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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凍春)
최 상 규
“분명히 말해두지만 ―.”
사나이는 똑똑히 뜨여진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분명한 말씨로 그에게 대들고 있었다.
“윤설회는 내 아내란 말이오!”
난로 위에서는 주전자의 주둥이로부터 하얀 김이 포옥폭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탁상시계를 보았다. 다섯시 이십분.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재떨이에서, 피우다가 꺼둔 담배를 집어 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림자 갑옷을 입고 거미줄 창을 든 기사.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그렇게 경쾌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나이는 강요를 하고 있었다. 사나이가 구하고 있는 것은? 안심할 수 있는 대답, 복종적인 언사, 영원히 욕먹어도 싼 열점(劣點)의 노정. 그러나 그런 것은 줄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애당초에 마련되어 있지를 않았다. 미안하다. 대장부끼리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다는 것은ㅡ.
“그뿐입니다. 사실 그 말씀으로 해서 더이상 분명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 습니다.”
“뭐라고?”
노한 목소리에 재촉받은 듯, 그는 성냥을 그어 입에 문 담배 끝에 갖다대었다. 불꽃과 연기오라기가 아주 가늘게 스몰거리는 이맛전에, 그는 상대방의 노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는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을 조금 더 내밀어, 푸른 연기를 푸욱 뿜어내어 그 시선의 가닥을 흐트려버렸다.
“겨우 그것뿐이야?”
“고정하시죠.”
난 무얼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가. 그는 번쩍 시선을 들었다. 상대방의 눈이 분노에 떨고 있었다. 불안과, 신사로서의 체면이 그 눈알을 누르고 있었다. 뿜어내고만 싶은 충동과, 거기 비례해서 들여마셔져야만 하는 생리 작용 때문에 사나이의 호흡은 자꾸만 가빠져가고 있었다.
“제가 제 의견을 좀 이야기하죠. 우리는 지금 서로 혼자씩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같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괜찮겠죠?”
그는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상대방의 머리 너머로 맞은편 벽에 붙은 고호의 노란 그림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아무리 재확인해 본댔자, 무슨 새로운 뾰죽한 수가 나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우리는 각자 따로 떨어져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될 수 있으면 그 일을 해야만 될 겁니다. 가령 선생님께서는 선생의 부인을 현직장에서 이동시키어 저와 선생의 부인과 만나는 기회를 없애버리신다든가 또 저로 해서는 오늘과 같은 이런 괴로움을 감내하면서까지 선생의 부인을 좋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선생의 부인의 결점을 혼자서 들추어내어 강조해본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닥쳐라!”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이니까……. 이번 것은 극단적인 예입니다만, 선생께서는 선생께 대해 불성실하고 부정숙한 부인과 손을 끊어버리신다든가……. 또 저로서는 교묘한 수법으로 말하자면 완전 범죄로 말입니다, 선생의 부인을 미망인으로 만들 계책을 세운다운가…….”
“그럼 나를 죽이겠다는 말인가?”
“원 천만의 말씀. 이를테면…… 말이지요, 이렇게 멀쩡하게 볼알 달린 사내 두 놈이 방 구석에서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런 일올 하는 편이 건설적이며 행동적이며 진취적인 방향이 아닐까 하는 제의견올…….”
“망할 자식!”
이쯤에서 주먹다짐이 나와야 했다. 그 혀라도 넣고 깨무는 듯한 묵직한 이 가는 소리와 더불어 내뱉은 욕설과 함께 사나이의 주먹은 그의 면상을 후려갈겨야 했다. 그도 그럴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주먹쯤은 맞아주는 것이 남의 아내를 제 아내처럼 생각하는 염치없는 연애꾼’ 의 예절바른 희생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제할 수 없이 분노한 자에게 마음 놓고 분노할 수 있는 동기도 만들어주었지만……. 사나이는 결연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두고보자!”
그것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나이는 불행을 느끼고 있었고, 자기를 그렇게 불행하게 한 것에 대해 복수를 다짐했을 것만은 틀림없었다.
