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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으로 본 동역자
(출 4: 13-17)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이 시간에 “아론으로 본 동역자”이라는 제목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는 등 위대한 일을 많이 했지만 혼자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형 아론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일하시지만 영혼구원이나 지상의 여러 사역에서 하나님 혼자 하시지 않고 동역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고전3:9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 했고, 고후6:1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해야 성공합니다. 얼마나 놀랍고 설레는 일입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을까요?
1. 섬김의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출7:7에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아론은 동생 모세보다 3살이 더 많습니다. 성경이 왜 나이 차이를 기록했을까요? 그럼에도 아론은 동생을 평생 섬겼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게 쉬운 일입니까? 이처럼 겸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교훈입니다.
16절에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여기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처럼 모세가 아론에게 무엇을 알려주면 아론은 그것을 받아서 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설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 듣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시123:1-2에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은사를 깨닫고 개발해야 합니다.
14절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말 잘하는 것이 아론의 은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정도로 말을 잘했습니다. 레위 사람이니 하나님의 말씀도 잘 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각자의 은사를 개발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지체이므로 은사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는 모두 위대합니다.
고전12:12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했고, 27절에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각자만이 있는 고유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걸 찾아내서 능통하도록 개발해야 합니다. 아론은 83년을 개발했습니다.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려면 갖출 것이 많지만 최소한 성경 구절을 외우십시요.
돌멩이만 잘 던져도 나라를 구합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잘 던져 블레셋에서 나라를 구하고 사울 왕의 사위가 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잠22:29에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하나님이 귀히 쓰십니다.
3. 마음을 다한 기쁨의 자세입니다.
14절에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기뻤던 것은 도울 능력이 있어서 기뻤고, 날마다 기도해 오던 일을 하게 되었으니 기뻤고, 나이 많았지만 불러주었으니 기뻤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쁜 마음을 주셨으니 기뻤습니다. 평생 소원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는 일에 동생이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서 할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부름을 받을 때 아론의 나이 83세, 시 90편 모세의 기도를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10절) 했듯이 보통 70 살던 시대였습니다. 83세면 훨씬 지난 나이인데 하나님이 쓰시겠다니 기쁜 일 아닙니까? 그 말씀은 그 임무를 다하기까지 부르시지 않겠다는 의미에게도 합니다. 민33:39을 보면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던 때의 나이는 백이십삼 세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니 40년을 더 살았습니다.
세계 최고령 영국의 111세 노인 티니스우드는 장수의 비결을 묻자 "장수의 비법은 없고 그저 운 좋아 오래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고집하는 식단도 없고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을 함께 먹는 것을 즐길 뿐 비법이 없다고 합니다. 튀김이 좋은 음식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비법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지만 사고만 저지르지 않아도 100세는 쉽게 산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전자매트 과식 조심하고 식후에 눕지만 마세요. 과식할 때는 꼭 움직이든지 혈액순환제를 들어서 문제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은 기쁜 일이고 장수의 비밀입니다. 이처럼 기쁨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4. 내용도 중요하고 자격이 갖춰질수록 좋습니다.
출40:12-15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가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그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음 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이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모세를 도운 아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시고 대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론이 얼마나 그 직분에 충성했든지 유대인들의 주석인 미드라쉬에 보면 아론의 장례식에 아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80,000명의 소년들이 아론의 관을 따라가며 울었다고 합니다. 아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80,000명이나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그만큼 화해와 축복과 사랑의 사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아들을 낳으면 첫아들은 언제나 아론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내용도 좋지만 자격도 필요합니다. 대제사장이라는 자격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실력만 있으면 되지 자격이 왜 필요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혜 없는 소리입니다. 실력이 출중해도 자격증이 없으면 불법이 되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능력 있다고 아무나 강단에 올라올 수 있는 것 아닙니다.
