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합실
최 상 규
어마어마하게 둥근 하늘 아래, 노오란 대기가 투명하다. 진공처럼.
태양은 먼 남쪽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다. 헤엄치듯 느린 햇살 그 아래, 남북으로 뻗친 두 줄기 레일이 온기 없이 반짝이고 있다.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다. 아무것도 전해오지 않고 전해나가지도 않는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천은 의장(意匠)없는 풍경화다.
선로가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바바리코트.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배를 약간 내밀고 있다. 살 쪄서 나와 있는 게 아니고, 뻐근한 허리가 뒤에서 밀고 있는 것이다. 안색은 적절히 누르고, 이목구비는 절대로 멍텅구리일 수가 없게 잘생겨 있다. 그러나 표정은 바보다. 지루해 하고 있다. 지루하다는 것은 똑똑한 사람이라면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이다.
그가 서 있는 플랫폼 비슷한 대지(臺地) 위에, 기둥 위에 생철 지붕만을 인 헛간 같은 것이 서 있다. 기둥은 곧고, 해가림 아래 그늘은 푸르스름하다. 사선으로 비치는 햇볕의 경계선상에 벤치가 굳은 땅에 발을 박고 있다. 햇볕이 비치는 그 한 구석에 여자가 한 사람 앉아 있다. 비누 냄새가 풍길 법한 청초한 모습. 그녀는 굵은 털실로 뜨개질을 하고 있다. 미래를 염두에 두고 살고 있는 것이다. 곁에 놓인 조그만 손가방 이외에는 그녀의 현실을 말해주는 아무것도 없다.
아직 꽃피기 전인 코스모스와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측백나무……등의 상식적인 식물들을 배경으로 눈에 띄게 우뚝 서 있는 것이 있다. 휜 바탕에 검은 글씨로 지명이 박혀 있는 표지판. 훤칠하게 넓은 그 얼굴 중앙의 두 글자는 양편에 또 작은 지명 두 개를 거느리고 있다.
그 다리에 등을 기대고 한 사람이 땅바닥에 앉아 있다. 세워진 무릎을 두 팔로 바짝 끌어안고 있다. 남자. 바짓가랑이 밑에서 뻗쳐 나간 검정색 구두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보이는 것은 그 빈약한 발목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릎 위에 기댄 창백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새까맣게 헝클어진 머리 속으로는 햇볕이 파고들고 있다. 내부에만 관심을 모으고 있는 듯한 그 자세는…… 아니, 이젠 시작해야 한다.
정지(靜止)란 무한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만물의 가장 편안한 자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의하여 또는 누군가에 의해서 깨어지고 만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의 동작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아무런 동인(動因)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불쑥 몸을 움직였다. 왼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옷 속에서 팔을 뻗쳤다. 그리고 팔굽을 굽히자 손목에 채인 반짝이는 시계가 나타났다. 그는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째깍째깍.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초침은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침과 분침은 참한 맵시로 어떤 각도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었다.
“빌어먹을!”
그는 입 안의 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성가신 듯이 시계를 손목과 함께 주머니 속으로 쑤셔넣어버렸다. 배가 들어가 있었다. 그가 몸을 똑바로 세운 까닭이었다. 그는 사나움이 섞인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웅해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표지판 아래의 사나이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자세를 깨뜨리지 않았고 그 반대편의 벤치 위에 앉아 있는 여자도 그냥 고개를 숙인 채 바늘을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몸을 돌이켜 여자를 향했다. 여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다섯 발짝. 여자의 시계(視界) 한구석에 그의 구두 끝이 충분히 나타났을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두 번 낮게 헛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여자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얼굴 같았다. 그러나 손끝에서는 여전히 두 개의 바늘 끝이 움직이며 실이 천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찾았다. 그러다가 자기에게 쏘아지고 있는 남자의 시선과 마주쳤다. 남자는 놓치지 않고 눈으로 그녀의 시선을 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여자의 입은 3자를 왼편으로 눕혀놓은 것처럼 닫혀 있었다. 그게 비죽비죽하는 듯하다가 간신히 열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기차 말입니다”
“네?”
“기차가 어떻게 되는 건가 말입니다.”
여자의 눈귀에 가는 주름이 잡혔다. 입이 도로 먼저 모양으로 닫혀있었다. 찌푸려진 미간에서 발산하는 것은 분노라기보다는 의혹과 모멸이었다.
