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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케이블방송 TVN의 코미디 프로그램 〈재밌는 TV 롤러코스터〉가 장안의 화제다. 코너별 독특한 에피소드 구성이 회를 거듭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성우의 무미건조한 내레이션이 압권인 ‘남녀탐구생활’이 가장 눈에 띈다. 고정 연기자 정형돈·정가은 커플보다 큰 관심을 받는 주인공, 성우 서혜정을 만났다.
“이번에 50대 시청률도 2위를 기록했대요.” 여기는 매주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 코너 내레이션을 녹음하는 여의도의 한 스튜디오. 방금 들어선 담당 PD가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다른 연령대 모두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으며, 이제 50대까지 공략했다며 환하게 웃는다. 담당 PD는 오늘 ‘남녀탐구생활’ 녹음 분을 성우 서혜정(47)씨에게 건네줬다. 서씨는 잠시 대본을 묵독한 뒤 곧장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이윽고 진행된 녹음은 1시간 30분 동안 휴식 시간을 한 번 가진 뒤 가볍게 끝났다. 기쁜 소식으로 시작한 덕분인지 작업 능률이 배가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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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전화 안내 멘트에서 착안한 무감정한 말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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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는 매주 화요일마다 이렇게 PD와 만나 녹음을 진행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제작 방식과 다르다. 보통 성우의 내레이션이 들어가는 경우 그림이 완성된 상태에서 성우가 화면에 맞게 목소리 연기를 하는데,〈재밌는 TV 롤러코스터〉는 반대로 성우의 녹음 분을 가지고 배우들이 거기에 맞게 연기를 한다. “내레이션 안에 연기를 가둬두는 게 작품의 컨셉트예요. 다큐멘터리 형식 안에서 연기자들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거죠. 그러니까 훨씬 자연스러웠어요.” 마침 녹음 현장에 나온 김경훈 PD의 설명. 총괄감독은 예능계에서 유명한 김성덕 감독으로, 1990년대 중반 인기를 모은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을 비롯해 〈세 친구〉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인기 코너 ‘인생극장’을 집필한 작가 출신 감독이다. 프로그램 기획 당시에도 그러한 방침에 따라 성우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단다. 아무 감정 없이 대본을 읽는 목소리가 필요했던 것. 그러다 감독의 머릿속에 114 전화 안내 멘트가 떠올랐다. ‘문의하신 번호는…’으로 시작하는 냉정한 기계음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혜정이 바로 그 음성, 114 전화번호 안내 멘트를 한 주인공이다. 그렇게 해서 요즘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재밌는 TV 롤러코스터〉 성우 서혜정’이 탄생했다. 일반적으로 성우들은 각자 성향에 따라 맡는 작품과 역할이 다르다. 서혜정씨는 외화 〈X파일〉의 스컬리 역으로 대중에 익숙해졌고, 이후에는 다큐멘터리 〈생로병사의 비밀〉 내레이션을 맡는 등 주로 냉철하고 이성적인 목소리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본인도 교양물에 잘 어울린다 생각하던 터라, 사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찾는다고 했을 때 썩 내키지는 않았다고 한다. “첫 녹음할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리벙벙했어요. 아마 적어도 8회까지는 목소리가 불안정하다고 느끼실 거예요. 이후 지금의 감을 잡고 이렇게 온 거죠.” 지난 7월 방영을 시작해 지난 주말(11월 21일)까지 벌써 19회를 맞았다. 케이블 채널에서 통상 인기 프로그램을 가르는 ‘마의 시청률 1퍼센트’는 거뜬히 뛰어넘었고, 최근에는 4.3퍼센트에 육박하며 최종 고지 5퍼센트를 향해 열심히 뛰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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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 학교 관뒀어요, 믿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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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정씨는 13년 전쯤 이혼을 했고, 지금은 혼자서 두 자녀를 키운다. 전남편은 재혼한 상태. 최근엔 그녀도 ‘좋은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안 사람인데 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만났어요. 한두 번 만나고 그 사람에게 마음이 많이 향한다는 걸 알았죠.” 지금으로선 마음이 닿는 사람으로, 좋은 친구로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한편 두 아이는 19세, 16세 남매라니 한창 공부에 정신없을 터. 그런데 엄마 서혜정의 다음 얘기에 정신이 바짝 든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 안 다녀요.” “네?” “아들은 중학교 2학년 때 그만두고 검정고시 준비 중이고, 딸도 음악을 하고 싶다면서 일단 학교를 그만뒀죠.” 