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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52
사량도 가는 길
정진규
사천 비행장에서 삼천포로 들어가다 보면 바다가 저 아래 멀찍이 있는 또 다른 바다와 몸을 섞고 있는, 내려다 보아야만 보이는 내려다 보아서 송구스러운 마을이 있다 문둥이 마을이다 슬픈 살, 자주자주 바닷물로 적셔 두어야만 소금물로 절여 두어야만 그나마 더디게 상하는 살, 그 마을 사람들은 절인 생선을 절대 먹지 않는다
염장해둔 내 슬픈 속살, 거기 묻힌 사량도 가는 길
----정진규, [사량도 가는 길]({本色}, 천년의 시작, 2004년) 전문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한국문학사상 가장 지적인 소설이며, 그 주제의식을 사상과 이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소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의 병원장인 조백헌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보여 주었지만, 그러나 이상욱(소록도 병원의 보건과장)이라는 회의주의자를 통하여 그 계획이 곧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떠한 불화도 없는 삶을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 행복한 삶이란 그 어느 곳에서 이루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이 아닌 이상적인 천국에서나 가능하게 될 것이다. 불교의 ‘극락세계’나 기독교의 ‘내세의 천국’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토마스 모아의 ‘유토피아’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역시도 그것이 결코 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이상적인 천국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 이상적인 천국을 어떻게 해서 건설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사상과 이론의 차원에서, 행복한 삶과 그 행복한 삶이 가능한 천국을 건설해보려는 웅장한 기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그 건설방법을 둘러싸고 낙천주의자인 조백헌과 회의주의자인 이상욱의 싸움을 통해서, 그 소설을 가장 날카롭고 긴장감 있게 이끌어 나간다.
그러나 이청준의 행복론과 천국론, 그리고 낙천주의와 회의주의는 서구의 사상과 이론의 차원에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싸움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문학사 속에서는 이미 퇴색해버린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백헌은 낙천주의자인데 왜냐하면 그는 병원장의 위치에서 ‘인간의 천국’을 지어주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욱은 회의주의자인데 왜냐하면 그는 그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 의식으로 조백현이 구상하고 있는 천국이야 말로 ‘인간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문둥이들이 배제된----에 지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의 행사는 사랑과 자유 위에 기초해야 하고, 하나의 천국은 다른 인간의 천국과 대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또, 그리고, 모든 천국들은 외부의 힘이 아닌 그 구성원들----문둥이들----의 자생적인 힘에 의해서 건설해야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이청준의 ‘천국론의 핵심’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요원한 과제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요컨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부분과 전체, 사유재산제도와 부의 공정한 분배 등, 이 모든 대립과 갈등들은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난제이며, 우리 인간들의 천국 자체는 영원히 건설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진규 시인은 1939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했으며,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마른 수수깡의 평화},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 {몸詩}, {알詩}, {도둑이 다녀가셨다}, {本色} 등이 있다. 또한 정진규 시인은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한국시인협회장과 한양여대 교수 등을 거쳐서, 이제는 {현대시학} 주간으로서의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정진규 시인은 “몸은 시간 속의 우리 존재와 영원 속의 우리 존재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실체”([자서], {本色})라는 인식 아래, ‘몸詩’를 써온 바가 있으며, 이 [사량도 가는 길]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사량도는 경남 통영시에 속해 있으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고, 약 1.5KM의 거리를 두고 윗섬과 아랫섬과, 그리고, 수우도라는 세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의 풍광 때문에 주말이면 약 5,000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다고 하지만, 그 사량도 어느 구석에 그처럼 서럽고 서러운 문둥이 마을이 숨어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문둥병이란 무엇인가? 문둥병이란 노르웨이 의사 한센이 발견했던 ‘제3군 법정 전염병’이다. 이제는 문둥병이 아닌 한센병이 공식명칭이며, ‘문둥병’과 ‘천형병’은 그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 불리워졌던 병명들이다. 한센병은 치료받지 않는 환자와 오랫동안 접촉하면 감염될 수도 있지만, 전 세계 인구의 95%는 한센병에 자연 저항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감염확률은 240만명 중의 1명이라고 한다. 이제는 한센병에 걸려도 제대로 통원치료만을 받으면 일상생활이나 직장생활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채규태, 한센병연구소 소장)고는 하지만, 그 옛날의 한센병은 문둥병이며, 무조건적으로 격리수용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상이 눈과 손과 발에 나타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은 물론, 그 이웃 사람들에게 전염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문둥병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천형병(하늘이 내린 병)이며, 그 이름만 들어도 공포와 불안이 저절로 찾아오는 그런 법정 전염병이다.
