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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남계집(南溪集), 박세채(朴世采).
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卷第七十二《禮曹參判 贈領議政申公神道碑銘》
원문, 번역문.
2) 동강유집(東江遺集) 제18권 부록二, 신익전.
묘표〔墓表〕,이민서(李敏敍).
번역문, 원문.
3)동강유집(東江遺集) 제18권 부록二, 신익전.
묘지명(墓誌銘), 김만기(金萬基).
《有明朝鮮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墓誌銘 幷序》
번역문, 원문.
4)동강유집(東江遺集), 신익전.
신도비명(神道碑銘), 박세채(朴世采).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神道碑銘 幷序》
번역문, 원문.
---- 이상《한국고전번역원 》에서 옮김.
5)신익전 신도비명(神道碑銘), 박세채(朴世采).
번역문, 원문.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에서 옮김.
6)신익전 신도비명(神道碑銘), 박세채(朴世采).
원문.
--- 《충주의 금석문, 2006년》에서 옮김.
◇내용요약
신익전(申翊全, (1605년(선조 38)~ 1660(현종 1))은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여만(汝萬)이요, 호는 동강(東江)이다. 영의정을 지낸 흠(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절도사 제신(濟臣)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8년(인조 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이 되고, 이어 검열·정언·지평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한 뒤 사인(舍人)·부응교(副應敎)·사간(司諫)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1639년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효종 때 호조·예조·병조의 참판 등을 지내면서 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로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뒤에 한성부 우윤(右尹)과 좌윤(左尹)을 역임하고,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공의 관직생활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으로 미묘한 처지에 놓여 한때 위태로운 경우도 있었으나, 충신(忠信)을 생활신조로 삼아 큰 위난을 당하지 않고 자수(自守)할 수 있었다.
역학(易學)을 애독(愛讀)하여 깊이 능통하였고, 필법(筆法)과 문장에 뛰어났다. 저서에 《동강유집(東江遺集)》 19권 3책, 《밀양지(密陽志)》가 있다.
비문은 생질(甥姪)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박세채(朴世采)가 찬(撰)하였다.
---《충주의 금석문, 2006년》에서 옮김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옮김.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에서 옮김.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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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집(南溪集)
박세채(朴世采, 1631년(인조 9) ~ 1695년(숙종 21)
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卷第七十二
神道碑銘
《禮曹參判 贈領議政申公神道碑銘》 五月三日
원문
內兄大宗伯申公晸以書來曰。先人顯刻無可屬筆者。惟子少嘗逮事。能知其志業。幸有述也。世采以不嫺古文辭。旣而宗伯公出守江都。與弟黃海觀察使曄並辭曰。石具矣。剞劂氏將奏功矣。願毋再辭。世采遂不敢辭。公諱翊全。字汝萬。東江其號也。鼻祖太師崇謙。佐麗祖功伐最大。又殉節以卒。諡壯節。始賜籍爲平山人。逮我 朝有諱曉。爲右正言。言事不合。退居以終。自號西湖散人。是公六世祖也。曾祖諱瑛。右參贊 贈左贊成。祖諱承緖。都事 贈領議政。考諱欽。領議政。際遇 宣 仁兩聖。文章德業。卓然名世。諡文貞。配享 仁祖廟庭。妣全義李氏。太師棹之後。北兵使諱濟臣之女。公以萬曆乙巳八月三日生。幼已醇愨。受學不怠。甫十歲。侍文貞公遯荒。沙溪金先生長生爲來訪。公應對周旋如成人。金先生亟加奬厲。自是必整衣。危坐誦讀以爲常。及觀太極圖副圈曰。此陰中陽陽中陰也。文貞公深奇之。旣博習群書。詞業大進。値光海滋昏。自屛不售。天啓癸亥。罹李夫人憂。 仁祖中興。文貞公始由冢宰進位。崇禎建元捐館舍。喪除。公愈自謹飭。間與章甫上書論 章陵追崇非禮。丙子 朝廷銳意修攘。 命六條選士。李公德泂疏公學行。金文正公尙憲方在銓注擬。 上因前事督責。文正公對以才識可惜。旋擢別試丙科。先是丙寅公登第。因擧子有違式者。臺議嘩甚。並罷一榜。至是再登焉。會虜東創踰年。乃唱名補承文院正字。薦爲藝文館檢閱。序陞至奉敎。調成均館典籍,司諫院正言,兵曹佐郞。時宮閽不嚴。公輒申明舊令。必繩以法。闕庭肅然。遷司憲府持平。金文正公自南漢退歸。被群小媒孼。秉東銓者實尸之。繼引憸巧士。恣意黜陟。公首請其罪。 上嘉納。選入弘文館。拜副修撰。迭遷至校理兼知製 敎。歷直講獻納。未幾贊价赴瀋陽。大搜私橐。有一舌官犯禁。恐被重究。謀投鄭虜命壽以狐鼠焉。公竟捕治之。還歷侍講院文學。左遷居山察訪。明年北使來。謂公曁伯氏東陽公志扶 中朝。並以數三宰臣去。禍將叵測。初東陽公當亂樹義甚偉。及後豎碑三田渡上。力辭書篆。公又與上价崔公鳴吉過祭箕子廟。大有忌諱語。會李烓爲虜囚反噬。以及素不相悅者。公亦嘗言烓奸故也。比至瀋窘辱百端。公夷然終不動。賴 東宮救解。還入玉堂。轉議政府舍人。復歷副應敎,司諫兼弼善。 昭顯世子卒。與同僚上疏請行朞制。差墓所都廳。事竣陞通政階。出爲光州牧使。公喜曰此庶可自效。悉括隱丁充諸軍闕額。勅境內期輸糶糴。幾累萬斛。無敢後者。其有死徙絶戶。輒以耗穀償己。修黌舍。會諸生勸課。一州大治。比歸立石頌德。入拜承政院同副承旨。歷刑禮兵三曹參議。遷左副承旨。 仁祖陟方。掌治喪禮。俄書 諡冊。進嘉善。因累躋至都承旨。遷戶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差副使。護義順公主行赴燕。還拜禮曹參判。遷兵曹兼同知春秋館。與修 仁祖實錄。拜漢城府右尹。適主家奴犯罪逃匿。公發卒捕之。有引形跡爲言者。公奮曰我爲法官。知守三尺耳。奚論其他。竟論徙邊。出爲開城府留守。府當西路。綰轂客使。所需巨萬。例責市民。久而號怨。公至立除之。奏給銅鐵萬餘斤。俾得懋遷取息。公私並裕。時 朝廷行錢法中廢。盡歸于府價。賤民將失業。公下令諸賦納官者。皆代以錢。民大悅。旣均定大同徵米。見其多麗私費曰。此非爲民設者耶。官司唯當食俸祿。仍命自後一切毋犯。數月庫藏告溢。府俗好訟。爲治者或病稽滯。至公視事。屢斷大訟。輒發其情僞。負者亦自無冤。民爲之語曰。終公任不可以非理干。將遞府人相率至朝堂。願納千金借留不得。乃立石追思。會大獄甫完。公有不能自安者。求外得密陽府使。更務淸靜爲治。日必手引諸生訓迪。訪邑中忠臣孝子烈女。新旌楔以奬之。俄以方伯親嫌遞。復拜開城留守。民爭加額以迎。治化益著。未幾因事歸。蓋自密陽還朝。及是徧復舊踐。爲戶禮兵刑參判左右尹都承旨。或至再三。間兼同知義禁。以書 孝宗哀冊進嘉義。明年庚子二月。偶感疾而卒。實二十有七日也。 上命致弔祭賻如儀。公德性渾厚。存心簡正。平居儼然自持。識慮明潔。言遜而行恪。至或歷變履險。事有不齊。一以謙恭謹確爲主。未嘗少變也。少篤孝順。事文貞公婉愉服勤。靡不克致。文貞公稱爲孝兒。居憂率禮。遇諱辰攀號如初。以及伯氏。愛敬交至。鎭日往省。小大必稟而後行。其在 孝宗大恤。哀痛甚。持制幾視親喪。每値 玉候違豫。起居唯謹。當官裁事。務自淬厲。不畏強禦。賢邪之會。趣舍益明。當太學生疏留愼齋金先生集。或有異議者。公曰先君嘗謂士剛君子人。此豈不足請留耶。遣子往參。在光州。相自點爲孫駙馬求昏需。公只貽以梳具。聞者難之。晩愛薛敬軒讀書錄。以爲有益身心。因究覽性理家書。如近思錄心經。常潛心玩繹。尤喜讀易。公退必莊誦不置。嘗曰世間實事。惟爲己之學。餘皆幻境也。其篤信類此。爲文意本於家庭。用力甚勤。古今諸大家。鮮不染指。要其所成就。典雅簡重。如拱璧然。澤堂李公植,樂靜趙公錫胤特相稱賞。恨不處以文苑。兼工書法。一時金石多歸之。最公志尙恬靜。不事進取。及連姻宮掖。益加斂縮。雖寄迹朝端。澹然若處林野逃空虛。見微守約。一以墳典從事。凡世之顯晦臧否。無足以嬰其懷。繇此始當壬午之役。遽中奸螫。不免拘幽於異域矣。至于辛卯大獄。勢嫌地逼。動成危疑。而終不得爲公累。論者謂是時能以忠信自保者。公可與李忠翼公時白並美。若較其難易。又有所分。則斯豈非公平生謙恭謹確之驗歟。嗚呼盛哉。公以諸子貴。累 贈領議政。初葬永平。中移楊州。後以戊申八月。卜葬于忠州西中房里向卯之原。夫人楊州趙氏。惠穆公昌遠之女。今 太母慈懿殿之姊也。端莊明達。事公無違德。一家咸取式焉。生五男。長卽宗伯公。曾任冢宰。以公遺訓力辭。爲薦紳艶誦。次暹別檢。質美行馴。尤號善事公。不幸早歿。惜哉。次昹。次卽觀察公。次昂夭。三女長適大司諫李嵇。次 王子崇善君澂。次尹之贇。孫男徵華,瑞華縣監,啓華承旨,鎭華,尙華,錫華,崇華,從華,遇華。女適參奉李碩亨,進士李翊夏,洪重益爲留守出。志華,處華,夢華爲別檢出。處華出爲昹後。采華,世華,女適洪重聖爲觀察出。喜濡爲大諫出。東平君杭,女適尹世鼎,尹廷虎,安壽鼎,趙鳴鳳爲崇善出。曾孫縣監二男二女。承旨二男二女。鎭華一男一女並幼。銘曰。
烈彼壯節。啓籍東陽。綿綿赫赫。文武迭昌。孰爲其宗。曰我文貞。公惟嗣興。爰洎元兄。孝順謙謹。忠義英傑。譬如老泉。二名是錫。繄公登 朝。大難未瘳。直道始彰。旋絀北郵。蜮弩倏發。鉅禍乃嬰。銀鐺徽纆。視猶夷庚。亦旣嘗世。遂懷左跡。南徼遺惠。西都底績。險塗難盡。大獄又熾。公在中間。夔夔恭畏。惟忠與信。寔爲本原。抑嘗好學。質有其文。神明所祐。百祿騈起。是以克終。奚啻免矣。中房之原。有石穹崇。我銘于顯。俾闡仁風。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4~1995
번역문
《예조참판 증 영의정 신공 신도비명 (병서)》
외종형(內兄)이신 대종백(大宗伯: 예조판서) 신정(申晸) 공께서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선친의 신도비에 글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소. 오직 그대만이 어릴 적부터 선친을 모셨으니 능히 그 뜻과 업적을 알 것이니, 부디 글을 작성해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세채(世採)는 고문사(古文辭)에 숙달하지 못하였다 하여 사양하였습니다. 얼마 뒤 종백공께서 강화유수(江都守)로 나아가시면서, 동생인 황해감사 신협(申曄) 공과 함께 또다시 청하며 이르기를, "돌은 이미 마련되었고 석수(石手)가 작업을 시작하려 하니, 부디 다시 사양하지 마시오."라고 하였으므로, 세채는 마침내 감히 더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공의 휘(諱)는 익전(翊全), 자는 여만(汝萬)이며, 동강(東江)은 그의 호입니다. 비조(鼻祖)인 태사 신숭겸(申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운 공로가 가장 컸고, 또 죽음으로 절개를 지켜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으며, 비로소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사받았습니다.
우리 조선에 이르러 휘 효(曉)라는 분이 계셨는데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가 언론이 뜻에 맞지 않아 물러나 일생을 마쳤으며, 스스로 호를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하였으니, 이분이 공의 6대조입니다.
증조의 휘는 영(瑛)으로 우참찬이며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승서(承緖)로 도사이며 영의정에 증직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휘가 침(欽)으로 영의정이었으며,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성군을 만나 문장과 덕업이 세상에 우뚝하게 뛰어났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인조의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 李氏)로 태사 이도(李棹)의 후손이며 북병사(北兵使) 휘 제신(濟臣)의 딸입니다.
공은 만력(萬曆) 을사년(1605년, 선조 38) 8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미 도의가 두텁고 진실하였으며, 학문을 배움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겨우 열 살 때 문정공(아버지 신흠)을 모시고 시골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찾아왔습니다. 공이 응대하고 주선하는 모습이 어른과 같았으므로 김 선생이 크게 칭찬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반드시 옷을 정제하고 바르게 앉아 글을 읽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습니다.
후에 《태극도부권(太極圖副圈)》을 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음 가운데 양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문정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이미 여러 서적을 널리 익혀 문장과 학업이 크게 진보하였습니다. 광해군 때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스스로 숨어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년, 인조 1)에 이씨 부인의 상(喪)을 당하였습니다. 인조 반정(仁祖中興) 후 문정공이 비로소 이조판서(冢宰)를 거쳐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崇禎(숭정) 건원년(1628년)에 문정공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은 삼년상을 마친 후 더욱 스스로 삼가고 단속하였습니다. 간혹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장릉(章陵: 인조의 생부 원종)을 추숭하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논하였습니다.
병자년(1636년) 조정에서 외침을 막고 내정을 정비하려 결의하여 육조(六條)에 명령하여 인재를 뽑게 하였는데, 이덕형(李德泂) 공이 공의 학행을 상소하여 추천하였습니다. 당시 김상헌(金尙憲) 공이 이조의 전주(銓注)를 맡고 있었는데, 임금이 전일의 일(장릉 추숭 반대)로 인해 독책하자, 김상헌 공이 "재주와 식견이 아깝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곧 별시 병과로 발탁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병인년(1626년)에 공이 과거에 합격했으나, 과거 응시자 중에 정해진 양식을 위반한 자가 있어 대간의 논의가 매우 시끄러워 일방(一榜: 해당 시험 합격자 전체)을 모두 취소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합격한 것입니다. 마침 청나라의 침략을 받아 한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방을 붙이고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으며, 추천을 받아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가 순서대로 승진하여 봉교에 이르렀고,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으로 옮겼습니다.
당시 궁궐의 문단속이 엄격하지 못하자 공은 문득 옛 법령을 밝히고 반드시 법으로써 다스리니, 궁궐 안뜰이 숙연해졌습니다.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습니다. 김상헌 공이 남한산성에서 물러나 돌아온 뒤 여러 소인배들에게 모함을 받았는데, 동전(東銓: 이조)을 잡은 자가 실상 주도하였으며, 이어 간사하고 교활한 선비를 끌어들여 제멋대로 출척(黜陟)을 일삼았습니다. 공이 먼저 그 죄를 청하니 임금이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에 임명되었고, 교리로 옮겨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직강과 헌납을 거쳤습니다.
얼마 후 사신을 따라 심양(瀋陽)에 갔는데, 사사로운 짐을 크게 수색하였습니다. 어떤 통역관(舌官) 한 사람이 금령을 위반하여 중형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정명수(鄭命壽)라는 청나라 간첩에게 투항하여 흉계를 꾸몄으나, 공이 끝내 그를 잡아 다스렸습니다. 돌아와 시강원 문학을 거쳐 거산찰방(居山察訪)으로 좌천되었습니다.
이듬해 북쪽 사신(청나라 사신)이 와서 공과 형님인 동양공(東陽公: 신익성)이 중원(명나라)을 지지한다고 하여, 두세 명의 재상과 함께 끌고 가니 그 화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 동양공은 난리를 당하여 의리를 세운 것이 매우 위대하였고, 후일 삼전도 위에 비석을 세울 때 전서(篆書)로 글씨 쓰는 것을 강력히 사양하였습니다. 공 또한 상사(上使) 최명길(崔鳴吉) 공과 함께 기자묘(箕子廟)에 하차하여 인사를 올릴 때 크게 꺼릴 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마침 이개(李烓)가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도리어 모함하였는데, 평소 서로 사이가 좋지 않던 사람들에게까지 미쳤으니, 공 역시 일찍이 이개가 간사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양에 이르러 온갖 구박과 욕설을 당하였으나 공은 태연히 끝내 흔들리지 않았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구원 덕분에 돌아와 다시 옥당(홍문관)에 들어갔고, 의정부 사인으로 옮겼다가 부응교, 사간 겸 필선을 역임하였습니다.
소현세자가 서거하자 동료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기년제(朞制: 1년상)를 행할 것을 청하였고, 묘소도청(墓所都廳)에 차출되었다가 일이 끝나자 통정대부(通政大階)로 승진하였습니다. 나아가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니 공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것으로 거의 스스로 힘쓸 수 있겠구나" 하였습니다. 은닉된 정남(丁男)을 모두 파악하여 여러 군대의 부족한 인원을 채웠고, 관내에 기한을 정해 환곡을 바치게 하니 거의 수만 석에 이르렀으며 감히 뒤처지는 자가 없었습니다. 죽거나 이사하여 집안이 끊어진 자가 있으면 문득 모곡(耗穀)으로써 자신을 대신하여 메꿨습니다. 학사를 수리하고 제생들을 모아 학업을 권장하니 온 주(州)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돌아갈 때 비석을 세워 덕을 송축하였습니다.
