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43
12월18일 [대림 제4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yGXiA49EzU (이금재 마르코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7819797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안에 그분께서 기쁘게 탄생하시도록 작은 공간 하나 마련해드려야겠습니다!>
요즘 일기예보 적중률이 대단합니다. 한파에 이은 폭설이 내린다는 예보에 근심 가득 안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눈을 뜨니 소나무 가지가 휠 정도로 폭설이 내렸습니다.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서둘러 마을 입구로 달려가, 긴 비탈길에 쌓인 눈을 치우고 또 치웠습니다. 눈의 두께가 만만치 않아,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땀으로 다 젖었습니다.
눈을 쓸 때마다 제 오랜 허물과 상처, 죄와 부끄러움도 쓸어내린다는 마음으로 싹싹 쓸었습니다. 그랬더니 멋진 길이 하나 나더군요.
그 길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쓸었는데, 차가 못 올라와서 발을 동동 구르던 캠핑온 가족들이 그 길을 밟으며 지나갔습니다. 근심 가득했던 얼굴들이 환하게 변하며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안전한 귀가를 위해 축복해드렸습니다.
가끔 공공 근로 독거 어르신들 앉으셔서 담소를 나누시던 정자 마루와 주변에 잔뜩 쌓인 눈도 말끔히 치워드렸습니다. 자칫 잘못해 눈길에 미끄러져 낙상이라도 하시면 남은 인생 심각해지는 동네 어르신들도, 조심조심 제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 걸어가시니, 참 다행이고 안심입니다.
벌써 대림 제4주일입니다. 마리아와 요셉께서도 곧 탄생하실 아기 예수님을 위해 각자 주어진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 길을 닦으셨습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 번 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우리 각자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도 임박한 예수님의 탄생을 고대하며, 오실 그분을 위한 작은 길 하나 닦아야 할 순간입니다. 우리 안에 그분께서 기쁘게 탄생하시도록 작은 공간 하나 마련해드려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sFuYEC2G8o
++++++++++++++++++
<나는 언제 임마누엘, 예수님을 원하게 되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함임을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야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는 사실은 너무 명확합니다. 팀 호잇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마라톤을 하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눈만 껌뻑일 수 있는 모습의 아들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이가 달릴 때 장애를 잊은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는 이것에 감동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줍니다. 그래서 대학도 졸업합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머물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창조자와 머물면 이전의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달려주면 자신은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원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만을 따를 것을 원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원하지 않으면 안 오십니다.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엄마보다, 엄마가 원하는 공부보다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마트폰을 빼앗고 게임을 지우고 엄마를 바라보게 해야 할까요? 물론 그러면 아이는 살아남아야 해서 어느 정도는 엄마를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스마트폰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거의 게임 중독이 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50회에는 친구가 하나도 없고 오직 스마트폰에만 의지하려 하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빼앗는 엄마가 나옵니다. 다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이가 스마트폰을 향한 욕망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때 금지하면 아이에게 게임에 대한 욕망을 더 증폭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모 먼저 죄와 집착은 고통임을 알아야 이렇게 놓아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질리도록 하게 내버려 두고 부모는 아이를 잠시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불안하고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정말 중독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해야 합니다. 부모인지,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인지. 아이가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을 원하는데 그것을 빼앗고 부모와 억지로 머무는 것이 좋은 것임을 강요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 없이 스마트폰만 보는 것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해야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신학교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혼하지 못하는 삶을 평생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여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사제 서품식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물론 저는 가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집에 남았습니다. 집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좋지 못한 비디오를 보며 게으른 짐승처럼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이 매우 비참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야 다른 것이 행복하게 보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만지려고 할 때 엄마는 아이의 손을 살짝 데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거부만 한다면 아이는 그것에 대한 환상을 계속 품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키워나갑니다. 만약 그 환상이 믿음이 된다면 고통스러워도 자기 믿음을 바꿀 마음이 없어서 중독되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일찍 일찍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고통임을, 심지어 부모를 잃어버리게 됨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미지근한 사람을 뱉어버리십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하늘과 땅의 중간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듭니다. 법을 통해서입니다. 원하지도 않는데 다가와서 명령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죄를 짓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완전히 주님과 머물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더 신앙을 갖기 어렵게 만듭니다. 지옥까지 갔다 오게 해야 합니다. 무책임한 것 같지만 이것이 하느님께서 쓰시는 방식입니다. 그 지옥에 있는 이들만, 그 어둠에 있는 이들만 빛의 소중함을 압니다.
