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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8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26장.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다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아브라함이 흉년 때에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블레셋 그랄 땅에 이주했듯이 대략 100여 년 후 이삭 때에도 흉년이 들자 다시 그랄 땅으로 이주한다. 아마도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블레셋 그랄 땅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흉년이 없이 비옥한 땅이었던 것 같다. 또한 두 흉년 사이 기간은 100여 년 정도 되므로 아브라함 때의 아비멜렉과 이삭 때의 아비멜렉은 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삭을 받아들인 아비멜렉은 자기 선조들의 왕궁 기록과 이삭의 심문을 통해서 오래 전에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네 땅에 머무른 것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대 아비멜렉에게 행하신 일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아마도 이 때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삭에게 나타나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이 아닌 당신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과 더불어 그 지시하신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실 것이라고 계시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그들에게 또는 그들의 자손에게 주실 땅이 어떠한지를 흉년이라는 섭리를 통해서 사전답사를 시키시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랄 땅에 한동안 거주하면서 그 땅이 다른 지역에 비해 얼마나 비옥한지를 절감했을 것이고 하루빨리 자기 자손들이 그 땅에 거주하여 정착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을 것이다. 신자의 성화의 삶에는 이삭처럼 간간이 흉년과 같은 어려움이 닥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흉년을 통해 이삭에게 더 크고 장대한 복을 계시하신 것처럼 신자들에게도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더 크고 비밀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복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으로 믿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복을 주신다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공로가 아들 이삭에게 전가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우상숭배자여서 아무런 선을 행한 것이 없었을 때에 선택하셔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전적인 은햬를 주신 것처럼 이삭에게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어떤 선한 공로나 아버지의 공로로 인해 그 댓가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신앙에 선하고 유익한 환경을 만들어줌으로써 삼사대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한 부모에게서 악한 자녀가 날 수도 있고 악한 부모에게서 선한 자녀가 날 수도 있으므로 이 택하심은 전적으로 개인적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가 각각 어떤 구별된 의미를 갖는지 따지는 것은 별로 큰 유익은 없어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명령 > 계명 > 율례 > 법도 순으로 그 포함하는 범위가 지정되는 것 같다. 즉 명령은 나머지 셋을 포함하고 계명은 율례와 법도를, 율례는 법도를 포함하는 의미로 보인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당신께서 내리신 지시가 크건 작건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그저 철저히 순종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교회와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내 입맛과 취향을 따라 취사선택하고 감탄고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나한테 유익이 되고 유리한 것과 크고 드라마틱하게 보이는 것은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척)하는 반면에,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것과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드러나지 않는 작은 일에는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며 한 걸음도 떼지 않는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전방위적인 섭리를 통해 그 일을 하게 하실 때에는 여전히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무슨 순교하러 가는 것마냥 토로하기 마련이다. 성경과 성령과 설교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명령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내 처지와 감정과는 상관없이 마치 노예가 주인에게 오로지 복종하듯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이삭은 아브라함처럼 그랄 땅 사람들이 두려워서 자기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거짓말한다. 그러나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처럼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삭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에피소드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삭이 똑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부전자전이라느니 남자들은 다 똑같다느니 섣불리 부정적으로 판단하기 일쑤지만, 앞서서 언급했다시피 고대 사회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이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삭으로서는 한 무리의 족장으로서 눈물을 머금고 자기 아내를 희생시킬 수 밖에 없는 처지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리브가도 마찬가지로 그저 한 남자의 아내인 것과 더불어 족장의 아내라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부족을 위한 희생을 각오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블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 때와는 달리 리브가에 대해서 물어보기는 했어도 그녀를 아비멜렉에게로 데려가지도 않았고 아비멜렉 또한 그녀를 데려오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그랄 땅에서 보내면서 아비멜렉은 이삭과 리브가가 남매가 아니라 부부인 것을 확인하고서는 이삭을 불러 심하게 질책한다. 