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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명동학교의 전설
48. 용정에 일송정 푸른 솔은
택시기사는 윤동주 생가를 나오자 곧바로 다시 시내로 향한다. 차는 시내도 지나 연길 가는 방향으로 직진이다. 그러더니 용정 초입에 위치한 체육관에 차를 댔다. 그러더니 그는 왼 편에 위치한 산을 가리킨다. 아마도 그곳에 일송정이 있는 모양이다. 자세히 산을 보니 맨 꼭대기에 정자가 보인다. 나는 메인스타디움에 큰 한글로 쓰여진 해란강이란 한글을 보며 곳으로 향했다. 이곳은 한글과 한문이 혼용되어 써 있어 나같이 외톨로 다니는 객에겐 여간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이 산을 비암산(琵岩山)이라 부른다. 평강벌과 세전이벌을 가르는 분수령이라는 비암산, 산 밑에 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널판지로 산길을 부지런히 만들고 거의 벌거벗은 길 양옆으로 나무들을 심고 있었다. 30분쯤 올랐을까, 확 트인 전경이 숨 가쁨을 잠재우며 이내 상쾌하다. 동으로 툭 트인 세전이 벌과 시가지가 굽어보이고 서쪽으로는 한줄기 해란강과 드넓은 평강벌이 한 눈에 안겨온다. 누군가 멀리 북쪽 연길방향에 우뚝 솟은 산이 모아산이라고 알려줬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해란강 강바람이 기분 좋게 몸 가까이 다가와 서는 듯하다.
듣자니 그 시절 비암산 코숭이 바위 벼랑에 두 아름도 넘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흡사 돌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같았다고 했다. 그 바람에 이곳 정자를 일송정(一松亭)이라 불렀다는 말도 있고 정자 옆에 큰 소나무가 우뚝 서 있어 정자를 그렇게 불렀다는 말도 있다. 정자 옆에 일송정에 대한 안내문구가 있었다. “1920년대 전후 로송은 울울창창하고 우뚝 솟아 신성한 길상무로 여겨졌고 이로 인해 기도하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1928년 중공 룡정촌 당지부가 성립된 후 일송정은 혁명가와 진보적 청년들의 비밀활동 장소가 되었고 연변지역 혁명당이 일본 침략자와 끝까지 투쟁하는 완강한 정신을 대표하였으며....”아무튼 일송정은 당시 용정일대 열혈청년들의 항일구국의 요람이고 독립된 나라와 해방 받은 민족의 미래를 위한 활동무대였을 테다.
듣기로 왜놈들이 정자 옆의 소나무를 없애버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앳된 소나무가 나를 반긴다.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핀 산 한 편으로 소풍 나온 노인들의 노랫소리가 요란하다. 도라지 노래가 끝나자 이어 나오는 음향기기 노래는 놀랍게도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란 노래다. 참 묘하다 싶다. 내가 연길에서 본 제일 큰 노래방 이름이 설운도 노래방이었는데 노래가 또한 설운도 노래라니. 그 노래는 육이오 전쟁으로 흩어진 혈육의 가족상봉에 대한 아픔이 서린 노래다. 흡사 그들은 그 노래를 서러움으로 안타까이 부르는 것만 같았다. 한때의 애국지사가 지금에선 보잘 것 없는 조선족 취급을 받는 그러한 애처로움 말이다.
일송정은 옌볜(延邊)을 찾은 한국인들의 필답 코스 중 하나다. 안내문에 적힌 그대로 조국을 잃고 먹을 것을 찾아 간도(間島)로 건너온 조상들의 땀이 서려 있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애국지사들의 피가 맺힌 곳이다. 그 한스러운 세월을 품어 온 해란강 줄기가 푸른 들판을 굽이굽이 적시며 시내로 향한다. 그 물을 머금은 용정시는 고즈넉했다. 100여 년 전의 설움과 고통이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아픔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주변 옌지(延吉)와 허룽(和龍) 일대에선 일본군을 섬멸한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빛난 승리도 있었지만 이후 불어 닥친 일제의 보복과 학살로 수많은 조선인이 쓰러져 간 비극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곡 ‘선구자’의 첫 대목이 술술 나온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한 때 이 노래를 많이 불렀던 적이 있다. 1970년대, 최루탄 때문에 눈을 비비던 대학생 시위대 속에서 ‘가곡’ 하나가 터져 나왔다. 바로 이 노래였다. 시위대는 ‘아침이슬’과 더불어 ‘선구자’를 많이 불렀다. 최루탄 가스 때문에 칼칼해진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제창했다. 정보당국은 그 노래가 들릴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보당국은 대학생들이 난데없이 ‘선구자’를 제창한 이유를 분석했다. 우선, 가사에 나오는 ‘불온한 단어’부터 헤아렸다. ‘일송정’, ‘해란강’, ‘선구자’, ‘용두레’…. 수틀리면 ‘빨갱이’로 몰아붙이던 당시여서인지, ‘중공(中共)’ 치하인 만주에 있는 지명이 나오니까, 시위대가 용공(容共) 세력일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들었다. 이후 많은 노래가 이른바 ‘금지가요’로 찍혔다.