저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초등학교 때 술과 담배를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술은 쭉 하고 있고 담배는 그때 맛을 보고는 맛을 느끼지 못해서 피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유였습니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것을 다 했습니다. 이렇게 일찍 놓아주면 아이들은 큰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참기 더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술과 담배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부모님이 그것을 말렸다면 저는 지금도 술 주정뱅이와 담배에 찌든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 맛의 향수를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술도 마시지만, 과음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담배는 절대 피우지 않습니다. 피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렸을 때 술과 담배였지만, 이것이 결혼이나 돈을 버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아이들은 압니다. 하나를 실컷 해 보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임을, 별 게 없음을, 그래서 최대한 이른 나이에 아이들이 자기 뜻대로 사는 것과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행히 저는 하.사.시.를 통해 저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이 더 믿어졌기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혼을 해 보지 않아도 술과 담배를 피우는 것과 그때 생각한 결혼의 환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죄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끝장나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 죄의 쓴맛을 톡톡히 보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돌아올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그렇게 하지 책임질 수 없는 상태로 막 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위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때 반발 심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매춘과 대마초와 같은 마약이 합법입니다. 술집에 들어가면 대마초 냄새가 코를 찌르고 길을 지나가면 빨간 불 밑에 아가씨들이 유혹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계에서 범죄율이 거의 최저인 나라가 네덜란드란 것입니다. 오히려 합법화 시키니 그것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춘이 불법이기는 해도 네덜란드보다 성범죄가 훨씬 많습니다. 네덜란드는 마약, 매춘, 동성애, 안락사, 공원에서 성관계 허용 등을 합법화해서 그것을 통제 못 하면 범법자가 아닌 아픈 사람으로 여기고 치료해줍니다. 그것을 한다고 범법자로 만들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아픈 사람임을 깨닫고 치료를 받게 해야 합니다.
범죄자에서 갱생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아픈 사람이 치료 받으러 오는 것이 어려울까요? 당연히 자신을 범죄자가 아닌 환자로 여기는 사람이 갱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부모가 자꾸 자녀에게 무언가를 금지하는 것은 자녀를 아픈 사람이 아닌 범죄자로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갱생이 더 어렵습니다. 놓아주고 풀어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부모와 머물기를 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죄의 지긋지긋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돌아올 것을 믿게 됩니다. 죄가 싫고 나로 사는 게 싫어졌다면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두 번째 이야기 ‘사라예보’ 사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라예보는 탁구의 이 에리사 선수가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유고슬라비아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사라예보는 세계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도시이기도 합니다. 사라예보에서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저격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서 당시 세계는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나뉘어서 끔찍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류의 지성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무기의 시험장이 되었고, 인류는 하느님의 모상을 버리고, 동생을 죽였던 카인처럼 이웃을 향해 총과 칼을 겨누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사라예보에서 있었던 한 청년의 총구에서 시작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만나서 탐욕과 정복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는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고유한 문화는 말살되고, 자원은 수탈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국주의의 탐욕은 끝나지 않았고, 20년 후에 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또 한 번 참혹한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오늘은 대림 제4 주일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제국을 만들고, 세계를 정복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탐욕과 욕망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약소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자원을 착취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이념, 세대, 혈연, 학연, 지연, 종교로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임마누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셨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하게 비폭력을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분이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갇힌 이들, 아픈 이들, 세리, 창녀, 이방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친구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하라고 하신 분이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사라예보는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주님이 태어나시는 베들레헴은 하느님의 나라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거룩한 사람은 신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능력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직책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지만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 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베들레헴으로 오셨던 임마누엘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겸손과 비움의 구유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
