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구해줘"라는 OCN의 드라마를
연속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OCN의 구해줘는 2017.08.05에 첫방을 시작으로 2017.09.24일 종영된 16부작의 드라마로
사이비 종교 집단에 맞서 첫사랑을 구하기 위한 뜨거운 촌놈들의 좌충우돌
고군분투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케이블 방송의 드라마는 공중파 방송보다 그 유연한 책임성으로 소제의 폭이 넓고 다양하며
폭력적이고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내용이 더 많습니다.
드라마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지만
케이블 시청자들은 공중파나 별다른 차별 없이 시청하기 때문에 그 파괴력은 엄청납니다.
종편의 시사방송은 공중파보다 훨씬 더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며
대국민 정치 선동 방송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태극기 물결의 애국 시민은
TV를 시청하지 않는 절제된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TV시청자는
언론의 거짓 방송의 좀비, 그 개 돼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바보 상자"의 불나방이 되어
진리를 옳게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메이저 방송과 언론에 열린 마음은
그들의 주장과 선동에 충성맹세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드라마상의 사이비 종교는 기독교를 표방하였고
드라마를 통해 기독교의 사이비성을 경계하였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광신적 행태는
모든 종교는 사이비다는 등식을 성립시킵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서로 분리될수 없는 유기체적 융합을 이루었습니다.
비록 "구해줘"의 드라마는 단순한 사이비성을 모티브하였지만
실제로 이단과 사이비는 거짓의 진실을 믿는 종교의 울타리를 가졌습니다.
세계적인 이단은 물론 우리 나라의 이단은
초대형 교회를 능가하는 조직과 시스템, 그리고 기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의 기초 위에 세워진 진리의 전당인 사이비 이단은
종교적 심리를 극대화한 조직체여서 종말론적인 생명력을 가졌습니다.
통일교와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와 여호와 증인, 그리고 몰몬교와 안식교는
모두 초대형 교회와 지교단의 조직력을 능가하는 소종파여서
개인이나 지교회가 상대할 없는 거대한 바위입니다.
특히 이단과 사이비는 눈덩이처럼 구르는 역동적인 사이비 동력이 있어
암초를 만나 산산이 부서지지 않는 한 종말론적인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융합될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 뿐만 아니라
타종교의 종교인은 전통과 그 종교의 교리적 전통으로 인해 서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적대적 종교의 차별과 갈등은 고유한 종교의 정체성, 그 자체이지만
종교의 울타리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나와 다른 너라는 우리의 실상입니다.
나와 다른 너에 대한 상생은
우리의 역사요, 우리의 이웃이요, 우리 동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타성에 젖은 종교성은
적대적 공생관계의 담을 넘어서 종교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극단적 상생의 미덕이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소위 말하는 신들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조정을 받는 신들의 대화....
그 종교적 융합은 "종교의 허상"이라는 진실의 종을 울렸습니다.
사람이 신이 되는 영성에 기초한 종교 다원주의는
인본주의 신앙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종교 다원주의는 인본주의 신앙의 이상을 실현하는 주체 신앙의 실상으로
모스트 모던의 좌파적 허게모니의 카르텔을 형성하였습니다.
차별없는 성의 유희라는 동성애는
종교 다원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말초적 의식 구조입니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구해줘"라는 절박한 소리는 허접한 드라마보다 더 희미한 소리, 그 아득한 메이리가 되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사랑과 평화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적대적 종교의 갈등은 물론 이단과 사이비의 경계를 허무는 인본주의 융합의 촉매가 되었습니다.
"구해줘"라는 절박한 소리는 구원의 생명, 그 믿음의 끈인데
그 절박한 소리는 굿판의 추임새, 박수 무당의 푸념이 되었습니다.
"구해줘"라는 생명의 절박한 소리는
하나님을 찾는 그 부르짖는 생명의 호흡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단과 사이비, 그리고 인본주의 무속 신앙에 홀릭된 사람은
현상황에 대한 인식부조화로 "구해줘"라는 생명의 구원, 그 아우성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주의 말씀과 기도에 깨어있는 주의 성도가
생명의 골든타임에 처한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사랑과 그 믿음의 능력으로 구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호흡, 그 믿음의 기도는
공의와 진리의 기초이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구원의 동력입니다.
진실는 거짓의 무더기에 대한
진리의 종소리입니다.
삶의 거짓, 그것의 발견은
곧 진리의 종소리를 울려 진실을 구해야 합니다.
