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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무서움을 우리는 공산주의에서 보았습니다. 무조건적인 세상에서 그 어떤 유기체적이고 창조적인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올가미에 갇힌 인생이자 올무에 걸린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자석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쇳가루처럼 그것만이 옳다고 외쳐대는 인간 사회는 그렇게 시작될 뿐입니다. 자연을 벗어난 죄과이자 계몽을 신봉하는 죄과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불안을 주입시켜 하나의 신념에 맹신하도록 몰아갈 뿐입니다. 그물에 걸린 고기는 죽음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허구적 인생의 깨달음을 가벼운 개념으로 터득했다는 자만과 함께 오만의 굴레가 씌워지는 순간입니다. 안타깝게도 한번 인식된 지적 자극은 평생에 걸쳐 지워지지 않으며 그로 인해 경직된 몸과 마음은 잘못된 질병만을 양산할 뿐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외골수로 나아가며 아무리 좋고 올바른 이야기도 겉으로 받아들이는 척할 수는 있어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역량은 상실합니다.
오히려 어려서 바보처럼 아무런 생각이 없이 자연의 고난을 받으며 자라난 어린이들이야말로 커 가면서 서서히 하나하나 내 스스로 배우고 알아가면서 건강한 삶의 실체를 향해 나아가는 고투적 노력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여 집니다. 똑똑함이 넘칠수록 아이들은 영악해지며 그런 영악성은 자가당착적으로 자신의 보호막을 펼쳐갑니다. 내가 하면 올바르고 남이 하면 그르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에 이념이 먼저 손을 내밂으로써 같은 이념의 동조자끼리 선순환의 감정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서로가 이처럼 이념으로 공진할 때에 세상은 그들의 것이 되며 일반의 둔하고 어리석은 시민들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허접한 구원의 함성을 외칩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열정은 죽음과 함께 끝날 뿐입니다. 똑똑하고 영리한 인간들이 어려서 잘못 만난 얼치기 교육자들 덕분에 평생을 자신의 삶이 아닌 이념의 삶에 빠져 안타깝게 살아갑니다.
자연적인 삶이란 누구나가 인정할 즉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가치를 향한 노력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삶은 정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애씀을 통한 인간 스스로의 고귀함을 찾아가는 지향성을 갖기에 현실을 더욱더 잘 살아가기 위한 애씀으로써의 고투적 작동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물질적 가치를 향한 애씀을 초월합니다. 물질적 가치에의 매몰을 우리는 욕망이라 말하며 욕심이라는 심성에서 시작하는 자기 몰입적인 가치이기에 내 배를 불리기 위한 동물적이고 맹목적인 집착의 동기를 몰고 오기에 모두는 그것을 천시해왔습니다.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그러한 가치는 선전선동의 대상이자 우상화의 시작일 뿐이기에 투쟁을 몰고 옵니다.
따라서 그것은 앎의 추구가 아니라 힘의 쟁취일 뿐입니다. 앎의 추구에는 취할만한 물질적 이익이 전혀 없습니다. 형이상학적 학문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단정적으로 기술이 불가능한 구름의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지성의 바탕에서 우러나오는 유토피아적인 상상의 세계이자 세계의 근원에 대한 탐구로서의 학문적이고 서술적인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함만이 간직되어 있기에 눈치와 물욕에 찌든 인간들에게는 천박해 보일 뿐입니다. 그런 세계가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아예 없다고 치부하며 자신의 물리적 능력에 무한한 가능성을 투사시킵니다. 물질적 차원을 넘어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차원이자 그 근거로서 지성의 극한에서 시작되는 앎의 너머 세계입니다. 현실 너머에 신의 세계가 있듯이 앎의 너머에 형이상학의 황금 세계가 있습니다. 다양성의 인간에게 무수한 열정을 불러일으킬 무한의 세계입니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인간 신체의 조건을 벗어나 영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고투(苦鬪)로서의 앎의 세계입니다.
