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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번째 지적중 [dukkha를 불안전(imperfection,),무상(impermanence),공(emptiness),비실체성(insubstantiality) 이러한 의미로 해석하게 되면 고는 느낌이 아니라 존재의 속성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은 존재가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인데 존재가 이러한 속성을 가졌다는 근거가 어디 있을까요?
'오온이 고가 아니다, 존재의 속성은 고가 아니다'를 말 하시면서 존재의 속성이 불안전하고,무상하고,공하고.비실체적이라는 것은 존재의 속성이라고 말하면 아이러니가 되겠죠. 그러면 이러한 반문이 생깁니다. 존재의 속성은 고가 아니라 불안전하고,공,무상,비실체적이다.바람이 무상한것은 바람이란 속성 자체가 무상한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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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밝혔습니다. 무상과,무아라는 것은 법의 속성입니다. 속성은 없앨 수 없습니다. 둑카에 위와 같은 의미를 더하면 둑카도 법의 속성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두 번째 질문: 바람이란 속성 은 무상한 것이지요. 왜 이런 질문이 필요할까요?
오온이 무상,고,무아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에 인식된 대상으로서의 오온은 무상하게인식되고. 괴롭게인식되고, 변역되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인 거처럼 둑카는 불안전하고,무상하고,공하고,비실체적으로 인식된다는 의미를 말하는 단순한 말일 뿐 입니다.칸트는 "물자체"를 말합니다. 물자체란.. 대상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며.. 칸트는 말하길.. 우리는 '물자체'를 의식할 수 없고 오직 인식되어진 것만 의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더구나 라훌라스님이 존재의 속성이 불안전하고,무상,고,비실체성하다고 말한적이 안보입니다. 이말은 후박님이 라훌라스님이 [오온은 고다]라는 말을 했다고 연결시킨 가정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하여 라훌라스님이 [오온이 고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고를 느낌이 아니라 객관적존재의 속성으로 보시려 전개되는 라훌라스님의 4선의 선정상태(선정상태를 무상하고 괴로움이라고 표현할때.. 라는 인용구를 주목해주세요)를 보면 선정상태란 중생의 의식상태를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곳을 잘 관찰하면
이곳에서 다루어진 선정상태의 무상이기에 '고'는 의식(느낌)의 문제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훌라스님이 고를 존재의 속성으로 본다든지 그리고 불안전,무상,공,무아는 존재의 속성이라는 해석은 부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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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답입니다.
둑카에 이러한 의미를 더하는 것은 모순이 됩니다. 둑카는 단지 괴로움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 4성제에 대한 저의 이해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본문에서 말한 것과 같은 모순이 생겨납니다.
2.3.[한 둑카에 불안전(imperfection,), 무상(impermanence),공(emptiness), 비실체성(insubstantiality) 같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것 역시 수행을 통해서 소멸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상이나 무아 공이라는 법의 속성은 발견하는 것이지 소멸시켜야 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말에서 법의 특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고의 소멸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견한다는 것은 소멸한다는 뜻과 같죠. 집성제를 발견한다는 것은 멸성제 이지요. 같은 이야기가 오해되는 경우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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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를 발견한 사람은 더 이상 고를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고의 소멸이지요. 그런데 오온=고가 되면 그러한 고는 소멸할 수가 없게 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고의 원인은 갈애로 말해 지는데 무상의 원인, 무아의 원인은 무엇으로 말해지는 걸 봤습니까?
3.3째 지적을 살펴보니 4선에서 일반적인 괴로움이 아니라는 말은 피부적인 차원을 넘는 괴로움으로 해석하여야 된다고 생각됩니다.예측대로 라훌라스님의 초선에서 4선까지를 보니 무상하기에 괴롭다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즉 3선을 통해 희비상의 경지를 넘고, 무상하기에 괴롭다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간 실천적관계 입니다.
