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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부른다. 찬 바람이 불면서 대게철이 돌아와서 영덕으로 가면 좋겠다 했었는데, 도중에 안동이 붙잡는다. 대나무줄기 같은 게다리를 마디마디 분질러가며 달콤한 속살을 꺼내 먹으리라던 기대를 접고, 하회 마을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길은 길어도 날씨는 좋아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겠다.
▲ 하회마을의 아침. 화산쪽에서 떠오르는 해가 까치집을 깨우고 있다.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전히 비포장이다. 문명으로부터 등 돌린 강변을 따라 깡마른 전신주가 띄엄띄엄 돌아나가고, 마주 오는 자동차가 있을 때마다 자욱하게 먼지가 인다. 그 때마다 자동차들은 상대를 배려하며 멈춰 선다. 병산서원을 찾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병산서원을 찾는 사람들은 말하기보다 느끼기 위해서 온다. 그것은 아득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향수에 대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이 빛나지 않는 건물들과 이 오래된 강변과 먼지 풀풀 이는 자갈길을 만나고 싶어했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동차가 이 곳을 다녀갔는가. 주차장 흙은 단단하게 굳어져 버렸다. 이런 곳 이런 풍경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딱딱한 길, 획일적인 구조,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야하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머리 속이 이산화탄소로 가득 차서 폭발 직전에 이르렀을 때 안심하고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는 넉넉한 장소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병산서원은 그럴 때 찾으면 좋은 곳이다. 역사 속의 인물과 그 덕행을 기리기에 앞서-.
달팽이통시를 돌아서 서원뜰로 들어선다. 길은 언덕길. 쪽문은 낮고 동쪽으로 돌아앉았다. 본당은 높직하고, 만대루는 시원하다. 누각으로 오르기 전에 신발을 벗는다. 거뭇거뭇 세월이 파먹은 통나무 계단을 올라선다. 한 겹 스타킹 아래서 삐걱삐걱 마룻장이 운다. 들보는 우람하다. 기둥은 둥글다. 추녀는 길고 소맷자락처럼 느린 곡선이다. 추녀 선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햇살이 들이친다. 낙동강 물은 저만치 물러서서 반짝인다. 이 누각에서 오래 머물면 누군들 시 한 수 짓지 못하랴 싶다. 돌아보면, 뜰은 네모났다. 동재와 서재가 동서에서 가로막아 뜰은 앞쪽으로만 숨통이 트인 입 구(口)자형이다. 이 아늑한 공간에서 오래 정진하면 누군들 급제를 하지 못하랴 싶다.
▲ 고택 추녀 끝에서 말라 가는 곶감(병산서원 서원집)
하회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복잡하다. 때마침 일요일 오후. 들어가고 싶지가 않다. 이 복잡한 시간에 마을로 들어가서 인파에 휩쓸리기는 싫다. 강 건너 부용대로 오르는 게 좋겠다. 높직한 곳에서 건너다보며 그리워하다 만나리라. 그런데 진입로가 조금 애매하다. 류시석 선생이 병산서원에서부터 달려와 주었다. 도중에 그를 만나 광덕교를 건너간다. 다리를 건너, 다리를 건너, 수루미쪽으로 들어왔다. 좁은 길을 파고들어 겸암정사 옆에 차를 세웠다.
낙동강은 이제 내 발아래 있다. 낭떠러지를 끼고 오솔길을 오르는 솔밭. 드문드문 터진 사이로 하회 마을이 보인다. 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만들었다는 만송정 솔밭이 보인다. 만송정은 정자가 아니라 저 솔밭 이름이다. 만 그루의 소나무가 모래밭 둘레에 모여 서 있으니 모래밭은 더욱 두드러진다. 솔잎들은 건강하여 검은 빛이 돈다. 솔밭을 뚫고 나간 사람들이 모래밭에서 거닌다. 나도 이 시간 저 마을로 들어갔다면 저 강변 모래톱을 거닐고 있으리라.