내가 내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올바르다는 식견을 착각이 아닌 진리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경직성과 이념은 이웃사촌입니다. 경직되고 게으른 정치적 판단력에 선전선동이 가미될 때에 대중(大衆)은 우중(愚衆)으로 전환(轉換, conversion) 됩니다. 그들은 전환이라는 개념을 독선을 치장하는 매우 고상한 언어로 사용함으로써 그것으로 대중의 낭만적 선전선동을 이끌어내려 애씁니다. 전환이라는 점잖은 개념을 영악하게 도입해 자신들의 거짓 선전과 굳어진 사고를 무마하고 가리는 용도로 현장에서 사용하기를 즐깁니다. 그 세계는 전환이라는 보편적 개념을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는데 이용하기들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전환의 소용돌이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 뿐입니다. 말로써 살아가려는 인간에게 실천으로서의 행위는 현실 괴리와 마주할 뿐입니다.
세상의 모순을 발견하는 순간 세상을 한탄하고 원망하며 스스로가 열사의 대열에 동참하고자 의지를 불태웁니다. 조그마한 온정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나와 다른 가치관에 생명의 투쟁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적재적소에 힘을 써보지 못해 그로 인해 망가져가는 인간의 삶은 스스로를 향해 투사되면서 사회를 불평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불안에 빠져들어 갑니다. 파괴적 심성으로 전환된 독단에 가까운 판단력은 인간의 구조를 망가트리는 해악으로 나타납니다. 에너지 효율이 낮아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 현상적인 차원을 넘어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도 경직된 논리가 세상을 휩쓸 때에 그 세계에서 삶은 소모적 에너지로 전락해가며 파탄을 예고할 뿐입니다. 외부의 논리에 자신의 의지를 동조시키는 삶 또한 자신의 길이 아닌 남이 내놓은 길을 갈 뿐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기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이며 인생의 보람이자 좋은 추억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스스로가 계획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그처럼 자신감을 주며 긍정적 생각으로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념을 통해 동조자를 구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자들을 모아 집단적 힘을 가지려 애씁니다. 그들의 시각은 그 경직된 신체에서 나오기에 오직 한 방향만을 향해 자신들의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생각이 깊어갈수록 그들의 투쟁의 대상은 과거에서 현실로 전환합니다. 그런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처음 그들의 집중된 힘은 과거를 매도하는 적폐 청산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의 목표는 진실의 달성이며 미래에도 그 진실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 없다고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동료들을 처단하고 조직을 새롭게 바꿉니다. 그런 내부적 투쟁으로 다시 형성된 조직에 전문적인 문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사라져버렸습니다. 즉 전문가적 집단으로서의 직업군들이 사회에서 사리지고 오직 선전선동에 나서는 전문가 자격증만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휘젓기 시작하면서 모든 인간의 삶은 저열해지고 저급해져 갑니다.
존재가 존재 자체인 사물들에서 우리는 앎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에 대한 변화와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 인간 앎의 활동입니다. 존재를 벗어나 운동으로 나아갈 때에 앎의 추구는 시작됩니다. 경직된 마음은 그런 존재에 머물러있으며 변화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특히 경직된 신념은 자신의 유연한 사고의 세계를 어떤 개념으로 채움으로써 수많은 가치를 가진 개념의 유입을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차단 증상을 보입니다. 마약 복용 자들의 금단의 증상과도 같습니다. 즉 신념이 공고(鞏固) 해지는 순간입니다. 콘크리트 위에서 새싹은 트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우물 안 개구리를 자처하면서도 그 게으름으로 세상에 대한 원망과 비판의 칼날만을 갈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가치 있는 삶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칼을 갈아 날을 세우고 스스로가 설정한 창조적 지향점을 향해 사용합니다. 당대의 앎의 관점에서 전통을 제고(提高) 하는 무언가 애쓰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무구한 전통의 자리에 자신의 독선을 대입시킴으로써 과거에 대한 이해의 고단한 노력도 없애고 오히려 적폐로 몰아가며 나댑니다. 참된 가치와 참된 판단의 규준(規準)을 멋대로 규율합니다.
