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태오 21,23-27)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approached him as he was teaching and said,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말씀의 초대
하 느님의 영을 입은 발라암은 광야에서 순례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의 예언을 한다. 곧 이스라엘에서 별 하나가 솟고 왕권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제1독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그곳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그 권한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당신의 말씀을 왜곡할 것임을 확인하시고 대답하지 않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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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당 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우리도 이따금 하느님께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실 뿐, 아무런 대답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침묵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말씀하시기 싫어서 그러하신 것이 아닙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자신들의 편견과 좁은 시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진정한 답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끊임없는 질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놀라우신 섭리를 우리가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순간이 오기까지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창 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 노예의 신분이 되었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불행 속에서 요셉은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질문을 던졌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신 채 침묵만 지키셨습니다. 요셉은 그러한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였고, 먼 훗날 모든 것이 그분의 섭리였음을 깨닫습니다. 그 렇습니다. 오랜 기간의 하느님의 침묵, 그것은 무관심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온전히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오늘 대답하지 않으신 채 그들의 마음을 열 때까지 참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정답인 예수님의 무응답(無應答)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수석사제들은 유다교를 대표하는 중요인사들이자 권위자들이었습니다. 한편 백성의 원로들은 유다인들 사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유다 사회 전반을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예수님은 정식 율법학교 졸업생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문하생도 아니었습니다. 교수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자격자인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공식적인 허락이나 승인도 없이 성전에서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따져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있어서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권한이었습니다. 합당한 절차와 자격, 제도와 법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교사자격증도 없는 주제에 ‘야매’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며 예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다시 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분이십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분이십니다. 스승 중의 스승, 참스승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 모든 피조물 전체, 인류 전체에 대한 권한을 당신 손에 쥐고 계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께 한없이 부족하고 철딱서니 없는 한 인간이 예수님의 자격유무에 대해서 따져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차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5살짜리 유치원 아이가 한 분야를 완전히 터득한 대석학, 박사학위 심사를 심사하는 석좌교수에게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을 않는 편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장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노림수가 분명할뿐더러 잔뜩 꼬이고 꼬인 그들의 질문이 조금도 진실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거부하십니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할 텐데 그들의 질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려면 질문 자체가 진실된 질문이어여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성의 있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질문, 영혼의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질문이어야 하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응답(無應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삐뚤어지지 않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이 보내신 마지막 대예언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성령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자격과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받고 세상 모든 인간의 권한 위해 서 계십니다.
오늘 새벽에는 이상하게도 졸리기만 하고 묵상이 잘되지 않습니다. 복음말씀을 몇 차례 읽어보고 주석서도 찾아보고 또 다시 눈을 감고 묵상을 해도 떠올려지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날을 일 년에 몇 차례씩 맞이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 중의 하나인가 봅니다. 답답한 마음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포트에 물을 담고 전원버튼을 눌렀습니다. 잠시 뒤 커피 물 끓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또 잠시 뒤 물이 다 끓었는지 전원이 저절로 꺼집니다. 전원 하나 눌렀을 뿐인데 내가 원하는 뜨거운 물이 나오고, 스스로 전원도 꺼지면서 저의 일을 줄여 줍니다.
생각해보면 전원 하나만 누를 뿐인데도 많은 일들을 하는 경우가 많지요. 컴퓨터도 전원 하나만 누르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방의 전등 역시 스위치 하나만 켜만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도록 환해집니다. 기타 등등 우리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 내 몸도 전원 하나만 누르면 원하는 글이 저절로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이룰 수 없는 상상을 해봅니다.
사실 우리들은 너무나 쉽고 편한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피하려고 하고, 자신의 의견과 다름을 발견하면 적대시하고 무시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내 삶 안에서 매 순간 이루어지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왔을 때에도 따졌던 사람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던졌던 질문에 대해 “모르겠소.”라면서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쉬운 길로만 가려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것뿐이었습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 생활하려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은 물론 결국 주님의 뜻을 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내 뜻대로 판단하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을 동반하는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에는 주님께서 보장하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들이 어렵고 힘들지만 이 길을 기쁘게 걸었고, 실제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선택하는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요? 편하고 쉬운 길은 순간의 기쁨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길을 걸으면서도 주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것들과 친해지면 행복도 피할 수 없게 된다(칼 야스퍼스).
인간의 나약함
-권태문 신부-
많은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함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하는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납니다. 구약 성서 학자 다이안 버컨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벨탑은 교만한 인간들이 신을 경멸하고, 자신이 신보다 더 위대함을 보여 주려고 그 탑을 쌓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밝고 안전한 미래를 바라는 삶의 본능적인 욕망이 자리한 것이다. 즉 육체의 병듦과 삶의 죽음에 두려움을 느낀 인간들이, 하늘에 다다름으로써, 병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종합하면, 인간의 교만에서가 아닌, 인간의 나약함에서 바벨탑이 출발했다.” 곧, 확실하고 안전한 미래,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백 퍼센트 안전 보증수표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약한 우리가 하루하루 숨을 쉬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이런 겸손한 자각를 통해, 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한 믿음을 통해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긴장으로부터 참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나약한 우리는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네가 뭔데 ?