한국의 유명한 침술가도 자기 제자들은 한의사가 되어 맘껏 영업하는데 자기는 자격증이 없으니까 침 한 번 놔주는 것도 불법이라고 소송이 걸렸습니다. 세상은 물론 교회도 영력 있고 실력 있어도 외국의 학위 없으면 이력서도 못 내미는 세상입니다. 세태를 탓하기 전에 지혜로울수록 좋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자기와 함께 일할 동역자를 찾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더욱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복하고 기뻐하고 자기 은사를 개발하고 아론처럼 충성하며 갖출 것을 갖추어 온전히 하나님께 쓰임 받는 복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하나님의 지팡이
출 4: 18-20
할렐루야! 즐거운 추석을 하나님의 은혜로 지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가정마다 풍성하게 하시는 은혜가 더욱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과, 근심에 쌓여있는 사람과,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애굽의 학정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왕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에 가 있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허락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갔습니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20). 모세는 긴 광야생활과 그의 사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잡고 승리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이 지팡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동행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1. 사명의 지팡이입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부름 앞에 사양을 합니다. 3장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부름 앞에 모세는 "하나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간다는 말입니까?" 극구 사양합니다. 분명, 옛날에는 이것이 자기의 소원이요 야망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는 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내가 얼마나 무능한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 날더러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라니 하나님의 말씀이 귀를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붙잡고 설득을 하십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내가 내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가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 인내를 가지고 모세를 설득합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어느 정도 마음을 돌렸습니다.
출애굽기 4장 1절에 모세가 말합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좋습니다. 하나님 내가 간다 하십시다. 그러나 하나님 한 번 생각해보세요. 누가 나를 믿어주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 모습 이대로 가면 누가 나를 하나님께서 보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뜻입니다.
사실 옳은 말입니다. 모세가 이대로 애굽에 가면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80 먹은 양치기 노인이 혼자 왔습니다. 누가 그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인정해주며, 바로 또한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스라엘을 내어놓겠습니까? 설령 바로가 보내준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 나서지를 않을 것입니다. 애굽 나서면 광얀데 모세의 무엇을 믿고 그 광야 길을 따라 나서겠습니까?
그러니 모세의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 뭔가 큰 것 하나 달라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믿어주지 도 않을 것이고, 되지도 않을 터이니, 하나님, 정말 나를 보내실려면 굉장한 것, 뭔가 커다란 능력 같은 것 하나 주십시오" 하는 뜻입니다. 누가 보아도 "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구나. 굉장하구나. 믿을 수 있겠구나. 따라가도 되겠구나" 생각할 수 있도록 뭔가를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요구입니다.
우리의 모습이라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해 보아야 되지 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먼저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인정할만한 것, 누가 보아도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렇게 믿어질만한 것을 먼저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시기만 하면 나도 그것 가지고 누구 못지 않게 주님의 일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요구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네 손에든 것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양을 치며 들고 다녔던 목자의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지팡입니다." 대 답했습니다.
하나님 "그 지팡이를 들고 가라." 명령하십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 정말 깊은 뜻이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모세에게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양을 치면서 40년 동안 들고 다녔던 것입니다. 이제는 모세의 분신과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세의 40년 광야 목동 생활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이미 가진 지식, 이미 가지고 있는 소유,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입니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것, 쓸데 없는 것, 아 무 소용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막대기를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손에든 것은 무엇입니까?
손에든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굉장한 것 다시 주시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이 바로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내 경험 내 과거 내 모든 것입니다. 내가 시시하게 생각했고, 때로는 불평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필요로 하십니다. 그것으로 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지팡이 다시 말해 지금 내 속에 있는 것, 바로 거기에서 시작 되는 줄 믿습니다.
보편적으로 교인들의 기도를 보면 한결같은 기도가, 물질 주시면 물질로 봉사하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물질을 주시면 얼마만큼 일하겠다는 것입니까? 한 10억 주시면 그 중에서 한 일 억쯤 사용해야 주님의 일 할 것입니까? 과연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물질이 있어야 합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헌금 궤 앞에 앉아 과부의 두 렙돈을 두고 제일 많은 것을 드렸다고 하신 주님입니다.
이 주님 앞에서 얼마만큼의 물질이 더 필요한 것입니까? 이미 있는 것으로 일 하면 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도 주님을 최고로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일 하면 하나님께서 되게 하시고, 부족하면 더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있는 것은 감추어놓고 달라고만 하고 있다면 그 기도는 평생해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용하십시다. 크고 작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기만 하면 됩니다. 던져라 하실 대 던지고, 잡으라 하실 때 잡고, 가리키라 하실 때 가리키기만 하면 됩니다. 사용하기만 하면 능력은 하나님이 나타내십니다.