대단히 용기 있는 엄마다. 미국에서 2년 정도 유학한 아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와 또래보다 한 학년이 떨어지는 김에 아예 내년에 검정고시를 보기로 했단다. 그런데 아들의 꿈이 영화배우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현재 출국한 상태란다. 동티모르 유소년축구단 김신환 감독의 실화를 영화화한 김태균 감독의 〈맨발의 꿈〉 촬영 현장에 보낸 것이다. 서씨의 선배 배우가 출연한다기에 선뜻 딸려 보냈다고. 자녀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대한민국 보통 엄마들에게서 한참 벗어난 모습이다. 배우가 꿈이라기에 지인들을 동원해 대학로 연극판에서도 경험을 쌓도록 지원했다고 한다. 다음은 딸의 경우. 역시 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해 아쉬운 감이 있었으나 어쩌랴. 자신의 꿈은 뮤지션이니 중·고등학교 과정을 일찍 패스하고 빨리 대학에 가고 싶다는 정확한 목표를 밝히는 마당에 밀어줄 수밖에. 현재 피아노 등 전반적인 음악 공부를 시키고, 대중가수로서 꿈을 지원하는 중이란다. 두 자녀 모두 다른 분야 꿈이라면 말렸을 텐데, 엄마가 잘 아는 연예계다 보니 쉽게 허락했다고 덧붙인다. 한편 어릴 적부터 엄마 옆에서 만화영화 더빙 작업을 듣고 자란 딸아이는 일본어 듣기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은 된다. “아이들은 걱정하면 걱정하는 대로, 믿으면 믿는 대로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믿는 게 우선이죠. 그리고 늘 강조해요. 톱스타가 되는 것보다 거리 공연을 하더라도 자신이 만족하는 일을 하라고 말이죠.” 자녀들의 용돈도 짠 편이다. 아들은 월 10만 원, 딸은 6만 원. 그 외에 필요한 돈은 심부름이나 아르바이트로 벌어서 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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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부터 50대까지 든든한 팬층 뿌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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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엄마 서혜정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아주 어릴 적부터 만화 좋아하고 영화 즐겨 보면서 성우의 꿈을 키웠죠. 저는 이 직업을 무척 좋아해요. 아마 다시 태어나도 성우 할걸요?” 고등학생 때까지 꾸준히 방송반 활동을 한 결과, 대학 주최 방송경연대회에서 대상과 개인연기상을 거머쥐며 서울예대 방송연예과에 특별 전형으로 합격했다. 지금으로 치면 특기자 수시 입학 케이스. 그러나 화려한 신입생 시절도 잠시. KBS 성우시험에 합격해 1학년을 다니다 말고 라디오 드라마에 투입됐다. 이후 복학해 제대한 최민수, 가수 장필순, 배우 최명길 등과 같이 학교에 다녔지만 결국 일이 바빠 졸업은 못 했단다. 오랫동안 스컬리 목소리로 유명세를 탔지만, 그 옛날 만화영화 전성기부터 뛰어난 활약을 했다. 1980년대 인기 만화 〈독수리 오형제〉 중 홍일점 ‘3호 유미(백조)’를 연기했는가 하면, 국내에 순정만화 붐을 일으킨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매력적인 중성 캐릭터 ‘오스칼’을 멋지게 창조해냈다. 요즘 ‘남녀탐구생활’에서 간혹 야리야리한 이 목소리를 응용해본다는 〈세일러문〉의 ‘마스’ 역할도 그의 몫이었다. 여기에 히트 광고도 줄을 잇는다. 이영애의 트레이드마크 ‘산소 같은 여자 마몽드’의 섹시한 멘트를 비롯해 헤아릴 수 없는 광고들이 그의 목소리를 빌렸다. 최근 문근영이 등장한 떠먹는 요구르트에서는 ‘남녀탐구생활’의 패러디 버전을 선보였다. 이어 원더걸스가 출연하는 치킨 광고도 얼마 전 작업을 마쳤다. 수능 준비생을 위해 한국 단편소설 100편을 오디오북에 담는 사업을 했다가 크게 실패한 적이 있지만, 얼마 전 다시 오디오북을 만들기도 했다. 이번에는 성격이 다르다. 신경숙의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를 오디오북에 담는 일. 그의 목소리로 듣는 소설 1천 부 정도가 전국 도서관에 비치된다고 한다. 이밖에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대만 국립박물관의 한국어 서비스가 그의 목소리. 내친김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까지 도전해보고 싶다고. 주말과 휴일 아침에는 TBN 교통방송의 음악 프로그램 〈음악살롱〉 DJ로 시청자를 만나는가 하면, 수요일마다 KBS 월드라디오의 〈문화 속으로〉도 진행 중. MBC 표준 FM 〈박경림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는 2부가 시작할 무렵에 ‘별밤탐구생활’을 선보인다.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는 50대 시청자를 공략 중이지만, 서혜정은 요즘 10대 팬까지 든든한 후원자를 ‘관리’하고 있다. 〈박경림의 별이 빛나는 밤에〉 방송을 마치고 나면 ‘언니, 누나’라 부르는 아이들의 문자가 줄을 잇는다. 일의 가짓수를 헤아리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듯싶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신의 직업을 이처럼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 듯싶다. 다방면에서 상상력을 동원하고 창의력이 투영되는 성우 서혜정, 그는 일을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단다. | | |
출처 : 내일신문 - 미즈내일 '인물'
취재 : 조미나(자유기고가)
사진 : 백종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