부용대 오르는 길은 솔밭 사이 오솔길이다. 이 곳 소나무들은 줄기가 굽고 잎이 성글다. 바람이 많이 닿는 곳인가 보다. 그러나 오늘은 바람 한 점 없다. 정상은 그다지 멀지 않다. 강쪽 풍경을 요리조리 돌려세우던 소나무밭은 정상 바로 아래서 우뚝 멈춰 선다.
▲ 부용대 일몰. 하회탈 박물관 뜰에서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지칠 때마다 그 그늘에서 쉬며 배 한 척 띄워 저 강물을 건너왔으리라. 양반들은 이 절벽 위까지 올라 경치를 즐기고 시를 읊었겠지만, 배도 없고 쉴 틈도 없는 서민들은 온종일 허리 굽혀 논밭을 일구다가 강물을 훑어 내리는 바람 한 줄기에 땀을 씻으며 고마워했으리라.
이 땅에는 얼마 전까지 양반과 상민이 있었다. 양반은 밤새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정신 노동을, 상민은 별을 보고 일어나서 별을 보고 들어오는 육체 노동을 하며, 건널 수 없는 강물을 원망하였다. 하회탈은 바로 그렇게 눌려 살던 계층에서 만들어낸 가면이었다. 이제 그것은 단순한 가면이 아니라 빛나는 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대는 바뀌어 신분 차별은 사라졌다.
이제 저 마을은 누구나 찾아오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마을이 되었다. 구경 오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초가지붕을 이고, 구경 오는 사람을 위해 근엄하던 양반가의 고택들도 대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이제 저 마을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마을까지 떠밀려온 것이다. 과연 모두가 진실로 원하는 일이었을까. 하회 마을은 둥글다. 저 둥근 마을을 감싸고도는 길고 긴 강물은 알고 있을 것이다. 먼저 온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 돌아갔는가를-.
겨울 해는 빨리 진다. 밤중에 병산서원까지 달려갔다 왔다. 서원 옆에서 쉬기에는 내 행장이 너무 허술했다. 하회 마을 입구 모텔에서 자고 동틀 무렵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하회 마을의 해는 화산(花山)쪽에서 뜬다. 화산은 326m. 높지는 않아도 뿌리가 펑퍼짐하니 넓어서 병산리와 하회리가 이 산기슭에 기대있다. 화산 머리를 짚으며 해가 떠오를 때, 은사시나무 가지에 걸쳐둔 까치 둥지가 활활 탄다. 가까이 다가가니 까치 가족이 불난 듯 날며 깟깟깟 짖어댄다. 머쓱해져서 돌아서서 골목 안을 기웃거린다. 어느 집 흙담에선 시래기가 말라가고, 어느 집 텃밭 빈 이랑에선 잎사귀와 열매를 잃어버린 고춧대가 가지런히 누워있다. 저 고춧대가 아궁이 속에서 제 몸을 태워 두터운 방구들을 뎁혀 주면, 저 텃밭의 주인은 저 고춧대만으로도 며칠 밤은 아랫목이 뜨뜻하리라.
볏짚을 쌓는 방식도 지방마다 다르다. 이 마을 볏가리는 움막처럼 둥글다. 맨 위쪽엔 상투처럼 꼭지를 만들어 씌웠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바로 저렇게 짚과 친하며 살았었다. 짚으로 멍석을 짜고, 짚으로 새끼를 꼬고, 짚으로 신발을 삼아 신고, 짚으로 망태기를 짜서 어깨에 두르고 들로 나갔다. 짚으로 가마니를 짜서 곡식을 담았다. 짚으로 우장을 만들어 비를 피하고,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고, 짚을 부벼서 뒤를 씻고, 짚 덤불 속에 파묻혀 추위를 달래기도 했다.