왜, 그런데, 정진규 시인은 그처럼 저주받은 문둥이 마을을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염장해둔 내 슬픈 속살이” 거기에 묻혀 있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정진규 시인이 문둥병 환자란 말인가? 왜, 그는 그 저주받은 문둥병 환자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왜, 또한, ‘문둥이 마을’을 그의 고향처럼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는 적어도 “사천 비행장에서 삼천포로 들어가다 보면 바다가 저 아래 멀찍이 있는 또 다른 바다와 몸을 섞고 있는, 내려다 보아야만 보이는 내려다 보아서 송구스러운 마을이 있다 문둥이 마을이다 슬픈 살, 자주자주 바닷물로 적셔 두어야만 소금물로 절여 두어야만 그나마 더디게 상하는 살, 그 마을 사람들은 절인 생선을 절대 먹지 않는다// 염장해둔 내 슬픈 속살, 거기 묻힌 사량도 가는 길”이라는 시구에서처럼, 동정과 연민의 사제로서 그곳에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정과 연민이란 그것이 정치적이든지, 경제적이든지 간에, 그 모든 점에서 우월한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베푸는 값싼 적선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동정과연민은 그 수혜대상자를 몹시도 불쾌하게 만든다. 동정과 연민이란 그 값싼 적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동상과 ‘당신들의 천국’을 세우려고 했던 조백헌원장의 시선에 지나지 않는다. 정진규 시인의 시선은 내가 이미 다른 글에서역설한 바가 있듯이 ‘동병상련의 시선’이며, 그 문둥병 환자들과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자의 시선이다.
하지만 실제로 정진규 시인은 문둥병 환자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내려다 보아야만 보이는 내려다 보아서 송구스러운 마을이 있다 문둥이 마을이다”라고 정상인의 입장에서 그 부끄러움을 어쩌지 못한다. 동정과 연민의 시선은 문둥이를 더욱 더 문둥이답게 만드는 시선에 지나지 않으며, 그 동정과 연민의 사제는 인도주의, 또는 휴머니즘이라는 미명 아래, 그 격리와 수용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문둥병 환자들은 저주받은 자들이지만, 그들의 인생이 불쌍한만큼 어디까지나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도와주지 않으며 안 되고, 그 장소는 이 세상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는 외딴 섬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외딴섬은 그러나 문둥이의 천국이지, 인간의 천국이 아니다. 또한 그 외딴섬 바깥 역시도 당신들의 천국이지, 인간의 천국이 아니다. 정진규 시인은 이청준의 소설의 이러한 역사 철학적인 문맥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만큼, 그 외지인과 정상인의 입장에서 그 송구스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이때에 송구스러운 마음이란 두렵고 거북한 마음을 뜻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더없이 맑고 깨끗한 인간의 부끄러움에 지나지 않는다. 외지인, 즉, 정상인의 사랑은 문둥병자가 아닌 만큼 동정과 연민의 시선에 지나지 않지만, 그 동정과 연민의 시선이 문둥병자와 정상인의 간극을 더욱 더 깊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진정한 사랑의 시선으로 변모시키려고 정진규 시인은 무한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내려다 보아야만 보이는 내려다 보아서 송구스러운 마을이 있다”라는 그 수직적인 시선을 버리고, “염장해둔 내 슬픈 속살, 거기 묻힌 사량도 가는 길”이라는 수평적인 시선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동정과 연민이 우월한 자의 수직적(시혜적)인 시선이라면, 그 수직적인 시선을 버린 동병상련의 시선은 수평적인 ‘줌’의 시선이며 참사랑의 시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어떻게 동정과 연민의 사제인 정상인이 문둥병자가 되고, 또한 어떻게 그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동병상련의 시선, 즉, 참사랑의 시선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인가? 과연 어떻게 그 불가능한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 가능할 수가 있겠는가? 실제로 정상인이 문둥병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감염이 되지 않고서는---- , 그 문둥이들을 격리시키지 않고 그 문둥이들과 함께 하는 삶은 그 정상인과 문둥이가 다같이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동정과 연민의 시선, 즉, 그 수직적인 시선을 버리고 동병상련의 시선, 즉, 참사랑의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문둥이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의 시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진규 시인은 정상인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내려다 보아야만 했던 수직적인 시선을 버리고, 그 수평적인 시선으로 문둥이들을 바라다 보게 된다. 문둥이의 살은 슬픈 살이다. 왜냐하면 "자주자주 바닷물로 적셔 두어야만 소금물로 절여 두어야만 그나마 더디게 상하“기 때문이다. 소금이란 무엇인가? 