-김종오 신부-
어린 시절, 열 살 즈음으로 기억되는 저는 순진하고 조용하며 그다지 임기응변에는 능하지 않은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동네 아이 중 한 명이 성당 입구 계단 모서리를 돌로 톡톡 치길래 저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그러지 마 !’ 하며 그 아이를 말렸습니다. 그때 치명적으로 날아온 그 아이의 반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게 다 네 거야 ? 네가 뭔데 무슨 권리로 이러는 거야 ?”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성당 안에 살면서 성당이라는 큰 울타리가 우리 집인 것처럼 여기던 저는 성당이 우리 것도 아니고 또 그리 부유하지도 않다는 슬픈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나는 그 아이 앞에서 자존심을 크게 상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지지 반응은 나중에 수도 생활을 하면서 권위를 이해하는데 큰 지혜의 보물창고가 되었습니다. “허허 … 종오야, 이 성당이 비록 우리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관리 봉사자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단다.” 교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직책은 내가 가진 소유물이 아닙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교회의 직책을 개인적 소유로 보았기에 두려움의 원천으로 변했습니다. 교회 내의 아무리 작은 직책이라도 개인 소유로 여기면 두려움이나 상처나 좌절 또는 실망의 대상이 되지만, 그 직책을 성령 안에서 수행하는 주님의 도구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봉사 직책으로 받아들이고 수행할 때 그 권위는 살아납니다. 교황 바오로6세와 자주 만나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를 일치와 화해로 전환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한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1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 권위는 지배 권력이지만, 성령 안에서 교회 권위는 자유의 원천이 됩니다.’
삶의 연혁
-강희재 신부-
신부님들이나 주교님들의 장례미사에 참례하다 보면 그분들의 생애 연혁이 소개된다. ‘보좌신부?·?주임신부?·?지구장?·?위원장?·?석사 박사 학위 취득?·?교수?·?지도신부’ 등 사제 생활40년 가까이 되신 신부님들의 연혁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그렇게 장례미사를 마치고 홀로 성당에 오면서‘훗날 나의 발자취는 어떻게 표현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발자취가 있게 마련이다. 내가 사제로서 평생 힘써온 일만이 아니라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었던 실수와 부족함, 내가 사제로 살면서 지었던 부끄러운 죄, 수없이 겪었던 실패와 성공, 자만과 게으름에 빠질 때마다 내 영혼에 고통을 심어준 보이지 않는 가시, 부당함에도 사제이기에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무상으로 받아 누려온 모든 것이 나의 발자취가 되리라.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신 크신 사랑에 오롯이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사제의 참된 발자취요, 그가 사제직 수행에 필요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사제한테나 교우들한테나 사랑이 없으면 그가 말하고 가르치는 언어와 예언과 지식과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 참된 힘이다. 그리스도인이 받은‘권위’?는 능력과 재물의 많음과 외적인 고급스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천상으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내려주신 크신 사랑에서 오고, 내 이웃과 형제들의 생명과 행복을 위하여 하느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봉사하는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 봉사의 발자취가 마지막 죽음 앞에서 사람들과 하느님께 영원히 남을 우리의 귀하고 숭고한 연혁이 될 것이다.
남편이 미장원에 다녀온 아내를 보고 버럭 화를 내며 말합니다.
“나하고 한마디 의논도 없이 단발머리를 하면 어떻게? 난 긴 생머리가 더 좋단 말이야.”
그러자 아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러는 당신은 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대머리가 된 거야? 난 긴 머리가 더 좋다고.”
누가 더 옳은 것일까요? 글쎄요. 상의하는 것도 좋겠지만, 무조건 자신에게 따라야 한다는 남편의 강압적인 태도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자기에게 무조건 맞춰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상대방에게 맞출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남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을 실천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의 입장에서만 판단하는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한 곳에서 함께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이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제거하려는 마음, 자기에게만 유리한 생각과 판단으로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행동들. 이러한 마음과 행동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도 또 함께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전 세계의 모든 성당에서는 성탄 구유를 꾸며 놓았을 것입니다. 우리 본당에서도 지난주에 청년들이 멋진 구유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구유 안에는 성모상, 요셉 성인상이 있습니다. 동방박사 성상 역시 구유 안에 위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밖에 갖은 장식으로 구유를 꾸며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빠진 느낌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빠졌습니다. 구유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성탄미사 때 안치하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예수님이 빠지니 다른 것들이 다 채워져 있어도 부족함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다면 어떤 생활을 해도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에 계실까요? 아기 예수님께서 차가운 바람이 휭휭 부는 이기적이고 미움 가득한 마음 안에 계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나눔과 사랑이 가득한 따뜻한 마음 안에 계십니다.
내 마음을 나눔과 사랑으로 따뜻하게 데워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오실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머무실 수 있으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대개는 전혀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데일 카네기)
아버지의 이름으로
-양승국 신부-
규모가 꽤 큰 단체가 파행을 거듭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파행의 가장 큰 원인은 구성원 간의 분열이었습니다. 주도권 획득을 위해 벌이는 두 세력 간의 다툼은 그야말로 이전투구泥田鬪狗였지요. 진흙탕 속에서 개 두 마리가 서로 물어뜯으며 뒹구는 모습과 어찌 그리 흡사하던지요.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그릇된 권한의 행사였습니다. 권한, 권위란 단어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어떤 것인가요? 너무나 오랜 세월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많은 고초를 겪어서인지 거부감, 부담감, 껄끄러움 등 부정적 느낌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러한 권위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좀 더 특별한 색채를 지니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행사되는 권위의 원천은 한 개인이나 집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통용되는 권위는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한 것이었지요. 가난한 우리에게 은총의 선물을 나눠주기 위한 권위의 행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은 오로지 ‘아버지의 권한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뭔가 권한이 주어지거나 역할과 책임이 주어진다면 그건 내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쓰라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용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선물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권한에 대하여
-김찬선신부-
권한에 매여도 자유로우며 권한에 자유로워도 방종하지 않은 것, 이것이 사랑이리라.
권한이 없어도 권위가 있고 권한을 가져도 교만치 않은 것, 이것이 사랑이리라.
사랑은 권한을 봉사로 가지며 사랑은 권위도 봉사로 가진다.