짚은 또 소중한 사료였다. 작두로 토막 내어 겨와 콩대를 섞어서 삶아 소먹이로 썼다. 생활도구와 보온을 위해서 짚은 아끼고 아껴야할 재산이었다. 하회 마을에서 만난 상투 같은 볏가리는 우리 할아버지들이 상투 틀고 살던 시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만송정을 가로질러 강물 곁으로 왔다. 어제 저녁 부용대에서 내려다볼 때는 황금빛이더니, 이른 아침 찾아오니 물안개가 핀다. 올올이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여리고 여린 새순 같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건너오는 사이 강은 쉬지 않고 흘렀겠지만, 그 운동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추위를 이기려고 강은 스스로 불을 지피는 것이리라. 모래톱 틈새에 난 웅덩이. 그 얕은 물과 주변의 모래들은 얼었지만, 흐를 수 있는 강물은 두터운 얼음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저렇게 군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모래톱. 나와 강물뿐이다. 나는 강물에게 손을 내민다. 추운 강물이 손을 잡는다. 강의 손은 내 손보다 차다. 눈으로 만져볼 때와 손으로 만져볼 때는 온도부터 다르다. 겨울 강물은 차디찬 악수를 남기고 손 사이로 빠져나간다.
화산 머리를 짚고 해가 솟을 때, 활활 타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던 까치집이 환한 햇살 속에 멀뚱하니 걸릴 무렵에야 하회 마을을 등진다. 다른 곳을 보아야하는 의무에 쫓기지 않는다면 이 골목 안 기와집마다 칸칸이 기웃거리고, 지붕 이는 아저씨와 덕담도 나누고, 조용한 집 할머니에게서 마을 이야기도 듣고, 봉화댁 손국수 맛도 한 번 더 보고, 모퉁이 돌아설 때마다 양반님 기침소리 들려올 것 같은 골목길도 느릿느릿 즐기며 걸어보련만.
풍산한지를 견학하고, 봉정사 구경을 하고, 개목사를 찾아가는 길. 가야리 가신다는 할아버지를 태웠다. 이 어른이 또 풍산류씨다. 개목사로 오르는 길 옆에 풍산류씨 집안 소유인 함벽당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그걸 구경하고, 짚 덤불에 물을 뿌려가며 퇴비를 만드시는 할아버지도 만나고, 도산서원으로 향한다. 개목사는 높직한 산 중턱에 있어서 포기한다.
지도상에는 도산서원쪽으로 질러가는 도로가 있는데, 확실하지 않으니 가지 말라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말린다. 시내쪽으로 되돌아나와 35번 국도로 갈아탄다. 도산서원은 산자락을 둥글게 두르고 있어서, 아침 해가 늦게 들고 저녁에도 다른 곳보다 땅거미가 일찍 진다. 서둘러왔지만 서당의 절반은 그림자에 묻혔다.
도산서원, 3년 전에 왔을 때는 저 툇마루에 앉아 글 배우러 온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 때 피어있던 꽃들은 모두 져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 저 두터운 매화 가지를 열고 새 꽃이 피어나면, 내 팔뚝 어딘가가 꽃 피는 듯 가려우리라. 그 때는 밝은 대낮에 맞춰 이 곳을 찾으리라.
아쉬운 마음으로 전교당 앞에 서니 한석봉 선생의 글씨가 맞이한다. 사람은 짧아도 학문과 예술은 길어서 멀리서 찾아온 길손을 위로한다. 두 번 절하고 돌아서는 어깨 위에 따뜻한 손길이 놓이는 것 같다.
고갯길을 넘어서 숙소를 구할까 하고 온혜리로 갔다가 퇴계 종택쪽으로 되돌아왔다. 육사시비를 찾아가려는 것이다. 퇴계 종택은 외딴 집이다. 자동차로는 고갯길을 둘러오게 되지만, 저 종택과 도산서원 사이에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산길이 있을 것이다. 병산서원과 하회 마을 사이에도 그런 길이 있을 것이다. 걸어서 그 길을 오가며 생각을 다듬고 문장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길러냈으리라. 상상하며 바라보니 저녁 해 붉게 타는 산자락이 더욱 선명해진다.
육사 선생 시비는 어디 있는가. 날은 저물어가고 땅거미는 갈수록 짙어 가는데, 사람 없는 시골길. 길이 끝나는 곳까지 달려와서야 잘못 온 것을 안다. 배추 뽑아낸 밭두렁에 차를 세우고 마지막 집 마당 안으로 들어가니 말갛게 차려 입으신 할머니가 반기며 물으신다.
