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지대 / 김연종
시집 한 권 보내고 싶었는데 주소를 물어보기는 겸연쩍고
주소를 알 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누구인지 가물거리고
혼사 소식을 들었는데 모바일 단체 청첩장이라
가기도 쑥스럽고, 안 가기도 체면이 아니라
계좌번호만 확인했는데 날짜가 지나가 버리고
신문 동정란 보고 병원장 등극한 동창 소식 접했는데
축하 전화도 축하난도 어색해서
우물쭈물하다 보니 어느새 퇴임 소식
부고를 접하고 망자 대신 장례식장을 확인하는데
주중에는 시간이 없고 주말에는 거리가 멀어
핑계 대신 반가운 계좌번호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보조미러를 달고
두 눈 부릅뜨고
귀 활짝 열고
말없이 ‘좋아요’만 누르고 사라진 지인에게
메신저를 통해 안부나 전할까
전화로 직접 목소릴 확인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들어가 보니
이미 페친 삭제
- 『애지』 2023년 여름호
* 김연종 시인
1962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 의대 졸업
2004년 <문학과 경계> 등단.
시집 『극락강역』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청진기 가라사대』.
산문집 『닥터 K를 위한 변주』 『돌팔이 의사의 생존법』.
제3회 의사문학상 수상,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현) 한국의사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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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은 독자라면 십중팔구 ‘내 얘길 하고 있네’라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현대인의 삶이란 게 이렇다. 아차하면 ‘아뿔싸’가 되고 어어하면 ‘어럽쇼’가 된다.
일일이 다 챙기고 배려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누구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도 사각지대가 있는 법이다.
언제나 믿음직한 친구, 언제나 효성스런 자식, 언제나 든든한 백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도 하다.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수도 하고 경범죄도 짓고 뼈저린 반성도 하는 것이다.
내과전문의로서 개업 의사인 김연종 시인은 현재 한국의사시인협회 회장이기도 하다.
매사 일처리가 휴가병의 군복처럼 깔끔하고 칼이 서 있는데 설마 이게 자기 얘기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엄벙덤벙 살아가는 게 김연종 시인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보조미러를 달고, 두 눈 부릅뜨고, 귀 활짝 열고 운전해도 눈에 안 들어오는 사각지대가 있었다는 것이
운전자 김연종의 고백이다.
세상 살아가면서 별 지적 안 받고 살고자 그렇게 애를 썼지만 잘 안 되더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매사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하는 이를 보면 나도 부럽다.
아아, 그런데 건망증이 오면, 치매기까지 오면!
- 이승하 (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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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지대란 어느 위치에 섬으로써 보이지 않게 되는 각도를 의미하기도 하고,
관심이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삶의 어떤 영역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특정한 관점으로 인해 맹목을 드러내게 되는 경우나 관심의 사각지대로서
주목으로부터 소외된 삶의 어떤 국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에는 다양한 삶의 사각지대가 등장하는데, 주로 삶의 의례적인 순간이 이에 해당된다.
즉 출간한 시집을 보내야 하는 경우, 혹은 지인의 혼례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 그리고 동창생의 승진 소식에
축하 난을 보내야 하는 경우, 망자의 장례식장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 등에서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묘사되어 있는 삶의 사각지대란 사실 시각에서 벗어나 있거나 온전히 관심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관심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동기가
부여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차일피일 미루다가”라든가 “날짜가 지나가 버리고”, “우물쭈물하다 보니”, “하릴없이 바라보고” 등의 표현들이
애매한 상황으로 인해 결단을 단행하지 못하고 내적인 갈등에 휩싸여 있는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내적 갈등으로 인해서 중요한 사건들이 나의 삶을 비켜가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인지 가물거리고”라든가 “날짜가 지나가 버리고”, 그리고 “어느새 퇴임 소식”, “다시 들어가 보니/
이미 폐친 삭제” 등의 구절들이 자신에게 다가온 사건들이 이미 자신과 무관하게 종결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우물쭈물하고 망설이는 동안에 중요한 사건들은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벗어나 버리고
자신이 개입할 수 없는 맹목의 지대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삶의 사각지대는 우리의 일상을 크게 변화시킬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집을 발간하고, 혼례에 참석하고, 승진을 축하하며, 망자를 애도하는 등의 사건들은
우리 삶의 중요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마디이자 결절점에 해당된다.
통과의례란 사람의 일생 동안 새로운 상태로 넘어갈 때 겪어야 할 의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통과의례란 우리의 삶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인데,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어떤 탈피와 갱신의 기제로 작동한다.
시적 화자가 “보조미러를 달고/ 두 눈 부릅뜨고/ 귀 활짝 열고”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의 활력과 생동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으로 김연종 시인의 신작 세계를 살펴보았다.
의사로서 시인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한 맥락이 조성되어 있기에 이번 신작들도 모두 그러한 인식틀로 접근하도록 한다.
시인이 상정하는 삶과 죽음, 혹은 건강한 삶과 그것의 조건들에 대한 탐색은 결코 가볍지 않다.
깊은 통찰과 사유가 빛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시인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관점인데,
의사로서 뭇 생명을 관찰하고 다양한 삶을 통찰한 경험에서 나오는 삶에 대한 이해와 사유가
감상에서 벗어나 있기에 더욱 실제에 육박하는 예리함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 시단을 풍요롭게 하고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부여할 것이다.
- 황치복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