사나이는 장하지도 않은 등판을 그에 돌려대고, 문을 차고 나가 버렸다. 밖은 영하의 혹한. 방 안엔 알맞은 열기와 습기가 가득히 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안한 마음 없이 담배를 빨았다. 사나이는 저 좋아서 나간 것이니까. 이빨이 앞서 으르렁 거리는 사나이가, 만약 으르렁 거리는 것에 으르렁거리지 않는 것보다 쾌감을 덜 느낀다면 무엇하러 으르렁거리겠는가?“
안방에서는 두 여인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쓰고 있는 건넌방으로 그들을 부를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대청으로 나섰다.
해가 설핏해지자 녹다 만 눈이 다시 얼어붙었고 그 위로 휘몰아쳐 오는 바람에 얼굴에 차가웠다. 맞은편 산 언덕 위 빨간 양관의 정면이 서쪽 하늘에 아직도 떠돌고 있을 붉은빛을 받아 제법 뚜렷이 솟아 있는 그 너머로는 흰 눈을 이고 있는 먼산이 아득했다. 먼 거리는 언제나 졸음을 일깨운다. 가기 힘든 곳은 가보고 싶은 욕구를 꼬여 낸다. 적설은 십 센티라도 좋으니 설령(雪嶺)을 넘고 싶다. 가슴이 저려오도록 차가운 냉기를 들이마시고 높은 정봉에서 아래로 향해 뛰자! 골짜기 아래 고여 있을 햇빛을 향하여. 그 밑에서 움터 자라고 있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향하여.
그는 안방문을 드르륵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두 얼굴이 불도 켜지 않은 으스름한 온기 속에 묻혀 있었다. 그 하나가 움직이며 그를 향했다. 그리고 뒤이어 그보다 젊은 하나가 또 움직여 그를 향했다가 얼른 수그러졌다.
그는 앉지 않았다. 그리고 천장에서 늘어진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빨간 단추를 눌렀다. 번쩍번쩍 경련적으로 섬광이 튀다가 방 안이 환히 밝혀졌다.
달걀 모양의 길쭉한 얼굴과 높직한 코. 그게 그를 향하고 있었다. 옛날에 있었던 그의 집안 식구 누구와도 닯지 않고, 높은 오똑한 콧날이 도전적으로 그의 눈을 쏘아 신경을 건드려주고 있었다. 거기에서 유발되는 증오. 유독성 충동. 그걸 억제하기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악의를 더이상 중대시키지 않는 방법은 그것을 억제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것임을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얼굴에다 대고 제법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 대체 이게 무슨 철없는 짓이죠?”
그 높은 콧날 위쪽 양편에서 동그란 윤기가 반짝였다 생각되자, 금방 그것은 사라졌다.
“나를 오히려 나무래는 거냐?”
“그렇죠. 이건 확실히 누님의 나이답지 않게 무모한 짓이죠.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모든 일이 누님 뜻대로 될 줄 알았던가요?”
“하여튼 네 행동을 중지시킬 방법은 이렇게 하는 길밖에 없었다.”
“내 행동을·…… 그게 누님 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중지시킬 권리가 누님에게 있었던가요?”
“그 행동이 나쁜 행동인 한…….”
“그건 어떻게 판단하는 거죠?”
“그것은 분명 하지. 약혼한 사이 인 수진이를 놓아주고 남편 있는 여자와 사이가 깊어지는 것은 분명히 나쁜 일이지.”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엇인가를 바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길처럼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깨뜨리진 말아야 했다. 감정적으로 내리쳐진 주먹은 깨어지기 쉬운 유리 그릇의 표면의 일 밀리 앞에서라도 정지해야 했다. 그리고 적어도 그때까지엔 그 감정은 정리되어 있어야 했다. 유리 그릇도 깨뜨리지 말고 주먹도 상처내지 않기 위해서. 그래 다음날엔 후회없이 그 주먹을 편 손으로 그 유리 그릇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그는 그의 주먹 끝의 일 밀리 앞에서 유리 그릇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한다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이에요. 누님은 그걸 몰라요. 그러니까 누님은 이렇게 혼자서 불행한 거죠. 내 말이 좀 과격했다면, 그건 누님의 경망한 행위에 대해 응당히 내려져야 할 매질쯤으로 생 각해두시죠. 그리고 수진 인…… 저쪽 방으로 좀 와요.”