들어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형조·예조·병조 삼조의 참의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겼습니다. 인조가 승하하시자 상례(喪禮)를 관장하여 다스렸고, 얼마 안 되어 시호책(諡冊)을 써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도승지에 이르렀고,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옮겼습니다. 부사(副使)로 차출되어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행차를 호위하여 연경에 다녀와 예조참판에 임명되었고, 병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로 옮겨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습니다.
마침 종친가의 노비가 죄를 지어 도망쳐 숨었는데, 공이 군사를 발동하여 잡았습니다. 형적(形跡)을 들어 말하는 자가 있자 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나는 법관으로서 삼척의 법을 지킬 뿐이다. 어찌 다른 것을 논하겠는가?" 하고 끝내 변방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나아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습니다. 개성부는 서쪽 길목에 위치하여 사신을 맞이하느라 필요한 비용이 거만(巨萬)이나 되어 예전부터 시전 상인들에게 부과하니 오랫동안 울부짖었습니다. 공이 이르러 즉시 이를 없애고, 동철(銅鐵) 만 여 근을 상소하여 얻어내어 그것으로 장사하여 이자를 얻게 하니 관가와 민간이 모두 넉넉해졌습니다. 당시 조정에서 전화(錢貨)를 사용하는 법을 중간에 폐지하여 모두 개성부의 값으로 돌리니, 천한 백성들이 장차 직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공이 명령을 내려 관가에 납부하는 모든 부세를 대신 돈으로 내게 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미 대동미(大同米) 징수를 균등하게 정하였는데, 사사로운 비용으로 많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백성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란 말인가? 관청은 오직 봉록만을 먹어야 한다" 하고, 이어 명하여 이후로는 일절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몇 달 만에 창고가 가득 찼습니다.
개성부의 풍속이 소송을 좋아하여 다스리는 자가 혹 지체됨을 괴로워하였으나, 공이 집무함에 이르러 여러 큰 소송을 판결할 때 문득 그 실정과 거짓을 밝혀내니 패소한 자도 스스로 원망함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를 두고 말하기를 "공의 임기 동안에는 비리로써 청탁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장차 이임하려 하자 개성부 사람들이 서로 이끌고 조정에 이르러 천 금을 바치고 더 머물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얻지 못하자, 이에 비석을 세워 추모하였습니다.
마침 큰 옥사(大獄)가 막 끝나자 공은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 없다 하여 외직을 구해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었습니다. 더욱 청정(淸靜)을 힘써 다스렸으며, 매일 반드시 제생들을 친히 이끌고 가르쳤으며, 읍내의 충신·효자·열녀를 찾아내어 정려를 새롭게 하여 격려하였습니다. 얼마 후 방백(관찰사)과의 친족 친혐(親嫌: 친족 관계 피혐)으로 교체되어 다시 개성유수로 임명되니 백성들이 다투어 이마에 손을 얹고 환영하였으며 다스림의 교화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일로 인하여 물러났는데, 대체로 밀양에서 조정으로 돌아온 뒤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예전 벼슬을 두루 다시 거쳐 호조·예조·병조·형조 참판, 좌·우윤, 도승지를 혹은 두세 번이나 지냈습니다. 중간에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고, 효종의 애책문(哀冊文)을 써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습니다.
이듬해 경자년(1660년) 2월에 우연히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니, 실로 27일이었습니다. 임금이 명하여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며 부의를 내리기를 규례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공은 덕성이 순후하고 마음을 씀이 간략하고 바르며, 평소에 엄숙하게 스스로를 지켰고 식견과 우려가 밝고 깨끗하였으며, 말은 겸손하고 행동은 삼갔습니다. 심지어 환란을 겪고 위험한 곳을踏밟아 일이 고르지 않음에 이르러서도 한결같이 겸손하고 공손하며 삼가고 확실함을 위주로 하여 일찍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효순함이 두터워 문정공을 섬김에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지런히 봉양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문정공이 '효성스러운 아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상을 당해서는 예법을 따랐고, 기일을 맞이하면 슬퍼 부르짖기를 초상 때처럼 하였습니다. 형님(신익성)에 이르러서도 사랑과 경경함이 교차하여 하루 종일 가서 문안하였으며,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습니다.
효종의 대율(大恤: 국상)에 있어서는 애통함이 매우 심하여 상복을 입기를 거의 어버이 상처럼 하였으며, 매번 옥체(임금의 건강)가 편안하지 못하실 때면 기거를 오직 삼갔습니다. 관직에 임하여 일을 결단할 때는 스스로 끊임없이 힘써 강포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현명함과 사악함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취하고 버림이 더욱 분명하였습니다.
태학생들이 상소를 올려 신재(愼齋) 김집(金集) 선생을 조정에 머물게 하려 할 때 혹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자, 공이 이르기를 "선군(先君)께서 일찍이 '김강(金剛: 김집)은 군자이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머물도록 청하기에 부족하겠는가?" 하고 아들을 보내어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광주에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이 손자 부마를 위해 혼수품을 요구하였으나, 공은 오직 빗(梳具)만을 보내니 듣는 이들이 어렵게 여겼습니다. 晩년에는 설경헌(薛敬軒: 설선)의 《독서록(讀書錄)》을 좋아하여 몸과 마음에 이롭다고 여겼으며, 이로 인해 성리학자들의 서적인 《근사록》, 《심경》 등을 파고들어 탐구하고 항상 마음을 침잠시켜 맛보고 풀이하였습니다. 특히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관청에서 물러나면 반드시 정좌하여 외우기를 마지않았습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세상의 실실된 일은 오직 나 자신을 위한 학문(爲己之學)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환영(幻境)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두텁게 믿음이 이와 같았습니다.
문장을 지음에는 뜻이 본래 가정(가학)에 근본을 두었고 힘을 쓰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여 동서고금의 여러 대가들 중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적었으니, 요컨대 그 성취한 바는 전아(典雅)하고 간중(簡重)하여 마치 가치 있는 옥(拱璧)과 같았습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특별히 서로 칭찬하고 상찬하며 문원(文苑: 문형/문장가)에 두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겸하여 서법에도 능하여 일대의 금석문이 많이 그에게 귀의하였습니다.
공은 뜻과 상품이 단박하고 조용하여 진취(進取)를 일삼지 않았으며, 궁궐과 인척을 맺게 되자 더욱 스스로를 단속하고 자제하였습니다. 비록 조정에 자취를 탁지했으나 담담하기가 마치 숲속에 거하며 공허한 곳으로 도망친 듯하였으며, 미세함을 보고 약조를 지켜 한결같이 경전으로써 일을 삼았으니, 무릇 세상의 드러남과 숨음, 잘되고 못됨이 모두 그 마음을 어지럽히기에 부족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처음에 임오년의 역(임오화변)에 당하여 갑자기 간사한 자의 모함을 받아 이역만리에서 갇히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고, 신묘년의 대옥(大獄)에 이르러서는 세력이 가깝고 지위가 핍박하여 움직이면 위태롭고 의심받게 되었으나, 끝내 공에게 허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논자들이 말하기를 "이때에 능히 충신으로써 스스로를 보전한 자는 공과 이충익공(李忠翼公: 이시백)을 함께 아름답게 여길 만한데, 그 난이도를 비교해 보면 또 분별되는 바가 있으니, 이것이 어찌 공의 평소 겸손하고 공손하며 삼가고 확실함의 증험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성대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은 여러 아들들의 귀함으로 인하여 누차 영의정에 증직되었습니다. 처음에 영평(永平)에 장사지냈다가 중간에 양주(楊州)로 옮겼고, 후에 무신년(1668년) 8월에 충주(忠州) 서쪽 중방리(中房里) 묘좌(卯坐: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향함, 또는 묘향)의 언덕에 택일하여 장사지냈습니다.
부인 양주 조씨(楊州 趙氏)는 혜목공(惠穆公)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며, 지금의 자의전(慈懿殿: 장렬왕후) 대왕대비의 언덕(언니)입니다. 단장하고 명달하여 공을 섬김에 덕을 위반함이 없었으니, 온 집안이 모두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5남 3녀를 두었습니다.
장남은 곧 종백공(신정)이니, 일찍이 이조판서(冢宰)를 임명받았으나 공의 유훈으로 강력히 사양하여 사대부들에게 널리 송축되었습니다.
다음 신섬(申暹)은 별검(別檢)으로 바탕이 아름답고 행실이 순하여 더욱 공을 잘 섬긴다고 일컬어졌으나 불행히 일찍 죽으니 애석합니다.
다음은 신앙(申晸/申曄의 형제, 신앙/신앙?),
다음은 곧 관찰공(신협)이며,
다음 신앙(申昂)은 요절하였습니다.
세 딸 중 장녀는 대사간 이계(李嵇)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왕자 숭선군 이징(崇善君 李澂)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윤지윤(尹之贇)에게 시집갔습니다.
손자는 신징화(申徵華), 신서화(申瑞華, 현감), 신계화(申啓華, 승지), 신진화(申鎭華), 신상화(申尙華), 신석화(申錫華), 신숭화(申崇華), 신종화(申從華), 신우화(申遇華)입니다. 손녀는 참봉 이석형(李碩亨), 진사 이익하(李翊夏), 홍중익(洪重益)에게 시집갔으니 유수공(신정)의 출생입니다. 신지화(申志華), 신처화(申處華), 신몽화(申夢華)는 별검공(신섬)의 출생인데, 처화는 신앙(昹)의 뒤를 이었습니다. 신채화(申采華), 신세화(申世華) 및 홍중성(洪重聖)에게 시집간 딸은 관찰공(신협)의 출생입니다. 신희유(申喜濡)는 대사간공(이계)의 출생입니다. 동평군 이항(東平君 李杭) 및 윤세정(尹世鼎), 윤정호(尹廷虎), 안수정(安壽鼎), 조명봉(趙鳴鳳)에게 시집간 딸들은 숭선군의 출생입니다.
증손으로 현감(신서화)은 2남 2녀를 두었고, 승지(신계화)는 2남 2녀를 두었으며, 신진화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립니다.
명(銘)하여 가로되,
매섭도다 저 장절공(신숭겸)이여, 동양(동산/평산)에 적을 열었도다. 면면히 이어져 혁혁하니, 문무가 번갈아 창성하였네. 누구가 그 으뜸이 되었는가, 우리 문정공(신흠)이라 말하도다. 공이 오직 뒤를 이어 일어났으니, 이에 첫째 형님(신익성)에게까지 이르렀도다.
효순하고 겸손하며 삼갔으며, 충의롭고 영걸스러웠으니, 비유하자면 노천(老泉: 소순)과 같아서, 두 명의 아들(소식·소철)을 내려주신 것이라네. 아, 공이 조정에 오르매, 큰 난리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도다. 곧은 도리가 비로소 드러나자, 곧 북쪽 변방으로 물러났도다.
통사살(蜮弩)이 갑자기 발사되어, 큰 화를 이에 입었으나, 은빛 포승줄과 포도청의 쇠사슬도, 평탄한 길처럼 여겼도다. 또한 이미 세상을 경험하고서, 마침내 벼슬길 물러날 마음 품었네. 남쪽 변방에 은혜를 남기고, 서도(개성)에 공적을 이루었도다.
험난한 길 다하기 어려워, 큰 옥사가 또 일어났으나, 공이 그 중간에 있으면서, 송구스러워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네. 오직 충성과 신의가, 진실로 본원이 되었도다. 또한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여, 바탕에 문채가 있었도다.
신명이 도우시는 바라, 백 가지 복이 함께 일어났네. 이로써 능히 마침을 잘 마쳤으니, 어찌 단지 화를 면함에 그쳤으리. 중방리의 언덕에, 높고 큰 돌이 서 있도다. 내가 밝은 비석에 명을 새기노니, 어진 풍모를 선양하게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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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유집(東江遺集)
동강유집 제18권
부록 2(附錄二)
묘표〔墓表〕 [이민서(李敏敍)]
번역문
동강(東江) 신공(申公)의 휘는 익전(翊全), 자는 여만(汝萬)이다. 계보는 고려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에게서 나왔다. 신씨(申氏)는 처음에 곡성(谷城)을 본적으로 삼았는데 장절공부터 평산(平山)으로 옮겼다.
6대조 효(曉)는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는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나 행주(幸州)에 은거하여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고조 휘 세경(世卿)은 명망과 덕행이 있었는데 관직은 사직서 영에 그쳤다. 증조 휘 영(瑛)은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조부 휘 승서(承緖)는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나 단명하였다. 관직은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에 그쳤는데, 훗날 공의 선친 문정공(文貞公)이 귀하게 되자 규례대로 추은(推恩)하여 증직되었다.
문정공 휘 흠(欽)은 문장과 덕업으로 세상에 이름난 재상이 되어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절도사 제신(濟臣)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 8월 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자질이 돈후하고 기운이 순수하여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겨우 10세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문정공의 자리 곁에 있는 공을 보고서 평범한 아이와 다르다고 칭찬하였다. 공 역시 이때부터 더욱 힘써 평소 반드시 몸가짐을 바로하고 강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태극도(太極圖)〉의 두 번째 동그라미를 보고,
“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는 것이다.”
하니, 문정공이 대단히 기특하게 여겼다. 조금 성장하자 여러 책을 널리 섭렵하고 문장을 지었다. 당시 세상이 갈수록 어지러워져 공은 과거를 단념하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더욱 학업을 닦았다.
병인년(1626, 인조4) 가을, 별시에 급제하였는데 대간이 근거 없는 논의를 가지고 논핵하여 파방(罷榜)하자 공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였다.
병자년(1636), 천거를 받아 참봉에 의망되었다. 예전에 공이 상소를 올려 장릉(章陵) 추숭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이 공의 지난 일로 진노하여 이조(吏曹)를 문책하였다. 당시 이조 판서였던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공에게 문재와 식견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겨울에 다시 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이듬해 가을에 비로소 창방(唱榜)하여 승문원을 거쳐 추천을 받아 사국에 들어갔다.
무인년(1638), 전적에 오르고 차례로 정언, 병조 좌랑, 지평에 임명되었다. 당시 큰 난리를 겪고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 소인배가 이 틈을 타서 청음 김공을 거꾸러뜨리고자 자기편을 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축출하였다. 인사권을 쥔 자가 몰래 그 논의를 주도하였는데 그가 끌어들여 기용한 자는 대부분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었다. 공이 처음 대각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전조가 거리낌없이 사심을 따르는 실상을 논열하니 사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곧 옥당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공이 병조에 있을 때 한 역졸(驛卒)에게 장(杖)을 쳤는데 오랜 뒤에 그가 병으로 죽었다. 전관(銓官)의 당파에 속한 헌관(憲官)이 중상모략할 의도로 탄핵하여 심리를 받게 되었으나 진상을 조사해 보니 사실이 아니므로 주상이 용서하라고 명하였다.
기묘년(1639), 교리에 임명되어 지제교를 겸하고 헌납으로 옮겼다. 겨울에 서장관이 되어 금지한 물품을 사사로이 소지한 자를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처벌하니 일행이 모두 숙연해졌다. 사행의 일에 주상의 뜻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으므로 심리에 회부되어 도배(徒配)를 당했다가 이내 풀려났다.
신사년(1641), 문학이 되었다. 겨울에 전관이 지난날의 유감 때문에 배척하여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에 보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평소 이계(李烓)가 간사하다고 말하였는데, 이계가 변방 수령으로 있다가 청나라에 구속되자 우리나라의 비밀을 말해주고 살 길을 찾으려 하였다. 그래서 재신(宰臣) 5, 6명이 명나라를 보존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고 무고하여 공의 형제와 여러 공들이 모두 심양으로 잡혀갔는데, 앞으로의 화를 예측할 수 없었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
계미년(1643) 봄, 비로소 돌아왔다. 그 뒤 계속 옥당에 있으면서 응교로 승진하였으며, 사인, 사간, 겸필선을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궁료(宮僚)들과 함께 글을 올려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였으며, 원묘(園墓)의 일을 처리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겨울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는데 공은 외직이야말로 역량을 발휘하여 공헌할 수 있다고 여겨 누락된 군액을 보충하고 포흠(逋欠)난 환곡을 채웠으며, 저축을 확대하고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며 유생들에게 강학을 권하니 온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무자년(1648), 체차되어 돌아와서 형조, 예조, 병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쓰고 가선대부로 가자되었다.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까지 지냈다.
경인년(1650, 효종1), 부사로 청나라에 갔다. 그간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 및 한성부 좌윤과 우윤에 임명된 것이 두세 번에 이르기도 하였고, 금오와 총관을 겸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신묘년(1651), 《인조실록(仁祖實錄)》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여름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다. 개성은 서로(西路)의 요충지에 있는데, 오랑캐 사신이 오면 요구하는 것이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되어 백성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공은 누적된 포흠을 탕감해 주고 밑천을 빌려주어 백성을 넉넉하게 해 주었다.
돈이 쌓여 제때 유통되지 않아 백성이 몹시 고통스럽게 여기자 공은 세금으로 돈을 받아 쌓인 돈을 흩었다. 녹봉 외에는 관청의 물품을 하나도 손대지 않으니 몇 개월 만에 쌓이고 남아서 백성의 요역을 여러차례 대신하였다. 그리고 송사를 부지런히 판결하여 적체된 문서를 모두 없애니 백성이 몹시 기뻐하였다. 공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가게 되자 백성이 조정에 천금을 바치면서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비석에 사모하는 마음을 새겼다.