각자가 각자의 삶에의 충실이야말로 진정 자기의 길이자 인간이 나아갈 방향이기도 합니다. 내 삶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 삶의 가치를 내맡기던 근대적 세계관으로 살아가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자신의 참된 정신적 역량을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세상의 가치를 창조하기는커녕 판단하고 질타한다는 것은 가식이자 거짓이기에 분열과 파괴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그런 분열의 허접함을 감추기 위해 편을 가르고 그것을 위해 이념을 도구로 내세워 자기편을 자연스럽게 형성함으로써 가치 부재의 분열사회로 몰아갑니다. 그런 집단에 맞서는 개인은 불행을 자처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가차 없는 여론몰이로 수갑을 채워 단두대에 올립니다.
전문성에 바탕을 둔 사회의 위계적 질서로서의 체제를 하찮게 여기기에 그 어느 조직에서도 전문적인 정책이나 식견이 없으며 오직 분열로 나아가야만 자신들이 사회에서 할 일이 생겨나는 하향적 인간들입니다. 상향적(上向的) 인간들은 자신이 갈고닦은 전문성으로 새로운 물갈이를 하지만 그들은 오염된 물갈이에 열중함으로써 부패 사회를 몰고 올 뿐입니다. 식견(識見)의 부재는 사회적 분열이라는 오염을 몰고 옵니다. 분열의 두려움을 모든 시민들에게 심어줌으로써 그들의 손아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합니다.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냉철한 의지와 외로운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 부단한 자기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내 스스로의 정신적 구축을 위한 경험적 앎을 확증해가며 거기에서 얻어지는 확신으로 세상에 대한 이해의 사고를 넓혀가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한 근본적인 삶의 관점을 터득하기 위해 일상적인 삶에서 고전(古典)에 대한 투자로 삶의 설계도를 그려나가야 합니다. 현실에서 그려대는 설계도면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히는 나약함은 배움을 포기하는 인생입니다.
지성을 향한 배움은 자기의식의 세포에서 시작해야겠으나 외부적 대상에서 앎의 추구를 반입하려 함으로써 인간은 최초의 분열을 시작합니다. 박학다식(博學多識) 한 이성적 지성은 내부의 용암이어야 하며 내부의 열정이어야 하지 외부로 표출되면 바로 굳어져 버립니다. 그런 세상의 이치를 모르고 외부로의 발현은 사회를 분열로 몰아가는 파쇄기(破碎機)를 놓는 꼴입니다. 밖으로의 표출은 경험의 땀방울이어야 하며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이야기가 사회적 가치로 전환될 때에 건전한 질서가 자리 잡히는 사회가 펼쳐진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머리만 좋고 자연이 없는 냉철한 이성에 포로가 되고 각인되어버린 신념의 활동은 땀 흘리며 애쓰는 운동보다 잔머리를 굴리는 계획에만 몰두합니다.
계획서와 보고서는 남을 종처럼 부릴 공준이자 공증이기에 그들은 그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지성은 외부로 터져 나오는 용암이 되어 분출함으로써 온 세상을 화산암으로 뒤덮어 비가역적 세계를 창조합니다. 사회 곳곳이 놀고먹자는 편향된 시각과 공짜로 얻어먹자는 사기적 시각이 넘쳐납니다. 한번 마약에 중독되면 인간 사회는 거덜 나는 길을 향해 질주할 뿐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20년이 아니라 50년이 되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는 노예가 되어 마약을 복용하며 즐겨 하나 진정한 인간의 고투적 삶에서 오는 창조적 기쁨은 소멸해갑니다. 거기에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은 뜨거운 용암에 뒤덮여 영원히 땅속에서 침묵해야 하며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터전은 오직 신념으로서의 이념만이 굳어져 화산암이 되어갈 뿐입니다.