오늘 전례는 온통 경이와 놀라움의 징조로 되어 있다. 이사야는 왕에게 하느님만을 믿으라고 권하였다. 아하즈를 야훼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그에게 어떤 징조를 청하라고 한다.(이사 7,11) 그러나 아하즈는 자신의 정치적인 계산 때문에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이유를 구실로 징조를 요구하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여전히 징조를 보여주신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3-14). 하느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다윗 가문을 이어주신다. 하느님은 인간들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으로 우리가 오직 당신의 길을 따라 걷고 당신의 약속과 지혜를 믿으라고 하신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동정녀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오늘 복음에(1,22-23) 따르면 남자를 모른 채 동정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라는 사실이다. 마리아는 이사야서의 그 구절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마리아의 모성은 참으로 위대한 징표이다. 마리아는 자기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처녀이며, 아들은 그녀가 이름 지어줄 그녀에게 속해 있고, 임마누엘이라는 그의 이름은 장차 메시아로서 그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역사상 어떤 인물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되실 수 있도록 도구 역할을 실현한 사람은 없다. 메시아는 순수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 메시아는 하느님의 약속을 살과 피로써 실현할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역설적이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동정잉태와 탄생 의미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징조의 신비스러운 면이 드러난다. 동정녀가 있었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고 어머니가 되었다. 아들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거기에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메시아에게 혈통으로 다윗 가문을 이어준 것이 아니라, 법적 동의와 사심 없는 사랑과 봉사로써 가문을 이어주었다. 복음은 믿음의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첫째 요소는 이미 말한 대로 예수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예수께는 인간적 차원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없고, 동정녀이신 어머니 자신도 오직 성령에 의해서 그를 잉태한다. 우리의 인간적 규범에 따른다면 마리아도 온전히 그의 어머니가 되지는 못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예견되고 기대하던 존재이지만 완전히 규범을 벗어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 분이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시지만, 우리 인간들을 섬기러 오신다. 이것이 마태오가 제시하는 둘째 신앙의 요소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명칭은 히브리말로 여호수아(Jehoshu'a) 즉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의 번역이다. 그리고 구원하실 백성은 하느님의 용서를 끊임없이 체험하고 있는(9,8; 18,15-18) 교회를 의미한다. 또 하나의 명칭은 임마누엘이라는 명칭인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23절)고 번역하고 있다. 이 명칭은 예수보다 더 명확하게 메시아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신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므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지만, 인간의 주도권을 말살시키지 않고 그것을 들어 높이신다. 이것이 마태오가 제시하는 신앙의 요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기에 마리아의 협조를 구하셨다. 그러나 결코 쉽거나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마리아의 잉태가 분명하지만,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요셉(19-20절)의 눈까지도 부정한 여인, 거짓된 여인으로 비쳤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도 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크나큰 신앙과 혹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오심과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성탄은 그분의 사랑을 믿는 이들 모두의 용기 있고 폭넓은 협조 없이는 실현되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들이 진정 임마누엘을 실현하고 그분을 체험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협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즉시 응답을 드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
[서울대교구 김한수 토미스 신부님]
<마음이 담긴 선물>
선물은 준비하섰나요? 크리스마스가 코앞입니다. 선물 받을 준비는 하셨나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엄청난 신비의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일상에서 주고받는 선물 가운데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사소한 일상의 대화에서 취향을 읽어 내고, 상황과 여건을 고려하여 고민하며 마련된 선물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소한 선물에 담겨 있는 그 마음을 읽어내면 주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 고맙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스스로 선물이 되어 주신 마음이 녹아 있음을 읽어내면 그 고마움의 크기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 선물에 담긴 마음을 읽고 나면. 그 고마움의 크기와 대상은 끝없이 확장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담긴 선물에 요셉 성인의 마음도 담겨
