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내리던 날
부여 낙화암을 찾아서
/梅谷堂 김 경숙
[백제의 마지막 수도]부여와 낙화암
* 일시 ; 2010. 4, 22
* 답사코스 ; 1)부여 부소산성 주차장-부소산문-삼충사-연못과 인공폭포-영일루-
군창지-반월루-사자루(사비루)-백화정(낙화암)-고란사-샘터-궁녀사
-삼충사-주차장(약 8Km, 2시간 30분)
2) 무령왕릉 주차장 - 무령왕릉 - 소나무숲 산책로 -
송산리고분군모형관(왕복800m, 1시간)
우리나라에는 두곳의 낙화암이 있다. 그 하나는 영월읍 금강정 윗쪽 동강의 높은 절벽
위에 있는 곳으로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관풍헌에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1궁노
10궁녀 그리고 모든 시종들이 절벽에서 투신 순사하였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들이 투
신 순사할 때의 모습이 마치 꽃이 낙화하는 모습과 같다하여 낙화암이라 불렀다 한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백제의 수많은 궁녀가 몸을 던진 부여의 백마강에 있다.
며칠전 마곡사를 다녀오며 무심코 던졌던, 낙화암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였던 일이 지
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때 그 생각을 떠올린
것이 기특하기 그지 없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여행지 중에 벚꽃이 한창 피었다 낙화하
는 요즈음 그 곳을 찾아갈 생각을 하였는지, 이 글을 쓰는 이 순간도 그곳에서의 낭만
에 흠뻑 젖던 생각을 하면 흐뭇한 미소를 거둘 수가 없으니 말이다.
내가 진정 누려야 할건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날 아침엔 웬일인지 아직 한참 있어야 필것이라고 생각도 아니하였던 내 창문 앞에
산벚꽃이 만개를 하여 아침 햇살에 깔깔거리고 있었다. 마침 전화가 걸려와 '오늘은 그
대가 말하던 부여 낙화암엘 가볼까 하는데 시간이 허락 되겠느냐, 다리가 걸을만 하겠
느냐' 물어오던 친구의 말에 난 얼른 이렇게 말했었다. '목발이라도 짚고 가보고 싶다'
라고...
기회는 언제나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것은 기회가 주어질 때 누리는 것이다.
게으름과 망설임은 과감히 떨쳐버리고, 오는 복은 기꺼이 맞이하자.^^
너무 오래전에 다녀 온 곳이기에 요즘 그곳의 풍경과 볼거리등을 전혀 짐작도 못한 채
그저 그곳을 다녀와야만 될 것 같은 생각이 어느날 문득 들었던 것은 무슨 까닭에서였
을까?
가보고 싶은 곳들을 머리속에 정하여 놓고는 한곳 한곳을 다녀오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밀렸던 과제물을 처리하듯 습관처럼 되어버린 내 고질병 아닌 고질병, 죽이 맞아 척척
따라주는 친구가 가까운 곳에 있기에 내 삶이 좀 더 풍요롭고 따분하지 않은 것은 다행
한 일이었다.
내 평생 절름발이가 되어 요즘처럼 불편한 몸으로 살아간다면 과연 지금처럼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일인가. 딱히 어느날 부터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산을 오르는
일이 내 인생의 한 부분으로 크게 자리잡기 시작한 그 날부터 난 또 하나의 색다른 삶을
손아귀에 쥔 듯 행복감에 젖어 살아왔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끔씩 뜻하지 않
은 작은 사고로 다리의 불편을 겪으면서도 결코 그 일이 크게 불편하다란 생각을 갖지
않았던 이유는 일시적인 장애를 입고 있다란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부스한 이튿날 부터도 난 산을 오르지 못하는 대신 여행을 할 수가 있었으니, 잠깐씩
스쳐지나는 아픔의 날들에도 우울해 한다거나 짜증을 부릴 사이가 없었다. 이 모든 것
이 아프고 아쉬울 때 달려와 주는 친구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진정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어느날부터 내게 필요한 존재로 가까이
다가와준 그가 한없이 고맙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사람들이 평생을 살며 맘에 드는 친구
한 사람쯤 만날 수 있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난 요즈음 내가 지닌 복중에
서도 가장 소중하고 값진 복을 지닌 것이 그와의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
곤 한다.
