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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나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 박이도
은하수 추천 0 조회 47 15.01.27 00: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 박이도

 

 

실수처럼 내 손에서 떨어진

꽃 한 송이

강물에 떠내려간다

 

낮달처럼 내 품속에서 떠나간

사랑의 체온,

흐르는 강물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숨을 죽인다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아프게 아프게 되살아나는

지난날의 그림

 

모든 이웃을 등지고

마을을 떠나는 이 죄인의 그림자를

지신밟듯 짓밟고 가는

소 한 마리

 

성황당 비탈의 상수리나무에서

일제히 뜨는 새들이 부럽다

젖무덤 같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너머

불타는 노을이 그립다

이 적막함이 두렵다

 

시집『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창비, 1991)

.............................................................................

 

 누구라도 자신이 살아온 과거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과거는 애틋한 추억의 곳간이면서 떨쳐버리고 싶은 상처의 공간이기도 하다. ‘내 마음 속에서 아프게 아프게 되살아나는 지난날의 그림’에 짓눌리는 것은 시인뿐만이 아니다. 어떤 이유로든 기대를 저버리고 마을을 떠나는 것은 죄인의 뼈아픈 그림자로 오래 남을 사건이다. 그래서 ‘성황당 비탈 상수리나무에서 일제히 뜨는 새들’이 더욱 부럽게 느껴진다. 자신의 흔적과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새들에 대한 부러움은 기억의 존재인 인간에겐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멀리 불타는 노을이 그리운 것은 뒤늦은 구원에의 갈망이다.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적막에서 생의 외경을 떠올린다. 성경을 보면 유독 상수리나무에 대한 언급이 눈에 많이 띈다. 나무의 굵직한 튼튼함은 능력, 성실, 용기, 보호 등을 상징하고 거짓 가르침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인용된다. 성경 못지않게 이를 제재로 한 시편도 여럿 보았다. 상수리나무는 임금님에게 진상하는 고급도토리나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상도 지역에서는 상수리나무라고 하면 좀 낯설다. ‘꿀밤나무’라고 해야 얼른 알아듣는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우쭐대는 인간도 위대한 상수리나무 앞에서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상수리나무는 새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해주고 씨앗까지 남김없이 사람과 짐승에게 먹이로 내어준다. 그런 나무이기에 다른 나무가 햇볕을 가로막지 않고 토양이 깊고 풍요로우며 토끼가 이빨을 갈기 위해 밑동을 갉아먹지도 않는다. 얼핏 제 앞가림이 서툴게 보이지만 더 많이 베풀수록 더 많은 자손을 얻을 수 있다는 진실을 상수리나무는 잘 안다. 다람쥐가 겨울양식으로 갈무리했다가 남긴 도토리가 봄볕에 싹을 틔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성황당 비탈의 상수리나무에서 일제히 뜨는 새들이 부럽다' 새삼 자연이 연출한 장엄한 비주얼에 경건해진다. 유럽에서는 ‘신성한 나무’라 하고 ‘숲의 왕’이라고도 부르는 이 상수리나무를 바라보면서 그 의젓한 자태를 공경하는 한편으로는 '산등성이 너머 불타는 노을'과 그 '적막함'에 두려운 마음도 든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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