이를 보면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삭 때의 아비멜렉은 선대 아비멜렉의 왕궁 기록을 통해사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머물렀을 때의 자초지종을 이미 알고 마음 깊이 명심하고 있었을 것 같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다녀간 이후로 아비멜렉은 대대로 자기네 땅에 거주하러 오는 이방인의 여인들을 함부로 취하는 관습을 철폐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비멜렉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들도 이 하나님의 사람을 해함으로 재앙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경고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지켜주신 것처럼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욱여쌈을 당하는 위기에 처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대로 멸망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내어 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우리의 잘못된 결정을 정당화 하거나 합리화 할 수는 없다. 이는 서로간에 동병상련을 생각하고 함부로 상대를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지 자기를 합리화 하라는 것은 아니다. 설령 사람들은 내 처지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준다 하더라도 내 잘못된 행보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다시 그러지 않도록 다짐하는 것이 필요하다.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아비멜렉을 비롯한 블레셋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삭은 그저 잠시 자기네 나라에 얹혀 사는 이방인 나그네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삭이 거주하도록 내어준 땅도 어쩌면 자국인들이 가치 없게 여기는 그런 지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통상적으로라면 이삭은 그랄 땅에 거주하는 여타 이방인들처럼 그저 간신히 먹고 살만큼의 소득만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그랄 땅의 모든 지역보다 100배나 더 풍성한 소출을 얻었는데 이는 이삭의 노오력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복과 은혜 덕분이었다. 이삭이 그렇게 척박한 땅에서 말도 안되는 소출을 올리고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은 그가 받은 복을 함께 나눠 받기를 원하기보다는 도리어 그를 시기하고 비방하며 젖줄과 같은 우물들을 훼손하기 시작하였다. 야곱 또한 라반에게 얹혀 살면서 불의한 삼촌 때문에 품삯을 열 번이나 깎였어도 도리어 라반보다 더 큰 양떼를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라반과 그의 아들들로부터 시기를 받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심으신 복음의 씨앗을 기르셔서 30-60-100배의 성령의 열매를 거두셔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신앙의 증거를 삼으신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잘되면 시기하고 훼방하여 내쫓으려 하고 잘 안되면 기뻐하고 조롱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무엇이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면 사람들의 평판에는 신경쓰지 말고 그 열매로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들과는 달리 신사적이어서 자기 땅에서 점점 강성해지는 이삭에게 위협이나 무력을 쓰지 않고 정중하게 자기 땅을 떠나 줄 것을 권유한다. 한 국가를 다스리는 왕이 한 명의 이방인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공경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하나님의 보살핌 덕분이다. 아비멜렉은 이삭을 통해서 만왕의 왕이시며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보고 체험했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건 멸시를 받건간에 이 땅의 것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복음과 선행으로 그리 하여야 한다. 복음이 아닌 이 땅의 것으로 높임을 받는다 한들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광을 돌릴 수 없으며 이 땅의 것으로 멸시를 받는다 한들 그리스도로부터 아무런 칭찬이나 상급을 받을 수 없다.
#20220128
#룻기 #Ruth 3:1-4:22
제 3 장
룻이 보아스와 가까워지다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나오미가 룻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된 것이었으나 그녀가 룻의 안식을 위해 취한 방법은 보아스에게나 룻에게나 자기 자신에게나 자칫하면 구설수와 추문에 오르내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다. 또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여호와 그리스도의 언약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들을 얻기 위해 자기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과도 같은 어리석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의 남자로서의 음욕을 자극하게 해서 보아스가 부득이하게라도 룻을 아내로 맞아서 자기의 기업을 무르도록 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보아스가 자기의 음욕대로 룻을 겁탈하지 않고 순전히 보내줌으로써 더 선한 결실을 맺게 되었지만 이는 나오미의 방식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나오미의 그릇된 방식을 선하게 역전시키신 것이다. 나오미가 취했어야 할 정당한 방법으로는 자신이 직접 보아스를 찾아가 남편인 엘리멜렉이 팔아버린 기업들을 되찾아 줄 것과 룻을 아내로 맞아줄 것을 겸손히 요청하는 것이었다. 위기나 어려움을 모면하는 유일한 방법이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차라리 손해를 보고 심지어 목숨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불의한 방법을 취해서는 안된다. 반면에 나오미의 지시에 순종한 룻은 비록 나오미로 인해 여호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세세한 율법이나 규례나 문화 같은 것에는 문외한이었을 것이므로 본성적으로는 그러한 나오미의 지시가 여자로서 거리끼더라도 그것이 이스라엘의 율법과 규례와 문화라고 여겨서 순종했을 것이므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만약에 보아스의 발치에 누운 여인이 룻이 아니라 들릴라 같은 음녀였다면 보아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음행과 간음에 빠지게 되고 사람들의 추문 가운데서 그 음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매년 추수때마다 습관적으로 유흥을 즐기고 곡식 단 더미에서 자곤 했을 것인데 그러한 추문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그리스도의 보호하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어쩌면 보아스는 그토록 자기 마음에서 떠나지 않던 룻이 기업을 물러달라며 자기 발밑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보아스는 자기 기분대로 룻을 대하지 않고 룻이 더 젊은 남자를 찾아 재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이가 많은 자기를 찾아와 기업 무를 요청을 한 덕목을 칭찬한다. 