늘 그랬듯이 커다란 기대감은 없이 그저 역사의 한 장소인 그곳을 찾아 현장을 답사 한
다라는 생각으로 부여를 찾았다. 그러나 난 그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하였던 큰 수확을
얻을 수가 있었다. 내 집 창문 위에 활짝 산벚꽃이 피어나는 날엔 늘 내 삶의 뜨락에도
온갖 꽃들이 만개를 해주었으니, 부소산성에서의 낙화되는 그네들 화려한 모습에 난 그
만 깜빡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경부고속도로를 내달려 천안에서 천안-논산 민자고속도로를 이용, 충남의 동북쪽 긴 터
널인 차령산맥의 차령터널을 통과하여 정안휴게소를 지나서 남공주로 빠져나왔다. 다시
국도를 이용하여 부여의 부소산 국민관광지의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30분경이다.
오래간만에 찾는 곳이기에 설레는 가슴으로 '扶蘇山門'으로 들어서니, 백제의 3충신(成忠,
興首,階白)을 모셔놓은 '삼충사' 앞에는 소풍나온 초등학생들로 가득하였다. 문안으로 들
어서니 3충신을 모신 사당을 울창하게 둘러싸고 있는 오죽이 눈길을 끈다. 그 곳에서 세분
의 근엄하고 인자한 모습을 잠시 대하면서 그분들의 업적을 돌아보았다.
성충이란 충신은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투옥, 식음을 전폐하고
옥사한 충신이며, 흥수님 또한 같은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때 충신으로 충언을 하다 반대
편의 모함에 귀양살이를 한 사람이고, 계백장군 역시 백제의 마지막 싸움인 황산벌에서
신라의 5만 군사를 백제의 5천군사로 맞아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장군이다.
3충사를 나와 좌측에 폭포소리가 요란한 작은 연못을 지나 나무로 깎아 놓은 듯 잘 만들
어진 이정표를 따라 부소산성으로 향하였다. 부소산성은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5호로 지정되어 있고, 부여를 이 당시 '사비'라 하였으므로
'사비성'이라고도 한다.
산성을 끼고 울창한 참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고란사 가는 길이고, 고적한 숲길에 들
어서니 한창 물오르기 시작한 솔숲 어디에선가 솔향이 '훅'하고 날아와 코끝을 자극하
며 기분 좋은 예감을 안겨온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도읍지가 오랜동안 공주였으나 원대한 뜻을 펼치기 위해 수도를 부
여읍 북쪽에 위치한 '부소산' 정상을 중심으로 쌓은 복합식 산성으로 백제의 도읍지인
'사비성'을 수호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산성의 동,서.남,북에 문지와 병영지 등이 있고 산성 안에는 백제시대 군량미를 비축하
던 군창지와 절터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쳐들어 왔을때 백제 '궁
녀'들이 산성에 숨었다 적군이 밀려오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금강인 '백마강'에
몸을 날렸다는 '落花岩'을 비롯한 '百花亭' '泗疵樓' '迎日樓' '半月樓' '皐蘭寺'등이 있어
역사 관광의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정표 있는 곳에서 10여분 정도 올라 첫 누락인 '迎日樓'에 당도하니 숲의 분위기가 장
난이 아니다.
영일루 숲은 삼혼칠백(三魂七魄)의 무도장
산벚꽃들 애도의 물결로 술렁인다.
슬프다 못하여 차라리 호화로운 낙화
삼천궁녀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세월의 흔적이 무수히 내리는
꽃잎의 숫자에 묻어난다.
비가 온다 꽃비가 내린다
영일루 햇살 지우고 산벚꽃들의
화려한 눈물꽃이 진다.
'10.04,22
영일루에 올라 잠시 산벚꽃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며 회상에 젖어 보았다. 가늠할 수 없
는 역사의 비애가 서린다. 무수히 낙화하여 땅을 덮고 있는 수많은 원혼들의 울부짖음
이 부소산 숲길 여기저기에 메아리 되어 귓전을 때려오는 듯 하다.
깔깔거리며 낙화하는 꽃잎이여
한없이 화려한 듯 하나
슬픈 눈망울에 이슬인냥 아롱이는
비운의 그림자가 어찌 섧다 아니하랴.
계룡산 영봉에 솟구치는 햇살이
제아무리 눈부시다한들
영일루의 낙화현장만이야 할까
아 삼천궁녀의 찢기우는 가슴
두견새 한마리 푸드득 날아
한맺힌 원혼 달랜다.
'10.04,22
영일루(迎日樓)는 당호가 원래 집홍정(集鴻停)이었던 문루이다.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군수 정몽화가 건축한 것을 1964년에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여
영일대가 서있던 부소산성 내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후, 그 누각의 이름을 영일루(
迎日樓) 라고 불렀다. 영일루는 정면 3칸,측면 2칸으로 구획된 2층 누각건물인데 다른 아
문에 비해서 그 규모가 비교적 크다. 구조는 1벌대로 쌓은 장대석 기단위에 높이 78㎝의
팔각주형장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2구씩의 주간포를 배치한 다포양식
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건물 정면에 '迎日樓'라는 현판이 걸려있
다.