그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서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아주었다.
동생이, 만인이 공인하는 정당한 방법으로, 행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누님은 착하다. 동생은 그걸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때 누님은, 이성도 아니고 적성(敵性)도 아닌 우호적인 여류(女類)로서 표창받아야 한다. 그러나 누님의 돈으로써 그 동생을 그런 방식으로 꼭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매의 극치다. 마치, 나 아니면 이 나라를 위해 대통령이 될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고 호언하는 정치가와 같이. 틀린 계산을 하려거든 차라리 계산은 하지 말아야 한다. 굿바이, 굿바이. 망부의 유산인 집 한 채로 연명하는 가련한 여졸(女卒)이여, 굿바이. 그 한 칸 방을 용납된 제 구석으로 생각하고 안심 했던 나의 유치함이여, 때벗지 못한 우애여, 미지근한 임대차 관계여, 꺼저버려라. 어느 여름날, 동생이 진정 좋아 그 동생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동생의 연인에게 냉차 한잔 내놓지 않고, 용의 주도한 적의를 잉태했던 누님의 지혜여. 그러한 누님의 절대적인 신뢰와 총애를 받으며 게으른 공기 속에서 예도(藝道)에 정진한 수진의 만능의 적성(適性)이여. 아듀, 아듀.
그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데 문에 가벼운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문이 열렸다. 분홍색으로 화려한 얼굴이 나타난다. 주름살 하나 없이 인생에 무죄한 동정녀의 얼굴. 길게 위로 꼬부라진 천연의 속눈썹으로 장식된 맑은 눈방울 두 개가 그를 응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감내하지 못할 새까만 차단의 빛. 융통성 있는 폭과 신축성 있는 필터가 마련되어야 할 자리를 투명하고 영롱한 수정체 두 개만이 꽉 메우고 있는 농밀한 진공. 닫혀진 두 개의 분홍색 입술은 그리스의 예지, 의미의 세계에로의 통로이던가? 연약한 부드러움이 모여 흑갈색 물결을 이루고 있는 머리털로 감싸인 저 머릿속에선 바흐의 평균율도 범접 못 할 음예(音藝)의 신세계가 전개되기 시작하고 있는가.
“죄송해요.”
한 마디. 그 음향이 방 안 가득히 퍼져 나갔다. 그 운동이 끝나기까지 그는 한참 동안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천만에. 미안한 건 오히려 난걸. 수진이의 평화를 깨뜨려준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 그럼 어떤 줄 알고 왔지?”
그녀는 살며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처음부터 얘기할까요?”
“얘기해요. 안방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우리가 겪는 일을 우리가 이야기하는 거니까 아무것에도 구애 받을 이유가 없어.”
“집에서 전화를 받았어요. 무척 놀랐지만, 그래도 갑자기 무슨 볼일이 있어 올라오신 것을 알았었죠. 그래 저의 집으로 오시라고 했더니 시간이 없다고 밖에서 잠깐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그래서 제가 나갔죠. 그 동안 무척 초췌해지신 것 같은 언니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안스러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뵙는데다…… 소식도 듣게 된 것이 기뻐서 무척 즐거웠었죠. 그랬더니…… 여쭈어보았죠, 요새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무얼 하시며 여가를 보내시는지……. 그랬더니, 돌연히 꾸짖으시더군요. 그런 걸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그걸 하나도 모르고 있느냐고,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냐구요. 전 처음에 무슨 일이 생겼나 생각하고 당황했는데, 언니는 또 말씀하시더군요. 무슨 일이 생겨서 그러는 것보다도 그런 질문을 들으니 기가 막혀서 그러신다구요.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고 한몸이 되는 것이 그렇게 허술한 일인 줄 아느냐구요, 뭐, 저도 그렇게 간단한 것으로 생각한 건 아니예요. 그것보다도 그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죠. 물론 언제나 곁에 있고 싶고 그리웠지만, 저는 저대로 또 바빴거든요. 작곡 발표회도 며칠 남지 않았고 또 삼월에 있게 될 스페인 음악가 초청 음악회에 피아노 반주도 일부 맡게 되고 해서……. 그러나 언니의 말씀을 돋고 저는 놀랐고 당황했어요. 참말 내가 지금 무얼하고 있나, 당신을 두고, 당신을 모르는 채 무얼 하고 있나…… 하구요. 그래 그냥 뛰어내려온 거예요. 제나름으로의 준비지 공적인 스케줄은 아직 없지만, 다 집어치우고 뛰어내려온 거에요. 그런데…….“
“그런 데…….”