하여 권한이 권력이 되지 않고, 권위도 권력에 기대지 않으며, 높이 있어도 권력을 행사치 않고, 낮게 있어도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의 주님은 이러하셨다. 주님을 권력을 향하지 않았고 늘 백성들을 향하셨다.
게임을 즐기려면 룰을 먼저 알아라
-전삼용신부-
가끔은 저를 좋아하는 신자 분들이 생깁니다. 남자 분들도 있지만 여자 신자 분들이 신부라고 해서 더 좋아하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지 사랑하는 것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미움이나 무관심의 대상이기보다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깊어지다 보면 자칫 결혼해야 할 사람이 결혼은 하려하지 않고 사제만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또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남편보다 사제를 더 사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제는 모든 이의 아버지이고 또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모든 신자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사제는“모든” 이의 사제이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의 사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좋아하면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한 아이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아이를 다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사제도 편애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첫 번째로 사랑해야 할 남편보다 사제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사실은 그것도 사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들은 신자도 알고 사제도 아는 일이지만 성당 내에서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각자 살면서 지켜야 하는 룰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계신데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대학 강단에 서기 위해서는 학위가 필요하듯이 그들도 그런 권한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학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권한은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상의합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한다면 왜 요한의 말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한다면 백성들이 그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온갖 비난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듯이 당신이 가르치실 권한도 하늘에서 왔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모르겠소.”라고 대답하자 예수님도“그럼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룰을 지키고 있지 않고‘억지’를 부리고 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해 보아야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사람을 설득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단절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동네에서 축구를 할 때면 시간을 정해놓고 하지를 않습니다. 축구를 하다보면 어느 정도 승패가 갈리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은 상대를 이길 수 없는 점수 차가 나게 되면 한 아이가 반칙을 많이 하기 시작합니다. 공을 손으로 잡고 사람을 잡기도 하며 축구의 룰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면 축구는 럭비로 변합니다. 처음 몇 분은 그렇게 공을 들고 뛰는 것도 재밌지만5분도 안 되어서 경기는 그렇게 끝나고 맙니다. 왜냐하면 룰이 없는 것이 재밌게 느껴지는 것은 경기를 이길 수 없어서 처음에 반칙을 하기 시작한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규칙은 경기를 재밌게 하라고 있는 것이지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닌데 룰을 어기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여러 사람이 그 경기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반드시 규칙이 생깁니다. 물론 한 사람이라도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지켜야만 할 무엇이 있습니다. 오늘 수석 사제들은 자신들이 모순에 빠져있음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예수님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더 이상 상대를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지켜야하는 룰 안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고집만 부린다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자세를 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인간관계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면 어쩌면 내가 보이지 않는 규칙들을 깨고 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 관계에 있어서 꼭 지켜야 하는 것들을 예수님께서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룰입니다. 그 룰 안에서만 인간은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멋진 경기를 위해 먼저 룰을 숙지합시다. 멋진 삶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배웁시다.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양승국신부-
시내 한 본당에 대림특강을 갔었는데, 제대 앞에서 인사를 하면서 또 다른 하나의 대림초에 불이 밝혀져 있음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첫 번째 대림초에 불을 붙일 때가 바로 엊그제 같았었는데...벌써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이러다 보면 또 순식간에 성탄이겠지요. "금쪽"같이 소중한 이 대림시기를 특별한 준비나 계획도 없이, 긴장이나 설렘도 없이 그저"때우는" 제 모습이 무척이나 서글펐습니다.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자신을 남김없이 살라 주님 오심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이 새삼 우러러 보이는 하루였습니다.
시 한편을 읽었는데, 마치도 세례자 요한의 삶을 두고 지은 듯 합니다.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12월, 오세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수도자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은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또한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길을 밝히기 위해 하루하루 타 들어간 대림초와 같은 존재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누가 과연 메시아인가?",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긴 맞나?" 하면서 긴가민가하는 백성들 앞에 용감하게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공적으로 선포한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황량한 산 능선에 묵묵히 산정(山頂)에로의 방향과 거리를 가리키는 고마운 이정표와 같은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어느 부자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은 죄인에게 세 가지 벌을 제시하면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벌은 50냥의 은을 내는 것이었고, 두 번째 벌은 50대의 채찍을 맞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은 생마늘 다섯 근을 먹는 벌이었습니다. 부자 죄인은 돈을 내자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매를 맞자니 아플 것이 걱정이 되고 무서워서 매 맞는 것을 선택할 수도 없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마늘을 먹는 벌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벌을 선택하면 금전적인 손해도 없고 육체적인 고통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마늘을 먹는 벌을 받기로 결심하고 마늘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충분히 받을 만한 벌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뒤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부자 죄인은 마늘을 더 이상 못 먹겠다면서 50대의 매를 맞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매를 맞는 것도 쉬운 벌이 아니었습니다. 몇 대 맞고 나니 참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부자 죄인은 돈을 낼 생각을 하면 가슴이 쓰리도록 아프고 아까웠지만 하는 수 없이 50냥의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들은 자신의 희생을 가져오면서까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순간의 기쁨만 가져다줄 뿐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통한 순간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항의를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질문을 던지시지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 서냐?”
당시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메시아가 아니라고 직접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참 예언자로 인정하고 있었지요. 따라서 요한이 세례를 주는 그 권한이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면 요한을 죽음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불충한 자가 됩니다. 또 반대로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가짜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을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모두 사람이 예언자로 믿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행동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편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즉, “모르겠소.”라고.