또한 영일루는 해를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인데 백제의 왕은 매일 이곳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국정을 구상했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떠오르는 태양을 잘 볼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지구를 걷는 법'에 쓰여있는 것처럼 부여를 여행할 때는 상상력이 필요할 것
같다. 부여로 수도를 옮긴 성왕은 절박함과 희망을 모두 갖고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 101호)
영일루를 내려와 화려한 낙화현장에서 잠시 배회를 한다.
여행중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꺼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켜자마자 요란한 신호
음이 울렸다. 산들바람님이셨다. 다리 다친 곳은 좀 어떠냐 걱정 하는 전화였다. 잠시 통화
를 한 후 사자루로 향하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낙화의 현장을 이 나이 되도록 본 적이 없다. 눈이 시리도록 화려하고도
슬픈 역사의 현장을.....
반월루로 향하던 중 군창지(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를 지났다. 그 곳에서는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으며, 일명 '만리창'으로 불렸던 유적지이다.
지금까지 조사결과 ㅁ자 형태를 이루는 4기의 조선시대 건물지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
까지 사용된 건물로 지형상 군사목적(군인들의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의 건물지로 추정되
고 있다.
부소산성의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이 만나는 등성이에 1972년 지은 2층 누각으로 현
재 부여의 시가지와 부여를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 부산의 대제각, 규암진 수북정
이 아련하게 들어와 부여가 반월성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사자루로 향하는 중에 친구가 장난끼가 동하여 길가에 쌓여있는 꽃잎 한웅큼 쥐어 머리
위에 뿌려준다. 이것이 그대 스타일이라면서.....ㅎ, 잠시 넋 잃은 여인이 되어 좋아라 하
여 본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06m)인 사자루(사비루)에 올라서니 사자루 옆에 유독 눈
에 띄는 한그루 산벚꽃이 반가이 맞아준다.
발길 닿는 곳마다 가슴 뭉클하도록 진한 감동이 요동을 쳐온다. 이곳까지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지를 않아 여유를 부릴 수 있는만큼 마냥 조용한 분위기에 젖어 보았다.
사자루는 부소산의 서쪽 봉우리 정상에 위치하여 백제시대 왕과 귀족들이 달을 보내며,
하루의 국정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정리했던 송월대에 1919년 임천관아의 문루였던 배
산루를 옮겨 지었다. 여기에 오르면 동쪽으로 계룡산, 서쪽으로 구룡평야, 남쪽으로 성
흥산성, 북쪽으로 올성산성과 중산성이 보이는 등 산수의 조화가 극치를 이룬 곳으로
건립당시 터를 파다가 광배 뒷면에 글씨가 새겨진 (정지원명) 금동석가래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어 현재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바람에 날리는 낙화와 함께 연초록의 잎들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이 내려다 보인
다. 한폭의 그림 같은 강 전경을 선사하는 부소산 정상 사자루에서 한참을 넋 놓고 내려
다 보다 '사진 찍게 바로 서보라'는 친구의 말에 비로소 이곳에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자루에서 낙화암으로 향하는 길에 소나무 두그루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있는 곳에
잠시 서서 부부의 정이든 친구와의 우정이든 이생에서의 사랑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잠
시 가져본다. 연리지는 아니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의 머리를 맞댄 다정한 모습이
하도 기이하여..... 조금 더 내려오다 연리지가 있는 곳에서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당현
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읊었다는 시를 감상해 보았다.
七月七日長生殿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 있는데
此恨綿綿無絶期 이 한 끝없이 계속되네.
比翼鳥(비익조)는 암수가 각각 눈 하나와 날개 하나만 있어서 짝을 지어야만 날 수 있다
는 전설상의 새이다. 화목한 부부나 남녀 또는 친한 친구를 비유한다. 比翼(비익)은 날개
를 나란히 가까이한다는 뜻이다. 比目魚(비목어)는 가자미나 넙치 따위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눈이 한쪽에만 있어 짝을 짓지 않고는 헤엄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가까운
연인이나 친구를 비유한다. 連理枝(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줄기나 가지가 연
결되어 하나가 된 나무이다. 나무의 결이 이어진 가지라는 뜻이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
또는 형제를 비유한다.