와보니까 안심했던 나무에서는 별안간 딴 가지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결 보고나니 수진의 가슴엔 동요가 생겨났고, 그 동요를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수진은 와락 좌절감올 느꼈단 그 말이겠지. 착한 수진은 타오르는 질투를 느끼기 전에, 수치감과 불쾌감과 역겨움을 느꼈었겠지. 화려한 전당에서 밀려나와 불결한 이령 속에 발을 헛디딘 자신을 발견했겠지.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멀리 물러선 것 같은 찬란한 전각을 향하여 뛰어돌아가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을 테고……. 그러다가 발에 결리는 진흙펄을 의식하곤…… 지금은, 더 이상 발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해서 발을 옮겨 디디기 위해서 발 밑을 눈여겨 살피고 있는 것이겠지.
“와서 보니까…….”
“알겠어. 구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어. 뻔히 아는 사실, 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걸 듣고 싶지는 않아.”
“아녜요. 그게 아녜요.”
“그럼?”
그녀의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뺨에 처음 뺨을 대었을 때와 같은, 무엇이 튀어나오려 하는 것 같은 빚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기에 눈부시지 않았다. 그의 시력 이 구겨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시선에서 눈을 피했다. 그리고 손끝에서 타고 있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꼈다.
“전…….”
“음?”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이제야 저는 잠에서 깨는 것 같아요. 아직 당신은 제게서 잃어진 분은 아니죠?”
그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침묵을 그는 느꼈다. 형광등 속에 든 초크에서 나는 낮은 ‘험’ 이 근지럽게 그의 고막을 울리고 있었다. 그는 견딜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
“모르겠는걸…….”
이런 일로 눈물을 흘릴 수진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확실히 무책임한 말이다. 달리 누가 알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그렇대도 그는 모른다. 기분으로 잃어진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아직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아무것도 깨어지기 이전이다. 운동 중이다. 깨어지기 쉬운 유리 그릇의 운명은 좀더 있어보아야 안다.
“모르겠어. 그건 우리 둘이 얄 수 있는 일이지만, 아직 우리는 서로가 그걸 모르고 있어. 수진은 나를 잃고 싶지 않다고 했지? 내가 이미 잃어버렸는지 어쨌는지도 모르지만, 수진이가 참말로 나를 갖고 싶은지 어쩐지도 아직 결정적 인 것이 아니지 ? 나도 마찬가지. 나는 지금 수진이 거의 옛날과 마찬가지로 내게 가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지금 수진에게 손을 뻗치고 싶은지 뻗치고 싶지 않은지, 나는 모르고 있어. 다른 곳에도 마찬가지. 나는 지금 달리 무슨 할 말이 없군. 좀더 있어봐야 해. 변화가 될 거야. 어떻든. 오늘 일로 해서 그 변화는 빨리 될 거야. 혹시 진전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나면 결정적인 모습이 우리 앞에 드러날 거야. 그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엔 없어. 앞뒤 보지 말고, 사람의 힘으로 나무의 성장을 보정해보자는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런 만용보다는 기다리는 미덕이 중요하지 않을까…….”