“저보고 그걸 물으시면?”
그녀는 냉혹하게 끊었다. 그리고 외면해버렸다. 그는 멋쩍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푸른 하늘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그녀를 향했다.
“제 어조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합니다. 하지만…… 물론 저는 압니다…… 이 사무실도 없는 간이역의 역장도 아니고 역원도 아니시라는 걸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뭘 따지려는 것이 아니고…… 답답하니까 물어본 겁 니다. 답답하니까 말씨가 그렇게 되어버린 겁니다. 알아주시겠지요?”
여자는 대답 대신 바늘 놀리던 손을 멈췄다. 그러나 그건 눈 깜짝할 사이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의사 표시도 없이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뭐 귀찮게 해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전 단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몇 시쯤이나 돼야 올라가는 차가 도착할는지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알고 계시거든 좀 가르쳐주십시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모르시나요?”
“몰라요!”
집어던지는 대답이었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싹 돌아서버렸다. 그리고 기어나오는 욕설을 참아 누르며 걸음을 옮겨놓았다. 더러운…… 더러운…… 차라리 걸어갈 수만 있는 곳이라면…… 그는 정말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 것 같은 자신을 의식하고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반짝이는 레일. 멎어 있는 풍경화. 매점(賈店)이 있을 리 없고 인가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조갈이 나는 목구멍에 침을 삼켜 흘려넣었다.
그때 그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표지판 아래의 사나이. 그런데 그 사나이는 몸을 떨고 있었다. 달아나려는 자신의 체온을 붙잡듯이, 잔뜩 두 무릎을 껴안고 웅크리고 앉은 채 눈에 띌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래 그 터부룩한 머릿 속으로 파코드는 햇볕마저도 자디잘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성급히 사나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사나이의 얼굴은 무릎 사이에 묻혀 있었다. 그는 가만히 사나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흔들어보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사나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기를 부를 남자라곤 바바리코트를 입은 나그네밖엔 없음을 알고 있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사나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여보세요. 어디 몸이 아프시오?”
그제서야 사나이가 겨우 얼굴을 보았다. 잠깐 치켜뜨는 눈알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추워서요.”
“춥다니? 이렇게 햇볕이 따끈따끈한데……괜히 추워요?”
“이렇게 자꾸 오한이 나는군요.”
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약한 목소리였다. 가련했다. 개처럼. 아니 훨씬 그 이상으로.
“허, 이거 야단났는걸.”
그는 혼잣말처럼 말하고 다시 풀었다.
“술을 마신 건 아니겠지요?”
사나이는 다시 무릎 사이에 묻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러나 술을 마셨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나이는 추위를 젼딜 수가 없어서 몸을 떨고 있는 것이었다.
“학질에라도 걸린 게 아니오?”
“학질은 무슨!”
그는 또 주위를 돌아보았다. 헛된 짓이었다. 그보다 더 따뜻할 수 있는 장소는 아무래도 없었다. 바람은 불고 있지 않으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몸을 덥혀줄 수 있는 유일한 온기인 햇볕은 더이상 받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사나이는 그것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개처럼 몸을 떨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 봅시다.”
그는 사나이의 고개를 들게 하고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깜짝 놀랄 만큼 뜨거웠다. 누구보다도 높은 열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나이는 열이 모자라서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었다.
“큰일났는데, 이거 어떻게 하나? 사람 하나 눈에 띄지 않으니 무슨 도리가 있어야지.”
그는 일어서서 바바리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나이에게 씌워주었다.
“이거 뭐…… 이것 가지고 무슨 보온이 되겠나…… 하지만 이 도리밖에는 없으니 우선 둘러쓰고서 가차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군요.”
“고맙습니다. 이거 참 미안합니다.”
사나이는 잠깐 고개를 들기는 했으나 이렇다 할 표정을 지어보일 사이도 없이 코트 자락을 여미어 얼굴을 싸버리는 것이었다.
“……그런거지 뭐, 미안해할 것 없어요.”
그는 벤치 쪽을 돌아다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뜨개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얼른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아까의 그 자리에 가서 섰다.
“저어, 미안하지만…….”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또 뭐야? 하는 시선이 그를 마주 쏘았다.
