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 계곡 문명, 하라파 문명이라고도 한다.
펀자브 사히왈 행정구의 하라파에서 1921년 최초로 확인되었고, 1922년 인더스 강 근처 모헨조다로에서 재확인되었다.
이후 조사에서 남쪽으로는 카라치에서 남동으로 800km 떨어진 캄베이 만까지, 동쪽으로는 델리에서 북쪽으로 48km 떨어진 야무나 분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이 문명은 문자를 알았고 언어는 드라비다어로 추론되고 있다.
밀과 낱알이 6줄로 나는 보리를 경작했고, 개·소·돼지·낙타·코끼리 등을 가축화했다.
생활용구는 가늘고 긴 처트제 돌날이었다.
창·칼·단검·화살촉·도끼·낚시바늘은 구리·청동으로, 주발·잔·접시와 같은 도구들은 구리로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유물은 스테아타이트로 만든 도장이다. 모헨조다로의 문명은 극적이고 급작스럽게 끝났다.
하라파 (Harappa)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각각 외곽이 5km가 넘으며 이 규모는 정치적 집중화를 이루었음을 시사해준다.
집중화는 두 도시 모두에서 이루어졌거나 인도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듯이 서로 번갈아 수도로 사용되었으며 한 도시에 정치권력이 집중되었던 것 같다.
하라파는 모헨조다로보다 후대의 것일 수도 있으며, 모헨조다로는 1차례 이상의 대규모 홍수로 파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카티아와르와 그 외곽에 있는 인더스 문명의 남부지역은 주요 인더스 유적보다 시기가 늦은 듯하다.
이 문명은 문자를 알았고, 문자체계는 약 250~500자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부분적·잠정적으로 해독되었고, 언어는 드라비다어로 추론되고 있다. 추정연대는 BC 2500~1700년경인 듯하나 남부지역의 유적은 BC 2000년기 후반까지도 존속했던 듯하다.
인더스 문명은 동시대의 이웃 취락이나 앞 시기의 취락에서 발전한 것 같다.
이들은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동시에 파괴해온, 해마다 반복되는 대홍수를 조절하면서 넓고 풍요로운 인더스 유역에서 많은 이익을 수확하기에 충분한 기술로써 메소포타미아식 관개농경을 실시했다.
이 새로운 문명은 여러 가지 환경적인 장애요인을 극복하면서 인더스 평원에 정착했으며 거대한 수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퍼져나갔다.
생계는 주로 농경과 상당한 규모라고는 생각되나 그 전모를 확인하기 어려운 무역으로 유지했다.
밀과 낱알이 6줄로 나는 보리를 경작했고, 콩·겨자·참깨 및 약간의 야자씨와 더불어 현재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목화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가축으로는 개·고양이·소·가금류·돼지·낙타·들소 등이 있다.
코끼리 역시 가축화한 듯하며 상아가 널리 사용되었다.
충적층에서 구할 수 없는 광물은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져오기도 했다.
금은 인도 남부와 아프가니스탄, 은과 구리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인도 북서부(지금의 라자스탄), 라피스라줄리는 아프가니스탄, 터키석은 이란(페르시아), 그리고 옥과 비슷한 푸크사이트는 인도 남부에서 수입했다.
인더스 문명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은 일반적으로 스테아타이트로 만든 도장인데 그 종류와 질이 독특하다.
측면의 길이가 19~32㎜인 4각형이며 뒷면에는 손에 잡고 걸기 위한 구멍 뚫린 돌기가 있다.
작은 끌과 송곳을 사용해 매우 아름다운 음각 문양을 조각했는데, 이런 문양은 코끼리·호랑이·코뿔소·영양과 같은 실제 동물에서 복잡한 모습을 한 공상적인 동물까지 다양했고, 때로는 사람의 모습도 조각했다.
인더스 문명 도장
인더스 계곡의 유니콘 문양 도장,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도장에는 후대 힌두교의 위대한 신 '시바'의 원형을 조각한 듯하다는 점에서 특히 관심을 끈다. 대부분의 도장에는 인더스 문자로 씌어진 짤막한 문장이 있다.