지성의 지폐는 불에 타 없어지며 전환(轉換, conversion)의 소멸을 맞이하지만 경험의 황금은 불에 타도 변하지 않는 변환(變換, transformation)의 유지를 맞이합니다. 그들에게 인간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개념일 뿐입니다. 머릿속 상상의 개념을 현실의 실천의 요소로 호도(糊塗) 하기를 반복함으로써 마비적 행복사회를 실천한 실천가로서의 영웅적 대우를 받기까지 합니다. 현실 사회를 게임 사회로 몰아가며 영웅을 탄생시키려 애씁니다. 각본에 짜인 대로 현실 사회가 흘러가도록 쉼 없이 닦달을 해댑니다. 가벼운 삶에 익숙한 무지의 시민들에게 그것은 구원의 소리이자 자신의 세계가 노력 없이도 현실세계에서 펼쳐질 수 있다는 확신을 몰고 옵니다. 온정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마약과도 같습니다. 온정의 낚싯밥이야말로 좋은 먹잇감입니다.
지성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먹잇감입니다. 똑똑하다는 인간에게 지성이 보여주는 앙갚음입니다. 그것은 지성을 남용한 죄과이기도 합니다. 지성을 자신의 도리(道理)로 여기지 못하고 남의 도리에 간섭하고 간여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바탕으로서의 도리를 마비시키고 수단으로서의 신념을 사용하고자 한 죄과입니다. 거짓과 가식의 목표 달성을 위한 거짓 온정만이 세상에 넘쳐날 뿐입니다. 거기에서는 뒤돌아서는 순간 또 다른 아쉬움이 몰려옵니다. 다시 또 온정을 찾을 수밖에 없으나 그들은 그런 증상을 인간의 올바른 자세라고 선전선동하기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면에서는 용암과도 같은 이념의 신념이 있기에 그들의 해악적인 활동은 어린 새싹들까지 마취시키며 끝없이 사회를 전환시키려 투쟁해왔습니다.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인간들은 자신의 삶이 온정으로 가득하고 윤리적으로 가득한 삶이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사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경험 부재의 개념만을 간직한 미숙아들입니다.
모든 신념이 외부로 향할 때 인간을 도구와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합니다. 신념의 전파자들은 동조자들의 묵시적 침묵을 먹고 사는 사회적 기생충(寄生蟲)과도 같습니다. 거기에 스펙터클한 거대한 창조의 봇물은 불가능합니다. 끝없는 이슬비로 인간의 몸을 파김치로 만들고 분열의 사회로 인간을 왕따의 두려움에 휩싸이게 할 뿐입니다. 전문가를 비웃으며 지성을 향한 추구를 천박하게 몰아갑니다. 삶의 평탄함과 평정은 그들에게 투쟁의 걸림돌이자 잘못된 인간의 전형적인 타파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들이 투쟁에 나서는 순간 거기에는 옳고 그름의 간여가 시작합니다. 그 주장들의 근거로서 동화(童話) 적인 동심(童心)의 개념이 사용될 뿐만 아니라 개념이 단순한 신념이 됨에 의해 서로는 경쟁의 대상에서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심화되며 결국에는 피를 불러올 대상이 되고 멸망시켜야 할 집단이 되어갑니다. 요즘의 진보와 보수는 그러한 싸움의 현장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승리의 찬가와 후회의 통탄이 사회를 횡행합니다.