“저쪽에 있는 저분이 지금 보니 아픈 사람이군요. 몹시 고열이 나서 몸을 덜덜 떨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쪽을 볼 수 있도록 그는 약간 몸을 비켰다 여자는 눈치 빠르게 그 비켜선 공간을 통해 사나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 씌워져 있는 바바리코트와 그게 벗겨져 양복 바람이 된 그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고 사태를 짐작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약간 안심하며 다음 말을 하려 다시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는데, 그녀의 그 묘하게 닫힌 입술가에 미묘한 웃음이 번지는 것 같음을 보고는 도로 기분이 언짢아져버렸다. 그래 그게 어쨌단 말인가요? 당신의 인정을 칭찬이라도 해달란 말인가요?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그 다음 말을 꺼냈다.
“혹시 무슨 약이라도 가지고 계시지 않은가 해서…….”
“약요?”
“네. 혹시 에이 피 시 같은 거라도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 해서.”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시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던 바늘 놀림 위로 돌아가버렸다.
“없으신가요?”
“없어요.”
도대체 그녀가 왜 그렇게 퉁명스러운지 크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또 말했다.
“치약도 없으신가요?”
그는 도리없이 사나이에게 돌아왔다. 여전히 떨고 있었다. 좀 덜한 것도 걀았다. 그는 그 곁에 서서 다시 한 번 시계를 보고, 남쪽으로 뻗어나간 반짝이는 선로를 바라보고 그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언제부터 그랬나요?”
대답이 없었다.
“마찬가지지만……이런 말도 하나마나지만……어서 차가 와야 할텐데…… 도대체 누가 사람이 있어야지. 꼭 버려진 땅 같단 말이야. 허수아비라도 있어야지. 책임은 못 질지언정 푸념이라도 듣고 화풀이라도 당해줄 것이 좌우간 있어야 말이지. 이건 도대체 말도 아니야. 어떻게 하란 말이야, 도대체? 그럴 바에야 이건 왜 있는 거야?”
그는 지명 표지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딱! 갈겼다. 그 바람에 그것은 다리가 진동하고, 사나이가 움찔 고개를 쳐들었다.
“네?”
“아니, 아니오. 나 혼자 말이오.”
“그런데 참, 아직 멀었어요?”
“뭐 말이오?”
“기차 말입니다.
“그걸 알고 싶은 게 바로 나요.”
“미안합니다.”
사나이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무 핀잔스럽게 말한 것이 좀 안된 것 같아서 그가 다시 물었다.
“대관절 어디까지 가시오?”
대답이 없었다.
“마찬가지지. 아나마나. 기차가 오는 것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사나이는 떨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또 걸음을 옮겨놓았다. 갈 곳이 없었다. 그는 또다시 여자의 옆에 와 있었다. 그는 여자의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여자가 앉은 반대편 벤치 끝에 가서 앉았다. 둘 사이에는 두 사람쯤 불편치 않게 더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남았다. 그는 무릎을 포개고 오른팔을 여자 쪽으로 뻗쳐 벤치 둥 위에 올려놓았다. 귀를 기울이나마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십 리 밖에 기차가 오고 있대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정적이었다. 여자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바늘 끝이 맞부벼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가방 속의 실뭉치가 풀려나오는 소리가 가볍고 낮게 벤치를 진동시켰다. 문득 돌아보았다. 수그린 여자의 옆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었었다. 여자의 얼굴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녀는 뜨개절만 하고 있었다.
“차표는 사놓으셨나요?”
여자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또 쓸데없는 소리룔 했군요. 압니다. 차표 파는 데가 없는 곳에서 차표를 사셨을 리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절로 말이 나온 겁니다. 기차가 설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요만큼의 보중이나 약속도 없는 곳이니 말입니다. 차표만 있대도, 그 면적만큼의 보장이라도 손에 쥐고 있대도 좀…….”
“왕복 차표를 사셨더라면 좋았을 뻔했군요.”
불꽃이 번져나가듯 여자가 말을 쏘았다.
“하.”
그는 놀랐다. 그것이 웃음으로 변했다.
“하하하!”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왜 웃는 거죠?”
“웃음이…… 나오는군요. 우습지는 않은데, 웃음이…….”
여자의 얼굴이 돌아갔다. 일부러 돌처럼 굳힌 얼굴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남자는 꺼져 있는 담배 꽁초를 선로 위에 집어던졌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여자의 얼굴이 다시 그를 향했다.