이후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자 오로지 청정(淸靜)하기를 힘썼는데,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다. 몇 년 동안 한직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다시 개성 유수가 되었는데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을 백성이 양손을 이마에 얹고서 영접하였다.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더욱 잘 다스려졌으므로 공이 개성에 선정을 베푼 것이 유독 많았다.
병신년(1656), 체차되어 돌아왔다.
기해년(1659), 효종대왕의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에 올랐다. 공은 평소 병에 걸려 허약했는데, 국상을 당해 놀라고 애통해하며 소식(素食)하느라 더욱 초췌해졌다.
경자년(1660, 현종1) 봄, 주상에게 환후가 있어 공은 대궐에 유숙하면서 문안하였는데, 귀가해서 감기에 걸려 2월 27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6세이다. 훗날 자녀들이 귀해지고 공신이 되어 여러 차례 추증을 받아 영의정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에 장사 지냈는데 묏자리가 좋지 않아 양주(楊州)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무신년(1668) 8월 갑신일에 충주(忠州) 중방리(中房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안장했다.
부인 조씨(趙氏)는 국구(國舅)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창원(昌遠)의 딸이다. 14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단정하고 순결하여 옛적 어진 여인의 지조가 있었다. 공을 섬기면서 절도를 어기지 않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었다. 또 성품이 현명하고 감식안이 있어 온 집안 부녀자들이 모두 본받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다가 몸을 상하여 신축년(1661, 현종2) 7월 24일에 뒤따라 돌아가셨다. 양주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무신년(1668) 8월에 공과 합장하였다.
공은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정(晸)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판서를 지냈다. 차남 섬(暹)은 빙고 별검을 지냈다. 삼남은 창(㫤)이다. 사남 엽(曅)은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를 지냈다. 오남 앙(昂)은 요절했다.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 차녀는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삼녀는 사인(士人) 윤지빈(尹之贇)에게 출가했다. 서출 아들 하나가 있는데 온(昷)이다.
정은 먼저 교리 심희세(沈煕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징화(徵華)이다. 차남 서화(瑞華)는 현감을 지냈다. 삼남 계화(啓華)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냈다. 장녀는 요절했고, 차녀는 참봉 이석형(李碩亨)에게 출가했다. 나중에 판관 허섬(許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6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화(鎭華), 상화(尙華), 석화(錫華), 택화(宅華), 종화(從華), 우화(遇華)이다. 딸은 사인 이익하(李翊夏)와 진사 홍중익(洪重益)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섬은 현감 유성오(柳誠吾)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다. 장남은 지화(志華), 차남은 처화(處華), 삼남은 몽화(夢華)이다. 창은 시정(寺正) 이선(李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섬의 아들 처화를 후사로 삼았다. 엽은 생원 임후(任垕)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채화(采華)이며, 딸은 사인 홍중성(洪重聖)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혜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희유(喜濡)이다. 숭선군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杭)이고 차남은 어리다. 딸은 사인 윤세정(尹世鼎), 윤정호(尹廷虎), 안수정(安壽鼎), 조명봉(趙鳴鳳)에게 출가했다. 온은 5남 1녀를 두었다.
징화는 좌윤 이상(李翔)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서화는 봉사 권회(權誨)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계화는 목사 이민장(李敏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진화는 시정(寺正) 김수증(金壽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지화는 참의 유헌(兪櫶)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다. 처화는 현감 송광순(宋光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몽화는 유원(柳瑗)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희유는 서탄리(徐坦履)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동평군은 군수 박세장(朴世樟)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공은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부터 항상 문정공의 곁에 있으면서 공손하고 신중하였기에 문정공이 매양 효성스럽다고 칭찬하였다. 거상할 때 곡하고 울며 전(奠)을 올렸는데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형님 동양공을 섬기는 데 있어서 마치 문정공을 섬기는 것처럼 하여 매사를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막내 누이가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자 당시 공은 이미 연로했는데도 날마다 가서 살펴보고 손수 약을 조제하였다.
평소 몸가짐이 의젓하여 차근차근 법도를 따랐으며, 말을 삼가고 과묵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외물에 욕심이 없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분별해야 할 때는 반드시 신중하였다. 관직을 맡았을 때는 조금도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아 우뚝 솟은 산과 같았다. 항상 독서를 낙으로 삼아 퇴청하면 반드시 일과를 정해놓고 읽었다.
평소 성품이 욕심없고 겸손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이르기를,
“전조(銓曹)가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권세를 좋아하고 관작을 탐하는 세상 사람들이 몰려간다.”
하였다. 비단 자신이 피했을 뿐만 아니라 자제들에게도 훈계하였으므로 공의 두 아들도 그 경계를 삼가 지켜서 전조의 관직을 받을 때마다 선친의 훈계를 이유로 사양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이 스스로 지킨 원칙을 알 수 있다.
공은 왕실과 인척을 맺었는데, 신묘년(1651, 효종2)의 옥사 때 화가 집안에 미치자 어느 곳이나 모두 지극히 위태로웠다. 그렇지만 공은 홀로 초연히 벗어나 사람들이 감히 터럭만큼도 공에게 조금도 누를 끼치지 못하여 마침내 스스로 명성을 지켰으니, 여기서 공의 충성과 신의가 평소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장은 간결하고 자연히 규범에 맞아 어렸을 때 이미 문정공에게 칭찬을 받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모두 누차 칭찬하여,
“관각(館閣)에 있어야 마땅하다.”
하였다.
세상의 대갓집 자제들을 보건대, 교만하면 낭패를 당하고 겸손하면 가문을 유지하는데 항상 그러하다. 공의 경우는 지조와 행실이 돈독하고 확고하니 원칙으로 세울 만하고, 절개를 지키고 겸손하였으니 퇴폐한 습속을 진작시킬 만하다. 문장과 행동은 대대로 지켜오던 것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나 지위가 그 덕에 걸맞지 않았다. 다 누리지 못한 것을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줄 것이니 이 또한 도를 지녔던 옛사람에 가깝지 않겠는가.
나는 공과 삼대에 걸친 우호가 있어 그런대로 공의 의리를 사모할 줄 알기에 마침내 그 유사(遺事)를 편차하여 묘표를 짓는다.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이민서가 짓다.
[주-D001] 추은(推恩) : 관원의 선조에게 관직을 추증(追贈)하는 것을 말한다. 신승서는 아들 신흠이 1품 관원이자 선조조(宣祖朝)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이라는 이유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象村稿 卷25 先府君墓表》
[주-D002] 장릉(章陵)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능호(陵號)이다.
[주-D003] 이계가 …… 잡혀갔는데 : 1641년(인조19) 이계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었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하였다.
[주-D004] 경인년 …… 갔다 : 당시 저자는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호행 부사(護行副使)로 연경에 갔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
[주-D005] 양손을 이마에 얹고서 :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加額〕은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축원하는 의식의 하나이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낙양에 사는 15년 동안 입궐할 때마다 백성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공경스럽게 바라보면서 “이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라고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주-D006] 신묘년의 옥사 : 김자점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를 말한다. 이때에 사위인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조카 신면(申冕)이 연루되었으나 신익전은 화를 면하였다. 신면은 김자점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국문 도중 장형을 받다가 쓰러져 죽었다. 김자점은 숭선군의 누이인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시할아버지인데,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숭선군의 어머니인 조귀인(趙貴人)과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조귀인은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이 되었고, 숭선군도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김재영 (공역) | 201
동강유집 제18권
부록 2(附錄二)
묘표〔墓表〕 [이민서(李敏敍)]
원문
墓表[李敏敍]
東江申公諱翊全。字汝萬。系出高麗壯節公崇謙。申氏始籍谷城。自壯節公移籍平山。六代祖曉。爲右正言。言事不合。退居幸州。自號西湖散人。高祖諱世卿。有名德。官止社稷署令。曾祖諱瑛。議政府右參贊。諡夷簡。祖諱承緖。有文行。早卒。官止開城府都事。後以公考文貞公貴。推恩 贈職如例。文貞公諱欽。以文章德業。爲世名相。配享 仁祖廟庭。配全義李氏。節度使濟臣之女。以萬曆乙巳八月三日生公。公質厚氣醇。幼不好弄。甫就傅。沙溪金先生。見公於文貞公座隅。奬待異凡兒。公亦自是益勉勵。恒居必脩飭。講讀不輟。嘗觀太極圖第二圈曰。此陰中有陽。陽中有陰也。文貞公大奇之。稍長。博涉群書爲詞章。時世益昏亂。公絶意赴擧居閒。業益進。丙寅秋。擢別試。臺諫因浮議。論罷其榜。公議稱枉。丙子。薦擬齋郞。公曾疏論 章陵追崇。 上怒公前事。貴問銓曹。時淸陰金文正公秉銓。以公文才見識爲對。冬。復擢別試。時有胡寇。明年秋。始唱第。由槐院。薦入史局。戊寅。陞典籍。歷拜正言,兵曹佐郞,持平。時大亂甫定。群小因以乘間欲傾淸陰金公。以幷逐不附己。秉銓者陰主其論。所引用多傾巧士。公始入臺。首論銓曹循私無忌狀。士論快之。旋入玉堂爲修撰。公在騎省。杖一卒。久而病斃。憲臣黨銓官。爲中傷計。論下理。按驗無實。 上命原之。己卯。拜校理。帶知製敎。移獻納。冬。爲書狀官。大搜治私齎禁物者。一行盡肅。因使事有未得 旨者。下理徒配旋釋。辛巳。爲文學。冬。銓官用前嗛。斥補居山察訪。先時。公素言李烓之姦。及烓以邊守。拘虜中。謁我國陰事冀不死。仍構五六宰臣以志存明朝。公兄弟與諸公。偕執入瀋。禍將不測。公夷然不爲動。癸未春乃還。其後連在玉堂。陞應敎。歷舍人,司諫。兼弼善。 昭顯世子喪。與宮僚上章。請行朞制。以治園墓功。陞通政。冬。宰光州。公以爲外職有可自效者。乃補缺伍充逋糶。廣儲畜賑窮乏。勸課諸生。一境大治。戊子。遞歸。歷刑,禮,兵參議。己丑。 仁祖昇遐。書諡冊文。加嘉善。在政院。自同副至都承旨。庚寅。以副价赴淸。前後爲戶,禮,刑曹參判及京兆佐貳者。或至再三。兼金吾,摠管者。亦累焉。辛卯。參修 仁祖實錄。夏。拜松都留守。松當西路衝。虜使至。徵求倍他邑。民不堪公捐積逋。貸本貨以裕民。錢壅而不時泄。民甚病。公賦錢而散其積。俸祿之外。不犯公藏一物。數月積羨。累償民役。且勤聽斷。一掃滯牘。民大悅。及公辭病歸。民請以千金借留於 朝。不得則勒石追思。後除密陽府使。專務淸靜。未幾免。優遊閑局數歲。復爲松都。民聞公來。加額而迎之。不令而益治。故公之惠政於松。獨多焉。丙申。遞歸。己亥。書 孝廟哀冊。進嘉義。公素有虛羸疾。遭 國戚驚慟。食素益瘁。庚子春。 上有疾。公留 闕下起居。還家感疾。二月二十七日。遂卒。春秋五十六。後以子女貴及從勳。累 贈領議政。初葬永平。以宅兆不利。權厝楊州。戊申八月甲申。永窆于忠州中房里負酉之原。夫人趙氏。 國舅漢原府院君昌遠之女。十四。歸于公。端莊醇潔。有古淑哲之操。事公無違度。敎子弟有法。且性明達有鑑識。一家婦女皆取則焉。及公歿。哀傷毀慼。辛丑七月二十四日。繼卒。權厝楊州。戊申八月。與公合窆。公生五男三女。男長晸。文科禮曹判書。次暹。氷庫別檢。次昶,次曅文科應敎。次昂早夭。女長適大司諫李嵇。次適 王子崇善君澂。次適士人尹之贇。庶出男一曰昷。晸前娶校理沈煕世女。生三男二女。男長徵華。次瑞華縣監。次啓華文科校理。女長夭。次適參奉李碩亨。後娶判官許暹女。生六男三女。男鎭華,尙華,錫華,宅華,從華,遇華。女適士人李翊夏,進士洪重益。餘幼。暹娶縣監柳誠吾女。生三男。長志華,次處華,夢華。㫤娶寺正李䆄女。無子。以暹之子處華爲后。曅娶生員任垕女。生一男二女。男采華。女適士人洪重聖。餘幼。李嵇生一男。曰喜濡。崇善生二男四女。男長東平君杭。次幼。女適士人尹世鼎,尹廷虎,安壽鼎,趙鳴鳳。昷有五男一女。徵華娶左尹李翔女。瑞華娶奉事權誨女。生二男一女。啓華娶牧使李敏章女。生一男三女。鎭華娶寺正金壽增女。生一男一女。竝幼。志華娶參議兪櫶女。無后。處華娶縣監宋光洵女。夢華娶柳瑗女。喜濡娶徐坦履女。東平娶郡守朴世樟女。生一女。公篤於孝友。自幼常在文貞公側。油油翼翼。文貞公每稱其孝。居喪哭泣饋奠。傍人爲之感動。事兄東陽公。如事文貞公。每事必稟而後行。季妹嘗有沈綿之疾。時公已老矣。日往視手調藥餌。平居儼然自持。循循有矩度。言語愼默。不言人過失。於外物泊然。不以經心。至賢邪當辨則必謹。當官奉職。則不少退避。嶷嶷有立。每以讀書爲樂。公退必有程課。雅性恬退。不喜進取。常謂銓曹秉通塞。世之喜權饕爵者趨之。不但斂避於其身。又以戒子弟。故公之二子。亦謹守其戒。受銓職。輒以先訓辭。此可以見公自守之大方也。公旣連姻宮掖。而辛卯之獄。禍在門庭。所處皆至危也。獨公超然自脫。人不敢以一毫累公。終以名義自保。於是益知公忠信素孚於人也。文章簡潔。自合典則。少時已爲文貞公所賞。而澤堂李公植,樂靜趙公錫胤。皆亟稱之。以爲合處文苑。蓋嘗觀世之高華之胄。驕而顚遜而綿者。恒是也。若公。操履敦確。可以立大防。守節謙約。可以厲末俗。文采行義。不隕其世守。而位不滿其德。又以其遺餘。貽後人於無窮。斯不亦幾乎古之有道術者哉。不佞與公有三世之好。粗知慕公之義者。遂論次其遺事。以表諸墓云。
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李敏敍。撰。
동강유집 제18권
부록 2(附錄二)
번역문
유명 조선국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墓誌銘 幷序〕 [김만기(金萬基)]
인조조(仁祖朝)에 현헌(玄軒) 신 문정공(申文貞公)은 덕업과 문장으로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는데, 그분의 두 아들이 가르침을 받고 미덕을 계승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막내아들 참판공은 조용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마침내 역경에 굴하지 않고 가주(家主)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참판공의 휘는 익전(翊全), 자는 여만(汝萬), 자호(自號)는 동강(東江)이다. 시조 신숭겸(申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와 원훈(元勳)이 되어 평산(平山)을 본적으로 하사받았다. 그 후 본조(本朝 조선)에 들어와서 휘 효(曉)가 우정언을 지내고 용퇴(勇退)하였는데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휘 세경(世卿)은 사직서 영을 지냈는데, 덕행으로 기묘 제현(己卯諸賢)에게 존중을 받았다. 이 분이 휘 영(瑛)을 낳았는데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이간공(夷簡公)이다. 이 분이 휘 승서(承緖)를 낳았는데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를 지냈다. 이 분이 휘 흠(欽)을 낳았는데 영의정을 지냈으니 바로 현헌 문정공이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청강(淸江) 선생 제신(濟臣)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삼가서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문을 배우자 문장에 대한 이해력이 날로 진전되어 겨우 10세를 넘겼을 때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太極圖)〉를 보고 두 번째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이것은 양(陽) 가운데 음(陰)이 있고 음 가운데 양이 있는 것이다.”
하니, 문정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약관의 나이에 많은 책을 널리 섭렵하여 글재주가 뛰어났다.
병인년(1626), 별시에 급제했는데 창방(唱榜)하기 전에 헌관(憲官)이 근거 없는 논의를 가지고 파방(罷榜)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에 대해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몸을 삼가고 학문을 닦는데 더욱 힘썼다.
병자년(1636), 조정의 신하들에게 어진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였는데 천거하는 문서에 공의 이름이 올랐다. 당시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봉의 첫 번째 후보자로 의망하였다. 그런데 주상께서 공이 예전 성균관에 있을 때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는 이유로 진노하여 김공을 문책하자, 김공은 문재(文才)와 식견으로는 후배들 중에서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대답하였다.
이해 다시 과거에 급제하고 이듬해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며, 곧 사국에 들어가 규례대로 봉교로 전임되고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에 누차 임명되고, 얼마 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때 청음 김공이 간신들의 시기를 받아 심한 중상모략을 당하였다. 인사권을 장악한 자가 그 논의를 주도하고 기회를 틈타 독단하여 조금이라도 정도를 지키는 선비는 모두 배척하고 자기편 사람을 기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친척조차 버젓이 피혐(避嫌)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감히 말하지 못했지만 공은 사은숙배하는 날에 즉시 전관(銓官)이 거리낌없이 사정(私情)을 따르는 실상을 탄핵하자 주상이 가납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인사를 담당하는 자리가 점점 깨끗해지고 공론이 다시 시행되었으니 공은 참으로 군자와 소인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체차되어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옥당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다.
