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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진심인 편
디모데전서 2:1-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3주일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창조질서를 회복하려는 절기이다. 유대교 랍비들은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일곱째 날에 창조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평정, 고요함, 평화, 휴식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여가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밥 무어헤드, ‘우리 시대의 역설’)
창조절은 만물에 대한 창조와 함께 시간을 지으신 창조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아침을 생각해 보자. 누구에게나 아침은 가장 창조적인 시간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너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위해 일어나는데 어찌 뒤틀린 기분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구에게나 아침은 ‘은총 받은 순간’이다. 다시 삶의 소명과 기적이 시작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1)
본문은 사도 바울이 아버지의 마음과 선배 목회자의 심정으로 젊은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구체적인 조언을 한다. 인생 선배로서 하는 충고에 진심이 담겨있다.
얼마 전 추석 연휴에 강원도로 가는 길에 백두대간 아래 신선대를 등산하였다. 아주 짧은 거리였다. 너럭바위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며 한나절 햇볕 바라기를 하였다. 어떤 분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 부탁했더니 아주 열심히 여러 장을 찍어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제가 사진 찍는데 진심인 편이어서.”
참 묘한 대답이었다. 어법에 맞지 않은 듯, 맞는 듯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요즘 ‘진심인 편’이란 말이 자주 사용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는데 진심인 편이어서”는 관용구처럼 사용한다. 사진을 보니 처음 본 사람에게 성의껏 사진을 찍어 준 그의 진심이 느껴진다. 진심은 얼마나 고마운 마음 씀씀이인가.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 ‘기도에 진심인 편’이라고 인용해 보았다. 기도는 하나님께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기도하는데 진심인 편인가? 사실 진심은 꼭 말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열 마디 말보다 한 줄 글이 말보다 훨씬 무거운 진심을 담을 수 있다.
예전에 어른 목사님들이 후배인 내게 잔소리처럼 “기도해라”고 하셨다. 그런데 요즘 선배들은 기도하라는 말을 잘 안 한다. 우리 세대도 그런 게으른 습관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잔소리처럼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런 잔소리들은 정말 진심인 편이어서 설득력이 있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우선순위로서 기도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1).
바울은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면한다. 특별히 기도를 네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권고하고 있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이다.
간구(데에세이스)는 특별한 일을 두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기도(프로슈카스)는 일반적인 기도를 말한다,
도고(엔튜크세이스)는 남을 위한 중보기도이다.
감사(유카리스티아)는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은혜와 공로를 찬양하며 드리는 기도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를 당부하며, 더 나아가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추가하고 있다. 이른바 통치자와 위정자를 위한 기도 당부이다.
당시 임금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이방인이요, 박해자였다. 그렇다고 군사독재 시절의 국가조찬기도회 따위 정치행사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더러 친왕권적으로 처신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기도자와 세상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서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바울은 기도하는 사람의 유익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은 경건한 마음과 단정함, 고요함과 평안한 삶을 얻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2).
여기에서 ‘경건’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니려는 태도이다. ‘단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즉 기도는 경건과 단정함, 곧 하나님의 관계와 사람의 관계를 올바르게 함으로써,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고요함을,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샬롬 평안함을 맛보게 한다.
2)
바울의 기도는 당시 기도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포함시키라는 선교적 명령을 담고 있다. 흔히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서 이방인이 아니다. 그 시대에 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과 같았다. 예를 들어 여성, 노예, 이방인, 장애인, 어린 아이 등이 있었다.
바울은 기도의 최우선을 강조하면서, 무엇보다 기도의 우선순위로 “모든 사람”을, 그다음에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사람들을 포함 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는 누구를 위한 기도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상과 인류를 위한 기도는 자칫 위선이 되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사람과 세상을 위한 기도’는 누구보다 기도에서 배제된 사람, 별별 처지에 놓인 다양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다.
복음서를 보라. 예수님은 항상 경계선 밖으로 내몰린 사람, 바로 이방인과 같은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포함 시키려고 하셨다.
삶의 경계선 밖에 있던 병자들, 생존의 경계선 밖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 구원의 경계선 밖에 있던 이방인들, 존엄의 경계선 밖에 있던 사회적 약자들, 사람의 경계선 밖에 있던 여성과 아이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들을 주님의 기도 안에, 사랑 가운데 안아 주려고 하셨다.