“저기 니 차가?” “예.” “운제 샀노?” “좀 됐읍니더.” “그래?” 할머니는 나를 친척 누군가와 겹쳐 보시는 모양이다. “야야! 야야!” 밥짓는 며느리를 큰 소리로 불러내어 길을 알려주게 하시고, “또 오니라” 손을 흔들어 주신다. 내가 한참을 망설이던 조그만 삼거리. 그 곳에서 ‘왕모산성’쪽으로 좌회전했어야 했다. 직진한 게 탈이었다. 이곳은 원촌리가 아니라 토게리였다. 아이 이름도 묻지 못하고 돌아섰으나 “예”하고 약속까지 했으니, 언젠가는 다시 가 뵈야 할 어른이시다.
‘이육사 시비’ 조그만 판때기에 글자 다섯만이라도 새겨서 ‘왕모산성/청소년수련원’ 표지 옆에 세워 주었더라도 이 삼거리를 그냥 지나치진 않았을 텐데, 안동 관청들은 시인에게 너무 무심하다. 한국시사에 빛나는 대시인을 이렇게 대접하다니. 도산면 사무소 앞 갈림길에 서있는 ‘육사시비 5.3km, 육사묘소 7.3km’ 표석에서 이 조그만 갈림길까지는 결정적인 갈림길이 세 군데나 있는데, 도중에 아무런 표지도 볼 수 없었다. 퇴계 유적지를 안내하는 그 잦고 빛나는 표지판들을 떠올리니, 너무나 대조적이서 서운하다.
퇴계는 마땅히 받들어야할 어른이시다. 그러나, 육사 대접을 이처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일제에 항거하다 북경 감옥에서 승화하신 지사 시인. 다 저문 시간에 선생의 시비 앞에 서니 맥이 빠진다. 긴 묵념을 드리고 사진을 찍으려하나, 헤매는 사이에 캄캄해져 버렸다.
인적 드문 시골길. 사진을 찍을 만한 빛이 사라진 시간. 자동차를 당겨 세우고 헤드라이트를 켠다. 중국 지안(集安)으로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갔을 때, 떼무덤 앞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대절해온 릭샤의 헤드라이트를 돋구고 고분 사진 찍던 일을 되살렸다. 그러나 내 차의 불빛은 시비보다 낮다. 길 위에서 지켜보던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내려왔다. 이 정도 높이의 빛이라면 성공할 것 같다. 낯설고 어두운 길을 혼자 헤매던 마음이 비로소 훈훈해진다.
트럭을 끌고 내려와 불빛을 도와주신 분. 육사 시인의 조카뻘 되는 이영동(55)씨다. 밭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를 만난 것이다. 자동차 불빛으로 찍은 사진이 오죽하겠어요,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다시 찍어가세요 한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 불빛이 은은히 새어나오는 집이 한 채 있다. 이래서 선생의 생가터 옆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시인은 시를 쓰고 농군은 시를 산다. 나는 그의 노동으로 지은 밥을 따뜻하게 먹는다. 원촌리의 밤은 오손도손하다. 생면부지의 여자를 집안으로 안내하고 밥을 다시 지어낸 부인은 의성김씨란다. 내 맏동서와 같은 집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성씨로 연결해 보면 모두가 친척으로 걸린다. 특히 안동지방은 성씨마다 종택이 있고,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육사 선생은 바로 이런 땅에서 태어나셨다. 퇴계 선생의 14대손으로. 오늘 저녁 나는 뜻하지 않게 퇴계 선생의 15대손 집안에 손님으로 들어 그 분들의 저녁을 얻어먹고 그분들의 지붕 아래 누웠다. 몽당비가 걸린 방. 이 방의 주인이신 할머니는 친척 잔치에 가셨다 한다. 할머니가 비운 방에서 내 지친 몸이 쉬어간다.
