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 명예, 권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무모하고 손해만 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굳이 찾아서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변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평화가 오기도 합니다.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이 있어서 따뜻해지기도 합니다. 작은 물방울이 떨어져서 큰 바위에 구멍을 내기도 합니다. 물방은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물방울이 시간을 만나면 단단한 바위에도 구멍이 납니다. 물방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서 큰 숲을 이룬 사람을 보았습니다. 매일 도토리를 심었습니다. 30년이 지나자 황무지는 울창한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숲에 개울이 생기고 새와 짐승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남미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신부님을 따르지 않던 현지인들도 이제는 신부님을 가족처럼 대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성당의 열쇠를 내주지 않던 교우들이 지금은 성당의 모든 열쇠를 신부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따뜻함과 정성이 얼어있던 교우들의 마음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과테말라에 후임 신부님이 한국에서 오면 이제 더 힘들고 어려운 콜롬비아로 선교를 간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열정에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헌신에서 바위에 구멍을 내는 물방울의 힘을 보았습니다. 공소 사목을 신청하는 선배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지낸다고 합니다. 오래되어 쓰러져가는 공소를 신축하기 위해서 농산물을 팔고, 서울에 가서 모금을 한다고 합니다. 공소사목을 신청하지 않았으면 굳이 신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서울로 가서 모금 강론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30년 넘게 사목을 하였으니 이제 어엿한 본당에서 모든 조직이 갖추어진 본당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배 신부님은 기꺼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주교님께서 본당으로 보내셨을 겁니다. 특수사목을 했으니 본당으로 보내는 것은 상식적인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마음은 아니지만 보좌 신부기간이 길어지는 후배 사제들을 위해서 본당은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은 저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4년 전에 이곳 뉴욕의 미주평화신문으로 왔습니다. 미주지역이라는 바위에 계란이 되어 신문홍보를 다니려고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태풍이 불었습니다. 그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미주가톨릭신문은 철수했습니다. 팬데믹 태풍은 끝나고 이제 신문홍보를 다니고 있는데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강좌 기획팀’입니다. 열정과 헌신만으로 사제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치밀한 기획과 노력으로 주교님의 마음도 열었습니다. 말씀과 영성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신부님들을 모시고 신앙강좌를 시작하였습니다. 팬데믹으로 지친 교우들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주교님을 모시고도 강좌를 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열정을 가진 분들과 함께하니 저도 기꺼이 계란이 되려고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의 원조는 예수님입니다. 쟁쟁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하기 힘들었던 ‘하느님나라’를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광주리를 모아보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 아니라 솜털로 바위를 치는 열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고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군대로 불의한 자들을 심판할 수 있었지만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솜털로 바위를 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바위를 깨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도 이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편한 길 꽃길도 갈 수 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계란’이 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첫댓글 제자들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에 헌신하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