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저의 시조에 대한 글(진주강씨 종친회에서 간행한..)을 보아오긴 했는데...족보에 나타난 강이식장군의 벼슬명이 병마도원수던가 병마절도사던가.....
어릴때에는 아..그런가보다.했죠..그런데 나중에 역사학도가 되서 생각해 보니...좀 고개가 갸웃갸웃해집니다.
왕족이 아닌 일반 지배층이 시조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지고 시조를 강조하던 시기는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 입니다. 그 이전에는 시조가 누군지조차 모르고 몇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가물가물하던 때였습니다. 문벌귀족이 혈통성을 강조하면서부터 자신의 혈통을 강조, 배경으로 삼기 위한 일종의 꾸미기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족보의 출현과 시조숭배의 강화로 나타나죠...
고려시대 가문연구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예가 안동권씨 일가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두각을 나타낸 권씨에 대한 글에는 본래 집안이 한미하여 셰계가 불분명하니..어쩌구 하는 식으로 나오다가 손자쯤 되서 집안이 끝발날리는 문벌귀족가문이 되자 시조는 누구고 시조 아들은 누구고 하는 식으로 싹 분위기가 바뀝니다.
아마 다른 귀족들도 경우는 비슷하겠죠. 진주강씨도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삼한벽상공신으로 공신가문이 되면서 서서히 부상하다가 강감찬(금천강씨시조), 강민첨(은렬공파시조)이 거란을 물리치면서 급부상하여 아마 이 때에 족보도 강화되고 시조에 대한 숭배관념도 더 철저해진게 아닐가 합니다.
병마도원수( 맞나??_)라는 벼슬은 고구려 당대 벼슬은 아닌거 같군요..이건 고려시대에 족보에 적다보니 그렇게 된 거 같습니다. 그리고 원래 족보에 벼슬명칭은 좀 부풀려서 뻥튀기 해서 적는 경우가 있어서 가문의 족보의 벼슬과 고려시대 실제 묘의 묘지명의 벼슬이 다른 경우(물론 족보에 더 높게 적어놨죠..) 도 본적이 있습니다.
족보라고 그다지 신뢰성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특히 시조에 대한 부분은 온갖 미사여구와 칭찬과 얼마나 혈통 우수하고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일단 저의 시조인 강이식 장군의 실존여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진 벼슬은 후대의 가필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