새벽에 밖으로 나가니 별자리가 선명하다. 낙동강은 시인의 생가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안동댐 수몰로 인해 생가터를 조금 돋구어서 시비를 앉혔다고 한다. 진짜 집자리는 등나무 덩굴 정자가 세워진 곳이다. 시비는 집 자리에서 10여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그쪽으로 앉히는 편이 시야가 넓고 더 잘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동시에서는 선생의 유적지를 정비하기 위해 생가터 가까운 곳에 터를 정하고 측량까지 마쳤다 한다. 어제 그렇게 찾아 헤매던 곳에서 선생이 바라보시던 별을 바라보며, 선생이 기다리시던 손님을 상상해본다.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오면 //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선생이 바라보던 강. 선생이 어릴 때 멱감고 고기 잡으며 놀았을 낙동강은 이제 호수가 되었다. 선생이 바라보며 뛰놀던 들판은 대부분 새로 생긴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선생이 그토록 기다리던 손님은 흰 돛단배가 아니라 차를 타고 올 것이다. 내가 선생의 생가터 옆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것은 과연 우연일까.
안동댐은 높직하다. 안동호는 넓다. 그러나 자동차로 접근할 수 있는 호반은 한정되어 있다. 임하호는 다르다. 임하댐 정상은 좋은 쉼터로 꾸며 놓았다. 영덕쪽으로 차를 달리다보면 쉴만한 공간도 만들어 두었다. 길이 먼저 생기고 호수가 나중에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수곡교를 건너 가본다. 길안면쪽으로 빠져나가 묵계서원을 가보려고 한다. 그러나 내 계산은 또 빗나갔다. 수곡리에서 용계 은행나무 앞까지는 꽤 먼 길이란다. 수곡교 위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걱정을 하신다. 길이 나쁜데 갈 수 있겠느냐고. 박곡에서 만난 할아버지도 걱정하신다. 길이 나쁜데 운전은 잘 하시느냐고. 마을 사람들의 걱정을 에너지 삼아 찾아가는 길.
길은 과연 우둘투둘하고 굴곡과 오르내림이 심하다. 곳곳에 낙석주의 팻말이 섰다. 어느 비탈에선가 돌 한 덩이만 굴러내려도 내 계획은 무산될 것이다. 그러나 가기로 한 길이니 가보아야겠다. 오랜만에 만나는 산길이 오히려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므로.
아무도 없는 길. 저물가는 시간. 좁다란 골짜기 안까지 호수는 들어차 있다. 흙탕물에 반들거리는 저녁 해. 갈수록 나빠지는 길. 그래도 결정적인 갈림길에는 표지판이 서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용계 은행나무 앞에 서니 더욱 어두워졌다. 어둑한 하늘 속으로 잎을 다 떨어버린 거목이 팔을 벌리고 섰다. 우람하고 괴괴하다. 무섬증이 밀려온다. 의무가 떠밀지 않는다면 이 시간 이 나무 곁에서 무엇을 위해 서성이겠는가. 그러나 그 의무 덕분에 안동의 구석구석을 만끽하고 있다.
용계 은행나무. 나무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 안동인들은 뜻과 지혜를 모았다. 그리고 많은 투자를 했다. 임하댐이 담수를 시작하면서 물속에 잠길 위기에 처한 거목을, 선 자리에서 15m를 들어올려서 살려낸 것이다. 다른 곳으로 옮겼다면 죽었겠지만 제 흙 속에서 뿌리를 들어올렸으니 이처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저 강철 지주목들이 700년 된 노목을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주었다. 안동인들은 과연 대단하다. 뜻을 모으고 지혜를 모으고 자금을 투자하면 물속에 잠길 운명에 처한 나무도 삶을 계속할 수가 있다. 저 나무가 양평 용문의 천 살 먹은 은행나무처럼 천세만세하기를 빈다.
길안에 오니 밤이 되었다. 빗방울이 후둑인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묵계서원은 포기하고 안동시내로 들어간다. 퇴근시간의 안동시내는 자동차가 많고 복잡하다. 시내 안에 숙소를 잡고 먹거리 구경을 나서려했지만, 첩첩한 자동차 물결을 헤치면서 길 찾기란 수월치 않다.