이 구절은 남녀 간의 깊고 변함없는 사랑을 다짐하는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사랑은 생명의 불꽃이고 정분의 승화이며 영혼의 결합이다.” 또 혹자는 말했다. “한이불
을 덮고부터는 무덤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마음을 같이 한다.” 천하의 모든 사랑하는 남녀
가 끝내 결합되기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두의 바람인가 보다.
그리고 인간세계에서의 그 진정한 사랑이 하늘에서도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樂天(낙
천)이란 字(자)로 더 유명한 唐(당) 白居易(백거이)의 ‘長恨歌(장한가)’에 보인다. 玄宗
(현종)과 楊貴妃(양귀비)의 사랑과 이별을 그린 이 노래는 민간에까지 널리 유행했는데,
기녀들도 이를 외워 더 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백제 멸망의 이정표가 되어버린 낙화암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부여, 금강 줄기 백마강
(白馬江)에 있는 부소산(扶蘇山) 자락 절벽을 이룬 큰 바위이다. 위례, 웅진(공주), 사
비(부여)까지 세번의 천도를 마지막으로 뒤안길로 사라진 역사, 백마강으로부터 절벽
을 타고 울긋불긋 피어 화려한 봄의 분위기를 맘껏 연출하는 진달래, 개나리, 산벚꽃,
복사꽃들은 슬픈 역사를 잠재우기에 충분하리만큼 만족한 경치를 그려내고 있다. 그
러나 백마강 푸른물살을 가르며 강바람에 낙화하는 산벚꽃의 하얀 꽃잎들은 그 당시의
비참함을 상기시켜 스산한 분위기속에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렇다. 시리도록 화려한
낙화의 현장, 낙화암 4월의 분위기는 그러하였다.
들판을 따라 쉼없이 달려온 백마강도 이곳에서만큼은 쉬어간다는, 나당 연합군에 쫓긴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몸을 던진 이곳에서 숙연하게 유속을 줄인다. 또한 해질 무렵
의 풍광이 백미라는 낙화암은 사비성이 불탔던 1500년전 그날처럼 하늘빛이 붉게 물들
어야 그 애잔했던 한의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다 한다.
낙화암으로 내리는 돌계단에서 앞서 내려가던 한 여자아이가 돌아서 내 앞을 막아서며
조용히 속삭여 왔다.
"조심하세요."
절룩이는 내 아픈 다리가 안스러워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 아이는 다시 조용히 속삭여
왔다.
"예뻐요! 떨어지겠어요."
그 때서야 내 머리 위에 꽃가루 얹어 놓은 것이 아직 남아있을 것이라 추측을 하게 되었
다. 위험한 돌계단을 뒷걸음질쳐 내려가며 마알간 눈동자를 굴려오던 어여뿐 그 아이의
눈에는 낙화암이 어떤 느낌으로 안겨져 왔을 것인지? 어쩌면 그 아이 머리속엔 낙화암
보다도 내 머리 위에 얹혀 있던 하얀 꽃잎이 더 관심이 갔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
그 나이 내가 이곳을 찾았던 그 시절,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교과서에 쓰여있던 3천궁녀
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스라히 머리속을 감돌고 있었을 뿐이었으니..
나라의 기운이 꺼져가는 서기 660년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
되자 의자왕의 궁녀 3,000명은 적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스스로 자결을 택하겠노라고 백
마강(白馬江)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이 바위를 후세인들은 떨
어지는 꽃 즉 낙화암(落花岩)이라고 불렀는데 이 암석 위에 1929년 군수인 홍한표(洪漢杓
)가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그들의 뜻을 기렸다. 고서에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설은 설일뿐..
부여는 마지막 도읍지이므로 백제의 유적이 많은 곳이다. 부소산성으로 들어가면 고란사
와 정림사지와 궁남지 그리고 낙화암까지 백제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생각보다 좀 더
걸어야 낙화암까지 갈 수 있지만, 그 때의 그 느낌을 가늠하며 걷노라니 괜히 숙연하여진
다. 초입에서의 잘 정돈된 길은 막상 낙화암에 들어서면 태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암
석지대가 나오기 시작한다.
<百花亭 千年松歌>
남부여성 사비성에 뿌리 내렸네
칠백년 백제역사 오롯이 숨 쉬는 곳
낙화암 절벽위에 떨어져 움튼 생명
비바람 눈서리 다 머금고
백마강 너와 함께 천년을 보냈구나
세월도 잊은 그 빛깔 늘 푸르름은
님 향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이련가
백화정 찾은 길손 천년송 그마음.
-백화정 시비(詩碑)-
부여 낙화암
부여라 낙화암에 찾아드니
천년송이 날 반긴다.
