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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를 ‘높이’로 구현해낸 집. 사우당종택은 입구(口)자 형이거나 디귿(ㄷ)자 형인 영남지방 고택의 구조와는 전혀 다르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강당, 영모당이 지형에 맞춰 차례로 단을 높여가며 지어져 깊숙이 들어설수록 높은 시야를 갖게 된다. 이쪽에서 높은 시야를 확보한다는 건 집의 안쪽을 밖을 향해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
경북 성주 ‘고요한 휴가’
서늘한 대숲 그늘 속에 들어선 정자의 툇마루. 거기서 누군가와 마주 앉아 조용히 바둑돌을 놓으며 보내는 느긋한 휴가를 생각해봅니다. 처마 끝에 빗물이 후드득 쏟아지는 날, 서늘한 한옥 마루에 책을 베고 누워 혼곤한 낮잠에 빠지는 휴가는 또 어떻습니까.
바야흐로 휴가마저도 스트레스가 되는 세상입니다. 남들의 행복한 휴가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실시간 생중계되는 세상. 남들보다 더 일찍, 더 많이 준비하고, 더 멀리 떠나서, 더 바쁘게, 더 화려하게, 더 고급스럽게 놀아야지만 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적잖은 휴가 비용도 비용이지만, 준비과정부터 쏟아부을 열정과 에너지가 더 모자
휴가는 사실 이럴 때 더 필요합니다. 더 이상 남은 힘이 없다고 느껴질 때. 남들과의 경쟁으로 심신이 피곤해질 때. 그때가 바로 휴가를 떠나야 할 때입니다. 이런 휴가의 목적지라면 교통체증과 바가지 상혼,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한 떠들썩한 피서지 말고, 정물 같은 풍경과 고요한 휴식이 있는 그런 곳이어야 할 겁니다.
경북 성주. 휴가철에도 여행자들의 발길이 좀처럼 닫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에 한눈에 반할만한 한옥 두 채를 만났습니다. 하나는 집의 깊이를 높이로 구현해낸 사우당종택입니다. 종택은 반질반질 윤이 나는 차가운 마루와 대숲 소리 서걱거리는 높은 자리의 정자, 불붙듯 타오르는 배롱나무
도시생활에서 방전된 몸과 다친 마음을 내려놓기에 이만한 곳이 없어 보였습니다. 반질반질 오래 닳은 집은 사람의 몸을 편안함으로 받아냅니다. 편안하다는 건 곧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는 것. 이런 시간이 만들어내는 건 자신의 호흡을, 걸어온 발자국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입니다. 휴가 때 집에서 쉬나, 나가서 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면 틀렸습니다. 때로는 ‘충전’보다는 ‘방향’이 더 중요할 때가 있는 법. 일상의 고단하고 버거운 무게가 방전 때문만이 아니라, 때로는 방향의 문제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 성주의 성밖숲. 나쁜 기운을 막는 비보풍수에 의해 조성된 왕버들 숲이다. 300살부터 500살 사이의 왕버들이 우람한 가지를 뒤틀고 선 숲 아래 심어둔 맥문동의 보라색 꽃이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했다. |
# 깊이를 높이로 구현해내다… 사우당종택
다른 한옥들과는 전혀 다르다. 집은 깊었고, 그 깊이가 특이하게도 높이로 구현됐다. 문간채에서 사랑채로, 거기서 다시 안채, 그리고 서당, 그 뒤의 대나무 숲 안에 재실이 서 있다. 건물은 순서대로 각기 단(檀)을 이루며 높아졌다. 깊이 들어설수록 건물이 들어선 자리가 높아지는 것이다. 전통적인 한옥에 현대적인 미감이 살짝 얹어진 듯한 느낌이랄까. 숨기고 가리는 대신 높이고 드러냈음에도 집은 그러나 전혀 위압적이지 않다. 유순하고 우아하게 바깥을 향해 열려있다. 안으로 깊이 들어설수록 숨는 것이 아니라, 높이 드러내며 바깥과 오히려 더 가까워진다는 얘기다.