노래 가사는 중요하다. 바로 감정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실은 반쯤 이 선구자에 나오는 가사 때문이다. 일송정이라 하는 것도 해란강도 용두레 우물도 그 노래 가사가 빚어낸 의미로서 더욱 가치를 지닌다. 나는 그 노랫말로 우리의 선구자인 애국지사들을 떠올리곤 했다. 솔직히 산 정상에 올랐지만 우리의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으며 명산이란 관점에선 축에도 낄 형편이 못 되는 야트막한 야산에 불과할 뿐이다. 뜻이 있어 의미를 부여하여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와 주위를 아무리 살펴도 당연히 있을 것으로 믿었던 선구자 노래 시비가 없다.
왜 그럴까. 잘은 모르지만 나는 그 이유 반쯤은 알 것도 같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선구자노래》는 한국에서는 만주 룡정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를 노래한것으로 알려져있고 중국조선족들도 대개 그렇게 믿어왔다. 작곡가 조두남선생은 21세의 열혈청년으로 목단강(오늘의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윤해영의 가사에 곡을 붙였다고 알려졌다.《선구자노래》는 1932년《원망의 대지, 만주땅을 누비며 민족의 한을 전신으로 저항하며 겨레의 숙원을 대변한 절창(絶唱)》이였다고 이야기 해왔다. 그런데 2천 년 대 초 이 말이 뒤집히는 안타까운 증언이 나왔다.
이야기는 이렇다. 조두남의 회고록 '그리움'에 의하면 이야기는 1932년 조두남이 목단강의 싸구려 여인숙에 기거하고 있을 때 윤해영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선구자의 가사를 주며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염원하고 민족의 구심점이 될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며 가사를 전해 주었다고 기술하였고 기후로는 그를 만난 적도 없다고 적고 있는데 중국 길림성에서 꽤 알려진 음악가인 김종화씨란 사람이 이를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조두남이 단장으로 있던 고려악극단원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던 사람인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만주 흑룡강성의 녕안시의 녕안극장에서 있었던 조두남의 신작 발표회에 윤해영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날 발표된 곡들이 선구자의 원작 이라 할 수 있는 '용정의 노래' 뿐 아니라 윤해영이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지었다는 '목단강의 노래' '산' '아리랑 만주'등의 신곡을 발표하였는데 그날 발표된 곡 대부분이 윤해영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왜 조두남은 선구자의 작사자인 윤해영을 1932년 여인숙에서 만난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해야 만 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 윤해영이 당시 만주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하고 옹호하는 작품 활동을 하던 친일 시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 일제가 만주침략을 노골화 하고 있을 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소극적으로 일제를 옹호하던 다른 문인들과 달리 그는 적극적이고도 열성적으로 일제를 찬양한 인물로 그는 당시 만주 최대의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만주괴뢰정부'를 찬양하는 [낙토만주]를 공공연히 외친 유일한 문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낙토만주에서 '선구자'란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구자란 독립운동을 하는 선구자가 아니라 만주국의 건국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선구자라 지칭한 것이며 당시 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선구자가 아닌 '산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오족이란 일본. 조선. 만주. 몽골. 한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윤해영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는 일제의 나팔수임을 바로 증명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일까 조두남은 이후로도 선구자의 작사가에 대해서는 이렇다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이말은 거의 정설화 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이가 나타났다. 원로 문예비평가 김영수(金榮秀) 씨는 펴낸 "몽상의 시인 윤해영"(우신출판사) 글집에서 "윤해영의 시에 등장하는 "오족" "오색기"는 만주국과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려는 낱말이 아니라 한민족을 상징하는 "고구려오족"이나 오행사상을 도상(圖像)한 조선군대의 의장기(儀仗旗)나 대방기(大邦旗)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윤해영은 비평적 용어로 "저의(底意)있는 기지(機智)"를 통해 일제시대 억압과 금지에 선수를 쳤다"면서 "그는 만주국의 건국이념인 오족협화라는 말과 그들의 국기인 오색기라는 말을 역으로 이용해 단일적 현실을 묘사하는 협의상징(steno-symbol)으로만 해석하는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고, 검열을 우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일까. 