잊은 듯 일깨우는 4월의 산벚꽃이
백마강에 낙화하여 혼백을 불러오고
봄햇살에 물오르는 천년송 푸른빛은
삼천궁녀 그리는 애닯은 눈망울인가.
천년을 굽이쳐 흐르던 백마강 물줄기조차도
낙화암 절벽 아래에선 숨죽여 오는구나.
고란사 불경소리 왜 그리도 가슴을 애리는지
절벽을 타고 붉게 물들어 있는 낙화암의 필적은
떠나지 못해 울부짖는 한맺힌 혼백의
붉은 눈시울.
아, 고란사 풍경소리 강바람에 울때마다
저녁노을에 흐느적이는 시심
고란정에 모셔진 고란초 한떨기만이
비운의 역사를 가냘프게 읊조린다.
고란초 뿌리내렸던 절벽 틈사이엔
돌단풍이 대신 가녀리게 꽃을 피워내고
돌계단 오르며 뒤돌아본 백마강 위엔
잠시잠깐 피었다 지는 봄꽃들의 슬픈 몸부림
그리하여 끝내 4월은
고란사 뜨락에 아픔을 안기우는
잔인한 풍경인가
참혹하고 비참한 비련의 절규인가
말좀 해보오 백마강아
역사를 일깨우는 황포돛대여!
'10.04,22
바로 이 부근으로 궁녀들이 뛰어내린 장소가 된다. 응시를 하다보니 머리가 무거워져
오고 스피커에서는 백제 백마강에 관한 노래가 흘러나와 슬픈 역사의 현장에 와 있음
을 일깨워준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넘겨버렸을 그 운율이 오늘따라 매우 구슬프게 들
려오며 지난 날을 회상케 한다.(고란사로 내리는 길목에서..)
궁녀들이 서로 자결을 하러 차례를 기다렸을 바윗길, 언급했다시피 부소산성에서 낙화
암까지는 거리가 좀 된다. 우리는 그 길을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고싶을테지만, 그 때 수많
은 궁녀들은 얼마나 큰 고통속에 통곡을 하며 그 길을 걸었을 것인가. 정작 나라를 위한
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인간이 이미 죽음을 목적으로, 삶의 종착역으로 걸어
가는 심정 그 심정은 과연 어떠하였을 것인지?(백화정 위에서..)
그 때는 정말 삼천궁녀라고는 생각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에 버금가는 많은 인원이 관리
들의 호령 아래 한쪽은 뛰어내리고 다른 쪽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애를 태웠을, 또 어떤 이는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의 공포로 혼절하거나 마음이 변해 도
망가려다 잡혀 강제로 떠밀려 낙화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야말로 생지옥의 아비규
환이 되었을 이 곳 낙화암, 통곡과 슬픔이 혼재 되고 바위는 비명과 살과 피로 온통 빨갛
게 물들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는 지금 지나간 역사를
회상하며 그저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만을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향락과 정사를 게을리 함으로서 백제가
몰락 하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분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의자왕은 주
군(州郡)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를 살펴 사형할 죄 외에는 모두 용서해
주는 등 민심을 읽는 정치를 하였다 한다. 더불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40
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642년 8월 신라의 남서쪽 군사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무너뜨렸는
데 이 부분은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묘사가 되었었다.
단지 말년부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데 의자왕은 수많
은 전투와 국정에도 능하고 온정과 결단성이 있는 인물이란 칭호를 삼국사기에서도 찾
아볼 수가 있을 정도로 인물이었다 한다. 이러한 왕이 변하게 된 것은 국가가 몰락하게
되자 미쳤다고 하는 이도 상당한데 그 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역사 차원으로 깊게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고 결코 그 것이 맞다 안맞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일반
적인 의자왕에 대한 인식에 대한 반대 견해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과 나당연합군의 반격
과 이에 제 때 왜와 고구려의 도움을 못받은 점(이는 신라의 김유신이 백제의 계백에 황
산벌 전투 이전까지 계속적인 패배를 보면 유추되듯 그만큼 전투하면 백제였다.)을 들
수가 있는데 나도 그러한 견해에 공감하는 바이다.(낙화암을 떠나며..)