경북 성주 윤동마을에서 만난 이 집이 사우당종택이다. ‘사우(四友)’는 종이, 붓, 벼루, 먹을 뜻하기도 하고, 눈 속에 피는 동백꽃, 납매, 수선화, 옥매를 이르기도 한다. 500년 전 이 집의 어른이 ‘사우당’을 호로 삼았다. 사우당종택은 그 어른의 후손들이 15대를 이어온 종가다. 무관의 벼슬인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나 도학에 능통한 문관이기도 했던 사우당 김관식은 후손들에게 바람
그 뜻을 새기고 집을 보면, 이리 높여 지은 뜻은 풍경에 대한 욕망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실제로 집 뒤쪽의 가장 높은 곳의 ‘영모재’에 올라서 본들 이렇다 할 풍경은 없다. 유순한 들판의 평범한 풍경이 펼쳐질 뿐이다. 그렇다면 각기 단을 세워 건물을 높이 지은 뜻은 무엇일까. 건물의 높은 담과 짙은 숲 뒤에 꼭꼭 숨지 않고, 거리낄 게 없이 다 드러내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담 밖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도 높여 지은 집의 안쪽이 훤히 보였다.
# 매미 소리 들으며 바둑 한 수를 놓는 맛
사우당종택은 독특한 건물의 배치도 훌륭하지만, 단아한 건물과 이제 막 꽃망울을 환하게 터뜨린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더 환하게 빛난다. 집은 오래 묵었지만, 종부의 손길로 어디를 보든 반질반질하다. 꽃과 나무, 그리고 수석과 소박한 장식물들로 너른 집이 꽉 차있다.
사랑채 마루에서 눈길을 끈 건 나무를 깎아 만든 두툼한 바둑판. 마루에 앉아 안채의 정원 쪽 창호문을 활짝 열어 매미 소리를 안으로 들이고, 꽃나무의 풍경을 병풍 삼아서 바둑이라도 한 수 놓는다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겠다.
안채를 지나면 후학들을 가르치던 강당이 있는데 ‘사우당’ 현판을 단 건물은 자못 힘차고 규모가 당당하다. 강당 마루 안쪽에는 사우당 10경(景)의 글귀를 새긴 편액이 걸려있다. 바람이 지나가는 마루에 앉아 글귀를 읽는다. 옥동에 저무는 구름, 후암의 붉은 단풍, 오봉의 피리소리, 영천의 푸른 대숲, 검봉에 떠오르는 달…, 옥동이며 후암, 오봉이 어딘지 알 도리가 없지만, 글에 담긴 풍경이 모두 다 고요하고 정적이어서 책갈피를 넘기듯 그 풍경을 떠올리자 금세 마음이 평안해졌다.
사우당종택의 가장 빼어난 공간
종택이 있는 윤동마을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참모이자 천문지리에 능한 풍수가였던 두사청이 성주의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은 곳이기도 하다. 의성 김씨 일가의 집성촌인 윤동마을에는 사우당종택을 중심으로 서계정, 첨모재, 원암재 등 열다섯 채가 넘는 한옥과 누각이 있다. 이것들만 둘러보는데도 반나절은 족히 걸린다.
▲ ‘나를 살리는 집’이란 뜻의 ‘아소재(我蘇齋)’를 당호로 삼은 한옥. 들어선 이들을 무장해제시키는 편안한 느낌의 집이다. |
#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집… 아소재
사우당종택에서 멀지 않은, 가야산 아래 끊긴 길 안쪽에 ‘아소재(我蘇齋)’란 현판을 건 한옥이 있다. 이름
아소재는 담박한 집이다. 화려한 치장 없이 수수하다. 윤동마을의 한옥처럼 멋스럽게 지어진 것도 아니고, 오래 묵은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집이 이 자리에 서게 된 내력도 이제 막 30년을 넘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소재가 매력적인 건 집이 한없이 느슨하고 편안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 집에 들어서면 아무것도 하지 않게끔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담도 경계도 없는 집. 그 집은 처음 온 사람이라도 곧 익숙한 제집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마치 마술처럼….