시간적으로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화 하는 것 을 무상 하다고 합니다.이 무상한 현상을 중생들은 시간적으로 일정기간 혹은 영원히 머물고 있는 자아와 세계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는 중생들의 신념과 관계없이 업의 경과로 무상하게 변해 갑니다.이러한 변화가 중생들에게 생로병사와 생사윤회로 느껴집니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통해 괴로움의 근거를 찾아보면 괴로움은 실체가 없어 연기하는 무상한 것을 자아로 집착함으로써 나타나게 된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즉 괴로운 것은 무아임을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며 괴로운 것은 무아라는 말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무상, 고, 무아는 논리적인과 관계가 아니라 실천적 인과 관계입니다. 하여 선정의 느낌속에서 고를 관하는 견해는 보다 구체적이고 일반적인 괴로움과 나눈다는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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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괴로움이 아닙니다. 그리고 경전에서 말하는 느낌은 여섯가지 느낌(육수)입니다. 총체적인 것입니다.
4. 그리고 [무상한것은 괴롭다]에 대하여[비구들이여. 물질..] 이곳에서 원문의 루파를 물질이라 하기보다 색이라고 역 하면 될 듯합니다. 물질, 색은 쓰이는곳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요.만약 색이 고라고 한다면 저의 경우는 색취온이 고라고 받아드리고, 물질이 고라고 한다면 잘못된 해석으로 받아드리죠. 이곳에선 루파를 물질로 해석하여 잡음이 만들어진 경우라 보입니다.
5.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괴로움 자체내에 있다(the cause, the germ, of the rising of dukkh is within dukkha itself, and not out side.)” “괴로움의 소멸을 가져오는 원인이나 근원도 괴로움 자체내에 있다(the cause, the germ, of the cessation of dukkh, of the destruction of dukkh, is also within dukkha itself,and not out side)”
이 말 역시도 [오온이 고다]는 문제가 있다라고 의의를 두고 지적하기에 문제가 되는 듯합니다. 만약 님처럼 라훌라스님이 생각 하였다면 라훌라스님은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와 멸은 지혜로 말하는 이중성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부분에 대하여 적어도 라훌라스님이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에 두엇으므로 이 문장과 왜 괴로움의 근원이 괴로움 자체라고 하는지 이말이 무슨 말인지 서로 모순되는듯한 두 문장을 함께 고민하는 문제로 풀어가야지 문장이 어글리하다고 의미까지 결론을 내리는 것은 보류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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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훌라 스님의 글을 좋게 이해하자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50년이 넘도록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문장은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비판이 너무 늦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오온은 둑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첫 번째 화살이라는 육체를 지니고 있으므로 생기는 고통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이라는 탐진치의 화살은 맞지 않습니다. 붓다가 없애려한 고통은 두 번째 화살(정신적인 고통)입니다. 그것이 열반을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라고 정의 하는 것에서도 증명이 됩니다. 붓다는 35세때의 깨달음(유위열반)을 이루어 고에서 벗어났습니다. 만약 오온이=괴로움이라면 35세때 붓다는 고(삼고)를 소멸하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색수상행식이 붓다에게도 그대로 있었으니 붓다는 죽을 때까지 괴로움속에 살다 가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를 크게 오해하는 말입니다. 후대에 무위열반이 진정한 열반인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무위열반이란 것은 그냥 유위 열반을 얻은 사람의 자연스런 결과,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붓다와 우리의 목표는 무위 열반이 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고통의 소멸은 이 몸을 가지고 실현됩니다.
6. 비판글을 읽으며 느낀점은 라훌라스님에 커다란문제는 별로 느껴지지 않으며,라훌라스님이 [오온의 고][존재의 속성이 고다]라고 한다는 말을 증명하기 위하여 전개된[4선선정상태]의 예를 든 것은 오히려 라훌라스님을 비판하기보다 라훌라스님의 [오온이 고]라는 말을 넓게 이해할수 있는 유연성을 더욱 준 계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글 쓰실때 나의 앎도 겸손한 위치에 있을 수 있어야 설사 자신의 이론이 문제가 있더라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됩니다.