공이 병조에 있을 때 한 역졸에게 장(杖)을 쳤는데 오랜 뒤에 그가 다른 병으로 죽었다. 이때 전관에게 붙은 헌관이 공에게 앙심을 품고 중상하였는데 심리에 부쳐 진상을 조사하자 결백이 밝혀져 주상이 온전히 석방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패초에 나아가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서용되어 직강에 임명되었다. 교리, 헌납, 수찬, 부교리를 두루 거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갔는데 당시는 겨우 난리를 겪은 뒤라 국법이 무너져 사행을 수행하는 하례(下隷)들이 공공연히 금지 물품을 소지하여 왕왕 큰소리로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공이 개인 소지품을 샅샅이 뒤져 범법자를 다스렸는데, 오랑캐 정명수(鄭命壽)와 사이가 가까운 역관이 자기 죄를 알고 노관(虜館)으로 달아나 나오지 않았다. 공이 마침내 결박해 와서 처벌하니 일행이 두려워하며 숙연해졌다. 정명수가 깊은 원한을 품었지만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복명하고 나서 부사(副使)와 함께 심리를 받고 평구역(平丘驛)에 유배되었다. 이는 주상이 명을 내려 주선하게 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세자가 돌아가 주상을 뵙는 것을 허락받았는데 사신이 왕명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청했기 때문이라고 주상이 의심해서였다. 세자가 서울에 들어오자 즉시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서용되어 교리에 임명되고, 헌납을 거쳐 시강원 문학에 임명되었다.
심양에 들어가게 되자, 조정에서 공이 정명수와 원한을 맺었다는 이유로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평소 공을 시기하던 자가 갑자기 이조에 들어갔는데 공을 배척하여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으로 삼았지만 공은 조금도 표정이나 말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임지로 가서 못가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글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때때로 혼자 바닷가나 산골짜기에 가서 노래하고 읊조리며 스스로 즐겼다.
임오년(1642), 청나라에 있던 적신(賊臣) 이계(李烓)가 공의 형제와 두세 재신(宰臣)이 명나라를 부지하려는 뜻을 품었다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심양관(瀋陽館)에 구류되어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 다행히 세자가 구명해 준 덕분에 석방되었다. 이에 앞서 공이 이계와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그의 부정행위를 발견하고는 그와 말을 섞지 않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작자는 장차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하니, 이계가 이 말을 듣고 앙심을 품었다. 공이 명을 받들고 심양에 갈 때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 지냈는데 강개한 말을 많이 하였다. 이계가 마침내 오랑캐에게 고자질하여 사지(死地)에 빠뜨리려 한 것이니,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다시 옥당에 들어갔다가 천거를 받아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고, 부응교, 사간으로 누차 옮기고 시강원 필선을 겸하였으며, 다시 사인에 임명되었다. 소현세자가 죽자 춘방의 동료들과 글을 올려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였다. 묘소도감 도청(墓所都監都廳)으로 묘소의 일을 감독하고 일을 마치자 통정대부로 가자되었다.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가서는 외로운 충심으로 분발하여 누락된 군오(軍伍)를 보충하고 포흠(逋欠)난 환곡을 해결하였으며,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요역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학교를 정비하고 유생들을 시험하니 고을 사람들이 추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체차되어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예조, 병조, 호조로 전임되었다. 중간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차례대로 승진하여 우승지로 옮겼다.
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써서 올려 가자를 받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기해년(1659, 효종10)까지 차례로 예조, 병조, 형조 등의 참판 및 한성부의 당상에 임명된 것이 많게는 서너 번이었고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된 것도 세 번이었으며, 조정에 들어와서 도총부와 금오의 직임을 겸임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경인년(1650, 효종1), 부사(副使)로 연경에 갔다. 돌아온 뒤에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인조실록》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우윤을 지낼 적에 권세 있는 집안의 종이 법을 어기고는 숨어서 나오지 않는 일이 일어났는데, 공이 나졸을 풀어서 잡아 왔다. 그런데 중재하는 자가 공이 왕실과 인척이라는 혐의를 들어 위태로운 말로 충동질하였다. 공은 분개하여,
“법관이 범법자를 다스리는데 어찌 혐의를 논하는가.”
하고, 마침내 법대로 논죄하였다.
송도 유수(松都留守)로 나갔는데, 백성이 청나라 사신의 요구로 고생하여 몹시 피폐한 데다 많은 폐단이 잇따라 생겼다. 공은 가장 먼저 노인들을 불러 고충을 물은 다음 완화하거나 없앴다. 그리고 호조의 동과 철을 지급해달라고 조정에 요청하여 시전 상인들의 밑천으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비용을 충당하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도움이 되었다.
개성부는 공납이 과중했는데 요행으로 면제받는 자가 많았다. 그러자 공이 모두 적발하여 균등하게 부과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화폐 사용을 돌연 폐지하자 개성부로 돈이 모이기만 하고 쓸 곳이 없어 많은 상인들이 생업을 잃었다. 공이 조와 쌀을 내는 자에게 돈으로 대납하게 하니 백성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훗날까지 바꾸지 않고 법으로 삼고 있다.
예로부터 고을 관원의 사적인 비용이 공납에서 지출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 법이 어찌 사적인 수요를 위해 만든 제도이겠는가.”
하고, 털끝만큼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창고가 가득차서 백성의 공납을 여러 번 감면해주었는데도 관청의 비용은 풍족하였다. 풍속이 이익을 다투고 소송을 좋아하여 고을 관원이 시비곡직을 혼동하고 송사가 적체되어 비방을 초래하였다. 그런데 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소송 문서가 씻은 듯 사라지고 모두 실정에 맞으니 백성들이 칭송하여,
“합하께서 재직하시는 동안에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요구할 수 없다.”
하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게 되자 온 성의 백성이 수레를 붙잡고 차마 놓지 못하였으며, 비석에 새겨 떠난 분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다시 힘써 외직을 구하여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는데, 다스림이 청정하여 어지럽지 않았다. 날마다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서 직접 가르치고, 읍내의 충신, 효자, 열녀들의 사적을 찾아서 새로 정표하고 그 후손들에게 양식을 지급하여 고을 백성을 진작하고 권면하였다. 그런데 관찰사가 친척이라는 이유로 피혐하여 체차되었다.
을미년(1655), 다시 개성 유수로 부임하자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환영하였고, 공 또한 백성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정이 더욱 현저하였는데 백성들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공의 자손이 개성부를 지나게 되면 백성들이 너도나도 만나보러 와서는 공이 재직할 때의 일을 말하는데 간혹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듬해에 체차되어 돌아갔다. 효종이 승하하자 명을 받들어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공은 몇 년 전부터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주상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 유숙하면서 하루에 세 번 문안하는 반열에 나아갔다. 이때부터 몸이 더욱 좋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감기에 걸려 2월 27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주상이 예법대로 조문하고 치제하며 부의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 거사동(居士洞)에 장사 지냈는데 묏자리가 좋지 않아 양주(楊州) 덕연(德淵) 가로 이장하였다가 무신년(1668) 8월에 충주(忠州) 관청 서쪽 앙암(仰巖) 중방동(中房洞) 묘향(卯向)에 안장하였다.
공은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고 돈독하였다. 문정공을 섬기면서 온화하고 기쁜 안색으로 뜻을 다르니, 문정공이 매양 칭찬하여,
“우리 집안의 효자이다.”
하였다. 거상할 때 몸이 수척해지자 보는 사람들이 측은하게 여겼지만 그럴수록 더욱 게을리 않고 예법을 지켰다. 제사 때는 마치 돌아가신 분을 뵐 듯이 오열하였으며, 간혹 지방으로 가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영위(靈位)를 설치하여 곡하였는데 늙어서까지 처음처럼 하였다. 효종의 대상(大喪) 때는 이미 연로하고 병들었는데도 6일 동안 죽을 먹고 몇 달 동안 소식(素食)을 했으며 선왕에 대해 언급하면 반드시 흐느끼며 눈물을 떨구었다.
문정공을 섬기듯이 한결같이 형님 동양공(東陽公)을 섬겼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쭌 뒤에 하였으며 날마다 찾아 뵙고 유시(酉時)가 지난 뒤에 물러나왔다. 동양공의 상을 당하자 빈소 곁에서 거상하고 졸곡 뒤에야 돌아왔다.
막내 누이가 중병에 걸려 일 년 내내 투병할 때는 날마다 몸소 보살피며 직접 약을 조제하였다. 어떤 사람이 노쇠한 나이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만류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 형제자매가 여덟 명이었는데 누이만 살아 있다. 내가 어찌 차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가정에서 훈도를 받아 평소 행동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예전 옥당에 입직하였을 때 설문청(薛文淸 설선(薛瑄))의 《독서록(讀書錄)》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이때부터 선유(先儒)들의 성리학 서적들을 모두 가져다가 집중하여 사색하였다.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하여,
“이것보다 즐거운 것은 없다.”
하였다. 독서하는 데 날마다 일정한 분량을 정해 두어 외물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니, 집에 양식이 떨어져도 몰랐다.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항상 공경하며,
“침착하고 고요하며 선을 좋아하기로는 아무 공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다. 온화하고 자애로와 남을 대할 적에는 그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잘못을 저지른 자제가 있어도 꾸짖지 않고 차근차근 타일렀다. 그러나 벼슬하여 직무를 맡았을 때는 의지가 확고하여 꺾을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글을 지어 문정공의 칭찬을 받았는데 노년에도 더욱 부지런히 힘써 시는 당(唐)나라 두보(杜甫)를 배우고 문은 반고(班固)와 한유(韓愈)를 본받았으며 간간이 명(明)나라 대가들의 글을 참고하였는데, 오랫동안 힘을 기울여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수창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문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만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상국(相國) 홍서봉(洪瑞鳳)은 대단히 칭찬하였는데, 이공이 한번은 동양공(東陽公)에게 말하기를,
“아우님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기력은 비록 공보다 조금 못하지만 전아하기로는 더 나은 듯하오.”
하였다. 서법도 단정하고 굳세어 옛사람의 필법을 터득하였는데, 조정의 전례에 관련된 책문과 이름난 인물들의 묘도문자는 대부분 공이 썼다.
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국구(國舅)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창원(昌遠)의 따님이자 지돈녕부사 소민공(昭敏公) 존성(存性)의 손녀이다. 단정하고 정숙하여 어려서부터 법도를 따르니 소민공이 어질다고 칭찬하며 다른 손자들보다 특별히 사랑하였다. 공의 집안에 시집와서는 정성을 다하고 예의를 갖추어 시부모를 받드니, 문정공이 항상 훌륭한 며느리라고 칭찬하였다.
공이 조정에 벼슬하여 현달한 뒤에도 더욱 청렴하고 검약하여 가산을 불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부인은 가난한 상황에서 힘써 가정을 꾸려나갔는데 살림에 법도가 있어 공으로 하여금 가정 형편이 어떠한지 모르게 하였다.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런 물건을 몸에 걸치지 않았으며 사양하고 받는 일을 조심하여 터럭만큼도 구차하지 않았다. 감식안이 있고 사리에 통달하여 공이 미덕을 이루도록 도운 일이 많았다.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중전이 되고 부인의 딸이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시집가자 부인은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극히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알아서 잘 처리하였다. 미망인이 되어서는 졸곡한 뒤에도 묽은 죽만 들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전(祭奠)은 반드시 손수 차렸다. 슬픔으로 몸을 상하고 고생하다 병이 나서 공이 돌아가신 이듬해 7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55세이다.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정(晸)은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 참판을 지냈다. 섬(暹)은 진사에 급제하고 빙고 별검을 지냈다. 창(㫤)은 요절했다. 엽(曅)은 진사시에 장원급제했다. 앙(昂)은 장가들기 전에 요절했다. 딸 셋을 두었는데,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바로 숭선군의 부인이며, 셋째 딸은 선비 윤지빈(尹之贇)에게 출가했다.
정은 먼저 교리 심희세(沈煕世)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징화(徵華), 서화(瑞華), 진사 계화(啓華)이다. 딸은 사인(士人) 이석형(李碩亨)에게 출가했다. 나중에 판관 허섬(許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화(鎭華)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섬은 현감 유성오(柳誠吾)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지화(志華)는 요절했고, 다음은 처화(處華), 몽화(夢華)이다. 창은 시정(寺正) 이선(李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처화를 후사로 삼았다. 엽은 생원 임후(任垕)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이혜는 희유(喜濡)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했다. 숭선군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고 딸은 선비 윤세정(尹世鼎)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나는 예전에 선배와 어른들에게 다음과 같이 들었다. 공은 문정공을 아버지로, 동양위를 형으로 두었으니 그 가문이 든든한 배경이 될 만하였고, 훌륭한 재주도 남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도리어 겸손하여 이런 배경을 믿지 않았기에 과시하는 자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사기까지 했지만 이 역시 개의치 않았다. 권세를 추종하고 출세하는 데 안달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이마를 찡그렸으며, 요직을 맡더라도 항상 핑계를 대고 물러날 생각만 하였다.
인조 말엽에 조정의 논의가 갈라지자 더욱 조정에 있고 싶지 않아 외직을 구하여 광주 목사에 보임되었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차운하다〔次陶淵明歸去來辭〕〉라는 글에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고 / 太上避世
그 다음은 땅을 피하는 것이다 / 其次避地
하였으니, 그 말에 깊은 뜻이 있었다. 광주에서 돌아온 뒤에는 세상이 더욱 험악해지고 공의 처지가 더욱 위태로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이에 두문불출하여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으며 항상 괄낭지계(括囊之戒)를 지켰다.
신묘년(1651, 효종2), 역적의 옥사가 일어나자 공의 일가에게까지 화가 미쳤지만 오직 공은 평소 사람들에게 충성스럽고 미덥기로 인정을 받았으므로 초연히 비방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명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상국 정태화(鄭太和)가 지은 공의 만시(輓詩)에
위태로운 처지에서 몸과 명예를 보존하고 / 身名自保危疑地
공손과 신중이 결국 복록의 바탕이 되었네 / 恭謹終爲福祿基
하였는데, 사람들이 공에 대해 잘 말하였다고 하였다.
옛날 우리 선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적소(謫所)에 있는 문정공을 방문하였을 때 공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열 살의 나이에 어른처럼 응대하자 우리 문원공께서 감탄하고 기특하게 여겨 훗날 큰 인물이 되리라 기대하였다. 우리 종대부(從大父)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효묘(孝廟 효종) 초에 어떤 사람의 말 때문에 조정을 떠나게 되었는데, 태학의 유생들이 주상께 글을 올려 만류하도록 청하였다. 그때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선군께서 예전에 ‘사강(士剛 김집)은 군자다운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군자다운 사람을 만류하도록 청하는 일이 옳지 않겠는가.”
하고, 자제들에게 가서 참여하라고 명하였다.
나는 공의 행실을 행실을 흠모하였으며 또 소싯적에 공에게 한마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 공의 아들이 와서 묘지명을 청하는데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선배들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 유약하였고 / 退然身若不勝衣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 어눌하였네 / 吶吶然言若不出諸口
옛날에 그런 사람 있었는데 / 蓋古有其人
공이 실로 옛사람 벗하였네 / 而公實尙友
저 아첨하는 소인들은 / 彼夸毗子
앞다투어 너도나도 달리지만 / 爭騖竝驟
수레바퀴 부서진 적 없다가 / 曾不敝輪
곧바로 기울어 전복된다네 / 旋卽傾踣
공은 겸손한 덕에 힘써 / 公懋謙德
홀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 獨受其祐
명성 지켜 생을 마치고 / 旣克令終
자손도 많이 두었다네 / 而孫子多有
내가 공의 묘지명을 써서 / 我銘公之藏
후세에 알리노라 / 維以詔後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김만기가 짓다.