인더스 문명의 석조물은 12개 정도가 발견되었다. 이 석조물은 모두 작으며 2개를 제외하고는 인간이나 신을 나타낸다. 청동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그중에서 특히 실물과 같은 들소의 청동상과 춤추는 소녀상이 유명하다. 셀 수 없이 많은 황소상과 물소상을 비롯한 소형 테라코타 조상은 일반적으로 교역물품으로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인간을 묘사한 테라코타의 형상은 보통 보석을 몸에 지니고 때로는 머리 장식을 한 벌거벗은 여인상이다. 이 인물상은 봉헌용이었던 것 같다.
인더스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도구의 유형에서 크게 다르다. 인더스 문명의 생활용구는 준비된 몸돌[石核]에서 떼어낸 가늘고 긴 처트제 돌날이었다. 구리나 청동제 곤봉 머리와 더불어 돌로 만든 곤봉 머리도 발견되었다. 그밖에 구리·청동 제품으로는 창·칼·단검·화살촉·도끼·낚시바늘이 있다.
주발·잔·접시와 같은 도구들은 구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도구와는 달리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구슬은 인더스 문명이 메소포타미아·크레타·이집트 문명과 분명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둥근 황금 구슬, 여러 조각으로 구성된 파이앙스 구슬, 에칭으로 장식된 홍옥수 구슬은 서부지역 문명과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모두 발견되었다. 보통 녹로로 제작되고 밝은 적색 피막이 분홍색을 띤 인더스 토기는 단순한 수평선이나 보다 회화적 모티프 가운데 하나를 검은색으로 그려 장식했다.
토기의 형태로는 단면이 S자형이며 고리가 달린 주둥이를 가진 대형 항아리, 이른바 굽 달린 접시 또는 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형태인 과일접시, 혹 모양의 장식이 있는 그릇, 가는 굽이 달린 큰 주발, 원통형의 구멍 뚫린 여과기, 크림색 술잔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인더스식 토기와 상감세공품, 때로는 도장도 발견되지만, 교역품의 대부분은 면화나 특정 종류의 목재였으리라 생각된다.
인더스 문명이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는 불확실하다.
실제로 그렇게 넓은 지역에서 성행했던 문화가 동시에 사라졌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나 모헨조다로의 문명은 극적이고 급작스럽게 끝났다.
이 도시는 BC 2000년기 중엽에 침략을 받았는데, 침략자들은 시체들을 방치한 채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
누가 공격했는가는 상상에 맡길 문제이다.
이 사건은 보다 오래된 〈리그베다〉에 기록된 아리아족의 인더스 지역 학살과 시간·장소에서 일치하는 듯하다.
이 책은 새로 온 사람들이 원주민의 '성벽도시' 또는 "요새'를 공격했고 아리아족의 전쟁신 '인드라'가 '세월이 옷을 낡아 떨어지게 하듯 성채들을" 부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모헨조다로는 최후의 일격을 받기 이전에 이미 경제적·사회적으로 매우 쇠퇴해 있었다.
대홍수로 도시가 물 속에 가라앉기도 했으며 가옥은 더욱 엉성하게 지어졌고 인구는 과밀했다. 최후의 타격은 갑작스러운 것처럼 보였으나 도시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증거를 통해 볼 때 인더스 유역에서 인더스 문명에 이어 나타난 문화는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이것들은 하부 인더스 문명의 유산을 조금 물려받기도 했지만 아리아족의 침략으로 인해 이란과 카프카스 지방의 영향을 직접 받기도 했다.
인도 지역 서북부에서 도시문명은 여러 세기 동안 죽은 상태였다.
그러나 카티아와르와 그 너머 남부지방의 상황은 매우 달랐던 듯하다. 이곳에서는 인더스 문명의 말기단계와 순동문화(純銅文化:BC 1700~1000년기의 인도 중부와 서부를 특징 짓는 문화) 사이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적 연속성이 있었던 듯하다(구리시대). 이 문화들은 인더스 문명의 종식과 BC 1000년경 인도에서 일어난 발달된 철기시대 문명 사이에 물질적 가교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