삼천궁녀라 하면 잠자리를 가질 때 1년을 300일로 잡고 65일은 쉬어도 무려 10년이란
답이 나올 일이다. 왕은 거의 매일이고 궁녀쪽에서는 십년이 지나서야 다시 한번 살을
섞을 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아무리 좋은 보양식을 먹는다 하여도 얼마 못가 피
골이 상접하고 일찌감치 저 세상으로 갔을 듯하다. 덕분에 그 간의 전투나 국사는 물건
너가고 보다 더 빨리 패망하였을 것 같은데, 백제는 멸망하기 근접까지는 그렇게까지
국운이 기울었던 건 아니었다. 물론 그만큼 궁녀를 많이 거느렸단 소리겠지만 그래도
잘해왔던 한 국가의 왕이 설마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거라 본다. 미루어 내려
오는 이런 이야기들도 나라가 망한데 기인한 백성의 원망에서 나왔을 것이란 추측을
해본다.
그 후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오늘날 우리는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되새기며 생
각만 할 뿐, 나무에는 싹이 돋았다 낙엽 되기를 반복하고 꽃들도 다시 찾아와 만개 하니
실로 자연의 법칙은 다행히도 역사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우리들 가슴에 아름다운 흔적
과 또다른 감동을 남겨주는 것이 아닌가 해진다. 청설모는 유유자적 나무 사이를 뛰놀고
오솔길 옆을 거닐던 장끼 한마리가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꾸~엉' 하며 저만치 날아가
앉는다. 그 후 계속하여 장끼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까투리를 찾는 숫꿩의 신호음이
아닌가 하면서, 부소산을 걷는 중 이들의 모습과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 한층 더 여행
의 참맛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다만 말없이 고요한 백마강과 낙화암만이 그 때의 한과 참혹하고 슬펐던 사실을 기억해
주리라.
백마강
전설을 전하는듯
恨을 삭이는듯
삼천궁녀 눈물을 섞고
굽이굽이 애잔함이 담겨 있는 곳
아픔에 등을 활처럼 굽히고도
신음 한번 내지 않고
한을 속으로만 삭일 뿐
백제의 역사를 안은 백마강은
진정 아픔의 강이다.
'10.04,22
고란사로 내려오는 길에 머리를 스쳐가는 노래가락이 있었으니, 이미자의 음성으로 불려
지던 '부여 낙화암'이다.
백제라 부여 땅에 마지막인 건
의자왕 눈물 뿌린 대왕포더냐
화려한 칠백 년의 영화도 사라지고
백화정 그늘 숲엔 두견새만 슬피 운다.
낙화암 낙화암아 삼천 궁녀 간 곳을
너는 아느냐
해 저문 고란사에 초인경 소리
사라진 궁녀들의 슬픈 넋이냐
송월대 영월대에 달빛만 고요한데
백마강 푸른 물에 몇 천 년이 흘러갔나
낙화암 낙화암아 반월성의 장수들
어데로 갔나<고봉산 작곡>
고란사에 드니 4월 초파일을 앞두고 많은 연등이 줄지어 달려있고, 들려오는 불경소리는
3천궁녀의 혼백을 위로하는 듯 애잔하고 애틋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늘 궁금하고 보고싶
던 고란초가 절 뒷쪽 고란정 앞에 있다 하기에 고란초부터 보고자 고란정으로 발길을 옮
겨보았다.
백제시대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도록 하였는데, 고란약수임을 알 수 있도록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인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오게 하였다. 고란
약수를 즐겨 마신 백제임금은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걸렸다 하며, 고
란약수를 한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곳에도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1미터 정도는 내려
다 보이는 깊은 샘에서 겨우 물 한국자를 떠서 음미한 다음 고란초에 눈길을 두었다. 이곳
에 올 때에는 절벽 바위틈 어디에선가 고란초 한 떨기쯤 서식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를 걸고 왔지만, 있을 것 같았던 절벽 위엔 돌단풍만이 기린 목처럼 기인 꽃대 위에 하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고란초는 고란정 입구 유리관 안에 귀빈처럼 모셔져 겨우 맥을 이
어가고, 고란정 옆 돌탑 앞엔 돌에 새겨진 '고란초의 독백' 시비가 세워져 있다.
양지도 그늘도 나는 싫어서
낙화암 바위틈에 끼어 살지만
고란사 종소리가 나를 달래고
넓은땅 마다하고 숨어 있어도
못 잊어 찿아주는 고란초 라오
이 몸은 실날같이 갸날프지만
눈서리 거친바람 이겨가면서
겨레의 흥망성쇄 지켜 봤다오
인정과 세태도 역역히 보며
앞뒤에 노란점을 찍었답니다.
요하들아 누구에게 아첨하느뇨
사치스런 꽃송이 부럽잖아요
주렁주렁 열매도 부럽잖아요
면면히 홀씨와 향기를 풍겨
부소산과 더블어 살아 왔다오.