세상의 일에서는 이렇게 편한 방법이 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투신이 있어야 하며, 굳은 믿음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굳이 당신의 신분을 밝힐 필요가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을 내 뜻 안에 맞추는 편한 신앙만을 지향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과정 안에서 행복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큰 재주를 가졌다면 근면은 그 재주를 더 낫게 해줄 것이며 보통의 능력밖에 없다면 근면은 부족함을 보충해 줄 것이다.(J.레이놀즈)
어둠 속의 별
-방교원 신부-
“그렇지만, 온갖 별들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별은요, 아가씨, 그건 뭐니뭐니 해도 역시 우리들의 별이죠. 저 ‘목동의 별’ 말입니다. 우리가 새벽에 양떼를 몰고나갈 때나 또는 저녁에 다시 몰고 돌아올 때, 한결같이 우리를 비추어주는 별이랍니다 … ”(알퐁스 도데의별> 중에서). 몇 년 전, 강원도 양양 깊은 산골에 있는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뒤로 있는 대청봉,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 가슴이 선선해지는 곳에서 살았던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것들과 더불어 제가 좋아했던 것은 가끔 새벽 두 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성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에 산 속 깊은 밤의 적막함과 바람소리, 쏟아질 듯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저마다의 큰 별이 하나씩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그 별을 따라 이곳까지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 별이 우리를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야곱의 별이며 우리 모두의 별인 아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아기 예수님의 별이 우리 마음속에서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이사9,1).
카리스마와 제도 -김찬선신부-
우리나라 최상위법인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위법인 보안법은 그 사상의 표현을 제한합니다.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영상 표현법은 영화에 등급을 매기고 표현을 제한합니다. 사상과 표현은 하늘이 모든 인간에게 준 권리이기에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판단이 될 때 집단은 그 자유를 제한합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판단의 권한이 어디에 있고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느냐가 항상 문제입니다. 이것은 종교, 신앙 행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 특히 악령을 치유하거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은사를 받은 사람과 교도권은 자주 충돌을 합니다. 그거나 교도권은 성령의 은사를 존중해야 하고 개인도 교도권의 판단을 존중해야 합니다. 좋은 예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당시 유다교의 충돌을 얘기하며 올바른 교도권 행사의 한 예를 소개합니다.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사도들의 말과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면 인간, 즉 교도권이 막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버려 두어도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로서는 할 수 없는 설교의 허락을 교황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교도권의 허락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교도권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복음을 선포하던 이단과는 다른 태도였습니다. 교황님으로부터 설교의 허락을 받았지만 그는 어느 교구를 가던지 그 교구장의 허락을 또 받았습니다. 하루는 어느 교구에 들어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 교구장께 설교의 허락을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교님은 당신이 설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며 프란치스코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라고 내치셨습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쪽 문으로 나가 저쪽 문으로 다시 돌아와 주교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왜 다시 돌아왔냐는 주교님의 물음에 프란치스코는 자식이 어떻게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있느냐고 여전히 주교님께 대한 애정과 존경을 보였습니다. 이를 보고 주교는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주었습니다. 교도권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보고 교도권은 그의 복음 선포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고 허락을 준 것입니다.
개인과 교도권, 카리스마와 제도. 이것은 끊임없는 갈등의 관계이며 서로 존중해야 할 영원한 상대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김영수-
우리는 모르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대략 무시해 버리거나 나보다 나은 분께 질문하거나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 볼 것이다. 또는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기도 한다. 아무튼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수석 사제와 원로들은 이미 예수님의 여러 기적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비판적인 질문을 한다. 한마디로“너 누군데 우리 앞에서 까불고 있어?” 하는 말투다. 그들이 정말 몰라서 물어보았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위치가 위협을 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유한한 생명체다. 어려서부터 살아온 문화와 지식에 의존하여 생각하고 행동한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의 자기주장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 더 강하고 고집스럽다. 특히 최근 인터넷의 발달로 네티즌들이 만들어 내는 여러 주장과 슬로건 등을 보면 가히 무서운 여론 몰이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의 생각과 인터넷 누리꾼들 사이에서 여론을 만들어 간다. 생각을 같이하고 목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이들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권익은 아랑곳하지 않는 주장을 서슴지 않으며 심지어 남을 공격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묻은 율법학자들을 지금의 악성 네티즌에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아주 완고한 사람, 곧 바리사이들에 비긴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척하는 교만도 문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발전을 주며 또한 그런 겸손함이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안 되는 일을 무조건 이루려는 무지 또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의 지혜가 무한함을 알 수 있다.
모르겠소
-장재봉신부-
독서가 전하는 발라암은 이방인이었지만
“당신이 축복하는 이는 복을 받고, 당신이 저주하는 이는 저주를 받는”
능력을 지닌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능력은
그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는 일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성경은 전해줍니다.
그가
돈에 마음이 멀어져서
모압 왕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미적대는 모습을 들으면 의아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압 왕의 제안은
“무엇이든 요구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민수22,17)라는
엄청난 보수가 걸린 일이었으니까요.
그의 머뭇거림을 본
하느님께서는 ‘나귀가 말을 하는’ 이적까지 행하셨음에도
세상의 유혹 앞에
흔들리는 발라암은 스스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타락을 자초하였습니다.
“돈벌이를 좋아하다가 그 범법 때문에 책망을” 받은 사람으로 기록되는
불명예를 얻고 말았으니까요(2베드2,14-16 참조).
타락이란 하느님께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이며
“마음은 탐욕에 젖어 있는”것임을 배웁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마음은
복음에 단호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예’라고 답하고
‘아니오’라고 말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모른척하고 외면하려합니다.
때문에
자신의 몸을 사리며 “모르겠소”라고
모호하게 처신하기를 꾀합니다.