어리석은 지성이 인간의 정치 활동에 간여함으로써 창조해낸 자유니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서구적 근대 개념들이 신념으로 승화됨으로써 유기체적인 사회적 삶을 경직시켜온 죄과입니다. 진보의 공산적 이념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기꺼이 경제를 망가트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좌파 집권기에 경제가 불안한 것은 그들이 일부러 몰고 온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입니다. 어부에게 비린내가 나고 농부에게 거름 내가 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나 이념에 빠진 인간들에게서는 이념의 냄새 즉 경직된 심신에서 나오는 고약한 오만(傲慢)의 향수만이 진동합니다. 거들먹거리는 신체에서 나오는 경멸의 시선과 온화한 온정이 대상에 따라 천변만화하며 즉흥적 전환 능력이 뛰어나기에 그 어디에도 집중하려 들지 않으며 건성건성 나댑니다. 그들에게 경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에 몰두하는 인간들을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오직 이념만이 절대화된 신앙입니다. 자기들의 의식주는 어리석은 노예들에게서 수탈하면 될 뿐입니다. 그런 이념을 완성하고 성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 할수록 그 성취의 영광은 더욱더 커져가기에 오히려 경제를 망가트리면 망가트릴수록 그들의 기쁨은 배가됩니다.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경제에의 관심을 보이기도 하겠으나 그것 또한 그들 공산 이념의 완성을 향한 향배(向背)에 일조할 뿐입니다. 파괴를 전제하는 그들의 이념은 토지공개념의 정당성을 들먹입니다. 조정과 설득은 그들의 일이 아닙니다. 이념을 동원해 단칼에 성취하기 위한 직선도로를 그들은 선호합니다. 바로 여론몰이입니다. 혼란은 그처럼 인간의 의식을 마비시킴으로써 의도된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 수 있는 힘을 배가시켜줍니다. 개울에 물고기를 그물 속으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위쪽에서 꽹과리를 치고 흙탕물을 일구어 어지럽게 혼란을 시켜주면 저절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그들 정책의 기조(基調)이 자 삶의 제1원리입니다. 혼란의 끝이야말로 진정 공산 이념이 원하고 바라며 갈구해마지않는 혼탁의 세상입니다.
새로운 사회 즉 기존의 반대적 이념의 변화된 사회는 물고기들과 같은 희생의 먹이를 필요로 합니다. 그 먹이의 대상은 열심히 살아가는 고지식한 인간들입니다. 평생을 땀 흘려 저축하고 자식들 교육시키며 애써서 어렵사리 집을 장만해 편안하게 살아가려는 노후의 인생들이 그들의 수탈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가진 자에 대한 적대적 여론몰이로 몰아감으로써 사회적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가진 자에 대한 경멸과 멸시 사회를 자연스럽게 조성해감으로써 수탈을 당해도 침묵해야 목숨을 부지합니다. 배움 없이 이념만을 받아들인 자들의 모습입니다. 사회적 피해자들이 원하고 바라는 가진 자에 대한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용기는 배가되고 투쟁정신은 더욱더 투철해집니다. 누군가의 피 흘림을 보면 더욱더 극악해져 가는 동물적 본성이 사회를 점유합니다.
인간의 지성은 개념을 선물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신념까지 선물해왔습니다. 경직된 신념의 개념화는 경직된 개념의 신념화입니다. 그놈이 그놈입니다. 인간의 삶을 하찮다 못해 어리석게까지 몰아가면서도 개념에 대한 믿음을 한없이 이어가기에 자신의 인생까지도 저당 잡히면서도 맹종의 맹세까지 해댑니다. 경직된 이념이 유기체적인 사회의 연쇄 고리로 파고들어 작동하기 시작할 때에 사회적 윤활기능은 마비되며 그 사회는 레밍 쥐의 운명으로 나아가며 냄비 속 개구리 신세를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비 사회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 지성이 몰고 오는 불합리이자 어둠의 그림자입니다. 그들에게 자동차의 윤활유는 불필요합니다.