2. 이적의 지팡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설득을 했더니 모세가 다시 핑계를 댑니다. 말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해서 안된다고 합니다. 모세는 아마도 말이 어둔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애 굽에 내려가고 바로와 대결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말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말이 답답한 모세를 이 사역에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지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인상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이 엄청난 사명을 주신 다음에도 여전히 입은 뻣뻣하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생각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이 일을 시키시려면 당연히 내 입술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다음에도 입은 여전히 뻣뻣하고 혀는 둔해서 말을 더듬습니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합니다." 사명을 받은 후에도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서도 과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초조와 불안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손에든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다시 잡았더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져 버리면 사단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잡으면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4:17). 이적이란 안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없었던 것이 있게 되는 것으로 사람의 재간이나 방법, 연구에 의해서 나타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출3:20)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적을 행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이적으로 인하여 마침내 모세는 히브리인들을 보내고야 말 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4:1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명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가져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출7:9) 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17-18에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었을 때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출14:21)."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출14:16)하였고,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 뻗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밤새도록 샛바람을 강하게 불게 하여서 바닷물이 물러가게 하셨다. 물이 갈라져 땅이 드러났다."(현대어/출14:21)고 했습니다.
반석을 쳤을 때 생수가 터져 나왔습니다(출17:6).
"내가 호렙산 바위 위에서 너에게 나타나리라. 너는 그 바위를 내리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물이 솟아나와 무리가 그 물을 마실 수 있으리라.'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하였다."(현대어/출17:6)
하나님은 이 지팡이를 모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적의 지팡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3. 승리의 지팡이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르비딤에서 싸울 때에 모세가 아론과 홀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아론과 훌은 양쪽에서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자 이스라엘이 승리했다고 출애굽기 17:8-13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병력을 동원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워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겠다.' 하고 말하였다."(현대인/출17:9)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힘에 겨워 두 팔이 무거워지자 그들이 돌을 모세가 서 있는 자리에다 가져다 놓고 모세를 그 위에 앉혔다. 그리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또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다. 이렇게 해서 모세의 손이 하루 종일 해가 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여호수아는 아말렉 군대를 칼날로 쳐 쓰러뜨렸다."(출17:12-1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곧 승리의 지팡이입니다. 여기에서 손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겠다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신과의 싸움, 죄악된 세상과의 싸움, 그리고 악한 사단과의 싸움에 접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승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탈무드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거지가 하루는 랍비의 집 담에 등을 대고 비비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랍비는 불쌍히 여겨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부부거지가 있었는데, 그 이튿날 역시 같은 장소에 와서 담에 등을 비비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본 랍비는 그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책망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부부 거지가 항의했습니다. "아니 어제는 그렇게 대접을 잘 해놓고 우리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대우 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랍비가 답했습니다. "지난 번 거지는 혼자였으니까 담에 등을 비빌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지만 너희들은 둘이 아니냐?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부가 아니냐? 당연히 등이 가려우면 서로 긁어줄 일이지, 함께 남의 집 담이나 비비고 있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그렇습니다. 서로 도우면 됩니다. 거기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서로 돕고 협력하여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부간에도 혼자 잘 났다고 하는 쪽 때문에 늘 말썽입니다. 나는 아내 없이 못 산다고 하는 사람, 남편 없이 못 살겠다고 하는 사람 절대로 문제가 없습니다.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과제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역사고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침내 모세가 순종합니다.