이야말로 인간의 궁리로
하느님의 뜻을 흐지부지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기에
가당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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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의 답변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고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피하려는 잔꾀에 불과했기에
떳떳치 못하고
비굴하고
간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끼리
그리스도인끼리
모여 궁리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을 알리고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닐 때
아무 소용없는 추잡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날
주님 앞에서는
“모르겠소”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로마1,20)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얻은 지혜로
그분의 뜻에 ‘예’하고
세상에 ‘아니오’라 답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천지창조 이후 인류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는 언제일까요? 아마 망설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 시대를 뽑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때가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요.
우선 맛있는 식당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 먹는 것이라고는 나무에서 자라고 있는 열매뿐입니다. 그래서 혹시 매일 먹는 과일이 지겨워서 하느님이 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봅니다. 또한 그곳에는 옷 입는 재미도 없습니다. 모두가 벌거벗고 다녔다고 하지요. 때로는 옷을 바꿔 입으면서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는 우리들을 생각했을 때, 조금 그 생활이 지겹지는 않았을까요?
차를 비롯한 교통수단이 있어서 먼 곳으로 멋진 경관을 보러 구경 다닐 수도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 똑같은 곳만을 바라보면서 그 틀 안에서만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할까요? 더군다나 요즘과 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이 아닙니다. 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있어서 새로운 세상을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세상이 정말로 행복한 세상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희망하고 있는 세상은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도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상상 속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불편함이 많은 에덴동산인데, 왜 그 곳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 안에는 어떤 비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는 비교 없이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서로 나누면서 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들, 즉 돈이나 명예 같은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대신 이 세상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비교라는 것들이 사라진다면, 또한 있는 그대로를 서로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서로를 위해서 나눔을 실천한다면, 이런 곳이야 말로 우리들이 꿈꾸는 에덴동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원하는 에덴동산은 이 세상 안에서도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에 말한 덕목들은 나 역시 조금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두가 이러한 덕목들을 실천한다면,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이 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뜻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바로 우리들이 있는 세상을 에덴동산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모두가 예외 없이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세상을 잘 만들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나 백성의 원로들처럼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비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서로를 위하고 그래서 나눔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뜻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닐까요?
에덴동산의 건설이 바로 나의 실천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건설을 위해 우리 함께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비교하지 맙시다. 열등감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빠다킹 신부
무슨 권한으로 이런을 하는 것이오? -강영구 신부-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대에게
하늘에 빛나는 태양을 향해 “너는 무슨 권한으로 빛을 내느냐? 누가 너에게 빛날 권한을 주었느냐?” 밤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들을 보고 “너는 무슨 권한으로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느냐? 누가 너에게 반짝일 권한을 주었느냐?” 하늘에 나는 새에게 “너는 무슨 권한으로 하늘을 나느냐? 누가 너에게 자유롭게 날라 하였느냐?” 눈이 시리도록 빨간 열매를 맺은 피라칸타를 보고 “너는 무슨 권한으로 그토록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느냐? 누가 너에게 열매 맺으라 하였느냐?” 하고 묻는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이 없습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만물이 저 마다의 자리에서 제 노릇을 바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빛나지 않는다면, 달과 별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지 않는다면, 꽃들이 피지 않고, 새가 하늘을 날지 않는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소명(召命)은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 소명에 충실하는 세례자 요한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백성들은 아름다운 사람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성전에서는 가르치시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낫게 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늘이 내려주신 소명(召命)에 충실하는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보게 되고 생명의 길을 걸으며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감지합니다.
당신의 소명(召命)에 충실함으로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십시오.(一明)
인정받는다는 것 -박동진 신부-
권위와 권위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앞선 것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스스로 그것을 부리려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에 가서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마음에서 많은 신부님들이 성직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함께 강제노역을 떠났습니다.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어떤 때는 몇몇이서 몰래 화장실에서 기도와 미사를 드려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노동사제의 시작입니다.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도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게 된 몇몇 노동사제들은 노동 안에서 때로는 이념적으로 다르고 때로는 종교적으로 다른 이들과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한 노동사제가 다른 노동자를 구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들, 그리고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그의 관이 성당 문밖을 나가자 왼편과 오른편에 각기 자신들의 깃발들을 들고 서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깃발을 숙임으로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비록 신앙면에서는 함께하지 않았지만, 수용소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같은 노동자로서 아파하는 동료들 곁에서 늘 함께해 준 이를 진정한 형제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권위주의로 덧씌워진 이들이 ‘권위’와 ‘권한’에 대한 질문을 던지니, 예수님의 반문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임숙희-
◆오늘은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들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의 ‘권위’에 대해 질문한다. 마태오복음뿐 아니라 공관복음서 곳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모두 예수께 주어졌으며, 예수께서는 그 권위로 말하고 가르쳤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년을 외국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보다는 먼저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다. 힘 자라는 데까지 사람들을 도와주려 하고, 충실한 가톨릭 신자인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와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마치 ‘영원한 타인’처럼 견고한 성벽이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차츰 이 불편한 관계의 뿌리가 ‘나는 이미 알고 있지’를 덧붙이는 그녀의 습관적인 말투에 대해 내가 느끼는 거부감이 차츰 내면을 건드리지 않은 피상적인 대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험과 지식으로 인간사와 하느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길 때 그것을 넘어서는 하느님 신비의 영역은 모습을 감춘다. 나이 칠십이 되어도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뛰는 인간의 신비는 빛이 바래고, 인간 사이의 만남은 내 지식과 정보를 확인하기 위한 기회로 그치고 만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일했던 대제관과 원로들이 가진 지식은 그들이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을 막고 예수께서 지닌 권위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보게 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사람들은 삶을 바꾸는 힘이 있는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하였다. 진정한 권위는 ‘거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 내면의 성소에서 뻗어나와 몸을 비추는 햇살과 같다.(칼릴 지브란) 그런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있기만 해도,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아름다운 권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이런 아름다운 권위를 지닌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 불을 지피고, 우리도 모르게 인생이 조각되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종류의 권위를 지녔을 것이다. 그분의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 슬픔과 기쁨,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그분의 몸을 찬란하게 비추어 사람들이 더이상 거역할 수 없는 그런 권위로 충만한 분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양승국신부-
<작은 시냇물을 버리고 큰 바다를>
예수님께서 오랜 침묵을 깨고 구세사 전면에 등장하시자 사람들의 궁금증은 하루하루 증폭되어갔습니다.