그래서인지 요즘은 선구자라는 노래를 안 부른다. 서울 동작구 현충원에서는 국립묘지 정자에 붙어 잇던 선구자 노래가사 나무패를 2015년도던가 철거했다고 도 한다. 용정의 노래를 해방 후 독립군 노래인 것처럼 바꾼 것이라는 의문 때문일 것이다. 참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미 그 노래는 애국가처럼 너무 큰 칭송을 받아온 노래이다. 그 시대를 산 문인들 대부분이 바로 그 경계선상에서 많이들 살았다.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수필가 김소운 선생도 그렇고 서정주 시인도 이광수 소설가도 노천명 시인도 같은 반열이다. 홍난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감옥 생활을 했었다. 그러나 뒤에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친일 노래를 작곡한 것이 드러남으로써 친일파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홍난파가 작곡한 ‘고향의 봄’의 원작 시를 썼던 이원수 시인도 일제강점기 말엽 친일 작품을 남김으로써 시대의 멍에를 쓰게 됐다. 홍난파와 쌍벽을 이루는 현제명은 ‘희망의 나라’에서 보듯 박진감 있는 선율을 지향했다. 쾌활하고 품이 넓은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엔 교육계에서 수많은 후학을 배출함으로써 한국 음악계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그런 그도 일제강점기 말기엔 잠시나마 친일의 길을 걸었던 흔적이 있다.
또 다른 속설도 있다. 윤해영은 월북을 한 인물이다. 만약에 당시 윤해영이 어디에 있는 인물인지 드러났다면, <선구자>는 빨간 딱지가 붙어 금지곡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유명가곡 <바위고개>의 작곡자이며 숙명여대 음대학장을 지낸 이흥렬(1909~1980)도 친일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음악가다. 일제 때부터 음악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작곡가 홍난파, 현제명 등도 마찬가지다. 이흥렬은 1948년 <바위고개>의 작사자인 이서향이 월북해 문제가 될 것 같자 작사자 이름을 자신으로 바꿨다. 그래서 아직까지 <바위고개>는 이흥렬 작사작곡으로 되어있다.조두남도 아마 그런 유사이유에서 애써 윤해영에 대해 숨기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조두남은 살아생전에는 친일 논란의 대상이 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작사가를 굳이 거론하지 않으려 한 것은 윤해영의 북한과의 연계성으로 인해 자신이 작곡한 <선구자>가 금지곡이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생기는 것이다.
윤해영, 나는 문득 풍랑시인 김삿갓이 떠올랐다. 아니 그 시대는 조두남도 윤해영도 모두 방랑한 처지로 만주를 돌았다. 조두남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악극단을 위해서 하루 밤에 1,2곡을 후딱 작곡을 해치웠지, 그러면서 반드시 당국을 지지하는 노래를 두 세곡 부르지 않으면 악극단 공연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친일의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의 음악인들은 누구나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누가 감히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까. 글이든 음악이든 유독 감성을 타는 예술가들은 갈대처럼 흔들리고 여리고 여리다. 천성이다 싶은데 굴곡진 역사 속에서 여리다보니 흔들린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목숨 바쳐 조국을 찾겠노라 독립투쟁을 한 선열들을 생각해 보라. 어찌 친일을 옹호하거나 변명하겠는가? 뜻과 의미 그로 빛나는 가치라면 얼마나 좋을까.
경우에 어떠하든 또 많은 세월 이미 우리는 그 노래로부터 선구자를 기억하고 만났다. 윤해영으로 인하여 졸지에 용정에 선구자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일송정이 우뚝 서 호령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 노래는 계속 불렀으면 한다. 이를 걷어치우기에는 너무 늦었다. 내 어릴 적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던 노래를 의식적으로 이제 와 지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더 분명히 윤해영 작사가를 기억해두는 것이 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일본 앞잡이 또는 월북 몽상 시인, 그로 슬프고 잔인했던 일제 강점기와 남북분단의 비극이 흡사 총탄 맞고 선구자라는 노래 속에 각인되어 들어있다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이야기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늘 아프게 하고 우뚝 선 애국지사의 큰 뜻이 그 얼마나 높은 지경의 어려운 험지였는지를 자연 알게도 되는 것만 같다. 뜻이 있어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존중받는다는 것, 이것이 곧 애국애족임을 만주 땅 일송정에서 새삼 생각해보는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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