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김초시와 쌀도둑◈
김초시는 과거만 보면 떨어져
한양 구경이나 하고 내려오지만
도대체 기가 죽는 법이 없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누라더러
“닭 한마리 잡아서 백숙해 올리지 않고
뭘하냐”며 큰 소리를 친다.
머슴도 없이 김초시 마누라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모심고 피 뽑고
나락 베고 혼자서 농사를 다 짓는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도 점심 때가 되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김초시 점심상을 차려주고
다시 논으로 종종걸음을 친다.
김초시는 식사 때를 조금이라도 넘기면
“여편네가 지아비를 굶겨죽이기로 작정했지”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말끝마다
“무식한 예편네”라고 무시한다.
어느 봄 날, 온종일 밭에 나가 일하고 들어와
안방에서 바느질을 하는데 사랑방에서
글을 읽던 김초시가 들어와
호롱불을 후~ 꺼버리고 마누라를 쓰러트렸다.
그 때 부엌에 쌀 도둑이 들어왔다.
쌀 도둑은 쥐 죽은 듯이 웅크리고 앉아
안방에서 먹구름이 몰아쳐
소나기가 쏟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초시가 마누라 치마를 벗기고
속치마를 올리고 고쟁이를 내렸다.
운우의 숨소리가 한참 가빠질 때
도둑은 쌀독을 열고 자루에 쌀을 퍼담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김초시
귀에 대고 마누라가 속삭인다.
“쌀 도둑이 들어왔소.”
김초시 방망이는 갑자기 번데기처럼 줄어들어
이불을 덮어쓴 채 방구석에
처박혀 와들와들 떨고 있다.
김초시 마누라는 치마 끈을 매면서도
계속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여보 여보, 더더더”라고 교성을 질러
쌀 도둑을 안심시켰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김초시 마누라가
부엌문을 차면서 “도둑이야”라고
고함을 지르자 쌀 도둑은
혼비백산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아직도 김초시는 이불을 덮어쓰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다.
김초시 마누라가 부엌에 나가 쌀독을 덮고
방에 들어오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김초시는 깐에 남자라고 어흠,
어흠하면서 정좌를 하고서는
“쫓으려면 진작에 쫓을 것이지
웬 뜸을 그리 들여 사람을….”
김초시 마누라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도둑이 쌀을 두 세바가지 퍼 담을 때
‘도둑이야’ 소리 치면 쌀자루가 가벼워
도둑이 퍼담은 자루를 들고 도망칠 것이고,
여덟아홉 바가지를 퍼 담았을 때 소리치면
쌀이 자루에 그득해 땅에 쏟아질 것 아니요.
다섯바가지는 들고 도망가기엔 무겁고
쏟아지기엔 자루에 쌀이 가득 차지 않아
그때를 기다렸지요.”
김초시는 벌떡 일어나더니 사랑방으로 달려가
읽던 책을 몽땅 쓸어담아 아궁이에 태워버렸다.
이튿날부터 그는 들에 나가 밭을 갈고,
마누라를 하늘같이 떠받들며 “부인”이라 불렀다.
=모셔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