저 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에게 줄서도 되는지? 그에게 투자해도 되는지? 귀찮게 굴고 성가신 말들을 서슴없이 해대니 빨리 손봐버려야 될 존재인지?
그런데 한 가지 눈여겨볼 일이 있습니다.
당대 천대받고 괄시 당하던 사람들, 공공연하게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 불행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예수님의 정체(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아)에 대해 한 점 의혹 없이 제대로 파악한 반면, 잘 나가던 사람들, 권력의 정점에 머물러있던 사람들은 전혀 감도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리들과 창녀들, 갖은 불치병 환자들, 정식교육이라곤 단 한 시간도 받지 못했던 ‘가방끈이 짧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너무도 명확히 알아차리고 있었고, 목숨 바쳐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계층구조 안에서 최고의 정점 가까이서 살았던 당대 최고학부 출신, 공부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엘리트 출신인 수석사제들,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백성의 원로들은 또한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들은 흔들리는 백성들, 갈팡질팡하는 백성들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고,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주어야 할 어른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의 희망이자 든든한 보루 역할을 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신앙과 정신자세는 그에 합당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인들, 백성의 지도자들이 지녀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위한 마음입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겸손의 덕입니다.
혼탁한 세상에서, 방향감각을 잡기 어려운 안개 속에서 방황하는 백성들 앞에 그들은 깨어있는 맑은 영혼을 지니고 백성들을 제대로 된 길로 안내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대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백성과 나라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고 계산적인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이나 자리에 연연하면서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결국 손해 보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원로로 존재한다는 것, 세월이 흐르고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도자로 산다는 것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연구를 거듭하고, 스스로를 쇄신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사심을 버리고 대의(大義)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작은 시냇물을 버리고 큰 바다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나와 내 가족의 부귀영화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의 사정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해야만 합니다.
확실하고 명료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신부-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가르치셨다. 그곳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어떠한 지위를 갖지 못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이 대단히 못마땅했으며, 백성을 선동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복음을 전하는가 하고 물었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느님이 보내신 백성들의 스승이나 예언자로 생각하여 권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질문한 것이다. 이어서 그들은 그 권한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는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받았는가 하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아서 행하는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권한을 받아서 행하는가에 대해 먼저 답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되물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묻는 바를 스스로 깨달아 알도록 하고자 하셨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백성으로부터 참된 예언자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가르쳤다(요한 1,29-37; 3,26-30).
예수님의 반문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딜레마(dilemma)에 빠졌다. 요한의 권위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일차적으로 그들이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점에 대해 질책을 받을 것이며,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의심한 것까지도 책망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에게서 왔다고 한다면 백성이 요한을 예언자로 알고 있기 때문에 백성이 자신들을 반대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모른다고 대답하며 발뺌을 했다.
종교지도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기보다 백성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세적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백성이 자신들을 반대하고, 혹시라도 소요를 일으킬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서지 않고 사람 앞에만 서 있었으며, 하느님을 믿고 두려워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더 의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않고 모른다고 발뺌함으로써 진리를 외면하였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고 모르는 척하며 넘어가는 모호한 자세는 참으로 위선적이며 악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고 말씀하셨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하는 불확실한 태도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취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 3,15-16)는 말씀처럼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을 하느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언제나 확실하고 명료한 태도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요.’라고 분명히 하는 신앙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느님만 바라보고 하느님 앞에 서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김상호 신부-
우리들은 오늘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슨 전능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가”라는 백성들 원로들의 질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하늘이 주었는가, 사람들이 주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의 대답을 복음서는 들려줍니다. “하늘이 주었다고 하면 왜 믿지 않는냐고 할 것이고 사람이 주었다고 하면 군중이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복음서는 이곳저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파라나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매우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4.32) 또 한번은 더러운 악령더러 명령하시니 악령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모두 깜짝 놀라 수군대며 말하였습니다. “이게 웬 말이냐, 이분이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떠나가는구나.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는 것을 알아 차렸는데 그 반대로 예수님을 시샘하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래서 어리석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전능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권위가 있는 말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나를 납득시키고 그래서 내가 동의하도록 만들며 감동을 자아냅니다. 권위가 있는 말에는 강제적인 윽박을 지르던지 나를 위협하던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 말씀에 따라 가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부끄럽게도 만들지만 대개는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들이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가 있는 말을 사람들은 듣고 싶어 합니다.
그 반대로 권위가 없는 말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강제와 무력과 압력과 고함과 처벌을 동원하여 억지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자발적으로는 권위가 없는 말을 따라 가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말을 우리는 잔소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잔소리를 사람들은 듣기 싫어합니다.