“대관절 저한테 뭘 원하시는 거죠?”
“원하다니요? 제가 무슨?”
“왜 자꾸 제게 말을 거시는 거죠?”
“그거야 부인께서도 저와 마찬가지로.”
“전 부인이 아네요.”
“그러십니까?”
“그리고 더이상 전 무슨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미안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그거야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무얼 하고 있습니까?”
“우리란 말로 저까지 끼어넣지 마세요. 저는 따로예요.”
“그래요? 그럼 따로 혼자서 지금 무얼 하시는 겁니까?”
“기차를 기다리고 있어요.”
“손으로 하시는 일은?”
“기차가 오기 전에는 절대로 기차를 탈 수가 없으니까 하고 있을 뿐이에요.”
“잘 되고 있군요, 그 제목이 뭡니까?”
“제목이라구요?”
“하시는 것 말입니다.”
“보시면 몰라요? 뜨개질 아네요?”
“아니, 그 작품의 제목 말입니다.”
그녀는 성난 얼굴로 바늘만 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말을 하기가 싫으셔도 그 대답만은 듣고 싶은데요. 참 길게도 뜨셨군요.”
그건 틀림 없이 유아(幼兒)용 재킷의 소매였다. 그 길이가 벌써 2미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팔이 길었다간 곤란하죠. 그래야만 될 특별한 이유가 또 뭐 있는지 모르긴 하지만.”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있는 듯 3자를 뉘여놓은 것처럼 닫혀 있던 입술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집스럽게 뜨개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든지 따로 하신대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치만 제가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물은 것은 무얼 원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헛일을 하고 앉아 있는 것보다 이왕 기차가 오기 전에는 기차를 타지 못하게 된 사람들끼리니 서로 이야기나 하며 시간을 보내자는 것에 불과했지요. 제 말에 자존심을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저 친구가 또 그 동안에 죽지나 않았는지 가봐야겠군요.”
여자에게 어느 정도 시간의 여유를 주어야 했으므로 그는 얼른 그 자리를 떴다.
사나이는 그때까지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몸의 진동이 아까하고 좀 달랐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사나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좀 어떠시오? 조금도 덜하지 않아요?'
얼른 대답이 없자 그는 한손으로 여며진 코트깃을 열어보았다. 고개가 들리며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이 나타났다.
“아니, 울고 있군요?”
오한과 흐느낌으로 떨리고 있는 사나이의 두 어깨를 그는 꽉 잡아 주었다.
“진정하시오. 울다니 말이 돼요?”
“미안합니다.”
고르지 못한 사나이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하지만 전에는 이러지 않았어요. 전에는 이래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이게? 이러다가 여기서 그냥…….“
“그만. 그만.”
그는 사나이의 말을 막았다.
기차만 오면 돼요. 머지 않아 기차가 오겠지. 그러면 타는 거요. 그러면 당신의 목적지에 갈 수가 있는 거요. 그리고 정히 견딜 수가 없다면 중간 어디, 병원이 있는 곳에서 내려 치료라도 받을 수가 있고…….“
“그런데 왜 이렇게 춥죠? 나는 왜 이렇게 춥죠?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추운 겁니까?”
“그야 할 수 없지. 춥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참아야지. 추운 사람은 당신 말고도 또 얼마나 많을지 모르는 거요. 딴 생각말고 기차 오기나 우리 같이 기다립시다.”
“기차는 올까요?”
“오겠지. 또 와야지. 안 온다는 것이 말이 아니니까.”
“그럼 그저 기다리는 수밖엔 없군요.”
“그렇지요. 설사 오지 않는데도 우리는 기다려야지요. 우리는 떠나야 할 사람들이니까. 기차를 탈 사람이 기차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오?”
“그렇군요. 하지만 왜 이렇게 추운지…… 전에는 이러질 않았는데……전에는 이런 적이 없는데…….”
“아무 말 맙시다. 그리고 기다립시다. 기차는 틀림없이 오니까. 우리를 실어다놓기로 했는데 실어가지 않겠소? 자, 기운을 내서 조금만 더 참고 견딥시다.”
