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어느 멋진 밤에 / 장석창

시월의 어느 멋진 밤에 장석창    시월 마지막 밤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지 창밖에는 낙엽이 즐비하다. 문득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기타를 들고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연주한다. 애잔한 선율에 마음을 실어 명상에 잠긴다. 살아오는 동안 시월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아내와 첫 만남이 시월 어느 토요일 밤이었지. 아들 돌잔치 때 연주하려고 이십여 년간 손 놓았던 기타를 다시 잡은 것도 시월이었네. 그리고…   ‘센텀파크 1차 아파트 가을 음악회’   퇴근길에 아파트 게시판 앞에서 멈춰 섰다. 단지 내 야외광장에서 10월 14일 밤, 입주민이 참여하는 음악회를 개최한다는 공고였다. 보름 남짓 남았다. 음악회는 7년 전 입주했을 때도 열렸다. 그때 아내는 다음에는 꼭 나가보라고 내게 권했다. 그 후로는 중단되어 잊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집에서 나를 보자마자 이번에는 참가하라고 부추겼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도 통기타 합주로 나간다고 했다. 사실 전자기타만의 독주는 좀 심심하다. 그러나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당시 나는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의대 록 밴드 선후배들과 연습과 공연에 열중하던 터라 아내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녀는 지인 모두를 부르겠다며 흡족해했다.   한 소년이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학교생활에 충실한 이른바 범생(範生)이었다. 틈틈이 라디오를 통해 록 음악을 듣는 게 취미였다.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폭발적인 드럼 비트에 매료되었다. 기타를 들고 흉내를 내보곤 했다. 의대에 진학한 청년은 록 밴드 동아리 문을 두드렸다. 동기들과 록을 연주하며 과중한 학업에 억눌린 젊은 혈기를 발산했다. 의업에 매진하는 사이 어느새 중년에 접어들었다. 가슴속 한편이 허전했다. 운명처럼 다시 기타를 잡았다. 삶의 자양분이었다. 아들이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록 음악을 접한 아들은 드럼 박자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피는 못 속였다. 기타와 드럼을 가르쳤다. 부자는 용감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날 밤 벽에 기대어 책을 보다가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목 근육이 돌덩이 같았다. 목과 어깨를 조금만 움직여도 절로 신음이 났다. 이대로는 음악회 참가가 불가능했다. 통증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아내는 나보다 더 노심초사했다. 나를 보는 결결이 내 상태를 점검하며 연주할 수 있냐고 물어댔다. 그때가 결혼 이후 아내가 내 건강에 가장 관심을 보인 시기였던 것 같다. 초조해진 아내는 도수 치료 업체를 소개해주었다. 치료사는 중년여성이었다. 그녀가 치료 중에 내뱉은 말이 뼈를 때렸다.   “진료도 중요하지만, 본인에게는 얼마나 투자하시나요? 이제부터 자신을 위해서 사세요.”   가을 음악회 날이 되었다. 시월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청명했다. 아침에 일어나자 기타부터 어깨에 둘러메 보았다. 불편한 대로 연주는 가능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연주회 일정을 살펴보았다. 총 열 팀이 참가했다. 아들은 아홉 번째, 나는 마지막 열 번째였다.   야외광장에 마련된 특설 무대는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니 호기심에 밖으로 나온 입주민도 많았다. 어둠이 점점 짙어가고, 음악회 열기가 밤을 밝혔다. 아들 팀 연주를 지켜봤다. 아들은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드럼 주자로 활동하는 무대 체질이라 전혀 떨지 않았다. 무난한 연주였다. 사회자가 다가와 관객들에게 남길 말이 없는지 물었다.   “직전 통기타 팀 중에 제 아들도 있었다고 전해주세요.”   내 차례가 되었다. 무대에 올라 관중석 아내를 찾으려다 포기했다. 사실 그럴 수도 없었다. 목이 아파서 고개를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경 음악이 흐르고 연주를 시작했다. 모든 조명이 나를 향했다. 통증이 몰려왔지만 돌볼 경황이 없었다. 클라이맥스인 속주 부분에 이르렀다. 숨을 들이마신 후 손가락에 혼을 불어넣었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들 목소리가 가장 또렷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항상 공허함이 밀려온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좀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아서다. 이번에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음악회가 끝나고 만난 아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단톡방이 난리가 났어요. 너무 멋지다느니. 프로 수준이라느니.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고…”   가없는 밤하늘을 철새 세 마리가 날아간다. 한 가족이다. 목적지는 그들이 태어난 고향이다. 아빠와 아들은 멀고 먼 길에 무료한지 곡예비행을 한다. 엄마는 흐뭇하게 바라본다. 철새가 험난한 여정에서 어떻게 귀로를 찾아내는지 신비롭다. 분명한 것은 귀소 본능에 이끌려 보금자리로 향하려는 의지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세파에 시달릴 때 어릴 적 그 시절로 회귀하고 싶어진다. 나에게 록 음악은 마음속의 둥우리이고, 기타를 안고 있으면 엄마 품같이 편안하다.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철새는 그곳으로 날아가리라.   인생은 정해진 연극처럼 흘러간다. 우리는 각자의 무대극에서 주인공이다. 배우는 주어진 극본대로 연기하지만, 역량에 따라 무대 위를 맛깔나게 변모시킨다. 그렇다. 삶은 경직된 것만은 아니다. 삶은 유연하면서도 탄력적이다. 하루하루를 변함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생활의 활력소는 꼭 필요하다. 무더위가 끝나면 가을인가 보다, 낙엽이 지면 이제 추워지려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주기성에 길들어져 매사에 무덤덤한 우리네 삶. 부족했지만 불편한 몸으로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무대에서 공연했고, 아내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안겨주지 않았나. 언젠가 아들의 드럼 반주에 맞춰 기타 연주하는 무대가 오기를 소원해 본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두 명과 마주쳤다. 처음 보는 아이들이었다. 한 아이가 웃으면서 인사했다. 혹시 내가 몰라보는 게 아닌지 염려되었다.   “나를 아니?”   “예, 어젯밤 가을 음악회에서 기타 치던 아저씨요.”   그리고는 옆에 있는 친구를 힐끔 쳐다봤다. 다른 아이가 맞장구쳤다.   “맞다! 그 아저씨.”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하룻밤 사이에 나는 아파트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해 시월은 그렇게 지나갔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지만 추억은 그때 그 모습으로 기억 속에 자리 잡는다. 앞으로도 소소하지만 소중한 이야기들로 내 인생 노트에 한 줄, 한 페이지 채워나갔으면 한다. 참! 오늘 밤에는 아내에게 기타 반주하며 노래를 불러줘야겠다.   곡목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서울출생 비뇨의학과 전문의 2020년 한국산문 등단 2021년 에세이문학 등단 제19회 한미수필문학상 대상 제16회 보령의사수필문학상 대상 제15회 보령의사수필문학상 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