동강유집 제18권
부록 2(附錄二)
유명 조선국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墓誌銘 幷序〕 [김만기(金萬基)]
원문
有明朝鮮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墓誌銘 幷序 [金萬基]
粤在 仁祖朝。玄軒申文貞公以德業文章。型範一世。厥有長季兩胤。襲訓趾美。克振其家聲。而季胤參判公。乃以恬靜謙抑自守。卒能履坎險弗跲。爲保家主云。參判公諱翊全。字汝萬。自號東江。始祖崇謙。翊麗祖爲元勳。賜籍平山。其後入 本朝。有諱曉。以右正言勇退。徵不起。有諱世卿。社稷署令。以德行爲己卯諸賢所推重。生諱瑛。議政府右參贊。諡夷簡公。生諱承緖。開城府都事。生諱欽。領議政。卽玄軒文貞公也。配全義李氏。淸江先生濟臣之女。以萬曆乙巳生公。幼而馴謹。不好弄。及受學。文義日進。甫逾十歲。觀周子太極圖。指第二圈曰。此陽中有陰。陰中有陽也。文貞公大奇之。弱冠博涉群書。詞藝蔚然。擢丙寅別試。未唱名。憲官因浮論議。罷其榜。人皆爲公嗟惜。而公略無介然意。唯以飭躬進學益勉勵。丙子。 命朝臣擧賢士。公名登薦剡。淸陰金文正公時秉銓。首擬齋郞。 上怒公曾在庠。疏論 章陵追崇。責問金公。金公答以文才見識。後輩難得。是歲復擢第。明年。選補槐院。旋入史局。例轉至奉敎。陞成均典籍。屢除司諫院正言,兵曹佐郞。俄拜司憲府持平。是時淸陰金公。爲群壬所惎。大肆毒螫。持銓柄者尸其論。乘機擅弄。士流稍秉正者。擧被其排根。推輓黨類。恬不避親嫌。而人惵其氣勢莫敢言。公於謝 命日。卽劾銓官循私無忌狀。 上嘉納。因是而銓地漸淸。公議復行。公信有力於消長進退之際焉。遞拜典籍。入玉堂爲副修撰。公之在騎省。杖一郵卒。久之以他病死。至是。憲官之黨銓官者。嗛公而中傷之。下理閱實乃白。特命全釋。牌召不進罷。敍拜直講。歷拜校理,獻納,修撰,副校理。帶三字銜。以書狀官赴瀋。時甫經亂。邦憲壞。使行徒隷。公挾禁物。往往致嘖言。公乃痛括私橐。繩其犯科者。象舌有昵鄭虜命壽者。知其罪。投虜館不出。公竟綁治之。一行震肅。鄭虜大恨。公不少撓。旣復命。與副价下理。配平丘驛。蓋 上有畀令周旋者。事不諧。而許 世子歸覲。 上疑使臣不遵旨而擅請故也。及 世子入京。卽命放宥。敍拜校理。歷獻納。拜侍講院文學。將入瀋。 朝廷以公搆怨鄭虜 命遞。素媢公者。驟入銓部。斥公爲居山郵丞。公無幾微見色辭。之任。搆小齋池上。處其中。佔畢不輟。時獨造海澨巖嶅間。嘯詠以自樂。壬午。賊臣烓在虜中。捏公兄弟及數三名宰。謂志扶 中朝。於是竝拘幽瀋館。事將不測。公夷然不爲動。賴 世子救解得釋。先是。公與烓同入試闈。瞯其姦慝狀。乃不與言。出語人曰。是夫也將無所不至。烓聞而銜之。公之奉 命赴瀋。過祭箕子廟。多感慨語。烓遂以告虜。欲陷之死。人服公先見焉。復入玉堂。薦拜議政府舍人。累遷副應敎,司諫。兼侍講院弼善。復拜舍人。 昭顯世子喪。與春坊諸僚上章。請行期服。以都廳董墓所役竣事。加通政。出宰光州。單心振擧。補闕伍釐逋糴。節縮浮宂。以助民徭。修學舍課諸生。邑人追思之。立石頌德。及瓜。拜同副承旨。遞拜刑曹參議。轉禮,兵,戶三曹。間復入政院。序遷右承旨。 仁祖上賓。書進諡冊文。加階。由左承旨。陞都承旨。自是迄己亥。歷拜禮,兵,刑列曹參判及京兆堂上。多者三四。拜喉司首席亦三入。而摠府金吾之兼帶屢焉。庚寅。以副使赴燕還。兼同知春秋。參修 仁祖實錄。其爲右尹也。有主家奴犯禁。匿不出。公發卒捕致。居間者以公連姻宮禁。引形跡。動以危言。公奮然曰。爲法官治犯禁者。豈論形跡耶。竟論以法。出守松都留筦。民困於北使徵求。彫攰甚。衆弊相仍。公首引父老問疾苦。弛罷之。請于朝。出度支銅鐵。資市廛本業。而取子錢以給用。公私俱賴。本府戶調重而多倖免者。公乃悉括出而均齊之。會 朝家用錢旋罷。錢湊本府無所洩。商販大失業。公令出粟米者代以錢。民大悅。遂爲後法不改。府官私需。舊取諸戶調。公曰。此法豈爲私需設也。不以毫毛供私需。於是庫藏充羨。累蠲民調而官用足。俗爭利健訟。府官多眩曲直。委滯以速謗。公莅任未幾。案牘如洗。咸得其情。民稱頌。謂閤下時不可以非理干。及解歸。府民傾城攀轅不忍捨。勒石以寓去思。復力求得密陽府。爲治淸靜弗擾。日召邑子弟。親加提誨。訪邑中忠臣孝子烈婦之蹟。新其棹楔。廩其裔。邑民聳勸。以道臣親嫌遞。乙未。再守開京。民聞公至。皆歡迎。公亦益習民情。惠政愈著。民到今不忘。公子姓過府境。多相率來見。言公時事。或出涕云。明年。遞歸。 孝廟禮陟。承命寫哀冊。陞嘉義階。公自前數歲已永憊。庚子春。聞 上違豫。力疾詣闕下宿留。日三造起居班。自是體益不佳。已而感寒疾。以二月二十七日卒于第。壽至五十六。 命弔祭賻如儀。初葬永平居士洞。以宅兆不利。遷厝楊州德淵上。戊申八月。永窆于忠州治西仰巖中房洞穴直卯。公性行純篤。事文貞公婉愉以承志意。文貞公每稱之曰。吾家孝子。居憂毀瘠。見者慜然。而執禮愈不懈。其於喪餘。悒懓如將見。或出外不與祭則設位以哭至老若初其在 孝廟大喪年已耆且病。而食粥六日。疏素累月。語及 先王。必歔唏涕隕。事伯氏東陽公。一如事文貞公。事必稟而行。日往拜。盡酉而退。及其喪。居殯側。卒哭始歸。季妹嬰疾浹歲。日躬視自調藥。或止以衰年非所堪。公曰。吾同氣八人。獨妹在耳。吾何忍不然。濡染家庭。平居操履甚飭。嘗直玉堂。覽薛文淸讀書錄。惕然有警于心。自是悉取先儒性理諸書。潛心玩索。尤喜讀易。謂至樂無踰此。攻書日有程課。不以外物攖情。雖家甔石。不知也。樂靜趙公錫胤。常敬重曰。沈靜好善。無如某公者。和厚子諒。待人唯恐傷其意。雖子弟有過。循循誨諭。不加詬責。而及其當官任職。確乎其不可撓奪也。蚤歲述作。已爲文貞公所奬賞。旣老彌勤。詩學唐杜。文法班韓。間參皇明諸大家。用力久而所造深。然不喜與人酬唱談說。故人亦鮮知其有文。唯李澤堂植,洪相國瑞鳳亟稱道之。李公嘗謂東陽公曰。季公之文。氣力雖少遜於公。典雅則殆過之。書法亦端勁。得古人筆意。 朝家典禮大冊曁名公墓道碑版。多公書。夫人楊州趙氏。 國舅漢原府院君昌遠之女。知敦寧府事昭敏公存性之孫。端莊淑愼。在幼少已遵義則。昭敏公稱其賢。鍾愛異諸孫。逮入公門。奉尊章誠禮克備。文貞公常稱以佳婦。公旣顯于朝。尤淸約。不事產業。而夫人力貧持家。經理有法。不使公知有無。性儉素。不以華靡加身。謹於辭受。絲毫不苟。有識鑑達事理。助成公德懿者多。 慈懿大妃旣正位坤極。而夫人之女。適崇善君澂。夫人益存畏愼。事有至難而能自善處焉。及稱未亡。已卒哭猶進稀糜。朝夕饋奠。必手自供具。哀毀勞瘁成疾。以公卒之明年七月不起。壽五十五。祔葬公墓。育子五人。晸文科兵曹參判。暹進士氷庫別檢。㫤早夭。曅進士壯元。昂未娶夭。女三人。長適大司諫李嵇。次卽崇善夫人。次適士人尹之贇。晸前娶校理沈煕世女。三男。徵華,瑞華,啓華進士。女士人李碩亨。後娶判官許暹女。四男三女。男鎭華。餘幼。暹娶縣監柳誠吾女。三男。志華夭。處華,夢華。㫤娶寺正李䆄女。無子。以處華爲后。曅娶生員任垕女。生二男一女。竝幼。李嵇一男。喜濡夭。崇善二男四女。男杭東平君。女士人尹世鼎。餘幼。不佞竊嘗聞諸前輩長者矣。公以文貞爲父。東陽爲兄。其門第足籍也。才美又足上人。而顧乃逡逡退遜。無所挾。至爲夸者所姍笑。亦弗較焉。見人趨勢。要急進取。必爲之蹙頞。雖歷踐淸華。而每思引避。 仁廟末。朝論岐分。益不樂在朝。求補光州牧。次淵明歸來辭。有太上避世。其次避地之語。其旨深矣。自光還。世塗益險㚀。而公之形跡益危。事有難言者。於是杜門屛居。罕與人接常存括囊之戒。及辛卯逆獄起。延及公一家。而惟公忠信。素孚于人。故超然免於訾議。以保令名。鄭相國太和挽公詩曰。身名自保危疑地。恭謹終爲福祿基。人以爲善言公。昔我先祖文元公訪文貞公於謫所。公時侍側。年十歲。應對如成人。我文元公歎異之。期以遠到。逮我從大父文敬公當 孝廟初。以人言去朝。太學章甫上章。請留其行。時或有異趣者。公曰。先君嘗謂士剛君子人。請留君子人。不亦可乎。命其子往參焉。不佞旣慕悅公之行。少也亦嘗辱公一言之奬許。今公胤子之來請銘。其敢以不文辭。遂以聞於前輩者銘曰。
退然身若不勝衣。吶吶然言若不出諸口。蓋古有其人而公實尙友。彼夸毗子爭騖竝驟。曾不敝輪。旋卽傾踣。公懋謙德。獨受其祐。旣克令終。而孫子多有。我銘公之藏。維以詔後。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光城府院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金萬基。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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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유집 제18권
부록 2(附錄二)
번역문
유명 조선국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神道碑銘 幷序〕 [박세채(朴世采)]
외사촌형 예조 판서 신정(申晸) 공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선친의 신도비문을 지어야 하는데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네. 그대는 소싯적에 선친을 섬겼으니 선친의 뜻과 업적을 잘 알 것이네. 부디 서술해주기 바라네.”
하였는데, 나는 고문에 익숙하지 않다고 사양하였다. 얼마 뒤에 판서공이 강화도로 부임하여 아우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신엽(申曅)과 함께 말하기를,
“비석감을 마련했고 석공(石工)도 작업할 준비가 되었네. 재차 사양하지 말기 바라네.”
하니, 나는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공의 휘는 익전(翊全)이고 자는 여만(汝萬)이며 동강(東江)은 공의 호이다. 시조 태사(太師) 신숭겸(申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공훈이 가장 컸던 데다 순절하였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며 처음으로 본적을 하사받아 평산(平山) 사람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휘 효(曉)가 우정언을 지냈는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나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자호는 서호산인(西湖散人)인데 이 분이 바로 공의 6대조이다. 증조 휘 영(瑛)은 우참찬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승서(承緖)는 도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흠(欽)은 영의정을 지내고 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며 문장과 덕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모친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으로 북병사 휘 제신(濟臣)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을사년(1605, 선조38) 8월 3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순수하고 성실하여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겨우 10세에 시골로 물러난 문정공을 모셨는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방문하자 공이 어른처럼 응대하고 주선하니 김선생이 몹시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글 읽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태극도(太極圖)〉의 부권(副圈 두 번째 동그라미)을 보고서,
“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는 것이다.”
하니, 문정공이 몹시 기특하게 여겼다. 많은 책을 두루 익히자 글솜씨가 크게 향상되었는데, 광해군이 갈수록 폭정을 일삼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광해군15), 이부인(李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인조가 중흥하자 문정공이 비로소 이조 판서로 조정에 나아갔는데 숭정(崇禎) 원년(1628)에 세상을 떠났다. 상을 마치고 공은 더욱 자중하였는데, 중간에 유생들과 상소하여 장릉(章陵)을 추숭하는 일이 예에 어긋난다고 논하였다.
병자년(1636), 조정이 정사를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일을 예의주시하여 여섯 가지 조목으로 선비를 선발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덕형(李德泂) 공이 상소하여 공의 학문과 행실을 아뢰었다. 당시 이조 판서로 있던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공을 의망하였는데, 주상이 이전의 일을 가지고 꾸짖자 문정공은 재주와 식견이 아깝다고 대답하였다. 곧 별시에 병과로 합격하였는데, 공은 앞서 병인년(1626)에 합격하였으나 곧 대간의 논의로 인해 파방(罷榜)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합격한 것이다. 마침 병자호란이 일어나 해를 넘겨서야 창명(唱名)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다. 천거를 받아 예문관 검열이 되고 차례로 승진하여 봉교에 이르렀으며,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당시 궁문을 출입하는 데 통제가 엄격하지 않았는데 공이 옛 법령을 거듭 밝혀 반드시 법으로 다스리니 대궐이 숙연해졌다.
사헌부 지평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소인배의 모함을 받았다. 실은 이조의 인사권을 쥔 자가 그 일을 주도하였던 것인데, 이어서 간교한 자를 끌어들이며 출척(黜陟)을 마음대로 하였다. 공이 제일 먼저 그 죄를 논하자 주상이 가납하였다. 홍문관에 선발되어 부수찬에 임명되었다가 번갈아 옮겨 교리에 이르렀으며 지제교를 겸하고 직강, 헌납을 역임하였다.
얼마 안 되어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가게 되었다. 개인 소지품을 대거 수색하였는데 한 역관이 금령을 어기고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하여 오랑캐 정명수(鄭命壽)에게 기대어 모면하려는 꾀를 부렸다. 하지만 공은 결국 체포하여 처벌하였다. 돌아와서는 시강원 문학을 역임하고 거산 찰방(居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청나라 사신이 와서 공이 형님 동양공(東陽公)과 함께 명나라를 부지하려는 뜻을 품었다고 하며 두세 재신(宰臣)과 함께 끌고갔는데 앞으로의 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당초에 동양공이 난리를 당하여 몹시 훌륭한 의리를 수립하였으며, 그 뒤 삼전도(三田渡)에 비석을 세우게 되자 전서(篆書) 쓰기를 극력 사절하였다. 공은 또 정사(正使) 최명길(崔鳴吉) 공과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를 지내면서 몹시 기휘(忌諱)하는 말을 하였다. 마침 이계(李烓)가 청나라의 죄수가 되어 평소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을 무고하였는데, 공 역시 이계가 간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심양에 도착하여 온갖 곤욕을 겪었지만 공은 끝까지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는데, 동궁이 구원해 준 덕분에 풀려났다.
도로 옥당에 들어와 의정부 사인으로 옮기고 다시 부응교, 사간, 겸필선을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과 상소하여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고, 묘소도감 도청(墓所都監都廳)에 차임되었다. 일을 마치자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나가게 되자 공은 기뻐하며,
“여기야말로 역량을 발휘하여 공헌할 수 있겠다.”
하였다. 빠져 나간 장정을 모두 찾아내어 누락된 군액(軍額)을 보충하였으며, 경내에 신칙하여 기일 내에 환곡 수만 곡(斛)을 상환하되 감히 늦는 자가 없도록 하고, 그중에 죽거나 옮겨서 호구가 없어진 경우는 모곡(耗穀)으로 충당하여 상환하였다. 학교를 정비하여 유생들을 모아 강학을 권면하니,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돌아가게 되자 백성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형조, 예조, 병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좌부승지로 옮겼다. 인조가 승하하자 상을 치르는 일을 맡았으며, 얼마 후 시책(諡冊)을 쓰고 가선대부에 올라 여러 차례 승진하여 도승지에 이르렀다. 호조 참판으로 옮겨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하였으며, 부사에 차임되어 의순공주(義順公主)를 호행(護行)하여 연경에 갔다. 돌아와서는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며, 병조로 옮겨 동지춘추관사를 겸하고 《인조실록》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는데 마침 주인집의 종이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하여 숨자 공이 나졸을 풀어서 잡아왔다. 혐의를 끌어대어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분개하며 말하기를,
“나는 법관이 되었으니 내가 아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다. 어찌 다른 것을 따지겠는가.”
하고, 마침내 사변율(徙邊律)로 논죄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개성부는 서로(西路)의 교통 요지에 위치하여 사신에게 드는 비용이 엄청났다. 관례적으로 저자 백성에게 부담을 지웠는데, 오래되자 원성이 자자하였다. 공이 부임하자마자 이를 없애고, 조정에 동과 철 만여 근을 지급해 달라고 아뢰었다. 이를 매매하여 이익을 남기니 공사간의 재정이 모두 넉넉해졌다. 마침 조정에서 화폐를 유통하다가 중도에 폐지하는 바람에 돈이 모두 개성부로 돌아왔는데 가치가 폭락하여 백성이 생업을 잃게 되었다. 공이 관청에 납부하는 세금을 모두 돈으로 대신하도록 명하자 백성이 몹시 기뻐하였다. 징수하는 대동미를 균등하게 분정(分定)했는데, 사적인 비용을 많이 붙이는 것을 보고서,
“이것은 백성을 위해 설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관리는 녹봉만 받아야 한다.”
하고, 차후로 일절 어기지 말라고 명하니 몇 달 만에 창고가 넘쳐났다.
개성부의 풍속이 소송을 좋아하여 다스리는 사람은 소송이 적체되는 것을 병폐로 여기기도 했다. 공이 정사를 보게 되자 누차 큰 소송을 판결하여 진상을 밝혀내니 패소한 자도 억울함이 없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말하기를,
“공이 임기를 마칠 때까지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요구할 수 없다.”
하였다. 체차될 때가 되자 고을 백성이 너도나도 조정에 가서 천금을 바치며 유임을 청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석을 세워 추모하였다.