7.예를들어 1번째 지적부분에서 [ 이와 같은 견해는 둑카라는 어원을 분석하여 내놓은 결과로서 이미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추종하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라는 말을 보면 나는 이런것을 지적하므로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보다 어떠하다는 자신의 마음이 내포하고 있지요.이런경우는표현보다 의미하는 곳에 눈길이 가서 내용을 잊게 하고 반감을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너무 여러가지 이야길 하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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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처음부터 라훌라스님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 대한 비판의 글도 곧 올릴 예정입니다)
제가 가진 것이 자만심이든, 자신감이든 토론의 주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적에 변명할 마음은 없습니다.
후박님이 댓글을 또 다시면, 님의 라훌라 스님 비판글에서 드러난 잘못된 견해 한가지를 또 지적하겠습니다.
[법에 대하여 토론시에는 법의 내용에 대해서만 반박해야지 인격을 건드리며 해서는 안됩니다(퍼온글입니다.)] 님과의 인연으로 왔다는 방문객님이 글쓰기 금지 당한 것은 글쓰는 초점이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화의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님과의 대화도 무의미 해집니다. 왜 우리가 논점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비난하는 이런 대화를 여기서 해야 하는지요......()
그리고 님에게 더이상 댓글은 안 달겠습니다. ...()
후박나무님은 단순히 초점이 어긋났다고 하지만...저는 논점을 다룬 후에, 그에 입각한 "논점 외 판단"도 했습니다. 제가 적은 논점 부분이 비판을 당하면, 당연히 비판 당한 부분에 입각한 "논점 외 판단"도 근거를 잃습니다. 저의 "논점 외 판단"을 비방으로 보려면, 논점에 대한 저의 지적을 일단 분쇄했어야 합니다. 저의 "논점 외 판단"도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었거든요. 또한 애초에 제가 굳이 이곳에 가입까지 하며 꼬리말을 적게 된 이유가...[정작 자신은 기본도 모르면서, 승려임을 자처하고 빨리어등을 남용하여, 저명인의 견해를 단순한 글자장난으로 비방하는 논문형식의 글을 지속적으로 올리는 것에 대한 우려]였습니다.
후박나무님은, 논점과 관련한 저의 구체적인 지적엔 한마디의 반박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저의 "태도"만 운운했을 뿐이며...활동정지를 부과하는 근거가 된 저의 "논점 외 판단"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님이 적은 글의 논리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들추는 꼬리말까지 삭제했습니다. 님이 업어 온 글을 저도 적겠습니다. [법에 대하여 토론시에는, 법의 내용에 대해서만 반박해야지, 인격을 건드리며 해서는 안됩니다.] 맞습니다. 님은 어떤가요? 님은 제게 "법의 내용"에 대한 한마디의 반박조차 없이, 상대에 대한 "평가"와 "태도"등만 운운했을 뿐입니다. 실제 님이 행한 위의 행위를 생각해 보세요. 물론 저는 상대의 인격을 건드렸습니다.
하지만 "법의 내용에 대한 반박"을 하면서...그 반박에 입각하여 나오는 판단으로, 이곳에 가입하게 된 동기를 감안하여, 상대의 인격을 건드렸습니다. 이곳에 가입한 동기를 봅시다. 저의 우려가 틀립니까? 불자에게 적절한 판단이 아닙니까? 인터넷에서 글질하다 보면, 소위 고승을 건드리면 욕 먹는 것 다반사입니다. 님은 라훌라 스님의 해당 저서를 "비방"하는 글의 첫머리에서, [언제든지...잘못된 점이 있다면 문제제기를 환영]이라고 밝혔습니다. 폼으로 적은 말이 아니라면, 적절한 문제 제기 부분에는 응했어야죠. 아닙니까? 약속 대로...제 글은 삭제했으며, 위의 글도 몇 일 후 삭제할테고, 탈퇴하겠습니다. 시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