애굽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팡이를 들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을 칠 때와 다를 바가 없는 초라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자랑할 것도, 내놓을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손에든 것이라고 전에 들었던 지팡이하나 뿐입니다. 여전히 말을 더듬는 입이 뻣뻣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겸손하고, 내게 아무 것도 없으니 하나님 더 의지합니다. 끝까지 나는 하나의 심부름꾼이요, 오직 하나님이 쓰실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여기에서 60만 대군을 인도하는 민족의 대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제 우리도 순종하십시다. 나의 나약함, 부족함, 무능함을 그가 먼저 아십니다. 그러니 변명할 것 없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순종합니다. 순종하면 물질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사람도 주시고, 필요한 것 다 주십니다. 나의 모습이 부족하기에 겸손하고, 겸손하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겸손만큼 강한 능력은 없습니다. 이 겸손으로 능력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인 사명의 지팡이, 이적의 지팡이, 승리의 지팡이를 붙잡고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때까지의 죄악된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라
출 4: 18-26
우리는 늘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순종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가슴에 와 닿고, 우리 영혼을 터치하고, 또 말씀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말씀에 순종하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삶의 변화란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변화된 삶을 살려면 순종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해 지는 것,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이런 축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기 위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이 아브라함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가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편견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생각과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지 않는 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가족과 조국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편견을 버리고 자기가 선호하던 것을 바꾸어야 하기도 했지요. 또 어떤 이들은 자기가 추구했던 이상과 소원을 포기해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우리가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조정이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성경에 보면 서로 비교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두 사람 다 부자입니다. 한 사람은 누가복음18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계명은 어려서부터 잘 지켰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그러나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한 거지요. 그러다가 슬그머니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에게로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기의 부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부자청년이 실패한 것은 자기의 삶을 주님에게로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너무 만나고 싶어서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오실 때 뽕나무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삭개오를 향해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오자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로 조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똑같은 부자였지만 부자 청년은 영생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삶을 주님께로 조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삶을 주님에게로 조정합니다. 그 결과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서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 생활을 오래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삶을 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 그렇게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께로 조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삶을 조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면서도 여전히 술과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세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세례문답을 할 때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니까 심각하게 고민을 합니다. 그러더니 세례식을 있는 그 다음 주일에 그만 교회에 안나왔습니다. 삶을 조정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지요. 반면 제가 서울에서 목회할 때 함께 교회를 섬겼던 장로님 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권사로 있을 때까지 등산을 너무 좋아해서 주일예배는 많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으면서 삶을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등산을 포기한 것이지요.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고 비로소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지식으로 이해하고 가슴에 와닿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삶을 조정하는 것을 잘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서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그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해야 했습니다. 그냥 미디안 광야에 머물러 양을 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는 일에 순종하기 위해 그는 애굽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바로 앞에 서야 합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가 있고, 자기를 죽이려고 찾는 바로가 있는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으로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자 모세가 어떻게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정해 나갑니까?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먼저 본문 18절에 보면 그는 장인 이드로에게로 가서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생존하였는지 보려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장인에게 말할 때 ‘노예상태에 있는 내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 형제들이 생존해 있는지 보러간다고 말합니다. 아마 모세의 마음속에는 그가 받은 소명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 체험한 놀라운 일들이 그에게 있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큰 임무는 여전히 그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모세의 이런 마음을 그대로 읽고 있다는 듯이 그에게 놀라운 말씀을 주었습니다. 19절을 함께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다’는 말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이 뭐가 중요한가?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애굽으로 가는 모세에게 약점 잡힐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40년 전에 저질렀던 살인사건입니다. 과거의 상처, 믿음 없이 행하다가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만약 내가 애굽에 갔을 때 누군가가 나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살인자라고 몰아붙인다면 어떻게 견딜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삶을 조정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모세를 염려하게 하고 불안하게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그 문제를 가지고 너를 참소할 자는 애굽에 단 한명도 없다’ 지금 하나님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는 모세에게 마치 의의 두루마기를 입혀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40년이 지나 공소시효가 끝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순히 시간만 오래 지났다고 해서 과거의 죄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보시고 모세의 죄를 가려 주셨습니다.
요즘 장 상 총리서리에 대한 인사 청문회가 정가의 핫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아직 인사 청문회가 시작도 안됐는데 한나라 당에서는 벌써 아들문제, 학력문제를 들추어내면서 흠집 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과거의 숨겨둔 부끄러운 것이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장상총리서리가 총리직을 수행하기가 그렇게 만만치 않게 보입니다. 아마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신변을 잘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장관은 과거의 허물이 드러나서 장관직을 임명받고는 며칠만이 그만 두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부끄러운 부분이 드러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빨리 정리해야 합니다. 집이 두 채 있으면 빨리 처분해야 하고, 국적문제도, 아들 병역문제도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치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정치할 사람이 없으니까 상관없겠지요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인사 청문회는 없지만 악한 사단이 주의 일을 하려는 주의 종들의 과거의 상처, 과거의 허물을 들고 나서서는 정죄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과거의 일이 올무가 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의 과거, 모세의 허물을 씻어주시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참소하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기도의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지난 허물을 가려 주시고 덮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습니까? 더 이상 지나간 과거의 허물과 죄악을 매여 있지 말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두 번째 우리가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20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여기에 보면 우리의 눈에 확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지팡이”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는 양떼를 치던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습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지팡이입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토프카피 박물관에 ‘모세의 지팡이’가 소장되어 있답니다. 길이가 1m 남짓하고 조금 굵은 나무 막대기에 불과한 것이지요. 박물관에 있는 막대기가 모세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미디안광야에서 자랄 수 있는 나뭇가지를 생각해본다면 아마 그 정도의 크기의 막대기가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은 그렇게 볼품없는 모세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보잘 것 없는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까?