몇 번 가보아서 익숙한 안동댐 옆으로 왔다. 여관 옆에 괜찮은 식당들이 모여 있어서 저녁 먹기도 편하다. 맛도 괜찮은 집들이다. 안동 간고등어로 저녁은 푸짐하였으나, 숙소 바로 옆에 기찻길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잠들만하면 털커덕거리며 지나가는 열차. 이 철로변 칠층전탑처럼 균열이 생기는 잠. 빗소리는 더욱 굵어지고 열차는 덜컥거렸지만, 다시 솟은 아침 해는 간밤의 불면과 걱정들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해는 떴으나 안개가 자욱하여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이 짙은 안개를 뚫고 호수를 구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럴 때는 시내를 어슬렁거리자. 안동민속박물관에서 천천히 돌며 안동사람들의 뿌리 깊은 전통과 생활풍속을 구경한다. 천천히 들여다보니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치마 저고리 빛깔과 동정과 끝동의 유무에 따라 남편과 자식이 있고 없고를 표시한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지는 일생이 안개에 밀려온 발목을 오래 붙잡는다.
우리 선조들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두고 매달려있는 사이에 다른 나라들은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조선시대의 전통은 일종의 굴레였다. 그것은 여자에게 더욱 가혹했다. 안동의 뿌리 깊은 전통도 여인네들의 희생으로 굳건히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동의 모든 곳에서 빛나는 것은 남자의 이름들뿐이다.
안동여인들이 대단한 것은 이러한 전통을 지켜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전통을 받들고 숭모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향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안동의 부강은 조선시대를 살다간 선조들의 전통이 밑받침이 되었겠지만, 더욱 현실적인 부강을 가져온 것은 그 전통의 굴레를 묵묵히 인내해내던 사람들이 그 때의 경험을 되살려 새로운 현실로 접목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이 잘 드러나는 예는 안동의 음식문화에서 엿볼 수 있다. 바다가 멀리 있는 고장에서 자신의 고장명 안동을 걸고 간고등어를 염질해서 팔고, 그것을 기초로 향토음식을 개발했으며, 제사 많은 고장의 맥을 살려 헛제삿밥을 개발하고,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소주를 증류한다.
안동사람들은 긍지와 고집으로, 사양산업에 접어든 한지의 맥을 끊지 않고 지키며, 옛날의 물건과 다르지 않는 안동포를 직조해낸다. 이 일들 중 대부분은 여인네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안동의 부흥에는 이처럼 여인네들의 인내와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안동은 먹거리가 풍부하다. 먹거리 여행을 따로 와도 좋을 만하다. 많은 돈을 들여서 화려한 식당을 기웃거릴 필요는 없다. 안동 구시장 먹자골목에 들러 보리밥을 먹으며 느낀 것이다. 구시장 먹자골목에서 보리밥을 먹는 사이 해는 중천에 오르고, 호수에 가득하던 안개가 걷혔다. 구름은 희고 빛난다. 흰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비친다. 이제는 어디로 가나 빛이 쏟아진다. 안동댐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영호루에 들렀다 다시 임하호로 왔다. 어제는 수곡교를 건너 남쪽 풍경을 보았으니 오늘은 영덕 경계까지 넘어가 볼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끝까지 가기 전에 예안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임동교를 건너면서 드물게 환한 호반을 훔쳐보았던 것이다. 저리로 가자. 저리로 가서 지친 길을 마무리지어야겠다. 마령리 앞까지 오니 내가 원하던 풍경이 있다. 빛은 쏟아지고 길은 구불거리지만, 호수는 되살아나서 빛나는 길을 만들었다.
임동교 교각이 징검다리처럼 보이고, 호수 안의 섬이 갈대꽃을 흔든다. 새로운 저녁 빛이 이 구석진 호수 안까지 가득 들어찬다. 밝은 빛을 너무 오래 향하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눈이 머는데, 나는 오늘 바로 이 호반에서 그렇게 장님이 되어 오래 서있다. 몸과 마음이 빛으로 가득해지는 순간-.
(글·사진 이향지 시인 www.poemg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