사나이의 울음은 그쳐 있었다. 그는 사나이의 어깨를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가 놓으며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아래 조그맣게 웅크리고 뭉쳐져 있는 사나이의 모습을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벤치에 앉은 여자. 그는 깜짝 놀랐다. 여자는 그냥 계속해서 그 소매 한짝을 길게 떠 나가고 있었다. 저런 변통성없는 고집통이 같으니라구! 그는 성큼성큼 그쪽우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결에 장승처럼 우뚝 섰다
그녀의 손놀임은 기계적이었다. 거기 따라 기계의 부분품 같은 두 개의 플라스틱 바늘 끝이 굵은 털실을 옭고 꿰코 빼며 짜나가고 있었다. 거기 따라서 그 전개(展開)된 어린이 재킷의 소매는 기형적으로 자꾸자꾸 길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앞을 지나 아까 앉았던 벤치 끝으로 가서 앉았다. 앞으로 숙인 여자의 옆 얼굴이 보였다. 돌처럼 굳은 얼굴. 그것은 그가 곁에 와 서고 또 앞을 지나 옆자리에 와 앉고 하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여자 같았다. 그러나 눈은 뜨여 있었다. 귀도 열려 있었다. 이 여자는 혹시 미친 여자가 아닐까? 그는 곧 기침을 두 번 했다. 그리고 유난히 크게 부스럭 거리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려했을 때 라이터의 은빛 말고 그의 눈을 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담배를 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휩스름하다는 것뿐 그것은 무의미했다. 아무 표정도 없었다. 손은 여전히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구석구석까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입에서 뽑았다. 라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시선을 그녀에게서 떼지 않은 채 몸을 돌려앉았다.
그녀의 눈이 살아 있었다. 그래 그것들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길어지는 소매 쪽으로 시선을 피하며 불쑥 한마디 했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얼른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고집이 아네요.”
“그러면……? ”
여자의 고개가 슬며시 돌아갔다. 그리고 뒤이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입술을 그는 지켜보고 있었다.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저는 알고 있어요. 어디에서부터 콧수를 줄이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고 넘어간 게 아네요. 전 알면서도 그냥 계속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녀의 목소리가 슬며시 죽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듣고 있는 참이었다.
“어서 계속하시죠.”
“콧수를 줄이기 시작하면 몇 단 올라가다간 끝내야 해요. 그러면 소매 한 짝이란 물건이 생겨나고 말아요. 그런데 그 전에 기차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또 시작해야 돼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이미 만들어진 것과 별개의 또 하나의 것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건 두 개째예요. 그것도 또 끝이 나겠죠. 그러고 나면…… 그래도 기차가 오지 않으면…… 또 시작해야죠. 세 개째를 말이죠. 못 할 일예요. 그럴 수는 없었어요. 너무 많아요. 한 개도 많아요. 반도 많아요. 없애야 돼요. 시작도 하기 전에 기차는 왔어야 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기차는 안 오고 있어요. 그러니까 잘한 거죠. 이젠 2미터쯤이나 길어져버렸지만 전 소매 한 짝을 짤 시간도 아직 다 기다리지 않은 거예요. 10미터가 된대도 마찬가지예요.”
“각오가 단단하시군요.”
그는 퉁명스럽게 비꼬아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까지와 다름없는 차근차근한 말씨로 대꾸했다.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쳇.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一.”
그는 말을 중단하고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실례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만―.”
“마찬가지 예요. 괜찮아요.”
“내 딴으로는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순전히 개수의 문제라면 적당한 때, 그러니까 한 개가 다 끝나기 전에 중단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쓸모없이 기이다란 것을 만들어놓지 말고 한 개가 되기 전에 치워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이거, 뭡니까? 이렇게 기이다란 걸 어디다 씁니까? 돌아가셔서 도로 풀어냅니까?”
“그게 좋을 줄도 알아요. 하지만 전 손올 놀려두고 있을 수가 없어요.”
“왜요?”
“뭘하죠? 손을 맞잡고 앉아 뭘하죠? 손이란 게 그런 건가요? 기차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버려두는 건가요?”
“하, 참. 좀 쉬게 해주면 어떻습니까? 이런 무용지물을 만들기 위해 일 시키는 것보다는 낫지…… 더구나 죽을 때까지 기차만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겠고.”
“기차가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게 될 수도 있죠.”
“네?”
그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서는 어린이용 소매가 자꾸 길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건 무슨……? ”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면…….”
“그럴 경우에는 이 소매는 시간으로 승격하겠죠.”