사시상청 푸른절개 천추에 전한
삼천궁녀 넋인가 내 맘이라오
無名 無相 色一功도 내맘이라오
약수에 내몸 띄어 님께 바쳐온
백제의 그 정신이 내맘이라오
- 임현상 지음-
고란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98호)는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으며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절이다.
백제시대에는 이 곳에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 건립된 듯하다. 고란
사란 절 이름은 뒤쪽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하였는데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고란초의 전설로 유명하다.
삼성각 앞에서서 내가 '가기 싫다'고 하자 친구는 더 가봐야 할데가 있으니 사진 몇장 더
찍고 어서 가자 이른다.
궁녀사를 가기 위하여 고란사에서 올라오며 내려다본 백마강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폭의
수채화와 같다. 연초록 새순과 백마강 맑은 물 위에 낙화하여 흐르는 하얀 벚꽃잎의 무
희와 선착장에 띄워논 황포돛단배 그리고 바람이 불때마다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하얀
꽃잎들의 눈부신 흔들림, 그 속에 간간히 들려오는 고란사의 풍경소리, 불경소리..
그곳에 노을이 깃들면 붉은 심장이 쿵쾅일 것만 같은 백마강의 저녁풍경을 그려보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의 무게는 가뜩 절뚝이며 힘겹게 오르고 있는 나의 불편한 발목을
물고 늘어진다.
다시 사자루로 올라와 궁녀사로 발길을 놓았다. 궁녀사로 내리는 길 골짜기에 계단식
논을 따라 잘 심어 가꿔논 꽃창포가 눈에 들어온다.적은 양이 아닌데, 한 여름 꽃을 피
워 숲에 노란 꽃향기 날리는 이곳 분위기가 기대된다. 이왕이면 노란꽃창포이길 바래
보면서...
우거진 숲길을 따라 삼천궁녀의 원혼을 위로하는 사당인 궁녀사에 도착하고 보니, 외
딴곳에 고즈넉히 앉아있는 사당 맞은 편에 한창 만개하여 있는 산벚꽃의 화려한 모습
이 또다시 눈길을 끈다. 마치 궁녀들의 혼백이 그곳에 모여 재잘거리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분홍빛의 화사한 빛이 숲의 그늘이어도 결코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다.
가을날 붉게 타오를 이곳의 단풍진 모습이 기대가 된다.
궁녀사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좌측 태자골로 향하였다. 한적하기도 하였지만 그쪽 길
이 편안해 보이는 것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걷는 길이어도 왠지 마음이 끌리기에....
종종 이곳의 주민인 듯한 사람들이 운동삼아 산책을 하고 있을 뿐, 별로 지나는 사람들
이 없기에 한적한 태자골 그 길이 한없이 편안 하기만 하였다. 가끔씩 들려오는 꿩의 울
음소리는 고향의 뒷동산을 걷고 있는 것처럼 아득히 머언 향수를 불러다 주기도 한다.
특히 부소산성 광장에서 태자천까지 이어지는 태자골은 가을날의 단풍터널이 압권으로
백제인의 미소처럼 푸근하고 낙엽 진 부드러운 흙길이 또한 기대되는 곳이다. 부소산은
백제의 숨결을 느끼고 바라보는데 최고의 장소일 뿐 아니라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될 만큼 생태계 보존이 잘 돼 있다.
깊어가는 가을 단풍터널 이어지는 태자골에서의 가을풍경도 감상하고 백제역사의 향기
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 그때쯤 다시 이곳을 찾으리라 다짐을 하면서 길을 걷다
보니 잘 가꾸어진 샘이 있어 들려보았다. "태자천"이라 바위에 새겨진 샘터의 이름이
태고의 분위기를 불러온다.
태자천에서 약수 한모금 떠서 목을 축인 후 넓은 길을 따라 걷지 않고 다리에 힘도 좀
키울 겸하여 지름길로 오르기로 하고서, 오솔길로 올라보았다. 다시 한번 아름다운 오
솔길을 걸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안고서.....
또 다시 산벚꽃들 우아한 모습에 취하여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내려와서 삼충사로 들기
위하여 충의문 앞에 섰다. 삼충사에 다시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애초에 들려서
나왔던 길이나 다시 들어가 보았다. 오죽의 모습을 삼충사 뒷뜰에서만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과 함께 사진 몇장 다시 촬영한 후.....
부소산문을 나와 먹거리촌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돌아쳤더니 배도 고프고, 구드레정식
이란 간판이 붙어있길래 구드레란 말이 궁금하기도 해서 한정식집에 들어갔다. 정식을
시켜놓고 구드레란 말의 어원을 물어보았다. 구드레란 Good에서 따온 말, 다시 말해 부
여농산물의 최고 브랜드를 이르는 말이었다. 정갈한 음식 한상을 받아 점심을 잘 해결한
후, 공주로 향하였다. 무령왕릉을 찾기 위함이었다.