있음을 오늘 복음(마태 1.18-21은 전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자렛 마을에 사는 다윗 가문의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갔다고(루카 1.28) 루카 복음사가가 전한다면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꿈으로 들어갔다고 전합니다. 성경 시대의 꿈 이해는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압박에 대한 실마리라는 현대적 해석과는 다릅니다. 그 시대는 꿈을 미래에 대한 안내로 이해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드러나는 하나의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야곱(창세 28., 10-17)과 요셉의 꿈(창세 37.5-11)이 그러했으며, 이방인 왕들의 꿈 역시 그들 왕국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것임을 다니엘서가 전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자신의 꿈으로 들어온 주님의 천사의 전언을 꿈같은 이야기로 흡려듬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담격 있는 권유로 읽어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경험과 배움을 마음에 간직한 이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생각을 굳혔을 때, 또 다른 마음이 담긴 소리가 그의 내면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 소리에 담긴 마음을 읽어냈습니다. 그렇게 읽어낸 마음에 참여했습니다. 하느님 마음이 담긴 선물에 요셉 성인의 마음도 그렇게 담겨 있습니다. 당신 백성을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의 선물에는 이처럼 고마운 마음들이 끊임없이 동참해 오고 있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시민(civis idem et christianus)으로 이해됩니다. 그 시민은 신앙의 진리에 참여합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가치에 동참합니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교회와 세상은 그리스도인 시민을 통해 연결됩니다. 그리스도인 시민은 사회적 가치를 살아가며 자기 생각을 굳혔을 때. 내면을 파고들어 온 신앙의 진리를 함께 읽어냄니다. 그렇게 세상의 가치에 신앙의 진리를 더해 갑니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선물에 마음을 더합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선물에 작은 마음 하나 살짝 더해 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께서는 어디에서 오셨고 어떻게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게 되었는지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열쇠는 마태오 복음 1장 16절에 있습니다. 16절은 15절까지 반복된 문학 형식(능동태)을 파괴하면서 ‘마리아에게서의 출생’(수동태)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탄생이 이전 조상들의 출생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특별한 이야기’에 대한 추가 보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강론 지침』, 103항 참조)
오늘 복음의 ‘특별함’은 먼저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부부 관계가 아닌 성령의 힘으로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동정녀 잉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초자연적 사건으로 분명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마리아에게서의 탄생이 ‘회상’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약속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제1독서 참조)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약속은 완성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현존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활동하십니다.
오늘 미사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우리를 예수님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안으로 초대합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새로 태어날 아기는 ‘임마누엘’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아기를 통하여 활동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광주대교구 임창훈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대림 제4주일인 오늘 우리는 어떤 마음인가요? 다가올 성탄을 기뻐하며 맞이하는 마음인가요? 대림 시기가 벌써 다 지나버렸네 하는 후회하는 마음인가요?
내가 우선인 신앙인과 하느님 우선인 신앙인은 대림 시기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내가 느끼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은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도 삶에 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우선인 신앙인은 대림 시기와 상관없이 매일 기도하고, 매일 성경을 읽고, 매일의 삶 안에서 임마누엘 하느님과 함께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대림 시기는 특별히 무언가를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은 평소에도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힘든 운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맞게 적당히 꾸준하게 하라고 합니다. 하루에 만 보는 걸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오천 보라도 매일 꾸준히 걸어야 합니다.
어쩌다 하루 이만 보, 삼만 보를 걷는 것보다 매일 정해진 만큼의 운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몸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영혼의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꾸준한 노력이 영혼의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늦었다 포기하지 말고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매일의 미사 참여나 봉사활동, 성지순례, 피정 같은 큰 실천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건강을 위해 하루에 작은 사랑 실천, 잠깐의 기도, 하루 10분씩의 성경 읽기라도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꿈에 주님의 천사를 만난 후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던 마음을 바꾸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요셉의 응답과 순종은 오늘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응답은 끊임없이 매일 계속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흔들림 없이 충실하게 주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끝까지 따라야 응답이 완성됩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나에게 오신 임마누엘 주님과 함께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침내 임마누엘>
마태오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침내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나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너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께서 나와 너와 함께
나와 너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뜻대로 나는 너와 함께
하느님 뜻대로 너는 나와 함께
그리하여 나와 너는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마침내 임마누엘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를 도구삼아>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함께하신다는 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하느님을 잘 모셔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림초 4개가 환히 빛을 밝히는 그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얻기를 바랍니다.