죽음! 그는 기분이 나빠졌다. 혹시 이 여자는……?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젓고 남쪽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기이다란 두 줄기 레일. 그렇게 쇠가 닳도록 지나간 수없는 열차를 타고 수없는 사람들이 앞서 갔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한 수없는 사람들이 앞으로 지날 열차들을 타고 가게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선로는 비어 있었다. 그들이 탈 차는 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혹시 죽음을 기다리는·……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어 그녀에게 말했다.
“이번 열차가 안 오면 다음 열차라도 오겠죠.”
“따질 것 없어요. 잠자코 기다리기나 하는 거예요.”
사신(死神)과 같은 얼굴로 시간을 짜고 있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그는 얼른 몸을 돌이키어 걸음을 옮겨놓았다.
표지판 아래에서 사나이는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구원을 청하는 심정으로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좀 어때요?”
대답이 없었다. 들씌운 코트가 벌렁벌렁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옷자락을 들춰보았다.
검푸르게 변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직도 멀었나요?”
“아직…….”
그의 목소리는 목구멍 속에 잠기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힘들여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힘을 좀 내봐요. 우리 좀 일어서서 걸어볼까?”
사나이는 맥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얗게 말라버린 입술이 힘없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허 참. 어떡하나? 이래서는 안 될 텐데.”
“그거예요.”
사나이의 열에 뜬 속삭임이었다.
“그게 걱정이에요. 어떻게 될 건지……이건 도대체…… 이러다간 영…….”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한번 일어셔 봐요.”
그는 사나이를 부축하려는 자세로 다가 앉았지만 사나이는 시선도 들지 못하고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전엔 이렇지 않았어요. 갑자기 이렇게 됐어요. 그래……기어오다시피 여기까지는 왔어요. 기차만…… 기차만 타면·… 죽을 애를 써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데…… 왔는데…… 기차는 오지 않고…… 이제는 기차가 온 대도…… 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기차조차도――.”
“그만, 그만. 기차가 안 올 리가 있소? 인제 곧 와요. 조금만 참아요. 그러면 타면 되는 거요. 못 타긴, 내가 있는데. 염려 말아요.”
“추워…… 자꾸 추워요. 그런데…… 그런데 나는 자꾸 떨어지고 있어요. 몸은 떨리는데 자꾸…… 자꾸 뜨거운 것 속으로…… 붙잡아줘요. 나를…… 안아줘요. 꼭…… 아, 이러다간 나는 영…….”
“허, 참 별소리를 다 하는군. 꼭 저 여차처럼 기분 나쁜 소리를 하고 있군그 래.”
“네 ? 누구요? 여자가 있어요?”
사나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생기를 띠었다. 거기에 힘을 얻어 그는 얼른 대답해주었다,
“음. 저기 벤치 위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여자가 하나 있소. 뜨개질을 하고 있지. 꾸준히, 열심히 기차가 꼭 올 것을 믿고서 말이야.”
기우뚱하는 사나이의 몸을 붙잡아주며 울리듯이 말을 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저 여자는 우리 친구요. 어떤 역경에서도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되어주지. 아무리 무력하다 하더라도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말이오.”
“친구?”
“그렇지, 친구지.”
“나를 좀 일으켜줘요.”
“힘을 내보겠소?”
“네, 이러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는 사나이의 휘뚱거리는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나이는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자…… 그 손이 필요하다. 여자의 손. 어머니의…… 손. 이 떨리는 몸을 그 손이…… 잡아주어야 한다. 어디, 어디에 있죠? 나를 잡아줄…… 나의 어머니가 되어줄, 여자가 어디에 있죠?”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사나이는 미친 소경처럼 맹렬히 앞으로 더듬어 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는 벤치 쪽을 보았다. 여자는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 얼굴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바늘 끝은 무슨 곤충의 날개짓처럼 그녀와는 관계가 없는 움직임으로 보였다. 거기엔 그 사나이가 찾아들어갈 눈곱만한 틈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갈구하고 있었다.
“어디죠? 선생님. 어지러워서 보이질 않아요. 데려다주세요, 선생님. 제발. 그게 바로 제가 갈 곳인지도 몰라요. 어서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결심했다. 그리고 사나이를 옆구리에 안다시피 하고 그녀 쪽으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무슨 기척을 눈치차릴 감각도 잃어버린 듯했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인 자연스러운 태세였다. 그는 그 뜨거운 사나이의 무게를 두 팔과 온몸으로 끌고가면서도 그녀에 대해 감탄했다. 빙하 시대를 더 소급한…… 빌어먹을! 무겁다. 그러나 그는 애써 나아갔다. 그래 그들은 점점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자세에는 눈곱만큼의 동요도 없었다.