권위가 있는 말은 존경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마더 데레사의 말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에도 권위가 있습니다. 비록 조용히 그리고 나긋나긋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을 그 말씀에 빠져들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의 말에는 권위가 없습니다. 권력자들의 말에는 권위가 없습니다. 힘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무력이지 권위가 아닌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악령도 그 명령을 받들고 또 가파라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다고들 하는데 우리에게도 그러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또 삶의 힘이 되어 준다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도 분명히 권위 잇는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내 귀를 스쳐 지나는 잔소리로 들린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권위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복음의 원로들처럼 저 가르침은 하늘에서 온 것일까 땅에서 온 것일까 하며 어리석은 질문을 반복할 것입니다. 권위 있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귓전을 지나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늘 자리 잡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모르겠소! -이인옥-
종교지도자인 수석 사제들과 정치권력자들인 원로들의 입장에서 볼 때,
권위있는 신학 수업이라고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평신도가,
명망있고 권세있는 가문의 출신도 아닌 그가,
감히 백성들을 선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저자거리라면 모를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상살이라면 모를까?
하느님나라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쉽게 말해서 '왜? 누구 맘대로 여기서 이런 일을 하냐?'는 것이다.
평신도, 목수의 아들, 예수는 반문한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모르겠소.”그들의 대답이다.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하기 곤란해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르겠다고 한 그들의 대답은 진실이다.
요한의 권한에 관한 문제나
예수의 권한에 관한 문제나
대답을 듣고 증거를 찾고 납득을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외양을 보고서는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 수가 없다.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이 하는 일,
한마디로 그 사람의 삶에서 됨됨이가 드러난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
그분이 범상치 않은 분임을 알아보았던 사람들.
그분에게서 하느님性을 느꼈던 사람들.
그래서 그분이 자신의 그리스도임을 고백했던 사람들은
바로 그분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믿어서 그분의 사랑의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대의 지도자들은 너무나 아는 것이 많아서,
너무나 높은 자리에 있어서,
요한에게도 예수에게도 한번도 마음을 열어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실제로 '몰랐다'.
그렇다. 우리도 그들처럼 우리 가운데 있는 아주 평범한 그분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그분을.
매양 놓쳐버리고 지나쳐 버리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높은 자리에
너무 고상한 자리에서만 그분을 찾고 있기 때문에
낮은 곳에 계시는 그분이 眼中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분을 찾기에는 너무 들은 것이 많아서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정작 그분을 만나서는 "모르겠소"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네가 뭔데, 내 마누라에게 큰 소리냐?
-이찬홍 신부-
엄마하고 딸이 심하게 말다툼 하고 있었습니다.
말다툼은 생각 외로 오래됐고, 딸이 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엄마에게 심하게 반항을 하자, 참다못한 아빠가 와서 딸에게 한마디 합니다.
‘야, 임마! 네가 뭔데, 나도 사랑스러워 함부로 대하지 않는 내 마누라에게 큰소리치면서 그렇게 대드냐?’ 라고 말하자, 아빠 말을 들은 딸이 엄마에게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엄마에게 심하게 반항하거나,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듣고는, 어릴 적에 부모님의 모습을 연상되며, ‘제주도에도 이런 아빠가 있었구나.’... 생각하며 놀랐습니다.^^)
복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께서 3년 이라는 공생활동안 하신일을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런후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다니시며, 병자를 고쳐주고,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겉 모습을 보고 대하는 분이 아니라, 그 속마음을 보고 측은해 하시는 분이기에, 배고픈 군중들을...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처럼 대해 주시며, 빵의 기적을 베풀어 배불려 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활동이 거의 대부분의 삶이요, 가끔 헤로데를 ‘여우같다’고 꾸짖고, ‘바리사이파들과 율법학자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며, 그들의 위선과 잘못을 질책하셨습니다.
곧,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비난당할 만한 일은 거의 하지 않고 대부분이, 아니 거의 모든 삶이 남을 도와주며 봉사하고, 위로하며 함께 울어주고, 측은해 하며 그 마음을 들어내셨습니다.
때문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질문을 뒤집어 본다면, 이는 이런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당신이 뭔데, 무슨 권한으로, 병자를 고쳐주며 위로해주고, 사람들을 측은히여기며 기적을 행사하고, 죄를 사해주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요?’
이러한 질문은 예수님의 말과 삶이 큰 잘못이기 보다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백성을 선동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자신들의 그릇된 모습이, 삶이, 죄악하나하나가 다 환하게 드러나게 되자, 이를 감추기 위해, 더 이상 부끄러움과 죄를 보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하며 반대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실상,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곧 사람들을 위로하고, 병자를 고쳐주며 죄를 사해주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기적을 체험하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분명 하느님께 받은 권한이 있었음에도, 이를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 권한을 더욱더 드려내야 함에도 그러지 않고, 자신들의 잇속과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과 행동으로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시기에, 부끄러움에 그리고 그 치부를 숨기기 위해 예수님을 반대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떠한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권한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상사로서의 권한과 사회에서 어른으로서의 권한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레지오 단장으로서의 권한, 사목회 임원으로서의 권한, 구역장으로서의 권한,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로서의 권한이 있습니다.
그 권한은 우리가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입니다.
이에 단순하게 자신이 지니고 있으라고 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이 명예욕과 권력을, 잇속만을 채우기 위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돌보아주고, 치유해 주기 위해 받은 권한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전해주며,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받은 권한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권한을 잘 사용했으면 합니다.
비록, 잘 사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잘못을... 직무유기를 보여 주기 위해 자신들의 권한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뭔데?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말하는 수석 사제나 백성의 원로들처럼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이미 행동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마음과 생각으로라도 예수님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했으면 합니다. 아멘
불신자에게 유보된 예수의 정체 -박상대신부-
대림시기에 봉독되는 복음의 주요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병자와 소경을 치유하고, 죄인의 죄를 사하며, 억눌린 백성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요구하는 내용으로서 그 태도는 믿음과 불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선택할 경우 하느님나라의 보장을 받는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는 내용이다. 둘 다 구약성서에 계시된 자들로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위한 특사요 선구자로, 예수는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이요 메시아로 예언되었다. 이들 주요내용을 잘 이해하는 방법으로 그 날의 독서로 대부분 봉독되는 이사야예언서와의 연결을 도모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제 대림 제3주간의 복음(12월 16일까지)은 모두가 세례자 요한과 관련된 것이다.