마침 큰 옥사가 겨우 마무리되었는데 공은 편안히 있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외직을 구해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 부임해서 다시 청정(淸靜)하게 다스리기를 힘쓰고, 날마다 반드시 유생들을 직접 불러 가르쳤으며, 읍내의 충신, 효자, 열녀를 찾아 새로 정표하여 장려하였다. 얼마 안 되어 친척이 방백으로 부임하였으므로 피혐하여 체차되었다. 다시 개성부 유수에 임명되자 백성들이 앞다투어 양손을 이마에 얹고서 맞이하였는데 교화가 더욱 현저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떤 일로 인하여 돌아왔다.
밀양에서 조정으로 돌아온 뒤로는 이전에 역임한 관직을 다시 역임하여 예조, 병조, 형조의 참판, 좌윤, 우윤,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두 번 세 번 지내기도 하였으며 간간이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효종대왕의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에 올랐다. 이듬해 경자년(1660, 현종1) 2월, 우연히 감기에 걸려 돌아가시니 그 날짜는 27일이다. 주상이 의례대로 조문하고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덕성이 돈후하며 마음가짐이 엄정하여 평소에는 의젓한 자세를 지켰다. 식견과 사려가 밝고 깨끗하였으며 말은 겸손하고 행실은 조심스러웠다. 간혹 변고를 겪고 험난한 일을 당하는 경우에도 상황은 달랐지만 한결같이 겸손하고 공손하며 조심스럽고 확고한 태도를 위주로 하였는데 조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어려서는 몹시 효성스러워 온화하고 기쁜 안색으로 부지런히 문정공을 섬기며 성심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문정공이 효아(孝兒)라고 칭찬하였다. 거상할 때는 예법을 따르고 기일이 되면 초상 때처럼 통곡하였다. 형님에게도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날마다 찾아뵙고 안부를 살피고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반드시 여쭌 뒤에 하였다. 효종대왕의 국상(國喪) 때에는 몹시 애도하여 거의 친상과 대등할 정도로 예제를 지켰으며, 임금의 옥체가 미령할 때마다 삼가 문안하였다.
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할 때는 자신을 가다듬는 데 힘써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어진 사람과 간사한 사람의 구별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을 만류할 때 어떤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자 공이 말하기를,
“선친께서 ‘사강(士剛 김집)은 군자다운 사람이다.’라고 하셨으니, 이 어찌 만류하기를 청할 만하지 않겠는가.”
하고, 자제들을 보내 참여하게 하였다.
광주 목사로 재직할 때 정승 김자점(金自點)이 부마가 되는 손자를 위해 혼수를 요구하자 공은 세면도구만 보내주었는데,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로 여겼다.
만년에 설경헌(薛敬軒 설선(薛瑄))의 《독서록(讀書錄)》을 좋아하여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 같은 성리학 서적들을 연구하였는데 항상 집중하여 탐구하였다.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하여 퇴청(退廳)한 뒤에는 반드시 엄숙히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이르기를,
“세상의 실질적인 일은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허황된 것이다.”
하였으니, 독실한 믿음이 이와 같았다. 문장은 집안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었으며 매우 부지런히 힘썼는데 고금의 여러 대가들의 문장을 접하지 않은 것이 드물었다. 그 성취를 요약하자면 전아하고 진중하여 공벽(拱璧) 같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특히 칭찬하여 관각(館閣)에 있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서법에도 뛰어나 당시에 금석문을 지어달라는 청탁이 공에게 가장 많이 모였다.
공은 편안하고 고요한 것을 숭상하는 뜻을 지녀 출세를 일삼지 않았다. 왕실과 혼인해서는 더욱 단속하고 조심하여 조정에 벼슬하고 있더라도 마치 초야에 있거나 텅 빈 골짜기에 숨어 사는 것처럼 담박하였다. 기미를 보아 신중한 태도를 지키고 오로지 경전에 종사하여 세상의 영달과 불우에 얽매이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처음에는 임오년(1642)의 화를 당하여 갑자기 간신에게 모함을 받아 이역(異域)에 구속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신묘년(1651, 효종2)에 큰 옥사가 일어났을 때는 형세가 의심스럽고 관계가 밀접하였으나 끝내 공에게 누가 되지 않았다. 논자들이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 충성과 신의로 자신을 지킨 분으로는 공이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 공과 명성을 나란히 할 수 있다.”
하였는데, 굳이 어느 쪽이 더 어려운지 비교하자면 또 차이가 있으니, 이 어찌 겸손하고 공손하며 조심하고 확고한 태도를 지킨 결과가 아니겠는가. 아, 훌륭하다.
공은 아들들이 존귀하게 된 덕택에 누차 추증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에 장사 지냈는데 중간에 양주(楊州)로 이장했다가 훗날 무신년(1668) 8월에 충주 서쪽 중방리(中房里) 묘향(卯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혜목공(惠穆公) 창원(昌遠)의 딸로 지금 대비(大妃)이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언니이다. 단정하고 현명하여 공을 섬기면서 덕에 위배되는 일이 없었으므로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본받았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유수공(留守公 신정(申晸))으로, 예전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공의 유훈에 따라 힘써 사양하여 사대부들의 칭송을 받았다. 차남은 섬(暹)으로 빙고 별검을 지냈다. 자질이 아름답고 행실이 유순하였으며, 특히 공을 잘 섬긴다고 알려졌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애석하다. 삼남은 창(㫤)이다. 사남은 관찰사공(觀察使公 신엽(申曅))이다. 오남은 앙(昂)으로 요절하였다.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 차녀는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 삼녀는 윤지빈(尹之贇)에게 출가했다.
유수의 소생 가운데 아들은 징화(徵華), 좌랑 서화(瑞華), 승지 계화(啓華), 진화(鎭華), 상화(尙華), 석화(錫華), 택화(宅華), 종화(從華)이다. 딸은 참봉 이석형(李碩亨), 진사 이익하(李翊夏), 홍중익(洪重益)에게 출가했다. 별검의 소생은 지화(志華), 참봉 처화(處華), 몽화(夢華)인데, 처화는 출계하여 창의 후사가 되었다. 관찰사의 소생 가운데 아들은 채화(采華), 세화(世華)이고, 딸은 홍중성(洪重聖)에게 출가했다. 대사간의 소생은 희유(喜濡)이다. 숭선군의 소생 가운데 아들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고 딸은 윤세정(尹世鼎), 윤정호(尹廷虎), 안수정(安壽鼎), 조명봉(趙鳴鳳)에게 출가했다. 증손으로 좌랑은 2남 1녀를 두었고, 승지는 2남 2녀를 두었으며, 진화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혁혁한 저 장절공은 / 烈彼壯節
평산 신씨의 시조라네 / 啓籍東陽
면면하고 혁혁하게 이어져 / 綿綿赫赫
문무로 번갈아 창성하였네 / 文武迭昌
누가 그중에 으뜸인가 / 孰爲其宗
우리 문정공이라네 / 曰我文貞
공이 대를 이어 나왔으니 / 公惟嗣興
형님과 함께였다네 / 爰曁元兄
효성스럽고 겸손하며 / 孝順謙謹
충성스럽고 걸출하니 / 忠義英傑
비유하자면 노천이 / 譬如老泉
두 아들을 이름 지은 것과 같네 / 二名是錫
아! 공이 조정에 오를 적에 / 繄公登朝
큰 난리가 치유되지 않았네 / 大難未瘳
곧은 도를 드러내자마자 / 直道始彰
곧 북쪽 역참으로 쫓겨났네 / 旋絀北郵
갑자기 모함을 당하여 / 蜮弩倏發
큰 화에 걸려들었네 / 鉅禍乃嬰
죄수가 되어 묶였지만 / 鋃鐺徽纆
평탄한 길처럼 여겼네 / 視猶夷庚
세상만사 겪고나서는 / 亦旣嘗世
마침내 외직으로 나갈 뜻 품어 / 遂懷左跡
밀양 부사로 선정을 베풀고 / 南徼遺惠
개성 유수로 치적을 쌓았네 / 西都底績
험한 길에서 온갖 난관 겪었는데 / 險塗難盡
큰 옥사가 또 일어났다네 / 大獄又熾
공은 그 와중에 / 公在中間
공경하고 조심하였으니 / 夔夔恭畏
오직 충성과 신의를 / 惟忠與信
실로 근본으로 삼았네 / 寔爲本原
또 학문을 좋아하여 / 抑嘗好學
바탕에 문채를 겸비했네 / 質有其文
천지신명의 도움을 받아 / 神明所祐
온갖 복록이 한꺼번에 일어나 / 百祿騈起
평온히 일생을 마쳤으니 / 是以克終
어찌 화를 면할 뿐이랴 / 奚啻免矣
중방리의 언덕에 / 中房之原
우뚝 솟은 돌이 있으니 / 有石穹崇
내가 비명을 지어 / 我銘于顯
어진 풍도 드러내리라 / 俾闡仁風
생질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좨주 박세채(朴世采)가 짓다.
원문
유명 조선국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神道碑銘 幷序〕 [박세채(朴世采)]
有明朝鮮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神道碑銘 幷序 [朴世采]
內兄太宗伯申公晸以書來曰。先人顯刻。無可屬筆者。惟子少嘗逮事。能知其志業。幸有述也。世采以不嫺古文辭。旣而。宗伯公出守江都。與弟黃海觀察使曅竝辭曰。石具矣。剞劂氏將奏功矣。願毋再辭。世采遂不敢辭。公諱翊全。字汝萬。東江其號也。鼻祖太師崇謙。佐麗祖功伐最大。又殉節以卒。諡壯節。始賜籍爲平山人。逮我 朝。有諱曉。爲右正言。言事不合。退居以終。自號西湖散人。是公六代祖也。曾祖諱瑛。右參贊 贈左贊成。祖諱承緖。都事 贈領議政。考諱欽。領議政。際遇 宣,仁兩聖。文章德業。卓然名世。諡文貞。配享 仁祖廟庭。妣全義李氏。太師棹之後。北兵使諱濟臣之女。公以萬曆乙巳八月三日生。幼已醇愨。受學不怠。甫十歲。侍文貞公遯荒。沙溪金先生長生爲來訪。公應對周旋如成人。金先生亟加奬厲。自是整衣危坐。誦讀以爲常。及觀太極圖副圈曰。此陰中有陽。陽中有陰也。文貞公深奇之。旣博習群書。詞業大進。値光海滋昏。自屛不售。天啓癸亥。罹李夫人憂。 仁祖中興。文貞公始由冢宰進位。崇禎逮元。捐館舍。喪除。公愈自謹飭。間與章甫上書。論 章陵追崇非禮。丙子。 朝廷銳意修攘。 命六條選士。李公德泂疏公學行。金文正公尙憲方在銓注擬。 上因前事督責。文正公對以才識可惜。旋擢別試丙科。先是丙寅。公登第。旋因臺議罷榜。至是再登焉。會虜東創。踰年乃唱名。補承文院正字。薦爲藝文館檢閱。序陞至奉敎。調成均館典籍,司諫院正言,兵曹佐郞。時宮閽不嚴。公輒申明舊令。必繩以法。闕庭肅然。遷司憲府持平。金文正公自南漢退歸。被群小媒孼。秉東銓者實尸之。繼引憸巧士。恣意黜陟。公首論其罪。上嘉納。選入弘文館。拜副修撰。迭遷至校理。兼知製敎。歷直講,獻納。未幾。贊价赴瀋陽。大搜私橐。有一舌官犯禁。恐被重究。謀投鄭虜命壽以狐鼠焉。公竟捕治之。還歷侍講院文學。左遷居山察訪。明年北使來。謂公曁伯氏東陽公志扶 中朝。竝以數三宰臣去。禍將叵測。初東陽公當亂。樹義甚偉。及後豎碑三田渡上。力辭書篆。公又與上价崔公鳴吉。過祭箕于廟。夫有忌諱語。會李烓爲虜囚反噬。以及素不相悅者。公亦嘗言烓奸故也。比至瀋。窘辱百端。公夷然終不動。賴 東宮救解。還入玉堂。轉議政府舍人。復歷副應敎,司諫。兼弼善。 昭顯世子卒。與諸僚上疏。請行朞制。差墓所都廳。事竣。陞通政階。出爲光州牧使。公喜曰。此庶可自效。悉括隱丁。充諸軍闕額。勑境內期輸糶糴。幾累萬斛。無敢後者。其有死徙絶戶。輒以耗穀償已。修黌舍。會諸生勸課。一州大治。比歸。立石頌德。入拜承政院同副承旨。歷刑,禮,兵三曹參議。遷左副承旨。 仁祖陟方。掌治喪禮。俄書 諡冊。進嘉善因累躋至都承旨。遷戶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差副使。護義順公主行赴燕。還拜禮曹參判。遷兵曹兼同知春秋館。與修 仁祖實錄。拜漢城府右尹。適主家奴犯罪逃匿。公發卒捕之。有引形跡爲言者。公奮曰。我爲法官。知守三尺耳。奚論其他。竟論徙邊。出爲開城府留守。府當西路。綰轂客使。所需巨萬。例責市民。久而號怨。公至立除之。奏給銅鐵萬餘斤。俾得懋遷取息。公私竝裕。時 朝廷行錢法中廢。盡歸于府。價賤民將失業。公下令諸賦納官者。皆代以錢。民大悅。旣均定大同徵米。見其多麗私費曰。此非爲民設者耶。官司唯當食俸祿。仍命自後一切毋犯。數月庫藏告溢。府俗好訟。爲治者或病稽滯。至公視事。屢斷大訟。輒發其情僞。負者亦自無冤。民爲之語曰。終公任不可以非理干。將遞。府人相率至朝堂。願納千金借留。不得。乃立石追思。會大獄甫完。公有不能自安者。求外得密陽府使。更務淸靜爲治。日必手引諸生訓迪。訪邑中忠臣孝子烈女。新旌楔以奬之。俄以方伯親嫌遞。復拜開城留守。民爭加額以迎。治化益著。未幾因事歸。蓋自密陽還 朝。及是偏復舊踐。爲禮,兵,刑參判,左右尹,都承旨。或至再三。間兼同知義禁。以書 孝宗哀冊。進嘉義。明年庚子二月。偶感疾而卒。實二十有七日也。 上命致弔祭如儀。公德性渾厚。存心簡正。平居儼然自持。識慮明潔。言遜而行恪。至或歷變履險。事有不齊。一以謙恭謹確爲主。未嘗少變也。少篤孝順。事文貞公。婉愉服勤。靡不克致。文貞公稱爲孝兒。居憂率禮。遇諱辰攀號如初。以及伯氏。愛敬交至。鎭日往省。小大必稟而後行。其在孝宗大恤。哀悼甚。持制幾視親喪。每値 玉候違豫。起居唯謹。當官裁事。務自淬厲。不畏強禦。賢邪之會。趣舍益明。當太學生疏留愼齋金先生集。或有異議者。公曰。先君嘗謂士剛君子人。此豈不足請留耶。遣子往參。在光州。相自點爲孫駙馬求昏需。公只貽以梳具。聞者難之。晩愛薛敬軒讀書錄。以爲有益身心。因究覽性理家書。如近思錄,心經。常潛心玩繹。尤喜讀易。公退。必莊誦不置。嘗曰。世間實事。惟爲己之學。餘皆幻境也。其篤信類此。爲文章。本於家庭。用力甚勤。古今諸大家。鮮不染指。要其所就。典雅簡重。如拱璧然。澤堂李公植,樂靜趙公錫胤。特相稱賞。恨不處以文苑。兼工書法。一時金石。多歸之最。公志尙恬靜。不事進取。及連姻宮掖。益加斂縮雖寄跡朝端。澹然若處林野逃空虛。見微守約。惟以墳典從事。凡世之顯晦臧否。無足以嬰其懷。繇此始當壬午之役。遽中奸螫。不免拘幽於異域矣。至于辛卯大獄。勢嫌地逼。終不得爲公累。論者謂是時能以忠信自保者。公可與李忠翼公時白竝美。苟欲較其難易。又有所分。則斯豈非謙恭謹確之驗耶。嗚呼盛哉。公以諸子貴。累贈領議政。初葬永平。中移楊州。後以戊申八月。卜葬于忠州西中房里向卯之原。夫人楊州趙氏。惠穆公昌遠之女。今 太母慈懿殿之姊也。端莊明達。事公無違德。一家咸取式焉。生五男。長卽留守公。曾任冢宰。以公遺訓力辭。爲薦紳艶誦。次暹。別檢。質美行馴。尤號善事公。不幸蚤歿。惜哉。次昶。次卽觀察公。次昂早夭。三女。長適大司諫李嵇。次 王子崇善君澂。次尹之贇。孫男。徵華。瑞華佐郞。啓華承旨。鎭華,尙華,錫華,宅華,從華。女適參奉李碩亨進士李翊夏,洪重益。爲留守出。志華,處華參奉。夢華爲別檢出。處華出爲昶後。采華,世華。女適洪重聖。爲觀察出。喜濡爲大諫出。東平君杭。女適尹世鼎,尹廷虎,安壽鼎,趙鳴鳳。爲崇善出。曾孫佐郞二男一女。承旨二男二女。鎭華一男一女。竝幼。銘曰。
烈彼壯節。啓籍東陽。 綿綿赫赫。文武迭昌。 孰爲其宗。曰我文貞。 公惟嗣興。爰曁元兄。 孝順謙謹。忠義英傑。 譬如老泉。二名是錫。 繄公登朝。大難未瘳。 直道始彰。旋絀北郵。 蜮弩倏發。鉅禍乃嬰。鋃鐺徽纆。視猶夷庚。 亦旣嘗世。遂懷左跡。 南徼遺惠。西都底績。 險塗難盡。大獄又熾。 公在中間。夔夔恭畏。 惟忠與信。寔爲本原。 抑嘗好學。質有其文。 神明所祐。百祿騈起。 是以克終。奚啻免矣。中房之原。有石穹崇。 我銘于顯。俾闡仁風。
甥姪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朴世采。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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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판독문 해석문 강민식
증(贈) 영의정(領議政) 예조참판(禮曹參判) 동강(東江) 신공(申公)의 신도비명(銘神道碑).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가의대부(嘉義大夫) 예조참판(禮曹叅判) 겸(兼) 동지의금부춘추관사(同知義禁府春秋館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신공(申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아울러 서문이라.