출애굽기 4장 전반부에 보면 소명 받은 모세가 주저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모세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 입니다.” “그것을 땅에 던져라”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지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말합니다 “뱀의 꼬리를 잡으라” 말씀대로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통해 모세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팡이는 모세 자신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과거에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의 힘과 자기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뱀처럼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뱀의 꼬리를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되었지요, 마치 이것처럼 실패한 모세가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내 목적을 위해서 지식을 사용하면 그것은 나의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내 지식을 드렸을 때, 그 지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 재능을 하나님께 드려보십시오 그러면 그 재능은 하나님의 재능이 됩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몸, 성전이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최고의 살인은 나의 은사, 나의 가능성, 나의 달란트에 죽음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냥 내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차입니다. 그냥 내 것입니다. 내 재능, 내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른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성경에 보면 모세의 지팡이는 이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볼품없는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이 지팡이를 내밀자 홍해가 갈라집니다. 이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보십시오 여기 “네 손에 준 이적”이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지팡이를 잡고 행할 하나님을 기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가 기적의 도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돌아볼 때 자신은 볼품없는 막대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나이 80세가 된 몸으로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볼품없는 막대기와 같은 자신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 속으로 자신의 삶을 던졌을 때 그는 더 이상 볼품없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용되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 나의 만족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어린이가 한 사람밖에 먹을 수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주님께 드렸을 때,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의 도시락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은 마른 막대기와 같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맡기는 일대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 인생을 조정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그 분에게 우리의 삶을 드리고 더 이상 마른 막대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크기의 일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4절 이하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애굽땅으로 가고 있는 도중에 이상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향하여 가는 모세를 죽이시려고 했을까요? 성경 중에서 해석하기 참 난해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뭔가를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말씀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일을 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한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다가 웃사와 아효가 죽은 ‘베레스 웃사’의 사건입니다. 이 말씀도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오는데 갑자기 제사장 둘이 죽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큰 나라를 만들어 나가면서 잘나가는 다윗에게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주시기 원했던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열심이 있어도 말씀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앞서는 것은 없습니다. 열심을 낸다는 것도,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도 다 말씀 안에서 행하여 져야 합니다. 병고치는 것도 중요하고, 능력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그 아내 십보라가 재빨리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차돌을 취하여 아들의 양피를 베어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당신은 내게 피남편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십보라가 지체 없이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왜 모세가 자녀들을 낳고서도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자신이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하여 살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자녀들에게 믿음의 교육을 제대로 안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아내 십보라도 할례를 우습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를 건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모세를 막아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앞에 나오는 22-23절 말씀과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면서 바로에게 선포할 중요한 메시지를 먼저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다. 네가 불순종하여 내 아들을 내어보내지 않으면, 바로야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장자로 택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장자를 내보내지 않고 불순종하는 바로의 아들, 장자는 죽이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해방될 것입니다. 반면 바로의 장자는 죽을 것입니다. 똑같이 애굽에 죽음이 임했는데 어떻게 바로의 장자는 죽고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습니다. 두 백성의 운명이 나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삼은 것은 언약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오래전에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표시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 언약의 표시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언약의 백성, 하나님의 장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할례는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대강 생각한 것입니다. 양피를 베에 피를 흘리는 할례의식을 소중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아내 십보라가 할례를 하잖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남편 모세를 보니까 실패한 사람입니다. 남편이 받은 할례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그들은 하잖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데 사람들은 하잖게 여기는 것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부분을 건드린 것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 할례를 그냥 잊고 지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은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하잖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세가 할례를 그냥 지나쳤듯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예배가 그렇습니다. 요즘 주 5일 근무제가 되면서 주일예배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안그래도 주일 예배드리는 것을 대강 생각하는데 주 5일 근무제가 되면 어떻게 되겠냐? 라고 걱정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매주 반복되는 예배이고, 한 달에 한번 성찬식하고 십일조는 누구나 하는 것이고 기도도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 같습니까? 전도하는 일이 하잖는 일처럼 느껴집니까? 세상과 다르게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들은 하잖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날 모세를 막아선 것처럼 여러분들을 막아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로 삶을 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까?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용서를 확신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른 막대기 같은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삶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사용되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