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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가상칠언을 통해서 본 십자가의 의미/ 고린도전서 1:1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bHAyTqNSE8w&t=238
금년에는 4월 9일이 부활절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활 주일을 앞두고 두 주일동안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전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는 우리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십자가가 나의 죄를 사하고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이고 그렇게 믿어진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도가 이해되지 않고 받아드려지지 않으며 미련하게 보인다면 여러분은 아직 멸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처형 받는 사람을 빨리 죽이지 않고 그가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죽어 가게 하는 잔인한 사형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 상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사형 제도입니다. 화형보다, 참수형보다, 단두대보다, 총살보다 더 악랄한 사형제도였습니다. 로마에서는 주로 탈주한 노예, 내란 선동자, 살인자, 반역자 등의 죄인들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그들은 사형수들을 십자가 위에서 갖은 고통을 당하며 며칠씩 신음한 끝에 죽게 했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잔인무도한 처형법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십자가형이 정치적인 폭도들의 소요억제책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죄인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부터 실컷 매를 맞고 피를 흘리고 지친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대못에 손목과 발목이 박힌 채 매달려 뙤약볕 아래서 물과 피를 쏟고 죽어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잦은 반란과 항거가 일어나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던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가로 처형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반역죄로 기소되어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오전 9시였습니다. 운명하신 때는 오후3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고통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이번 설교는 주님의 가상칠언을 4복음서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서 순서대로 말씀드리며 십자가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용서의 십자가
눅 23:34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돈 많은 사람이나 세도가 당당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기가 맞을 매를 종이나 매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신 맞게 하고 그 삯을 주었습니다. 주로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선비들이 대신 매를 맞아주고 돈푼이나 얻어다가 가족들의 끼니를 이었습니다. 당시에 그 죄의 삯은 곤장이었는데, 죄는 자기가 짓고 곤장은 가난하고 낮은 백성들로 맞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반대입니다. 죄는 보잘것없는 우리가 지었는데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그래서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에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주님께서 한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실 때에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왔으나 인파로 인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째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옥은 대개가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집 한쪽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붕에서 약간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외부인이라 하더라도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이 용이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메고 사람들은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 흙벽돌로 된 지붕 기와를 벗겨내고 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렸습니다. 이들이 결례를 무릅쓰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사랑하시고 그를 고쳐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했습니다. ‘이건 신성모독이다.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 예수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리고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5:24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주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님이 말씀하시자 그 사람이 곧 일어나 자기 침상을 들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병을 고치는 권세가 있으시고 죄를 사하는 권세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확증하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 용서의 십자가 앞에서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사죄의 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소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나의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영국의 한 변호사가 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변호에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고, 그는 정신착란증세로 정상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하며 자살까지 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한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학대하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 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에게 사죄의 은총이 임한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사죄의 확신과 자신의 변화를 시로 고백했습니다. 그 시로 만들어진 찬송이 찬송가 258장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그는 이렇게 사죄의 확신을 노래했습니다.
그가 바로 ‘윌리엄 카우퍼’입니다. 그는 주님의 치유를 경험한 후에 영국 문학사에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자유의 몸이 되어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4절입니다. “날 정케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 없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둘째는 용서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용서의 십자가 앞에서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를 용서를 하고 싶지만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용서하려고 노력한다고 다 용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적으로는 노력하지만 감정적인 상처가 커서 용서가 안 되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하고 싶으나 용서가 안 되면 하나님께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위대한 삶을 살았던 다윗에게는 많은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대적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시 109:4입니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2. 구원의 십자가
눅 23:43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가상칠언의 두 번째 말씀은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형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는 “네가 그리스도라면서 왜 그렇게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있느냐? 네가 진짜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가고 우리도 구원해봐라.” 다른 사형수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주님에게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께서 그 사형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의 선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평생 악한 짓을 하다가 최후에는 강도로 사형을 당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구원의 진리가 있습니다.
①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구원을 받은 이 사람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이 사람이 십자가 상에서 구원을 받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구원을 위하여 착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착한 일을 할 시간도 없었고 착한 일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구원받았습니다. 단지 그는 주님이 메시야임을 믿고 입으로 고백했을 뿐입니다. 그가 말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는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이 사실은 우리 편에서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에 이를만한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 감사하게도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엡 2:8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하나님에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구원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에게는 엄청난 복입니다.
②구원은 믿는 즉시 받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신앙고백을 한 후에 낙원을 약속 받은 사형수는 믿음의 고백을 한 그 날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그 순간 구원을 받습니다. 요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앞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 죽어도 천국에 들어갑니다.