보이스는 재력이나 지위에 있어서는 룻보다 더 높았어도 그것으로 룻을 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젊은 룻이 나이많은 자신을 찾아와 준것에 더 큰 고마움을 가졌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룻이 한것이라곤 오갈데 없고 의지할데 없는 과부 시어미인 나오미를 곁에서 봉양하고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줍기를 한것밖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룻의 그 선한 행실이 베들레헴 전역에 퍼져서 회자될 정도였다. 보아스는 여인의 외모보다는 얼마나 현숙한지를 먼저 보고 룻의 그러함을 칭찬하였다. 보아스가 룻이 말한대로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한 것은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흔쾌히 승락한 것인데 이는 그가 평소에도 룻을 매우 연모하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보이스에게는 룻이라는 모압 여인이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구해야 하는 값진 진주였던 것이다.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그러나 보아스는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룻을 자기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으면서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절차와 순서를 준수한다.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게 된다면 설령 룻이 그의 아내가 된다 하더라도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결단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빌미로 불법과 불의를 정당화하지 않고 올바른 절차와 순서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소원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14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15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꿈에 그리던 현숙한 여인인 룻과 함께 밤을 지새면서도 자신의 음욕대로 행하지 않고 룻의 정절을 지켜준다는 것은 그만큼 보아스가 얼마나 의로운 남자인지를 드러내준다.
16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17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18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나오미는 비록 자신이 바라던대로 보아스가 룻을 취하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룻에게 준 보리 여섯 되를 증표로 삼으며 보아스가 이를 진행할 것을 신뢰함으로 잠잠히 기다리기로 한다.
제 4 장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룻기에서 가장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부분은 바로 보아스가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과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는 것을 협의하는 내용일 것이다. 보아스에게 부름 받은 친족은 자기가 기꺼이 엘리멜렉이 판 기업을 물러주겠다고 했는데 이는 그 친족도 매우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유력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준다. 따라서 그 친족이 룻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것 때문에 기업 무르는 것을 포기했다고 해서 비난을 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보아스는 올바른 절차와 질서를 지키겠노라고 하면서도 룻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 친족과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친족이 처음에 흔쾌히 기업을 무르겠다고 했을 때는 아마도 덜컥 겁이나고 절망감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꺼낸 것은 아마도 그 친족이 가급적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친족이 자기의 신발을 벗어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맹세하자 보아스는 그제서야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먹이를 놓치지 않는 짐승처럼 신속하게 그곳에 모인 장로들을 증인으로 삼아 자신이 정식으로 기업을 무르고 룻의 남편이 되는 사람임을 선언한다. 보아스가 취한 정당한 방식이 선하고 좋은 결과를 맺게 된 것이다. 또한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일에 있어서 베들레헴 성읍의 모든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의 축복을 받게 되는데 이는 그가 평소에 성읍에서 얼마나 후덕한 인물이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만약에 그가 비방받는 자였으면 비록 정당한 방식으로 기업을 무른다 하더라도 장로들과 백성들에게서 축복이 아니라 비아냥만 들었을 것이다.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나오미는 모압에서 모든 것을 잃고 마라가 되어 돌아왔으나 보아스와 룻에 의해 다시 나오미로 회복되는 기쁨을 누린다. 그에게는 비록 아들이 없어도 아들과 같은 든든한 사위인 보아스가 있고 딸 같은 룻이 있으며 손자인 오벳이 있게 되었다. 베들레헴 성읍의 여자들은 자기들 중에서가 아니라 이방 족속인 모압 여인이 보아스의 아내가 된 것에 어떠한 시기나 질투도 하지 않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일처럼 받아들여 축복을 멈추지 않았다.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베레스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자기 첫째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를 통해 낳은 쌍둥이 중 동생이다. 베레스는 태어날 때 자기 형 세라보다 먼저 태어나려고 형을 잡아끌고 자기가 먼저 뱃속에서 나오게 되었다. 베레스와 헤스론과 람과 암미나답과 나손 까지는 애굽 고센 땅에서 살았을 것이다. 나손은 아마도 출애굽 까지는 했으나 광야에서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살몬은 여호수아 시대를 살았는데 살몬의 아내는 마태복음의 계보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여리고의 창녀였던 라합이었다. 살몬은 라합의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들어온 이후 그녀의 신실한 신앙만을 보고 기꺼이 아내로 맞이했을 것이며 이 또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세기의 결혼이었을 것이다. 보아스가 모압 여인이었던 룻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아비인 살몬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보아스는 아마도 에훗이 사사일 때 살았을 것인데 적어도 3백여년 동안 아들 손자 증손자 까지만 보게 된 것이 쉽게 납득가기는 힘들어 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보아스를 비롯해서 오벳과 이새도 노년에도 아들을 낳았다고 본다면 불가능하지만도 않을 것이다.