생질(甥姪)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兼)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박세채(朴世采)가 짓다. 생질(甥姪)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議政府右▨▨) ▨▨▨▨▨▨▨▨▨▨▨▨▨▨▨ 외손(外孫) 현록대부(顕禄大夫) 동평군(東平君) ▨▨▨▨▨▨▨▨▨ ▨ ▨ 외사촌형 예조판서 신정(申晸) 공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선친의 비문을 지어야 하는데 글을 부탁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그대가 어려서 일찍이 섬긴 분이니 능히 그분의 뜻과 업적을 알 것입니다. 글을 짓기 바랍니다.” 하였다. 세채(世采)는 고문사(古文)을 배우지 않았으나 사양하였으나 얼마 뒤에 판서공이 강화도로 부임하며 아우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엽(曅)과 더불어 함께 말하기를, “돌은 갖추었고, 석공(石工)도 장차 준비가 되었습니다. 원컨대 다시 사양하지 마십시요.” 하니, 세채는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공(公)의 휘(諱)는 익전(翊全)이요, 자(字)는 여만(汝萬)이며 동강(東江)은 그의 호이다. 비조(鼻祖) 태사(太師) 숭겸(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이 가장 컸고 또 순절하여 졸하였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비로소 본적을 하사 받아 평산인(平山人)이 되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효(曉)가 있으니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언사(言事)가 부합하지 않아 물러나 살다 돌아가셨다. 자호(自號)는 서호산인(西湖散人)이니 이 분이 6대조이다. 증조 휘 영(瑛)은 우참찬(右參贊)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휘 승서(承緖)는 도사(都事)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흠(欽)은 영의정이고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성왕(聖王)을 만나 문장과 덕업이 탁월하여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는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으로 북병사 휘 제신(濟臣)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을사(乙巳, 1605년, 선조 38) 8월 3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이미 순수하고 성실하여 배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겨우 10세에 문정공을 모시고 시골로 은둔하였는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방문하자 공이 어른처럼 응대하고 주선하니 김선생이 몹시 장려하였다. 이때부터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글 읽는 것이 일상이었다. 의 부권(副圈)을 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다.” 하니, 문정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이미 여러 책을 두루 익혀 글솜씨가 크게 진척되었는데, 광해군의 혼정이 더하자 스스로 몸을 감추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천계(天啓) 계해(癸亥, 1623년, 광해군 15)에 이부인(李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인조가 중흥하자 문정공이 비로소 이조판서로 벼슬에 나아갔는데 숭정(崇禎) 원년(1628)에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을 마치고 공은 더욱 삼가고 삼갔는데, 그 사이 유생들과 더불어 상소하여 장릉(章陵)의 추숭은 예가 아니라고 논하였다. 병자(丙子, 1636년)에 정교(政敎)를 닦고 적을 막아내고자 하는 뜻을 다잡아 여섯 가지 조목으로 선비를 선발하도록 명하였다. 이덕형(李德泂) 공이 상소하여 공의 학문과 행의를 아뢰었다.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공은 바야흐로 이조판서로 있으며 의망하였는데, 상이 이전의 일을 가지고 꾸짖자 문정공은 재주와 식견이 아깝다고 대답하였다. 곧이어 별시(別試)에 병과로 뽑혔는데, 앞서 병인(丙寅, 1626년)에 급제하였으나 곧 대간의 논의로 인해 파방(罷榜)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오른 것이다. 오랑캐가 동쪽을 괴롭힌 때를 만나 해를 넘겨 이내 창명(唱名)하였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천거되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고 차례로 봉교(奉敎)에 승진하였다.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병조좌랑(兵曺佐郞)에 뽑혔다. 이때 궁궐(宮闕)이 엄격하지 않아 공이 문득 옛 법령을 펴서 밝혀 반드시 법으로 다스리니 궐내가 숙연해졌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정공 김공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물러나 돌아갔다가 소인배의 모함을 받았다. 이조(吏曹)의 인사권을 가진 자가 실제 그 일을 주도하였는데, 이어서 간교한 자를 끌어들이며 출척(黜陟)을 마음대로 하였다. 공이 제일 먼저 그 죄를 논하자 상이 가납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다가 번갈아 옮겨 교리(校理)에 이르렀으며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 직강(直講),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보내져 심양(瀋陽)에 가게 되었다. 개인을 대거 수색하였는데 한 역관이 금령을 어긴 것이 있어 무거운 처벌이 두려워 쥐새끼 같은 오랑캐 정명수(鄭命壽)에게 기대어 모면하려 하였다. 공은 결국 체포되어 다스려졌다. 돌아와서는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을 역임하고 거산찰방(居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청나라 사신이 와서 말하길, 공이 형님 동양공(東陽公)과 함께 명나라를 부지하려는 뜻을 품었다고 하며 두세 재신(宰臣)과 함께 끌고갔는데 앞으로의 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당초에 동양공이 난리를 당하여 매우 훌륭한 의리를 세웠으며, 그 뒤 삼전도(三田渡)에 비석을 세우게 되자 전서(篆書)를 힘써 사절하였다. 공은 또 정사(正使) 최명길(崔鳴吉) 공과 기자묘(箕子廟)를 지나다 제사를 지내면서 몹시 기휘(忌諱)하는 말을 하였다. 마침 이계(李烓)가 오랑캐의 죄수가 되어 도리어 평소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을 무고하였는데, 공 역시 이계가 간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심양에 이르러 온갖 곤욕을 겪었지만 공은 끝까지 동요하지 않고 의연하였는데, 동궁(東宮)이 구원해 준 덕분에 풀려났다. 돌아와 옥당(玉堂)에 들어갔다가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으로 옮기고 다시 부응교(副應敎), 사간(司諫), 겸필선(兼弼善)을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과 더불어 상소하여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고, 묘소도감도청(墓所都監都廳)에 차임되었다. 일을 마치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나가자, 공이 기뻐하여 말하길, “여기는 가히 스스로 힘쓸 만한 곳이다.” 하였다. 숨은 장정을 모두 찾아내어 누락된 군액(軍額)을 보충하였고, 경내를 정비하여 기일 내에 조적(糶糴) 수만 곡(斛)을 상환하되 감히 늦는 자가 없도록 하고, 그중에 죽거나 옮겨서 호구가 없어진 경우는 모곡(耗穀)으로 충당하여 상환하였다. 학교를 정비하여 유생들을 모아 과업을 권면하니,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돌아가게 되자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들어와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형조, 예조, 병조 세 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하고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 인조가 승하하자 상례를 맡았으며, 얼마 후 시책(諡冊)을 쓰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여러 차례 승진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옮겨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하였다. 부사(副使)에 차임되어 의순공주(義順公主)를 호행(護行)하여 연경에 갔다. 돌아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으며, 병조(兵曹)로 옮겨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고 더불어《인조실록》을 찬수하였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주인집 종이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하여 숨자 공이 나졸을 풀어서 잡아왔다. 해억을 끌어와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분개하며 말하기를, “나는 법관이 되었으니 내가 아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다. 어찌 다른 것을 따지겠는가.” 하고, 마침내 사변율(徙邊律)로 논죄하였다. 나아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부는 서로(西路)의 교통 요지에 해당하여 사신에게 드는 비용이 엄청났다. 관례에 따라 저자 백성에게 부담을 지웠는데, 오래되니 원성이 자자하였다. 공이 이르러 이를 없애고, 구리와 쇠 만여 근을 지급해 달라고 아뢰었다. 이를 매매하여 이익을 남기니 공사간에 모두 넉넉해졌다. 이때 조정에서 화폐를 유통하다가 중도에 폐지하는 바람에 돈이 모두 개성부로 돌아왔는데 가치가 떨어져 백성이 생업을 잃게 되었다. 공이 관청에 납부하는 세금을 모두 돈으로 대신하도록 명하자 백성이 크게 기뻐하였다. 징수하는 대동미를 균등하게 분정(分定)했는데, 사적인 비용을 많이 붙이는 것을 보고서는 말하길, “이것은 백성을 위해 설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관리는 녹봉만 받아야 한다.” 하고, 이내 이후로 일절 어기지 말라고 명하니 몇 달 만에 창고가 넘쳐났다. 부의 풍속이 소송을 좋아하여 다스리는 사람은 소송이 쌓이고 막히는 것을 병폐였다. 공이 친히 업무를 보면서는 누차 큰 소송을 판결하여 진상을 밝혀내니 진 자 또한 스스로 억울함이 없었다. 백성들이 그것을 일러 말하기를, “공이 임기를 마칠 때까지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은 불가하다.” 하였다. 장차 체차되자 부의 백성들이 서로를 이끌고 조정에 이르러 천금을 바치며 유임을 청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석을 세워 마음을 쫓았다. 마침 큰 옥사가 겨우 마무리되어, 공은 편안히 있을 수 없어 외직을 구해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 다시 청정(淸靜)하게 다스리기를 힘쓰고, 날마다 반드시 유생들을 손수 이끌어 가르쳤으며, 고을 내 충신, 효자, 열녀를 찾아 새로 정표하여 장려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친척이 방백으로 부임하였으므로 피혐하여 체차되었다. 다시 개성부 유수(留守)에 제수되자 백성들이 앞다투어 이마에 손을 얹고 공경하여 맞이하였는데 교화로 다스리는 것이 더욱 현저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일로 인하여 돌아왔다. 대개 밀양에서 조정으로 돌아온 뒤로는 두루 이전의 관직을 다시 역임하여 예조, 병조, 형조의 참판, 좌윤, 우윤, 도승지가 되었는데 두 번 세 번 지내기도 하였으며 그 사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효종의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이듬해 경자(庚子, 1660년, 현종 1) 2월에 우연히 감기에 걸려 돌아가시니 실로 27일이다. 상이 의례대로 조문하고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덕성이 크고 원만하며 마음가짐이 간결하고 정직하여 평소의 삶이 근엄한 모양을 스스로 지켰다. 식견과 사려가 밝고 깨끗하였으며 말은 겸손하고 행실은 삼갔다. 혹은 변고를 겪고 험난한 일을 당함에 이르러 사정이 한결 같지 않더라도 한결같이 겸손하고 공손하며 삼가고 확고함을 위주로 하였는데 일찍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어려서는 독실히 효성스럽고 온화하여 문정공을 섬김에 친숙하게 즐거워하며 복종하고 힘써 이르지 않은 것이 없어 문정공이 효성스런 아이라고 칭찬하였다. 장례를 치를 때는 예법을 따르고 제삿날이 되면 초상 때처럼 통곡하였다. 큰형에게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고, 날마다 찾아가서 안부를 살피고 크고 작은 일이건 반드시 여쭌 후에 행하였다. 효종의 국상(國喪)에 있어서는 애도함이 심하였고 거의 친상(親喪)를 보는 듯 예제를 갖추었다. 매번 임금의 안후가 좋지 않을 때면 기거(起居)를 오로지 삼갔다. 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할 때는 자신을 갈고닦는데 힘쓰고, 강포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사람이 모이면 구별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태학생(太學生)들이 신재(愼齋) 김집(金集) 선생의 유임(留任)을 상소할 때에 혹 다른 의견을 가진 자가 있자 공이 말하기를, “선친께서 사강(士剛, 김집)은 군자다운 사람이라고 하셨으니, 이 어찌 유임을 청하는 것이 족하지 않은가.” 하고, 자식을 보내 참여하게 하였다. 광주에 있을 때 재상 김자점(金自點)이 부마가 되는 손자를 위해 혼수를 요구하자 공은 단지 머리 손질 도구만 보내주었는데, 들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만년에 설경헌(薛敬軒)의 《독서록(讀書錄)》을 좋아하여 몸과 마음에 유익함이 있다 하였다. 인하여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같은 성리학 서적을 연구하는데 항상 마음 깊이 그 뜻을 생각하고 찾았다. 더욱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공은 물러나서 반드시 엄숙히 암송하기를 그만 두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세상 실제의 일은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이고 나머지는 모두 허황된 것이다.” 하였으니, 독실한 믿음이 이와 같았다. 문장을 지을 때는 집안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었으며 매우 부지런히 힘썼는데 고금의 여러 대가들의 문장을 접하지 않은 것이 드물었다. 그 성취를 요약하면 전아하고 진중하여 공벽(拱璧) 같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특히 서로 칭찬하였고, 홍문관[文苑]에 들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겸하여 서법에도 공교로워 한때 금석(金石)의 청탁이 가장 많았다. 공은 항상 염정자수(恬靜自守)를 숭상하고 뜻을 지녀 출세를 일삼지 않았다. 왕실과 혼인해서는 더욱 단속하고 조심하여 비록 조정에 벼슬하고 있더라도 마치 초야에 있거나 텅 빈 골짜기에 숨어 사는 것처럼 담박하였다. 기미를 보아 분수를 지키고 오직 고전에 종사하여 무릇 세상에 드러남과 감추어짐, 좋고 나쁜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처음 임오(壬午, 1642)의 싸움을 당하여 갑자기 간신에게 모함을 받아 이역(異域)에 유폐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신묘(辛卯, 1651년, 효종 2)의 큰 옥사가 일어났을 때는 형세가 의심스럽고 지위를 핍박 받았으나 끝내 공에게 누가 되지 않았다. 논자들이 이르기를, “이때에 능히 충성과 신의로 자신을 보존한 것은 공이 가히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 공과 나란히 훌륭하다.” 하였는데, 굳이 어렵고 쉬운 지를 비교하자면 또 차이가 있으니, 이 어찌 겸손하고 공손하며 조심하고 확고함의 징험이 아니겠는가. 오호! 훌륭하도다. 공은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 누차 추증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처음에 영평(永平)에 장사 지냈는데 중간에 양주(楊州)로 이장했다가 훗날 무신(戊申, 1668년, 현종 9) 8월에 충주 서쪽 중방리(中房里) 묘향(卯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양주조씨(楊州趙氏)는 혜목공(惠穆公) 창원(昌遠)의 딸이다. 지금 대비(大妃)이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언니이다. 단정하고 명달하여 공을 섬기면서 덕에 벗어나는 일이 없었으니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본받았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유수공(留守公)으로, 일찍이 이조판서에 부임하였으나 공의 유훈에 따라 힘써 사양하여 사대부들의 칭송을 받았다. 차남 섬(暹)은 별검(別檢)으로 자질이 아름답고 행실이 유순하였으며, 더욱 공을 잘 섬긴다고 알려졌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애석하다. 다음은 창(㫤)이고, 다음은 곧 관찰공(觀察公)이다. 다음은 앙(昂)으로 요절하였다. 3녀의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 차녀는 왕자 숭선군(崇善君) 징(澂), 다음은 윤지빈(尹之贇)에게 시집갔다. 손자 징화(徵華), 좌랑 서화(瑞華), 승지 계화(啓華), 진화(鎭華), 상화(尙華), 석화(錫華), 택화(宅華), 종화(從華)이고, 손녀는 참봉 이석형(李碩亨), 진사 이익하(李翊夏), 홍중익(洪重益)에게 시집갔는데 유수(留守)의 소생이다. 지화(志華), 참봉 처화(處華), 몽화(夢華)는 별검(別檢)에서 나왔다. 처화는 출계하여 창의 후사가 되었다. 채화(采華), 세화(世華), 딸은 홍중성(洪重聖)에게 시집갔는데 관찰 소생이다. 희유(喜濡)는 대간(大諫)에게서 나왔다. 동평군(東平君) 항(杭), 딸은 윤세정(尹世鼎), 윤정호(尹廷虎), 안수정(安壽鼎), 조명봉(趙鳴鳳)에게 시집갔는데 숭선(崇善) 소생이다. 증손으로 좌랑은 2남 1녀를 두었고, 승지는 2남 2녀, 진화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銘)에 가로되,
저 장절공의 위엄은 烈彼壯節
동양[平山] 신씨의 시조라네 啓籍東陽
면면하고 혁혁하게 이어져 綿綿赫赫
문무로 번갈아 창성하네 文武迭昌
누가 그중에 으뜸인가 孰爲其宗
우리 문정공이라 이르네 曰我文貞
공이 대를 이었으니 公惟嗣興
형님과 함께였네 爰曁元兄
효순하고 겸근하니 孝順謙謹
충의의 영걸이라 忠義英傑
노천(老泉)에 비유하자면 譬如老泉
두 명의 아들 이름 二名是錫
아! 공이 조정에 오를 적에 繄公登朝
큰 난리 끝에 大難未瘳
곧은 도를 드러내나 直道始彰
곧 북쪽 역참으로 쫓겨났네 旋絀北郵
갑자기 당한 모함 蜮弩倏發
큰 화에 걸려들었네 鉅禍乃嬰
죄수 되어 묶였지만 鋃鐺徽纆
평탄한 길처럼 여겼네 視猶夷庚
이른 세상 겪었으니 亦旣嘗世
마침내 외직에 뜻을 품어 遂懷左跡
남쪽에서 베푼 선정 南徼遺惠
개성에 쌓인 치적 西都底績
험한 길 온갖 난관 險塗難盡
큰 옥사 또 치열하네 大獄又熾
공은 그 와중에 公在中間
공경하고 조심하니 夔夔恭畏
오직 충성과 신의로 惟忠與信
이것이 근본일세 寔爲本原
학문을 좋아하니 抑嘗好學
바탕이 문장이라 質有其文
신명의 도움 받아 神明所祐
온갖 복록이 함께 일어 百祿騈起
이것으로 마치시니 是以克終
어찌 이제 면한 것인가 奚啻免矣
중방리의 언덕에 中房之原
우뚝 솟은 돌이 있어 有石穹崇
내가 비명 지어 我銘于顯
어진 풍도 드러내리 俾闡仁風
숭정기원(崇禎紀元) 60년 정묘(丁卯, 1687년, 숙종 13) 월 일에 세우다.