남편과 연애시절 이곳에 손을 잡고 왔던 추억을 더듬으면서, 왕릉 한바퀴 돌아 숲길을
산책하고 내려와서 송산리고분군모형관을 들려 관람한 후 용인으로 향하였다.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7번째 발견된 고분이며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
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
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
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
이다.
2010. 4, 22
첫댓글 그동안 얼마나 산으로려 다니셨나요...잠시 쉬라고...........그래도 잠시 바람 쐬고 오셨으니 다리 다 나을때까지는 아파트주위만 산책하셔요.다리를 다치셨으면 얼마나 고생스러울까싶으네요. 저두 몇주를 집에만 있으려니 이생각저생각에 증까지 생겨려고 하네요.
몸이 불편하고 마음이 아플 수록 집안에 있어서는 치유가 되지를 않습니다. 가능하면 틈틈이 여행도 하시면서 심신을 달련하시옵길..... 감기는 다 나으셨나요? 일주일전 이 몸도 심한 감기가 들어 주사맞기 바빴답니다. 기를 쓰고 일주일만에 감기 떨어버렸습니다. 그것도 거의 다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감기 앓고 계시다면 빠른 시일내 완쾌되시옵길 바라면서....... 다 잃어도 건강은 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늘 활기찬 생활속에 행복한 삶 누리시옵길 바라나이다.^^
매곡당님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사정이 있어서 카페에 드나들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한 마음입니다. 다리를 다치신 모양인데 얼마나 아프시고 또 갑갑하셨을지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그래도 낙화암 다녀 오실 정도라면 쉬이 회복되시리라 믿습니다. 얼른 나으셔서 활기차게 산행하시는 모습 보고 싶습니다 행복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셨네요. 통 뵙지를 못하겠다 하였더니..... 건강하시지요? 몸만 건강하면 언제 어디서든 다시 만나질 수 있는 법, 어떠한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무탈한 일상이 되시옵길 바라겠습니다. 두달여를 석고집에 다리를 가두고 마음이 싱숭생숭 하였느니다. 이제는 거의 완쾌가 되어 슬슬 가까운 산엔 오르내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지요. 너무 건강하다 보니 몸이 불편한 사람 돌아보라고 하늘이 잠시 불편을 주셨던 듯 합니다. 앞으로는 자주 뵐 수 있겠네요? 시인님 아니 들어오시니 저도 발걸음이 뜸하였었습니다. 좋은 일만 있으시고 좋은 글 많이 내놓아주세요. 늘 행복하시구요.^^
김경숙시인님 오랜만이네요.그래서 뵐수 없었구랴.고생많았습니다.그래도 산에서의 모습은 해맑은 그되로내요 역시 시인님은 산에서 더 생기가 나는것 같네요..ㅎㅎ 하루 빨리 완케하시고 카페에서 활발한 모습 기대합니다.언제 한번 오시구요^^
닉을 바꾸셨네요. 아직은 누구신지 눈치를 못채었습니다. 이래저래 마음이 분주하여 자주 카페에 들리질 못하였더니...... 부상 입은 곳은 거의 다 치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머지 않은 날 다시 산에 들게 되겠지요. 잘 지내시기 바라고 좋은 기회에 뵙시다요.^^
김영순 입니다.옥륜이란 호를 아는분께 받았는데 좀 어색합니다.(玉倫)자주쓰면 정감이 갈련지.언제 오세요^^
네 김영순님 호였군요. 자꾸 불려져야 자연스러워질 겁니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봄에 다리를 다쳐서 두어달 산행을 못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다시 걸음마 연습 중... 가고싶은 곳은 많고 아직은 집을 비울 수가 없어서 당일 산행만 허락하고 있습니다. 6월이 지나가고 나면 딸아이 집에 들어와 있게 될것이고 그 때는 좀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해집니다. 여름에 허락되면 제주도 한번 날아갈까 합니다. 옥륜님 건강하게 여름 잘 나시고 계시길요....^^
산사랑 유별나신 시인님 잠시 휴식도 하시라고 주신 시련이라 생각하시고 한걸음 쉬어가시지요....늘 그 열정에 찬사를 보냅니다..하루빨리 쾌차하시구요...오랜만에 인사 여쭙고 갑니다
정말 오랫만입니다.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바삐 지내다보니 자주 볼 수가 없었네요. 잘 지내고 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