③구원 받은 사람은 낙원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향하여 믿음의 고백을 한 사형수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몸은 흙에서 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죽은 자들의 영이 들어가는 곳은 백보좌 심판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불신자의 영은 죽으면 음부에 들어갑니다. 음부는 고통스러운 장소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가 죽어서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음부에서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봤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기에게 보내어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의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불꽃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면 그의 영이 육체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 후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신자는 죽으면 낙원에 갑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은 사형수는 죽음 후에 바로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간 곳이 낙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낙원에 대한 묘사가 없지만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는 것을 통해서 낙원은 안식의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마무리 하시면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백보좌심판입니다. 이때 불신자들은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 들어갑니다. 지옥에 관한 막 9:48-49 말씀을 보겠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지옥은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당합니다. 불 속에서의 고통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끝이 없습니다. 거기는 연약한 구더기도 죽지 않고 영원히 불도 꺼지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백보좌 심판 후에 믿는 사람들은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그곳을 새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음부는 불신자들이 죽은 후에 백보좌 심판 전까지 대기하는 장소고, 지옥은 백보좌심판 후에 불신자들이 들어가서 영원히 고통당할 장소입니다. 하지만 음부와 지옥을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백보좌심판 전후로 구분하여 말하지만 저도 같은 장소라고 봅니다. 낙원은 신자들이 죽은 후에 들어가서 백보좌 심판 전까지 대기하는 장소고, 천국은 백보좌심판 후에 신자들이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릴 장소입니다. 하지만 낙원과 천국도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저도 음부와 지옥처럼 낙원과 천국도 같은 장소라고 봅니다.
새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옵니다.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닙니다. 새하늘과 새 땅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곳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도 없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이긴 자들이 상속 받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이 맑고 밝습니다.
천국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만 이천 스다디온으로 정육면체입니다. 1스다디온이 약 192m이니 12,000스다디온은 약 2,304km입니다. 천국은 길이가 약 2,304km, 너비가 약 2,304km, 높이가 약 2,304km입니다. 천국의 성곽은 보석이고, 성문은 진주입니다. 천국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입니다. 천국에는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인 예수 믿는 자들만 들어갑니다. 천국에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아옵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그곳에는 다시는 저주가 없으며, 믿는 자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합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을 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시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하며 요한계시록을 마무리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3. 사랑의 십자가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사도 요한과 몇 명의 여자들만 있었습니다. 요 19:26-27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이 부분을 효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효는 인간으로써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니 효의 도를 행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종로에 가면 효자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효자동의 이름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늙은 아버지를 극진히 섬기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의 실수로 아기가 이불에 깔려 죽었습니다. 효부 며느리는 아무 말 없이 아기를 업은 채로 남편에게 갔습니다. 남편은 죽은 아기가 불효를 했다고 아기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러자 뺨을 맞은 아기가 되살아났습니다. 이런 유래로 효자동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효도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 부분을 효로 해석하는 것도 좋지만 저는 사랑으로 해석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였고 천사를 통해서 수태고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동안 행하신 일들을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아들의 죽음 후에 마리아의 상실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사도인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서 사랑이 가장 많은 요한을 통해서 마리아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중에 첫 번째가 사랑인 것입니다. 요일 4:8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사도요한은 본래 사랑이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우레의 아들이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보내시매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에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가 주님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과격한 성격의 요한이 나중에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복음에는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격한 성격의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요? 많은 원인이 있겠으나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요한은 예수님께 특별히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 21:20입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여기 보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나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사도요한입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석에서 주님의 품에 기대어 누워있던 사람입니다. 주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도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요한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들의 비결을 아시나요? 저는 잠 8:17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으로 잠언 8:17을 찾아봅시다. ‘간절히’ 앞에 작은 글씨로 1)이라는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본문 아래쪽에 보면 ‘1) 히, 새벽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은 간절히를 말하고, 히는 히브리어라는 의미입니다. ‘새벽에’는 히브리어의 단어로는 간절히라는 말이 새벽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간절한 사람이고, 간절한 사람은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새벽은 하루의 첫 시간입니다.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둔다는 말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새벽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을 찾는 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우선순위를 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이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둘째,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성령충만할 때 주어집니다. 롬 5:5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할 때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충만할 때 사랑의 사도가 되고, 사랑의 목사가 되고, 사랑의 성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충만하셔서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상칠언 중에 처음 세 마디는 오전 9시부터 12시 사이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졌는데 그 때는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나머지 네 마디 말씀을 연거푸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오늘은 오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들을 살펴봤습니다. 다음 주에는 예수님께서 운명 직전에 하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가상칠언을 통해서 발견한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2.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3.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