“보세요.”
그는 울렁울렁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당신의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말예요I
그의 팔에서 풀려나간 사나이의 몸이 쓰러지듯이 그녀의 무릎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동작은 좀더 빨랐다. 그녀는 타자기처럼 절도 있게 옆으로 물러앉았다. 사나이의 손은 그녀가 앉았던 빈 자리 위에 쏟아져 겹쳤다.
“왜 이러시죠?”
냉담한 여자의 목소리만이 튀어나왔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나이는 기도하는 것 같은 자세로 가쁜 숨결을 씨근거리고 있었다,
“나를…… 나를…….”
사나이의 몸이 불끈 움직이며 그녀 쪽으로 옮아갔다. 여자의 몸은 다시 한 번 참새처럼 가법게 깡충 옆으로 옮겨 앉았다.
“왜…… 나를…… 이건…….”
말도 안 되는 외침으로 사나이는 애소하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는 그 기다란 소매 한 짝이 자꾸 길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그 곁에 서 있었다. 땅에서 집어든 구겨진 바바리코트를 팔에 걸친 채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제 한 번만 더 똑같은 과정이 반복된다면 여자는 더 옮겨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 조그만 손가방은 벤치의 가장자리까지 그녀의 몸으로 밀려나가 있었다. 이제 다시 사나이가 그녀에게 손을 뻗치고 기어오른다면 그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나이의 손을 잡아줄 것인가. 아니면 발딱 일어서서 사나이를 눈 흘기며 피해 달아날 것인가…… 하여튼 하나의 끝장이 날 것이었다. 그 끝장을 향해 사나이의 몸이 움직였다. 잘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무릎으로 일어섰다. 사나이의 몸은 막 앞으로 나가려하고 있었다. 여자의 내부에는 이미 어떤 결정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곁에 선 그는 숨이 콱 막험을 느끼고 눈을 꼭 감아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그들 세 사람과는 아주 먼 어떤 곳에서 어떤 음향이 들어와 그들 세 사람의 귓속을 동시에 울렸다. 그는 번쩍 눈을 떴다. 사나이가 번뜩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발딱 얼굴을 들었다. 노오란 대기를 진동시키는 그 샛노란 이중의 악음(樂音). 기차 소리였다. 그들 셋의 머리가 일제히 남쪽으로 돌려졌다.
“아아아!”
뭉치고 억눌렸던 것이 잊고 있었다는 듯이 풀려나왔다. 드디어 기차가 오고 있었다. 반들거리는 두 줄의 레일이 까마득히 멀어져 나가 하나로 합해지려 하는 지점에 버밀련의 네모난 점이 돌연히 생겨나 조금씩 조금씩 확대되고 있었다.
“오는군요! 드디어 오는군요!”
그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활짝 펴진 얼굴로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굉장한 쇼크라도 받은 사람 모양 커다랗게 눈을 뜨고 멍청하니 일어서 있었다. 가슴에 모아 쥔 옷에서는 2미터가 넘어보이는 그 기다란 어린이용 재킷 소매가 늘어져 있었다.
“참말, 인제는…… 인제는…….”
사나이는 헐떡이는 소리로 말하며 엉거주춤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달려들어 사나이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 어깨를 껴안고 등을 두드리며 힘을 북돋우었다.
“됐어요. 인젠 타는 거요. 그리고 가는 거요. 기운을 내시오, 응?”
사나이가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한 개가 끝나기 전에 드디어 와주는군요.”
여자는 뜨개질 한 것을 가슴에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흔쾌하게 웃음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요. 우리는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기차가 오는 겁니다.”
열차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우렁찬 디젤 엔진 소리와 육중한 무게가 철로 위를 구르는 굉음이 그들의 귀를 울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움직였다. 그는 바바리코트를 입었다. 사나이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열에 뜬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대었다. 그리고 여자는 손가방 속에 뜨개질한 그 길고 긴 소매를 꽁꽁 눌러가며 다져넣었다.
기차가 다가왔다. 그들 발밑의 레일이 울리며 삐득삐득 소리가 나고 질주하는 열차의 굉음은 바람처럼 그들에게 몰아쳐왔댜.
