한 사례는 와리스톤의 일기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강해 설교를 했기 때문에 성경 한권을 마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라덴의 한 목사는 너무나 오래 같은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였기 때문에 노회는 본문을 바꾸라고 시정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설교는 원고를 보고 읽지 않았고 철저한 준비를 통하여 메모만 가지고 즉흥적인 설교를 하였다. 설교자들은 철저하게 원고를 준비하고 난 후 마음으로 그 내용을 습득하고 강단에서는 원고 없이 설교하였던 것이다.
‘설교자의 능력과 목회 성공여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교회당에 모이느냐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과 교리적인 지식이 어느 정도 되느냐에 따라서 규정하였다’(G. D. Henderson, Religious Life of 17th Century Scotland, Cambridge, 1937, p. 200). 이러한 지식 여부를 위하여 노회는 정기적인 심방을 촉구하였고 목사들은 심방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이 얼마나 성도들의 심령에 박혔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장로교 목사들은 설교의 은사를 지닌 자들로서 자신들을 영혼을 탐구하는 능력 있는 설교자란 별명이 붙었던 것에 비해 감독주의자들은 메마른 도덕 강좌를 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심령을 울리고 눈에 눈물이 흐르며 가슴을 치게 하는 능력 있는 설교자들이 장로교 목사들이었다.
설교에는 본문 강해, 교리적 설명뿐 아니라 적용까지도 포함시켰다. 설교대지 구분은 교리와 논리 및 적용에 따라 구분되었다. 교리적인 가르침을 제시하고 그 가르침을 입증하기 위한 논리를 펼쳤으며 그리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시켜나갔다. 그러나 이 시대가 언약도들의 활동이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설교에 종종 군주에 대하여 또는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이 나타나곤 하였다. 언약도 순교자 중 한 사람인 멕카일 목사는 선언하기를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권좌에 앉아 있는 아합에 의하여, 정사를 맡고 있는 하만에 의하여, 교회 안에서는 유다에 의하여 핍박을 받고 있다’고 했다(John Howe, The Scots Worthies). 존 샘플(John Semple, 1607-1677) 목사는 감독제도에 대항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가 성경에서 어느 본문을 설교하든지 반드시 그 설교에 감독들을 파헤치는 언급을 하거나 감독주의를 공격하는 말을 했다.
당시의 설교들은 신학적이고 실천적이며 영적이었다. 심령을 꿰뚫는 능력이 있었다. 특별히 옥외설교자들의 설교는 상당히 복음전도적인 설교였다. 그 당시의 가련한 스코틀랜드의 영적 상태를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하는 복음적인 설교를 하였던 것이다. 존 키드(John Kid, d. 1679?) 목사는 ‘설교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 설교는 손가락질 받을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G. D. Henderson, Ibid., p. 218). 이들 목사들은 깊은 경건과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하였고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거의 광신적이라고 할 정도로 진지하게 감동을 끼치는 설교자들이었다.
맺는 말
핸더슨 교수는 그의 책에서 이 시대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결론을 지으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품과 학문에 의하여 목사는 그의 교구의 지도자였다. 목사에게 설교는 지방, 국가, 도덕 및 영적인 일에 대한 정보와 교육을 위한 최고의 자원이었다. 주중의 생활의 단조로움을 해결해 주는 설교만큼 흥미 있고 관심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교회는 그 시대를 지배하였다. 그 일은 주로 강단을 통해서 지배하였다’(Ibid., p. 219). 학문과 경건의 능력이 겸비되어 있는 설교자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복음의 능력은 핍박을 받고 있는 언약도 평신도들을 하나로 묶어주었고 신앙으로 승리하게 한 원동력이었으며 살인시대가 막을 내리고 18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장로회주의가 재형성되게 하는 근원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복음 선포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의 암울한 상황에 죄악의 포승줄에 매여 지옥으로 끌려가는 인생들을 무엇으로 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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