#20210128
#민수기 #Numbers 31:48-54
48 군대의 지휘관들 곧 천부장과 백부장들이 모세에게 나아와서
49 모세에게 말하되 당신의 종들이 이끈 군인을 계수한즉 우리 중 한 사람도 축나지 아니하였기로
50 우리 각 사람이 받은 바 금 패물 곧 발목 고리,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 고리, 목걸이들을 여호와께 헌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
51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그들에게서 그 금으로 만든 모든 패물을 취한즉
52 천부장과 백부장들이 여호와께 드린 거제의 금의 도합이 만 육천칠백오십 세겔이니
53 군인들이 각기 자기를 위하여 탈취한 것이니라
54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천부장과 백부장들에게서 금을 취하여 회막에 드려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을 삼았더라
이스라엘은 겨우 1만 2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족히 열 배는 더 많았을 미디안 연합군을 남김없이 진멸하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지휘관들이 고백한대로 이스라엘 군사들 중에서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여호와의 전적인 은혜 이외에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깨달은 이스라엘의 지휘관들의 태도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사뭇 다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여호와의 능력으로 거둔 승리이고 한 명의 전사자도 생기지 않았다면 당연히 안도하고 감사하며 기뻐했을텐데, 지휘관들은 도리어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재물들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 앞에 드려 속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지휘관들이 왜 감사제물이 아니라 속죄제물을 드리고자 했느냐 하는 것이다. 분명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미디안을 상대로 그런 대승을 거둔 것과 모두가 살아남은 것에 얼마간은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이 잠잠해지면서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지켜주신 여호와의 돌보심이 한마음으로 떠올랐을 것이며 여호와가 아니고서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과 그런 자기들에게 과연 무슨 자격과 공로가 있었겠느냐는 겸허한 마음과 지금은 이렇게 승리의 기쁨에 젖어있어도 여호와를 저버리게 되면 언제든지 미디안처럼 여호와께 버림받아 몰살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지휘관들의 지도에 따라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만장일치로 자기들이 탈취한 패물들을 모두 여호와께 생명의 속전으로 드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여호와께서 별도로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자기들이 그 패물들을 가졌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또한 그 패물을 드린다고 해서 자기들의 생명을 값주고 산 것으로 인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군사들은 미디안처럼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일뿐인 자기들을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사용해주시고 지켜주신 여호와께 겸허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감사하며 드린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그들의 진정성을 보시고 그 패물들을 생명의 속전으로 인정하신 것 같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짓게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자기의 미천함을 먼저 고백하였다. 선지자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늘 보좌에 앉으신 만군의 주 여호와를 뵈었을 때 자기에게 죽음의 화가 임하게 되었다고 토로하였다. 선지자 다니엘은 강 가를 거닐다가 환상 중에 영광의 인자를 보고서는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 쓰러지고 말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많은 물고기를 건져올리게 되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려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였다.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여겼다. 세상에서 우리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전혀 예상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좋은 것을 누리게 되었을 때 누리는 것 자체로만 기뻐한다거나 자기에게 어떤 선한 것이 있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여긴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도리어 그러한 크고 좋은 것을 받았다면 왜 이런 것이 자기에게 주어졌는지, 내가 무슨 자격과 공로가 있다고 이런 것들을 주시는지를 돌아보고 두렵고 떨림으로 겸허히 감사하게 받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