아소재 주인 엄윤진(55) 씨가 이곳에 뿌리내리게 된 내력은 범상치 않다. 8년 전쯤 엄 씨는 경남 김해에 출장차 내려왔다가 길을 잃는다. 한참을 헤매다가 ‘해인사’ 안내판을 발견하곤 내친김에 절집에 들르자고 핸들을 틀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길을 잃고 발견한 게 바로 이 집이다. 본래 한과를 만들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어딘가에서 뜯어다 다시 세웠다는 한옥은 무성한 잡풀 속에 폐가처럼 묻혀있었다. 집 앞에는 ‘전세·매매’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그는 한옥을 샀고 서울살이를 다 정리하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 정자 ‘만귀정(晩歸亭)’ 아래 옥계천변에 지어진 한 칸짜리 정자 ‘만산일폭루(萬山一爆樓)’의 창호문 너머로 폭포가 바라다보인다. |
집에는 주인의 성품이 묻어나게 마련. 수더분한 성품 그대로 집을 가꿨다. 마당에는 잔디를 심고, 처마 아래에는 비비추꽃을 심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집을 다듬었다. 그리고 커피를 내리고 민박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더치 커피 한 잔에 7000원. 숙박 요금은 10만 원. 시골 촌동네의 커피값이나 숙박비로는 비싸지만, 그건 커피값이라기보다 집을 누리는 입장료에 더 가깝다. 차 한잔을 주문하곤 마루에 누워 책을 보거나 혼곤히 낮잠을 자도 된다. 봄이면 손님들이 마당에서 쑥을 캐거나 머위를 뜯기도 한다. 그저 제 편한 대로 마음껏 시간을 즐기면 된다. 엄 씨는 아소재를 가장 사치스럽게 즐기는 방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최고로 쳤다. 그게 진짜 휴식이라는 얘기다.
# 500살 왕버들 아래 보라색 융단이 깔리다
사우당종택이나 아소재를 휴가의 숙소로 잡으면 호젓하게 다녀올 만한 곳들이 곳곳에 있다. 성주라면 곧바로 ‘참외’라는 말이 먼저 입에 붙고 그 외에는 떠오는 것이 거의 없겠지만, 성주에는 제법 향기 나는 호젓한 명소들이 곳곳에 있다. 눈에 확 뜨일만한 풍경은 없지만 느긋한 뒷짐과 느린 걸음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먼저 성주읍의 성밖숲부터. 성밖숲은 성주읍 서쪽의 하천인 이천변의 마을 숲이다. 본래 밤나무숲이었다는데, 임진왜란 직후 다 베어졌고 대신 왕버들이 심어졌다. 이렇게 심어진 늙은 왕버들 55그루가 500살이 넘는 노거수가 돼서 천변에 가지를 뒤틀고 있다. 나무의 위용도 위용이지만 그 아래 심어둔 맥문동이 이제 막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어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내고 있다.
가야산 동쪽 자락의 법수사 옛 절터도 느긋한 휴가 여행에 어울릴만한 곳이다. 법수사는 한때 인근의 해인사보다 더 위세가 당당했던 절집이었다. 건물이 자그마치 1000칸이 넘었고, 암자만 100여 개를 헤아렸다고 전한다. 지금 해인사의 대적광전에 있는 불상도 본래 법수사의 것이었다.
법수사 자리에는 삼층석탑 하나와 당간지주만 겨우 남았는데 석탑과 당간지주 사이의 거리와 경사를 보면 법수사가 얼마나 큰 절집이었는지, 또 경사면을 따라 절집 건물들이 얼마나 웅장하게 들어섰을 것인지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운무가 산자락을 휘감을 무렵, 오래된 시간을 증거하는 탑 앞에 서면 세월이 비워낸 것들과 자신이 비워야 할 것들을 혹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성주에서는 또 가야산 칠불봉 아래 옥계천변의 만귀정의 경관을 빼놓을 수 없다. 베보자기 같은 폭포가 쏟아지는 옥계천의 물가에 ‘늦을 만(晩)’에 ‘돌아올 귀(歸)’를 쓰는 정자 만귀정이 있다. 조선후기 공조판서를 지낸 이가 40여 년의 벼슬살이를 마치고 고향 땅에 돌아와 지은 정자다. 정자 아래 물가 언덕에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란 한 칸짜리 정자 안에서 폭포를 그윽하게 내다보는 맛이 훌륭한 곳이다. 여기에다 대학자 한강 정구가 말년에 후학들을 길러내던 초당 자리에 들어선 회연서원을 보탠다. 인적 드문 서원의 적막한 정원에서 불붙는 듯 타오르는 배롱나무꽃과 서원의 지붕 기와가 첩첩이 그려내는 선을 감상하는 것도 나무랄 데 없다.
출처 문화일보 성주 = 글·사진 박경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