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善德女王) 과 밀본법사(密本法師)
선덕여왕(善德女王) 덕만(德慢)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흥륜사(興輪寺)의 승려 법척(法척)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병을 치료했으나 오래 되어도 효력이 없었다. 이때 밀본법사(密本法師)의 덕행(德行)이 나라 안에 소문이 퍼져서 좌우 신하들이 바꾸기를 청했다. 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이니 밀본은 신장(宸仗) 밖에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경을 다 읽고 나자 가졌던 육환장(六環杖)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더니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중 법척(法척)을 찔러서 뜰 아래에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은 이내 나았다. 이때 밀본의 이마 위에 오색의 신비스러운 빛이 비쳐 보는 사람이 모두 놀랐다.
또 승상(丞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렸을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도 못하고 수족도 놀리지 못했다. 항상 보면, 큰 귀신 하나가 작은 귀신을 데리고 와서 집 안에 있는 음식을 모조리 맛보는 것이었다. 혹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귀신들의 무리가 서로 다투어가며 욕했다. 양도가 귀신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고 싶었지만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이름은 전하지 않는 법류사(法流寺)의 중을 청해다가 불경을 외게 했더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 쇠망치로 승려의 머리를 때려 땅에 넘어뜨리니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밀본을 맞아오도록 하니 사자가 돌아와서 말한다. "밀본법사가 우리 청을 받아들여 장차 오신다고 했습니다." 여러 귀신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얼굴빛이 변하니 작은 귀신이 말한다. "법사가 오면 이롭지 못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큰 귀신은 거만을 부리고 태연스럽게 말한다. "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느냐." 이윽고 사방에서 대력신(大力神)이 온 몸에 쇠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하고 나타나더니 모든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가지고 갔다. 다음에 무수한 천신(天神)들이 둘러서서
기다렸다. 조금 있더니 밀본이 도착하여, 경문(經文)을 펴기도 전에 양도의 병은 나아서 말도 하고 몸도 움직였다.
그리하여 지나간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양도는 이 일로 해서 불교를 독실히 믿어 한평생 게을리하지 않았다. 흥륜사(興輪寺) 오당(吳堂)의 주불(主佛)인 미타존상(彌타尊像)과 좌우 보살(菩薩)을 소상(塑像)으로 만들고, 또 그 당(堂)에 금으로 벽화를 그렸다.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金谷寺)에서 살았었다. 또 김유신(金庾信)은 일찍이 늙은 거사(居士) 한 사람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 때 유신공(庾信公)의 친척인 수천(秀天)이 오랫동안 나쁜 병에 걸렸으므로 공이 거사를 보내서 진찰해 보도록 했다. 때마침 수천의 친구 인혜사(因惠師)라는 이가 중악(中岳)에서 찾아왔다가 거사를 보더니 업신여겨 말했다. "그대의 형상과 태도를 보니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인데 어찌 남의 병을 고치겠는가." 이에 거사는 말했다.
"나는 김공(金公)의 명을 받고 마지못해서 왔을 뿐이오." 이에 인혜(因惠)가 말했다.
"그대는 내 신통력을 좀 보라" 하더니 향로를 받들어 향을 피우고는 주문을 외니, 이윽고 오색 구름이 이미 위를 두르고 천화(天花)가 흩어져 떨어졌다. 거사가 말한다. "스님의 신통력은 불가사의합니다. 저에게도 역시 변변치 못한 기술이 있어서 시험해 보고 싶으니, 청컨대 스님께서는 잠깐 동안 제 앞에 서 계십시오." 인혜는 하라는 대로 했다. 거사가 손가락을 한번 튀기자 인혜는 공중으로 거꾸로 올라가는데 그 높이가 한 길이나 된다. 한참 만에야 서서히 거꾸로 내려와 머리가 땅에 박힌 채 말뚝과 같이 우뚝 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밀고 잡아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사가 그곳에서 나가 버리니, 인혜는 거꾸로 박힌 채 밤을 새웠다. 이틑날 수천이 사람을 시켜 이 사실을 김공(金公)에게 알리니, 김공은 거사에게 가서 인혜를 풀어주게 했다. 그 뒤로 인혜는 다시는 재주를 부리는 체하지 않았다.
찬(讚)해 말한다.
붉은빛 자줏빛이 분분해 몇 번이나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니,
슬프다, 어목(漁目)도 어리석은 사람 속였네.
거사가 손가락 가볍게 튀기지 않았더면,
건상(巾箱)속에 무부(무부)를 얼마나 담았을까.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原寺)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이 절은 안혜 등 네 대덕(大德)이 김유신(金庾信)ㆍ김의원(金義元)ㆍ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며, 네 대덕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네 고승은 모두 신라 때의 유명한 중이라 하겠다.
돌백사(돌白寺) 주첩주각(柱貼注脚)에 씌어 있는 것을 상고하여 보면 이러하다. 경주(慶州) 호장(戶長) 거천(巨川)의 어머니는 하지녀(河之女)이고, 이 하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明珠女)이다. 명주녀의 어머니인 적리녀(積利女)의 아들은 광학대덕(廣學大德)과 대연삼중(大緣三重)이다. 이들 형제 두 사람이 모두 신인종(神印宗)에 귀의했다. 장흥(長興) 2년 신묘(辛卯; 931)에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임금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분향하고 수도(修道)하니, 그 수고로움을 상 주어 두 사람의 부모의 기일보(忌日寶)로 전답 몇 결(結)을 돌백사에 주었다 한다. 이렇게 보면 광학ㆍ대연 두 사람은 성조(聖祖)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으며 안사(安師) 등은 김유신 등과 함께 원원사를 세운 사람이라 하겠다. 광학 등 두 사람의 뼈가 또 여기에 와서 안치(安置)되었을 뿐이고, 네 고승이 모두 원원사를 세웠다는 것은 아니며, 또 성조(聖祖)를 따라온 것도 아니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늘`행복한 부처님 되소서~나무관세음보살_()_
南 無 觀 世 音 菩 薩 _()_
삼국유사 잘보고 갑니다... _()_
南 無 觀 世 音 菩 薩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