바울은 그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분뿐이신 중보자이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한 분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6).
모든 구원의 출발점은, 모든 구원의 완성은 한 분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반복하여 말씀하신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 25:40)는 ‘한 인간’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한 영혼을 위한 구원의 절박성과 천부적인 인간 권리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세상의 법을 넘어서는 위대한 사랑은 인간의 이기적인 팔둘레를 넘어선다. 온갖 신분적 제약, 사회적 울타리, 권위와 권력의 벽, 경제적 제한과 차별을 없애는 일이다.
바울이 누누이 강조한 “모든 사람”에 대한 기도 부탁과 구원 소식에 대한 강조는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가슴에 와닿는 호소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사가 변할 리가 없다. 세상이 변해도 예수님이 품으신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한 사랑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늘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물질이 최고가 된 우상화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선다.
그런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 안에 바로 ‘내가’ 포함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 밖에 있는 ‘남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참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대할 때 관용과 존중, 용서와 자비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면, 내 좁은 소견과 편견을 버린다면, 그 관대함은 ‘모든 사람’과 세상을 지향할 수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구원과 만민을 위한 복음의 정신이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사람’이란 말씀을 하시면서 이런 말로 강조하셨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모든 사람에게는 수호천사와 같은 존재가 있어서 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3)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말하면서 디모데와 장차 그리스도의 교회에 참여한 우리를 향해 당부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과 사역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준다.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7).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부름 받았다. 무엇보다 구원의 경계선 밖에 있던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방인의 스승”으로 보냄을 받았다. 사도와 스승은 진리를 가르치고, 스스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다.
그런 바울은 우리를 향해 당부한다. 너희는 기도를 행하라. 경계선 밖의 존재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 복음을 전파하고, 모범이 되라는 것이다.
먼저 기도의 깊이를 더하라.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 등 기도의 ‘깊은 곳’까지 나아가라.
또한 기도의 영역을 넓혀라. 가족과 친구를 넘어 박해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기도의 ‘땅 끝’까지 나아가라.
그리고 기도의 중심을 높여라. 산만한 기도에 중심을 세우고 한 분이신 주님께로 집중하라는 것이다.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간청하였던 ‘주님의 기도’를 배우라.
기도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기도처럼 힘든 것이 없다. 바울은 기도의 맛을 배우라고 한다. 바로 ‘기도하는 일에 진심’을 보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3).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받으실만한 기도를 드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라고 한다.
하나님은 경계선 밖에 있던 나를 불러 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가운데 나를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한 사람으로 만나고 사랑해 주셨다. 그런 마음으로 친밀하신 하나님과 마주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일에서 그 진심을 보여주신다. 요즘 수요기도회에서 ‘누가가 그린 예수님’을 공부하는데, 여러분의 관심이 적어서 참 아쉽다. 누가복음은 군데군데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순간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눅 4:42).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8).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예수님은 틈을 내어 꾸준히 기도하셨다. 계속 기도를 반복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예수님은 애초에 슈퍼맨으로 부름받지 않았다. 도깨비 방망이라는 무기를 들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셨다. 그리하여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행하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분주한 중에도 한밤중에, 새벽녘에 홀로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진심이 느껴진다. 그래서 제지들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내가 기도하는 데 진심인 편을 보이라.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기도는 진심인 편인가, 스스로 물어보라. 최소한 주기도문을 바치면서 거듭 그렇게 살기 위해 진심을 보이라.
본문의 마지막 장면은 남녀 신자가 기도하는 모습이다. 바울은 모범적인 기도자를 칭찬하고, 격려한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8).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9-10).
그리스도인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존재이고, 생명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고, 음성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헛된가? 바른 삶의 모습으로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께 마음을 두어라.
본회퍼 목사는 말한다.
“자유를 찾아 떠나려거든 너의 욕망과 지체가 너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못하도록 너의 감각과 영혼을 훈련하는 일을 무엇보다 먼저 배우라”(본회퍼).
하나님 앞에서 내 기도의 진심이, 기도의 열심과 훈련이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