오후의 사양을 받으며 그 간이역 대합실 벤치 앞에 저립해 서 있는 그들 셋 앞에 맨 먼저 들이닥친 것은 우람하게 대기를 깨뜨리는 괴물 같은 거대한 기관차였다. 그것은 우탁한 소리와 함께 사나운 회오리바람을 그들에게 밀어붙이며 질풍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아찔하는 현기중을 느끼며 이릉거리는 열기가 스쳐 지나가고 난 후에 눈을 떴다. 철도의 이음매를 굴러 지나는 수많은 쇠바퀴 소리가 따가닥따가닥 규칙적으로 울려오며 뒤따른 객차들이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4호차. 5호차. 6호차……기차는 아직 속도를 늦춘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발돋움하는 심정으로 지나가는 차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수없는 사람들이 바람처럼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기차에 그들보다 먼저 타고 앉아 쿠션에 몸을 기대고 진행과 시간에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있는 한가로운 자세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지나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몇십 초 안에 차는 정차하고 그 안의 사람들도 정지하고, 그리고 그들 셋이 차 위로 올라 그들과 같은 신분이 된 후에 기차는 공평하게 그들 모두를 끌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것이었다.
객차는 여전히 눈앞을 지나고 있었다. 12호차, 13호차, 14호차……아직도 얼차는 속도를 별로 줄인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도 끝을 알 수 없이 많은 객차가 달려 따라오고 있었다.
“앞쪽에 타야 남보다 먼저 가게 되는 건데…….”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마찬가지죠, 뭐.”
사나이도 씽긋 웃어보였다.
“그런데 왜 기차가 서지를 않죠?”
여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은 안 했다. 그러나…… 서겠지. 뒤에 이렇게 많이 달렸는데 기관차가 우리 앞에 설 수야 있나. 이젠 브레이크를 걸겠지. 21호차. 22호차. 23호차……하나하나의 행복한 차실(車室)들이 절꺼덕절꺼덕 소리와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26호차. 27호차. 28호차…… 그런데 열차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레일의 이음매를 지나는 절꺼덕 소리가 좀 전보다 더 빨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열차의 뒤쪽을 보았다. 끝이 보였다. 신호등이 달린 끝 칸의 승강구엔 차장도 서 있지 않았다. 석양을 받아 번득이는 회갈색 차벽이 바람처럼 가볍게 눈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요했다. 의혹. 당황. 공포. 그들이 얼굴을 마주 볼 사이도 없이 열차의 빛나는 후벽(後壁)은 소리 없이 그들을 놓아두고 떠나가버렸다.
“아니, 아니, 아니…….”
비명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지만 기차는 사라졌다.
아무렇게도 할 도리가 없었다. 열차가 오기 전에도, 열차가 통과하고 있는 도중에도, 그리고 열차가 사라져버린 다음엔 더욱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고 무엇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레일은 레일대로 아까처럼 있고, 그들은 그들대로 아까처럼 있을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죠?”
“정말, 이건, 이건…….”
“급행 열차였나요?”
“아니었대도 이젠 마찬가지죠.”
“어떻게 하죠?”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저 파랗기만 했다. 그리고 노오란 대기가 투명한데, 말없는 풍경화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덩두런히 서 있었다.
잠자리 한 마리가 불안정한 미행을 하다가 사라졌다.
개구리가 건드렸는지 코스모스 한 포기가 잠깐 떨리다가 멎었다.
맨 먼저 벤치로 돌아간 것은 여자였다. 그녀는 의자의 북쪽 끝에 가서 소리없이 앉았다. 다음에 사나이가 비실비실 표지판 밑으로 걸어가 덜퍽 주저앉았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는 발로 땅바닥을 긁고 있었다.
“어이구, 추워!”
신음 소리를 내며 표지판 밑의 사나이는 바짝 몸을 웅크리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벤치 위의 여자는 뜨개질감을 꺼내 그 기다란 소매를 풀어 늘어뜨렸다.
“아직도 더 길어져야겠군요.”
남자는 돌아다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땅을 긁던 발을 멈추고, 뻐근한 허리로 배를 약간 앞으로 밀어내었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말했다.
“훼방꾼이었어요.”
그리곤 다시 무한을 닯은 경지가 시작되었다.
-끝=
2016년 11월 10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