미국 샌디에고에 1729년에 지어진 미션성당이 있는데 제단 위에 양팔이 없는 십자고상을 모셔놓았습니다. 왜 그런 십자고상을 모셨을까요?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선한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그 고통에 가려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 양다리 걸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언제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신비로운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있던 요셉의 처신을 통해 순명의 역사를, 믿음과 응답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요셉을 바라보면 정말 너무도 기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이 설레였겠습니까? 그런데 약혼한 처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실망, 또 실망,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놀랍고 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결혼을 하자니 남의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되고, 파혼을 하자니 한 사람을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만드는 것이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따지고, 소문내고 망신을 주며 소란을 피울 수도 있었으나 요셉은 법을 어기지도 않고 마리아를 죽음에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고 결국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1독서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의 상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닥친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해명도, 설명도 없습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보통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믿음은 바로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에 따르는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단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갈등과 상처를 가슴에 담고 상대를 철저하게 배려하며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태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남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나요? 이웃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없는지요? 험담을 하고 뒷담화를 하는 곳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십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감싸주고 품어주려 했던 요셉의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고 하느님 축복의 통로가 되길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 요셉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최선책으로 결정한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고민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한가운데서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세상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아주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응답을 요구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신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늬만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더더욱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때야말로 그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응답의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내가 이것을 감당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여겨지는 일, 궂은일, 곤란한 일에 직면해서 피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하십시오. 바로 그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 응답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길 청하며 매일 매 순간 우리 마음속에 아기 예수님을 탄생시켜 드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이에서 펜을 떼지 않은 채 4개의 직선으로 9개의 점을 연결하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5개의 직선이라면 쉬울 것 같은데, 4개의 직선이라고 하니 하나의 선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정답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생각했던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우선 정답은 이러했습니다. 경계를 벗어나면 쉽게 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점에서 조금도 벗어나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에 문제의 해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지요. ‘틀을 벗어나는 사고방식’은 우리 일상 안에서도 분명 필요로 합니다. 사실 습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란 정말로 힘듭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경기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우리나라가 불리하다고 생각할 때가 더 많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가 승리하면 선수들이 잘해서이고, 다른 나라가 이기면 심판의 잘못된 판정과 텃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뜻도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틀이 있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율법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틀이었습니다. 이 틀에 의하면 마리아를 고발해서 공개 심판을 받게끔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틀을 깨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를 복음은 이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파혼하기로 작정하지요.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은 아직도 틀 안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 그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고발하지도 또 파혼하지도 않으면서 성가정을 이룹니다.
천사의 명령이니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이루어진 명령입니다. 꿈 꾼 것을 누가 그대로 따르겠습니까? 틀을 깨려고 시도했기에, 꿈을 통해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 틀은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요셉도 마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성탄의 정점에 와 있는 대림 제 4주일입니다. 제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는 예언이 복음에서 실현됩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되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요셉에게 알려 줍니다. 바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마지막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인 임마누엘 주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 2독서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우리가 기도와 전례에서 늘 사용하는 호칭인데, 이 호칭이야말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주’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떠받드는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는 나자렛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마태오 복음에서 요셉에게 알리는 주님 탄생 이야기는 앞의 본문과 바로 연결됩니다. 즉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설명입니다. 족보는 메시아를 자리매김하고 본질적인 물음, 즉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에 답하고자 하느님 백성의 총체적인 역사를 종합적으로 제시합니다. 탄생 예고 이야기는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어디에서 오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건의 흐름을 바꿔 놓으실 수 있으십니다. 성경에서(창세 16,7-13; 탈출 3,2) 하느님을 가리키는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예언자적 영감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하시는 의사소통 방법입니다.(창세 20,3; 28,12; 욥 33,15) 이로써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인정하고, 예수의 아버지로서 책임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요셉은 아기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요셉의 이름과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으나 요셉을 통하여 다윗의 자손이 됨으로서 참으로 인간으로 오심을 말해줍니다.
다른 탄생예고이야기의 경우처럼 천사는 아기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라는 의미의 ‘예수아’를 그리스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구원을 의미하는 ‘여호수아’와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자’라 불리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신명 32,15; 1사무 10,19; 루카 2,11) 1세기 유다인의 세계에서 이 호칭은 오직 하느님께만 사용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해방자의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구원자’로 지칭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구원자’로 불리움 받습니다. ‘죄에서 구원하다”라는 표현은 더욱더 놀라운 것입니다.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는 구실을 한다면 죄에서 구원할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합니다. 그분이 곧 임마누엘 주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인간이 되시어 내려 오십니다. .