원문
전체판독문해석문 『금석문 탁본 조사보고서(2019)』
贈領議政禮曹參判東江申公銘神道碑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嘉義大夫禮曹叅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神道碑銘 并序 甥姪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朴世采撰 甥姪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 外孫顕禄大夫東平君▨▨▨▨▨▨▨▨▨ ▨ ▨ 內兄太宗伯申公晸以書來曰先人顯刻無可屬筆者惟子少嘗逮事能知其志業幸有述也世采以不嫺古文辭旣而宗伯公出守江都與弟黃海觀察使曅竝辭曰石具矣剞劂氏將 奏功矣願毋再辭世采遂不敢辭公諱翊全字汝萬東江其號也鼻祖太師崇謙佐麗祖功伐最大又殉節以卒諡壯節始賜籍爲平山人逮我 朝有諱曉爲右正言言事不合退居以 終自號西湖散人是公六代祖也曾祖諱瑛右參贊 贈左贊成祖諱承緖都事 贈領議政考諱欽領議政際遇 宣仁兩聖文章德業卓然名世諡文貞配享 仁祖廟庭妣全義李 氏太師棹之後北兵使諱濟臣之女公以萬曆乙巳八月三日生幼已醇愨受學不怠甫十歲侍文貞公遯荒沙溪金先生長生爲來訪公應對周旋如成人金先生亟加奬厲自是整 衣危坐誦讀以爲常及觀太極圖副圈曰此陰中陽陽中陰也文貞公深奇之旣博習群書詞業大進値光海滋昏自屛不售天啓癸亥罹李夫人憂 仁祖中興文貞公始由冢宰進位 崇禎逮元捐館舍喪除公愈自謹飭間與章甫上書論 章陵追崇非禮丙子 朝廷銳意修攘 命六條選士李公德泂疏公學行金文正公尙憲方在銓注擬 上因前事督責文正 公對以才識可惜旋擢別試丙科先是丙寅公登第旋因擧子有違式者臺議嘩甚並罷一榜至是再登焉會虜東創踰年乃唱名補承文院正字薦爲藝文館檢閱序陞至奉敎調成均 館典籍司諫院正言兵曺佐郞時宮閽不嚴公輒申明舊令必繩以法闕庭肅然遷司憲府持平金文正公自南漢退歸被群小媒孼秉東銓者實尸之繼引憸巧士恣意黜陟公首論其 罪 上嘉納選入弘攵館拜副修撰迭遷至校理兼知製 敎歷直講獻納未幾贊价赴瀋陽大搜私橐有一舌官犯禁恐被重究謀投鄭虜命壽以狐鼠焉公竟捕治之還歷侍講院文 學左遷居山察訪明年北使來謂公曁伯氏東陽公志扶 中朝並以數三宰臣去禍將叵測初東陽公當亂樹義甚偉及後豎碑三田渡上力辭書篆公又與上价崔公鳴吉過祭箕子 廟大有忌諱語會李烓爲虜囚反噬以及素不相悅者公亦嘗言烓奸故也比至瀋窘辱百端公夷然終不動賴 東宮救解還入玉堂轉議政府舍人復歷副應敎司諫兼弼善昭顯 世子卒與諸僚上疏請行朞制差墓所都廳事竣陞通政階出爲光州牧使公喜曰此庶可自效悉括隱丁充諸軍闕額勑境內期輸糶糴幾累萬斛無敢後者其有死徙絶戶輒以耗穀 償已修黌舍會諸生勸課一州大治比歸立石頌德入拜承政院同副承㫖歷刑禮兵三曺叅議遷左副承㫖 仁祖陟方掌治喪禮俄書 諡冊進嘉善因累躋至都承旨遷戶曹參判 兼五衛都摠府副摠管差副使護義順公主行赴燕還拜禮曹參判遷兵曹兼同知春秋館與修 仁祖實錄拜漢城府右尹適主家奴犯罪逃匿公發卒捕之有引形跡爲言者公奮曰 我爲法官知守三尺耳奚論其他竟論徙邊出爲開城府留守府當西路綰轂客使所需巨萬例責市民久而號怨公至立除之奏給銅鐵萬餘斤俾得懋遷取息公私竝裕時朝廷行 錢法中廢盡歸于府價賤民將失業公下令諸賦納官者皆代以錢民大悅旣均定大同徵米見其多麗私費曰此非爲民設者耶官司唯當食俸祿仍命自後一切毋犯數月庫蔵告溢 府俗好訟爲治者或病稽滯至公視事屢㫁大訟輒發其情僞負者亦自無冤民爲之語曰終公任不可以非理干將遆府人相率至朝堂願納千金借㽞不得乃立石追思㑹大獄甫完 公有不能自安者求外淂密陽府使更務淸靜爲治日必手引諸生訓迪訪邑中忠臣孝子烈女新旌楔以奬之俄以方伯親嫌逓復拜開城留守民爭加額以迎治化益著未幾因事歸 盖自密陽還 朝及是偏復舊踐爲戶禮兵刑叅判左右尹都承㫖或至再三間兼同知義禁以書 孝宗哀冊進嘉義明秊庚子二月偶感疾而卒實二十有七日也 上命致吊祭賻 如儀公德性渾厚存心簡正平㞐儼然自持識慮明潔言遜而行恪至或厯變履險事有不齊一以謙恭謹確爲主未嘗少變也少䔍孝順事攵貞公婉媮服勤靡不克致文貞公稱爲孝 兒居憂率禮遇諱辰攀號如初以及伯氏愛敬交至鎮日往省小大必稟而後行其在 孝宗大恤哀痛甚持制幾視親喪每值 玉候違豫起居唯謹當官裁事務自淬厲不畏強禦賢 邪之會趣舍益明當太學生䟽㽞慎齋金先生集或有異議者公曰先君嘗謂士剛君子人此豈不足請留耶遣子徃叅在光州相自點爲孫駙馬求昏需公只貽以梳具闻者難之晩愛 薛敬軒讀書錄以爲有益身心囙究覧性理家書如近思録心経常潜心玩繹尤喜讀易公退必莊誦不置嘗曰世間實事惟爲己之學餘皆幻境也其篤信類此爲文章本於家庭用力 甚勤古今諸大家鮮不染指要其所就典雅簡重如拱璧然澤堂李公植樂静趙公錫胤特相稱賞恨不䖏以文苑兼工書法一時金石多歸之最公志尙恬靜不事進取及連姻宮掖益 加歛縮雖寄跡朝端澹然若䖏林野逃空虚見微守約惟以墳典従事凡世之顯晦藏否無足以嬰其懷繇此始當壬午之役遽中奸螫不免拘幽於異域矣至于辛卯大獄地嫌勢逼動 成危疑而終不淂爲公累論者謂是時能以忠信自保者公可與李忠翼公時白竝美苟欲較其難易又有所分則斯豈非公平生謙恭謹確之驗耶嗚呼盛㢤公以諸子貴累 贈領議 政初葬永平中移楊州後以戊申八月卜葬于忠州西中房里向卯之原夫人楊州趙氏恵穆公昌逺之女今 太母慈懿殿之姊也端莊明達事公無違德一家咸取式焉生五男長即 留守公曾任冢宰以公遺訓力辭爲薦紳艶誦次暹別檢質美行馴尤號善事公不幸蚤歿惜㢤次㫤次即觀察公次昂早夭三女長適大司諫李嵇次 王子崇善君澂次尹之贇孫男 徵華瑞華佐郞啓華承㫖鎮華尙華錫華省華従華女適㕘奉李碩亨進士李翊夏洪重益爲㽞守出志華䖏華叅奉夢華爲別檢出䖏華出爲㫤後采華女適洪重聖爲觀察出喜濡爲 大諫出東平君杭女適尹世鼎尹廷虎安壽鼎趙鳴鳳爲崇善出曾孫佐郞二男一女承㫖二男二女鎮華一男一女並㓜銘曰 烈彼壯節啓籍東陽 綿綿赫赫文武迭昌 孰爲其宗曰我文貞 公惟嗣興爰暨元兄 孝順謙謹忠義英傑 譬如老泉二名是錫 繄公登朝大難未瘳 直道始彰旋絀北郵 蜮弩倏發鉅禍乃嬰 鋃鏜徽纆視猶夷庚 亦既嘗世遂懷左跡 南徼遺恵西都底績 險塗難盡大獄又熾 公在中間夔夔恭畏 惟忠與信寔爲本原 抑嘗好學質有其文 神眀所祐百祿駢起 是以克終奚啻免矣 中房之原有石穹崇 我銘于顯俾闡仁風
崇禎紀元之六十年丁卯 月 日立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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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題額 : 贈領議政禮曹参判東江申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贈大臣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大夫□□□ □□□□□□□□□□□□申公神道碑
甥姪嘉善大夫憲府大司憲兼均館祭酒朴世采 撰
□姪大臣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經筵事□□□書□□崇祿大夫東平君兼□□□ 篆
內兄大宗伯申公晸以書來曰先人顯刻無可屬筆者惟子嘗逮事能知其志業幸有述也 世采以不嫺古文辭旣而宗伯出守江都與第黃海觀察使曅並辭曰石具矣 剛氏將奏功矣 願母再辭世采遂不敢辭 公諱翊全字汝萬東江其號也 鼻祖太師崇謙佐麗祖功伐最大又殉節以卒諡壯節始賜籍爲平山人逮 我朝有諱曉爲右正言言事不合退居以 終自號西湖散人是公六世祖也 曾祖諱瑛右參贊 贈左贊成祖諱承緒都事 贈領議政考諱欽領議政際遇 宣仁兩聖文章德業卓然名世諡文貞配享 仁朝廟庭妣全義李氏太師棹之後北兵使諱濟臣之女 公以萬曆乙巳八月三日生幼已醇愨受學不怠甫十歲侍文貞公遯荒沙溪金先生長生爲來訪公應對周旋如成人金先生亟加獎厲自是必整衣冠坐誦讀以爲常及觀太極圖副圏曰此陰中陽陽中陰也 文貞公深奇之既博習群書詞業大進值 光海滋昏自屏不售天啓癸亥罹李夫人憂 仁祖中興文貞公始由家宰進 位崇禎建元捐館舍喪除公愈自謹飭間與韋章甫上書論章陵追崇非禮丙子 朝廷銳意修攘命六條選士李公德洞疏公學行金文正公尙憲方在銓注疑 上因前事督責文正公業以才識可惜旋擢別試丙科先是丙寅公登第因擧有違式者臺議嘩甚並罷一榜至是再登焉 會虜東創踰年乃唱名補承文院正字薦爲藝文館檢閱序陞至奉教調成均館典籍司諫院正言兵曹佐郎時宮閽不嚴公輒申明舊今必繩以法闕庭肅狀遷司憲府持平金文正公自南漢退歸被群小媒孼秉東銓者實屍之繼引憸巧士恣黜陟公首請其罪 上嘉納選入弘文館 拜副修撰迭遷至校理兼 知製敎歷直講獻納未幾贊价赴潘
陽大搜私橐有一舌官犯禁恐被重究謀投鄭虜命壽以狐鼠焉 公竟捕治之還曆侍講院文學 佐遷居山察訪明年北使來謂公暨伯氏東陽公志扶中朝並以數三宰臣去禍將叵測初東陽公當亂樹意甚偉及後竪碑三田渡上力辭書篆公又與上价崔公鳴吉過祭箕子廟大有忌諱語會以炷爲虜因反噬以及素不相悅者公亦嘗言炷奸故也 比至潘窘辱百端公夷然終不動賴 東宮救觟
還入玉堂賻議政府舍人復歷副應敎司諫兼彌善 昭顯世子卒與同僚上疏請行朞制差墓所都廳事竣陞通政階出爲光州牧使公喜曰此庶可有效悉括隱丁充諸軍闕額勑境內期輪糶糴幾累萬斛無敢後者其有死徒絕戶輒以耗穀償己修黌舍諸生勸課一州大治比歸立石嶺德入 拜承政院同副承旨歷刑禮兵三曹參議遷左副承旨 仁祖陟方掌治喪禮俄書諡冊進嘉善因累躋至都承旨遷戶曹參判兼五衛都總府副摠管差副使護 義順公主行赴燕還 拜禮曹參判遷兵曹兼同知春秋館與修 仁祖實錄 拜漢城府右尹適主家奴犯罪逃匿公發卒捕之有引形跡爲言者公舊曰 我爲法官知守三尺耳奚論其他竟論徙邊出開城留守當西路綰轂客使所需巨萬例責市民久而號怨公至立除之奏給銅鐵萬餘斤俾得
懋遷遷取息公私並裕時 朝廷行錢法中廢盡歸于府價賤民將失業公下令諸賦納官者皆代以錢民大悅旣均定大同徵米見其多鼉私費曰此非爲民設者耶 官司唯當食俸祿仍命自後一切母犯數月庫藏吉溢府俗好訟爲治者或病稽滯至公視事屢斷大訟輒發其情僞負者亦自無冤民爲之語曰終 公任不可以非理干將遆府人相率至朝堂願納千金借留不得乃立石追思會大獄甫完公有不能自安者求外得陽府使更務清靜爲治日必手引諸生訓迪訪邑中忠臣孝子烈女新旋楔以獎之俄以方伯親嫌遷復拜開城留守民爭加額以迎治化益著幾回事歸蓋自密陽還 朝及是徧復舊踐爲戶禮兵刑參判左右尹都承旨或至再三間兼同知義禁以書 宗宗哀册進嘉義明季庚子二月偶疾而卒實二十有七日也 上命致弔祭賻 如儀公德性渾厚存心간正平居儼然自持識聰明潔言遜而行恪至或歷變險事有不齊一以謙恭謹確爲主未嘗少變也少篤孝順文貞公婉嫲服勤靡不克致文貞公稱爲孝兒居憂摯禮遇諱辰攀號如初以及伯伯氏愛敬交至鎮日往省大小亦稟而後行其在 宗宗大恤哀痛甚持制幾親親喪每值 王候違像起居唯謹當官事務自評厲不畏強禦賢邪之會趣舍益明當太學生疏留愼蔣先生集或有異議者今日先君嘗謂士剛君子人此豈不是請留耶遺子往參在光州相自點爲孫馱馬求昏需公只貽以梳具閒者難之晚愛
薛敬軒讀書錄以爲有益身心因求覽性理書如近思錄心經常潛心玩繹尤善讀易公退必莊誦不置嘗曰世間實事唯爲之學皆幻境也其篤信類此爲文章本於家庭用力甚勤古諸大家鮮不染指要其所就典雅簡重如拱壁然澤堂李公植樂靜趙公錫胤特相稱賞恨不處以文苑兼工書法一時金石多歸之最公志向恬靜不事進取及連□宮掖益加飲縮雖寄跡朝端澹然若處林野遫空虛見微守約惟以填典從事凡世之顯晦藏否無足以要其懷繇此始當壬午之役遠中奸鰲不兌拘幽於異域矣至於辛卯大獄地嫌異動 成危疑而終不得爲公累論者謂是時能以忠信自保者公可與李忠翼公時白竝美苟欲較其難易又有所分則斯豈非平生謙恭謹確之驗耶嗚呼盛哉公以諸子貴累贈領議政 政初葬永平中移楊州後以戊申八月卜蔣于忠州西中房 里向卯之原夫人楊州趙氏惠穆公昌遠之女今 太母慈懿殿之姉也端莊明達事公無違德一家戚取式焉生五男長郎留守公曾任家宰以公遺訓力辭爲薦紳艷誦次遲別儉真美行馴尤號善事不幸蚤夭惜哉次景次即觀察公次昂早天三女子適大諫李稭次 王子崇善君次次尹之贊孫男徵華瑞華佐郎啓華承旨鎭華尙華錫華省華從華適參奉李碩亨進士李翊夏洪重益爲留守出志華處華參華夢華爲別檢出處華出爲景後禾華適過聖爲觀察出喜濡爲大諫出東平君杭女適尹世鼎尹廷安壽益趙鳴鳳爲崇善出曾孫佐郎二男一女承旨二男二女鎭華一男一女並幼銘曰 烈彼壯節啓籍東陽 綿綿赤亦文武迭昌 孰爲其宗日我文貞 公惟嗣興暨元兄 孝順謙謹忠義英桀 譬如老泉二名是錫 緊公登朝大難未廖 直道始彰旋純北郵 率弩條發鉅禍乃嬰 銀鉦微饟視猶夷庚 亦既嘗世燎懷左跡 南徧遺惠西都底續 險塗難盡大獄又熾 公在中間變變恭畏 惟思與信室爲本原 抑嘗好學質有其文 神所祐百祿駢起 是以克終矣當兌矣 中房之原有石穹崇 我銘于顯俾練仁風 崇禎紀元之六十年丁卯 月 日立
《충주의 금석문, 2006년》에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