목숨을 모티브한 구원의 주제는
생명의 본질인 진실과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구해줘"라는 절박한 소리를 잃은 양심은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에 장악된 좀비의 실체일 것입니다.
좀비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며
산 자의 생명을 빼앗는 죽은 자의 동체입니다.
진실의 종소리, 그 진리의 음성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그 계시된 믿음은 주 예수입니다.
성서의 갈등 구조는
진실의 종소리를 울리는 믿음의 도가니요, 그 풀무입니다.
성서의 갈등 구조, 그 내밀한 소리는
엘리야가 호렙산 굴에서 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메시야의 음성입니다.
성서의 갈등구조를 영적 주상절리의 상그릴라로 발견하지 못한다면
"구해줘"라는 진실의 종을 울리는 믿음의 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죽음의 절박한 상황, 그 사막의 목마름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물을 파고 반석의 생수를 찿는 기적의 믿음은 구원의 젖줄이 될 수 없습니다.
진실의 간절한 열망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은
헌재의 탄핵 변호인단과 법원의 형사 재판 변호인단 마저 좌파적 탄핵 기획의 계략이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진실은 태극기 물결의 절규가 될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각 부처 인민 위원회의 활동은
불탄 보수의 잔불을 제거하며 보수를 완전 궤멸시키고 있습니다.
자유 대한민국의 흙과 그 뿌리인 민초들의 울부짖는 애국의 함성과 그 절규는 자유 통일의 희망이요,
그 믿음의 씨앗은 대한호의 구조를 알리는 질실의 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작금의 시국과 그 현실은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에 장악된 국가와 종교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실의 종을 울리는 실체는
성서의 갈등 구조에 깨어 있는 언약의 젖줄을 항해하고 있습니다.
흰놈의 골짜기, 그 죽음의 언덕을 넘어 가늘고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믿음의 항해는
어둠과 죽음의 상황 가운데 빛과 생명의 인도를 받는 구조선에 승선한 믿음의 항적을 가졌습니다.
풍랑 가운데 만난 구조선은
환난과 고통 가운데 부르짖은 결과입니다.
☞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25-30)
광풍과 풍랑의 바다 물결은
심판과 구원을 위한 하나니의 섭리요, 그 통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악의 길을 따르고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환난과 고통 가운데 사망의 문에 이르게 됩니다.
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심판에 처해지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구원의 메이라는 하늘에 상달하여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구원하십니다.
믿음은 빚좋은 개살구가 아닙니다.
믿음은 십자가 목걸이, 그 장신구가 아닙니다.
"구해줘"의 절박한 소리는 믿음의 기도요,
환난 날에 부르짖는 그 기도는 인자와 진리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룹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은 것이요,
산 자의 믿음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구원하실 때까지 부르짖는 기도를 합니다.
믿음은 이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구원의 근본이요, 본질인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한 그 장소에서 받는
환난의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시편 107편의 구원관은 완전한 구원의 모티브이며
이단과 사이비, 그리고 인본주의 신앙을 배격하는 신본적 신앙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7편의 말씀이 구원관의 중심이 된다면
집단적 사이비 신앙의 광란에 함몰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함정과 올무와 덫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중심 세력이 되어 흰놈의 골짜기, 그 몰렉의 광장을 이루었습니다.
문제는 이단과 사이비의 함정과 올무와 덫을 깨닫지 못하는 좀비 신앙이요,
종교적 광신의 집단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에 함몰되면 누구라도
환난의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구원의 기회마저 잃어버립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음의 문턱에 이르고서도
빛의 인도를 받아 천국 문에 이르렀다고 착각하는 착시현상은 화인맞은 양심의 그 절망입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불길에 싸여 있는 한국 교회는
인본주의 신앙으로 잿더미가 될 때까지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적화의 불길에 싸인 한반도를 깨닫지 못하는 얼간이 보수와
이단과 사이비 신앙에 함몰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얼간이 보수 신앙은 초록동색입니다.
"구해줘"라는 그 절박한 소리도 내지 못하는 현실은
하나님의 구원이 패싱된 심판지대일 것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는 말씀으로
마지막 경고로 들야야 할 것입니다.(렘5:1)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론적인 믿음의 경고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종말론적인 교훈을 하여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2-8)
오늘날 이단과 사이비에 매몰된 광신자들은 확증편향된 종교의식으로
구해줘의 절발박한 상황의 인식마저 없는 경우 대부분입니다.
구해줘의 절박한 인식을 전햐 하지 못하는 상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안티나 불신자의 절박한 인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