바로 그 구원자, 해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심을 기쁘게 준비하는 기간 되시길 바랍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롤모델 성 요셉>
-배려와 존중, 침묵과 경청, 겸손과 순종-
"영원한 하늘의 빛 떠올라 있고, 구원의 아침샛별 반짝이나니 찬란한 천상빛이 우리를 불러 천국의 시민되라 초대하시네."
대림시기 제2부(12.17-24) 아침성무일도시 찬미가 5절이 아름다워 나눕니다.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참 행복합니다. 큰 산같은 두분의 성인, 즉 성 요셉과 성 베네딕도를 배경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 로고에서 불암산佛巖山 큰 산봉우리 둘이 흡사 두 성인을 상징하는 듯 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성 요셉이고 마치 오늘이 성 요셉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오늘 대림 제4주일, 마음 안팎을 환히 비추는 대림 촛불 넷이 주님 오심이 임박함을 알리며 마치 성 요셉 축일을 경축하는 듯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참 좋은 아버지 요셉을 마련해 놓으신 하느님의 배려가 놀랍습니다. 어제 “오! 지혜(O Sapientia)”로 시작됐던 M후렴에 이어 12월18일, “오! 하느님(O Adonai)”으로 시작되는 M후렴도 좋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은연중 보여주는 성 요셉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성 요셉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두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수차례 인용했지만 늘 새롭습니다. 영원한 롤모델인 성 요셉을 참으로 흠모하는 마음에서 쏟아 놓은 고백시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불암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고
큰 절을 올린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불암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불암산처럼!”-2000.11.17.
이와 더불어 그보다 한참뒤에 쓴 “저녁 불암산”도 제가 좋아하는 짧은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2007.12.
그대로 성 요셉을 상징하는 듯한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제 집무실에는 어느 아픈 자매가 깊은 신심으로 6개월에 걸쳐 그린 “크고 깊고 고요한” 산같은 모습의 성 요셉의 초상화도 늘 바라볼 수 있도록 비치되어 있습니다.
첫째, 성 요셉은 배려와 존중의 큰 마음을 지닌 ‘큰 산’같은 분입니다.
참으로 큰 산같은 연민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바로 이런 넉넉하고 자비로운, 배려하고 존중하는 성 요셉의 큰 마음이 정말 잘 드러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나 침착하고 지혜로운 대응인지요! 추호도 흥분이나 분노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성 요셉의 관심은 오로지 마리아의 안전이였습니다. 감쪽같이 마리아를 살려내고 지켜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마음은 더 큽니다.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이 이뤄집니다.
둘째, 성 요셉은 침묵과 경청의 깊은 사랑을 지닌 ‘깊은 산’같은 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은 침묵과 경청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요셉이 침묵중 경청한 후 조용히 헤어질 마음을 굳혔을 때, 꿈에 주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필경 성 요셉은 깊은 고뇌중에 밤샘 기도에 돌입했음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요셉을 신뢰했는지 당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참으로 탄생할 아기 예수님이 얼마나 고귀한 분인지 그 심오한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예수는 본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히브리 말 이름인 여호수아가 줄어서 된 예수아를 그리스말식으로 음역한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자 성령으로 잉태된 참으로 심오한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바로 제2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런 고백과 일치되는 신비로운 비밀이,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이고 영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인 예수님의 고귀한 신분이 은밀히 요셉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받은 침묵과 경청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신적 기원을 알았기에 요셉은 참으로 예수님을 헌신적으로 돌봤을 것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겸손과 순종의 고요한 믿음을 지닌 고요한 산같은 분입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정수유심靜水流深, 심수무성深水無聲).’ 성 요셉이 바로 그러합니다. 참으로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겸손과 순종의 고요한 믿음을 지닌 성 요셉은 참 ‘깊은 산’같은 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심중을 정확히 알아챈 성 요셉은 군말없이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얼마나 충실한 주님의 종인지요! 겸손과 순종으로 빛나는 성인의 믿음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내적 일치의 삶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이런 성 요셉을 통해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의 실현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뜻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 임마누엘인지요! 마침내 요셉의 순종의 믿음으로 마리아를 통한 임마누엘 구원자 예수님이 탄생할 수 있었으니, 성 요셉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 인류의 자부심같은 존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 삶의 영원한 롤모델 성 요셉입니다.
