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다리는 모두 몇 개? 이야기 따라 걸어볼까!
청계천의 오랜 역사를 증언하는 옛 돌다리
청계천(淸溪川)은 서울을 한번쯤 찾는 이들의 관광지이면서 서울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도심 속 산책로다. 종로구와 동대문구·중구·성동구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약 11km의 소담한 물줄기다. 작은 하천이지만 청계천은 한강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600년 수도 서울이 가지는 역사이기도 하고, 시민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소소한 추억이기도 하다.
청계천엔 건너갈 수 있는 도보용 다리가 22개나 된다. 이 가운데 광통교와 수표교 등 옛 돌다리가 있는가 하면 버들다리처럼 정겨운 이름의 다리와 한때 콘크리트로 하천을 덮고 세웠던 고가다리의 흔적도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서울의 변화 과정을 추억하고 상상하다 보면 청계천은 훌륭한 유적지구나 싶다.
광통교를 만든 돌에 얽힌 숨은 이야기
광통교와 수표교는 조선시대 태종과 세종 때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벌여 청계천을 정비하면서 만든 다리다. 태종은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면서 하천 이름을 ‘개천(開川)’으로 지었다.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다.
청계천이란 현재의 이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창지개명(創地改名)’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지명을 새로 지을 때 생겨난 이름이다. 이때 서울의 당시 이름인 ‘한성’을 없애고 ‘경성부(京城府)’로 고치는 등 우리의 산·강·지명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이성계의 부인 강씨의 무덤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광통교
작은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광화문 청계천 상류에서 하류 방향으로 가다 만나는 광통교(종로구 서린동)엔 멋진 문양을 한 네모난 돌들이 박혀있어 눈길을 끈다. 광통교 돌들엔 역사 속 이야기가 숨어있다. 돌들의 원래 자리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 무덤으로, 아들 태종 이방원이 강씨 무덤에서 가져왔다.
이성계가 왕위를 강씨 소생이자 세자인 방석에게 넘겨주려고 하자, 전처 소생인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방원은 이후 정권을 장악하고 나니 강씨가 미웠나보다. 강씨가 죽고 난 뒤에 묘지석을 파가지고 광통교를 만들었다. 한양 사람들이 이 돌들을 밟고 다니라고 한 것이다.
경복궁이 바라다 보이는 광통교 일대는 18세기 후반 그림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유명했던 한양 최고의 번화가였다. 도시민의 문화적 욕구가 커지면서 그림 감상과 소유에 관심이 커졌다. 왕실과 사대부로 대표되는 상류층 문화가 확산되면서 광통교 일대를 서화의 유통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진짜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에 있다?
나무로 모양새만 갖춘 수표교
수표교(종로구 관수동)는 세종 2년(1420)에 세워졌는데 임금의 어가 행렬이 지나가던 다리로 청계천의 상징이었다. 처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로 다리 인근에 소와 말을 매매하던 시전이 있었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다 2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수표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441년, 강수량 측정을 할 수 있는 수표(水標)를 마전교 서쪽에 세우게 됐는데 그 이후부터는 다리 이름도 수표교로 불리게 됐다. 왕실에서 쓰이는 난간 양식이 민간 다리에 적용된 점이 외관상의 도드라진 특징이다.
1960년대 청계천 복개 시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놓은 수표교
현재 청계천에 있는 수표교는 이상하게 석교가 아닌 어설픈 나무다리다. 다리 모양새만 갖췄다. 지난 1959년 청계천을 복개하고 고가를 설치하면서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졌고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전태일 동상이 서있는 버들다리
동대문 평화시장을 바라보고 있는 전태일 동상
하천을 건너가는 여러 개의 다리 가운덴 천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이름 지은 ‘버들다리'(종로구 종로5가)가 있다.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다리 위에 전태일(1948~1970) 동상이 서 있다.
그가 16살 어린 나이에 상경해 재봉사, 재단사로 일했던 동대문 평화시장이 바라다 보인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외치며 22살 짧은 삶을 살다 갔다.
전태일이 만들었다는 친목회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21살 때이던 1969년,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 현실에 맞서 싸우고자 재단사 친구들을 모아 친목회를 만들었다. 이때 그는 멋있고 과시적인 이름을 물리치고 하필이면 ‘바보회’로 명칭을 정한다. 근로기준법에 8시간만 노동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우리는 여태껏 그것을 몰랐으니 바보가 아니었느냐?’라는 깊은 각오가 전태일로 하여금 그런 역설적인 이름을 짓게 했다고 한다.
물길을 콘크리트로 덮고 세웠던 고가다리
60년대 하천 복개공사 후 세워진 고가다리
하천 위에 있었던 높다란 고가도로 일부가 서있다. 청계천을 복개(하천이 흐르는 위를 콘크리트로 덮는 것)하고 만든 청계로(淸溪路)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청계천에 고가다리 일부를 남겨둔 거다. 1959년 청계천은 대대적인 복개작업에 들어갔다. 수백 년을 흐르던 청계천은 너무나 간단히 콘크리트로 덮여졌다.
당시 ‘불도저’로 불렸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오랜 기간 사람들의 곁에서 흐르던 청계천을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차가운 돌로 덮었다. 11km에 달하는 청계천이 사라지고 도로와 고가다리가 생겨났다. 복개공사는 물길을 덮는 공사일 뿐만 아니라 천변의 판잣집들을 허무는 공사이기도 했다.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던 청계천 양안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현대적인 상가와 공장들이 들어섰다.
정다운 징검다리가 이어진 청계천 하류
1990년대 늦은 밤, 집으로 가는 길에 지나던 청계고가(혹은 삼일고가) 풍경은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심야의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그런 모습이 서울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렇게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발아래에 개울물이 흐른다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철새보호구역이자 희끗희끗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하류로 들어서자 정겨운 징검다리가 보인다.
이 외에도 청계천에 있는 22개 다리는 각각의 사연과 매력이 숨어 있다. 무심코 오갔던 청계천 다리마다 얽힌 이야기를 알고 보면, 청계천의 아름다운 풍경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다.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204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