따듯함의 온정적 개념에 휩싸인 집단에게 닥치는 죽음의 양상(樣相) 또한 그와 같습니다. 죽음 앞에 예감은커녕 대응도 불가능한 침묵으로 조용히 받아들임으로써 사라져갈 뿐입니다. 착함을 주장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세상을 바라볼만한 근거(根據)로서의 근성(根性)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판단으로서의 의지력은 더욱더 나약해져가기에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오직 그 착함을 주장하는 설교자의 교설(敎說)만이 진리이고 믿음이며 신앙일 뿐입니다. 돼지가 주인이 주는 먹이로 크고 개가 주인이 주는 사랑으로 크듯이 현실에서 그들의 자연적 삶의 본능은 퇴화된 지 오래입니다. 돼지는 땅을 파헤치는 본능으로 먹이를 찾고 개는 도둑을 지키는 예리함이 그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물에서 본능을 제거시켜왔을 뿐입니다. 온정적 따듯함을 강조하는 설교자일수록 그들은 추종자들의 삶을 파괴하고 빼앗아갈 뿐입니다. 길들일 뿐입니다. 거친 야생의 예리한 감각적 능력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는 무능의 극치를 보여줄 뿐입니다.
꾸준히 인내하는 경험의 과정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온정으로 덮어버리며 괜찮다고 쓰다듬어 주기까지 합니다. 개인의 고투(苦鬪) 적 삶의 향방을 피동(被動) 적 온정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모두를 따듯한 우리 안으로 몰아넣어 개성을 말살시키고자 애씁니다. 하나의 이념만을 내세움으로써 더 높고 다양한 이념의 수용을 차단시켜갑니다. 안주하는 삶이 훌륭하고 위대하다고 선전선동해댑니다. 거칠고 투쟁하는 삶은 내 몫이고 당신들은 편안하게 온정에 감싸여 살아가라고 설교합니다. 한번 온정에 마비되면 아무리 세상이 다양하다고 외쳐보아야 그들에게는 온정적 집념의 강도를 더욱더 강하게 해주는 역반응을 생성할 뿐입니다. 지성 만능의 사회는 오만의 사회이기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온정 만능의 사회는 겸손의 사회이기에 나대기보다는 조용히 포기하는 일념(一念)으로 삶을 살아가고자 애씁니다. 오직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 후회의 외마디를 지름과 동시에 어둠이 눈꺼풀을 덮어갈 뿐입니다. 유연성은 현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유기체적 신체를 가진 인간이 보유한 창조적 힘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장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로 가라앉아 미래에 무수하게 부딪칠 사회적 곤란과 갈등에도 흔들림 없이 넘어설 면역력을 형성시켜준다고 생각됩니다.
아비의 역할은 그처럼 힘에 의한 힘에의 전수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지성의 의도된 힘이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순환적인 힘입니다. 거기에는 아이가 어려움에 처한 순간을 투정이나 핑곗거리를 찾게 만드는 요인을 형성시킬만한 질료(質料)들이 전혀 없습니다. 인내와 의지로 극복의 에너지를 갖출 수 있도록 인도하는 거대한 형상(形相)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비의 진정한 온정의 내력(內力)입니다. 힘으로서 아이에게 베풀어주고 감싸주는 아비의 온정이 아이의 내면으로 지속적으로 변환되어 감으로써 아이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인한 힘을 형성시켜 갑니다. 하나의 튼튼한 뿌리 깊은 나무로 성장할 밑거름은 아비의 힘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아비의 능력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힘의 의지가 아이의 심장과 체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인도하는 우주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마주하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인력(引力)의 자기력(磁氣力)입니다. 무의식적 질서이자 자연스러운 태생적 윤회의 도리(道理)이기까지 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이의 유전적인 인자에 새겨주는 아비의 자비로움과 인내함의 의지에 의한 애정 어린 힘의 전달이 양육(養育) 하는 아비의 자연스러운 능력이자 발현(發現)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아비의 애정은 단속(斷續)이며 어미의 사랑은 연쇄(連鎖)입니다. 인간의 삶은 그 단속과 연쇄의 어딘가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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