참으로 크고 깊고 고요한 불암산 같은 성 요셉입니다.
1.배려와 존중의 큰 산같은 마음의 사람,
2.침묵과 경청의 깊은 산같은 사랑의 사람,
3.겸손과 순종의 고요한 산같은 믿음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이런 사람으로 변모시켜 줄 것입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의로운 요셉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1,18-21)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말씀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인성을 취하신 합법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성령으로 잉태된 신성을 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탄생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된 일을 두고 의로운 사람 요셉은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러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복음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율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요셉이 처한 상황은 그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전하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의로움을 드러냅니다.
대림 제4주일을 의미하는 대림초 네 개의 불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주님성탄대축일'이 임박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할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 내 마음 안에 탄생하시는 주님의 자리는 잘 마련되어 있는지? 나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잘 살아왔는지? 의로운 요셉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지금은 이에 대한 '시급한 성찰과 다시 태어남'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
[인천교구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님]
“미국에서 두 번째 학기 때 한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성서 주석 페이퍼를 제출했는데 영어 문장이 너무나 빈약해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과 긴장이 얼마나 컸던지 며칠을 우울하게 지내던 중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나는 절벽 밑에 서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어찌나 높은지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절벽 위에서 튼튼하게 생긴 숫염소 한 마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올라갈 수도 없는 아득한 정상에 늠름한 염소 한 마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꿈을 보면서 처음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공부가 마치 절벽타기와 비슷하구나.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마치 깎아지른 듯한 저 높은 절벽을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구나.’
하지만 꿈은 언제나 내게 힘을 주고 생기를 주기 위한 것인데,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지 하고 즉시 적극적으로 다음과 같이 꿈을 해석하였다. ‘그렇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현재로서는 저 높은 절벽을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저 늠름한 염소처럼 나도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겠구나.
그렇다! 저 염소는 몇 년 후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꿈을 해석하고 나니 퇴짜 맞은 페이퍼 때문에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 않게 됐다. 용기를 내어 교수님께 전화를 해 페이퍼를 다시 교정해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재작성해 통과할 수 있었다.”(송봉모 신부 「관계 속의 인간」 중)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 일이 우리의 굳어진 생각을 깨고, 행동의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예전에 로마서 4장에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라는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희망이 없는데 어떻게 희망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말씀 중간에 몇 단어를 넣으면 이해할 수 있기도 합니다. ‘내 눈에 희망이 없어도, 그분의 눈으로 내다보고 희망하며.’ 그 구체적인 상황을 몇몇 성경 인물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의 눈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떠나라고 하긴 했는데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약속의 땅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막막함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눈에는 아브라함에게 보이지 않던 희망이 보였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에는 가려져 있던 많은 후손들과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희망이 없어 보여도, 주님을 믿는다면 희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데요.
구약에 나오는 요셉도 당장 벌어지는 일들만 보면 희망할 수 없었을 겁니다. 구덩이에 갇히고, 노예로 팔려 가고, 감옥살이를 합니다. 하지만 그가 희망할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을 내다보시는 분이 보여 주신 꿈을 강하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그를 희망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 희망할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셉도 그의 눈에는 희망이 아니라 두려운 상황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오해받아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고 희망을 내다보고 계시며, 그 희망과 함께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는 희망적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희망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면, 주님이 보고 계신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 24)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십니다.
요셉을 아시고
마리아를 아십니다.
요셉은
번민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믿음의 순종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이렇듯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순종의 핵심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은총이
됩니다.
은총과 평화는
저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는
믿음에서
만나게 되는
은총과 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요셉의 믿음에서
삶과 성탄은
하나가 됩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서로를 살립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부르심을
완성하시는
주님을 믿기에
착각에서 깨어나고
불편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맞아들이듯
믿음은 말씀과 함께
이 상황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요셉에게서
믿음은 새 세상을
만드는 구원의 기쁜
서막(序幕)이 됩니다.
믿음은
맞아들이는
신비이며
예수님 탄생은
믿음의 실현입니다.
동서남북으로
모두 밝혀진
대림의
촛불같이
우리의 믿음도
지치지 않고
뜨겁게
타오르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을 믿기에
믿음에 순종하는
은총의 값진
여정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