소금이란 화학명으로는 ‘염화나트륨’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소금이 없으면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의 혈액 속에는 0.9%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우리 인간들이 식물 속의 칼륨을 많이 섭취하면 할수록,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소금이 필요한 것이다. 그 옛날, 유럽과 아시아는 물론, 그 어떤 고장에서도 소금의 생산지를 둘러싸고 시장과 교역로가 발달하였다는 것은 이처럼 다 그 까닭이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소금을 미라를 만들 때 사용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기 위하여 소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소금은 물건의 부패를 방지하고 물건을 변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하여, 그토록 성서에도 ‘소금’을 신성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금은 사랑, 성실, 맹세의 상징인 것이다. 문둥병자들의 슬픈 살, 그 슬픈 살에는 이처럼 소금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하여 바닷가의 외딴섬이 필요했었겠지만, 그러나 이처럼 성스러운 ‘소금’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도, 지극히도 다행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마을 사람들은 절인 생선을 절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러한 것일까? 정진규 시인은 이미 ‘민물고기 박사 최기철 옹의 영전’에 바친,
地上 가득한 죽음 지나 모든 민물고기들이 먼저 問喪을 와 있었다 설악산 열목어도 와서 있었다 나 죄가 많다 문상만은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안면이 있는 버들치 각시붕어 등 몇몇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민물고기를 먹지 못한다 어머니의 내 태몽이 한 마리 잉어였다 그걸 그들이 알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라는 [문상]이라는 시에서 그 이유를 시사해준 바가 있었다. 요컨대, 그가 ‘잉어’이기 때문에 ‘민물고기’를 먹지 못하듯이, 문둥병자들과 그 절인 생선들의 관계는 동족의 관계이었던 것이다. “사천 비행장에서 삼천포로 들어가다 보면 바다가 저 아래 멀찍이 있는 또 다른 바다와 몸을 섞고 있는, 내려다 보아야만 보이는 내려다 보아서 송구스러운 마을이 있다 문둥이 마을이다”라는 시구는 그 문둥이 마을에 다가가기 위하여 얼마나 더욱 더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있는 것이며, 또한, “슬픈 살, 자주자주 바닷물로 적셔 두어야만 소금물로 절여 두어야만 그나마 더디게 상하는 살, 그 마을 사람들은 절인 생선을 절대 먹지 않는다”라는 시구는 모든 신경이 마비되고 생살이 썩어가는 문둥병자들을 얼마나 더욱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시구란 말인가? 동정과 연민의 시선은 ‘베품’의 시선이지만, 참사랑의 시선은 ‘줌’의 시선이다. 베품은 시혜적이지만, ‘줌’은 무보상적이다. 그 참사랑을 통하여 정진규 시인은 문둥병 환자들의 슬픔에 동참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자발적으로 문둥병 환자들로 만들어 버린다. “염장해둔 내 슬픈 속살, 거기 묻힌 사량도 가는 길”에서의 “염장해둔 내 슬픈 속살”은 그가 실제로 문둥병 환자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삶이 그만큼 고통스러웠고, 따라서 그의 가슴(마음)이 또한 그만큼 썩어가고 있다라는 뜻일 것이다.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면 우리는 흔히 ‘속이 탄다’라고 말하거나 ‘속이 썩는다’라고 말하게 된다. 문둥이들은 살이 썩어가는 사람들이고, 나는 마음이 썩어가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같은 형제들이고, 우리의 ‘슬픈 살’은 사량도의 소금물에 절여두지 않으면 안 된다.
몸은 시간 속의 존재이며, 영원 속의 존재이다. 몸이 시간 속의 존재라는 것은 그 유한성 때문일 것이며, 또한 몸이 영원 속의 존재라는 것은 그 몸 자체가 또다른 생명의 모태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진규 시인이 ‘몸 詩’ 이후, ‘알詩’를 쓰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둥병 환자는 시간 속의 존재이지, 영원 속의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생살이 썩는다는 것은 건강한 모태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살이 썩는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생겨나게 되고, 또한, 그것과 정비례하여, 문둥병과 천형병이라는 저주의 말이 탄생하게 된다. 정진규 시인의 [사량도 가는 길]은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참사랑‘에 기초해 있는 시이며, 더욱 더 낮은 데로 임하면서도 ’인간의 천국‘을 구상해보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매우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이며, 다른 한편, 너무나도 아름다운 나머지, 그토록 슬픈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우리 인간들의 천국은 그 어디에 있으며, 과연 그곳에서의 삶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질문들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서, 정진규 시인의 [사량도 가는 길]을 다시 한 번 더 읽어본다.
슬프다. 아름답다. 이 순간이, 이 순간의 황홀함이 영원불멸의 삶으로 변모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 인간들은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