복음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키고 그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광야와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베풀게 한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복음은 선구자의 중요한 역할을 부각시키면서 그 이상으로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우선 메시아를 준비하는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을 보도하고, 그 다음에 메시아의 역사적 도래, 그리고 메시아의 활동을 단순히 시간상의 순서로 열거하려는 목적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향력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의 ‘이미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인자(人子)의 ‘다시 오심’에로 연장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해 보자. 역사적 사건의 측면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메시아 예수의 공생활로 말미암은 신약의 시작으로 끝나며,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 즉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로 끝난다. 그러나 구세사적 측면에서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두 분의 역할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경륜 속에 하느님 스스로가 세례자 요한과 아들 예수에게 부여한 사명과 권한 때문이다. 이 사명과 권한이 두 분의 역할과 활동을 인간구원과 관련하여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권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예수와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정확한 시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이틀째 되는 날이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사흘째 되는 날로 편집되었다.(마르 11,1-33) 논쟁의 원인이 되는 ‘이런 일’이란 예수께서 입성 직후 행하신 성전정화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하신 예수님의 전체 행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의 권한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권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시고, 그들이 알아듣기 훨씬 쉬운 방법을 택하신다.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반문(反問)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믿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사제들은 세례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문이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트려 ‘모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지만, 사실상 그들은 속으로 세례자 요한을 불신함으로써 예수까지도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사실상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하여 백성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함은 물론,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권한으로 지금까지 놀라운 행적을 해왔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렇듯 불신자에게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은 유보된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말씀을 들으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이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뢰이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건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기란 힘들다. 우리 중에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자적 역할과 활동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는 회개와 쇄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마태 21,23-27)
--유 광수신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하고 물었다.
오늘 복음에서 "권한"이라는 말이 여러 번 사용되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셨을 때에 일반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라는 분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하고 물었을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권한을 가지고 가르치신다. 권한이란 무엇인가? 인간적으로도 어떤 권한을 가지고 가르치고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다. 아무 힘이 없는 동네 사람들이 하는 일과 가르치는 것과 학교 선생님이 하는 일과 가르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장관이 하는 일과 대통령이 하는 일과 가르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간이 하는 일과 가르치는 것과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가르치시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어떤 권한으로 가르치시고 일을 하시는 것일까?
권한을 그리스어로 엑소우시아(exousia) 라고 한다. 엑소우시아란 이 말은 하느님께 사용하는 단어로서 하느님의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힘이 들어가 있다면 어떤 힘이 들어가 있는가? 하느님은 창조의 능력이 있고, 치유의 능력, 깨달음의 능력,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능력에는 평화를 주는 능력이 있고, 기쁨을 주는 능력이 있다. 회개의 능력이 있고, 용서의 능력이 있고, 사랑의 능력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능력이 들어가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되고, 용서하게 되고, 사랑하고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가르치시는 것에는 모두 하느님의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워진다. "빛아 생겨라"하면 빛이 생기고 "눈을 뜨라" 하면 눈을 뜬다. 죽었던 이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면 일어나 걸어간다. 왜 그런가? 하느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거센 돌풍이 일고 있는 바다를 향해 "잠잠하고 조용히 하여라"고 하면 잠잠해지고, 더러운 영이 들린 이에게 "더러운 영아 나가거라" 하면 더러운 영이 나간다. 그리고 "너희 죄를 용서한다."하면 죄가 사해진다. 하느님의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고 놀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눈 먼 이를 보고 "눈을 떠라"하고 말을 하면 눈을 뜨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말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능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듯이 오늘 이루시는 분이시다. 무엇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말씀으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으면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내게 이루워 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하자. 그러면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당신 자신의 안일함과 행복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권한은 군림하는 권한이 아니라 봉사하는 권한이다. 봉사하기 위해 하느님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에수님은 하느님의 능력을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인간을 치유시키시는데, 인간을 구원하는데 사용하셨다.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봉사받으려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인간에게 봉사하셨고 봉사 하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셨다. 왜 그러셨는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힘은 모두 선을 위해 사용하셨지 악을 위해 사용하신 적이 없다. 비록 당신 생명의 위험을 당시면서도 심지어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한번도 당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고 오직 봉사하시는데 사용하셨다.
권한이 하느님께 속한 것이듯이 하느님께 속한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칠 때 우리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능력은 발휘된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제가 죄를 사해주면 죄가 사해지고, 사제가 제병을 축복하면 예수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를 축성하면 예수님의 피가 된다.
예수님의 이 능력이 없다면 교회는 벌써 무너졌을 것이다. 2 천 년 동안 교회가 지탱되어왔고, 오늘도 전 세계적으로 구원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하느님께 속한 이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이 그리고 가르침 속에 하느님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의 권한을 믿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지만 "모르겠소."라고 거부하는 이에게는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어떤 일들이 이루워 지는가? 보지 못했던 하느님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하고 듣지 못했던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되고 무기력해졌던 내 영혼에 생기가 돋아 주님께 기쁨과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리게 되고 온 세상이 다시 부활한 것과 같이 새 하늘 새 땅으로 보이고 느끼기 시작한다.
어떤 이들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성모님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이에게 일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하느님의 능력으로 가르치시고 일을 하시더라도 믿지 않고 "모르겠습니다."라고 불성실하고 책임회피나 하는 비겁한 이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러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봉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군림하고 강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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