말갛고 긴 손가락을 가진 그녀의 두 손이 터질 듯이 팽팽한 슬랙스의 무릎 위에 얹혀 있었다. 유리 공예품 같은 손톱이 각각 그 끝에서 빛나고 있었다. 만인을 위한 장식품, 그녀만의 애완물, 또는 그녀가 그를 위해 가꾸고 다듬어놓은 슈퍼 액세서리. 그 중에 그것들이 무엇이 될 것이며, 또 무엇이 되기를 그들은 원할 수 있을 것인가.
“수진. 괴롭게 변해버린 거지만 현실이야. 참으면서 생각해줘. 그리고 이것은 잘잘못을 가리고 사죄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좋아질 수 있는 성질의 현실도 아니야.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달 수 있고, 아무에게도 잘못은 없달 수도 있어. 그러나 그런 건 지금 문제가 되지를 않아. 밤은 모든 것으로부터 은밀한 것을 가리어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지만, 이 밤은 우리의 마음과 눈에게 가리워친 것을 드러내주는 밤으로서 우리 앞에 있어. 이 밤을 지내봐야 해. 그리고, 나는 지금 혼자가 되고 싶어. 무슨 생각이 될지도 몰라. 좀 나갔다 오겠어. 자기 일을 생각하는 데는 누님의 힘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벽에 걸린 외투를 떼어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지금쯤 그녀의 손은 이 외투를 들고 그의 등 뒤에 서 있게 되었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손은 그 동안의 세월 동안 좀더 속세적인 것이어야 했고 그녀의 머릿속은 좀더 육욕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녀도 혹시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혼자서 외투를 입었다.
“어디 가지?”
“밖에 좀 나갔다 오려구요.”
“저녁도 먹지 않고.”
“먹고 싶지 않아요.”
“나가지. 않는 게 좋을걸. 수진일 놓아두고 어딜 가는 거지? 수진이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지?”
“그런 이야기는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닌데요. 더욱이 하고 싶지도 않고…….”
“그럼 언제 하는 거지, 누가 하고?”
“누님은 지금 이 구두끈 매는 짧은 시간조차 나를 이 마루 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싶지 않게 만들어주는군요.”
“도대체 어딜 가는 거지 ? 의논할 필요도 없나? 먼저 그쪽에 가서 의논해야 되나?”
“누님. 수진이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아요? 누님의 급수는 자꾸 떨어져만 가고 있군요.”
대기는 얼어 있었다. 어디 한번 깨뜨려보려면 깨뜨려보라고. 그는 수은처럼 농밀한 추위 속을 뚫고 걸어나갔다. 꽝꽝 얼어붙은 길바닥과 구두 뒤축 사이에서 바싹 마른 음향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심에까지는 통할 리 만무한 소리. 일순 들렸다가 기록도 없이 사라지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를 타고 이동하고 있는 한 인체는 진애에 찬 대기를 뒤혼들어놓기는커녕, 옥죄이는 추위에 안으로만 오므라드는 무력한 육신. 그 속에 살아 있는 정신은……. 아, 이 협착한 뇌수. 딱딱한 두개골. 두피와 그것과의 마찰을 그는 모공으로 느낀다. 그 수많은 모공들. 그 하나하나에 두 개씩 세 개씩 밀생해 있는 머리털. 모두들 바늘처럼 일어서라. 그리고 방사하라. 이 머릿속이 시원하도록 보든 내용을 내뿜어버려라!
귀가 따가웠다. 방비 없이 노출된 그것은 지극히도 부끄럼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코끝이 딱딱하게 감각되었다. 지상 일 미터 육십 센티의 고도를 유지하며 수평으로 비행하는 머리통. 그것은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향방(向方)이 아닌 방향. 길가에 늘어선 푸른 가로등이 표지가 되고 있는 똑바른 진로. 그 끝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다. 그가 구하려는 것도 없다. 무중력의 공역(空域)에 던져진 두개골. 관성이라는 무궁동력(無窮動力). 그러다가 그것은 어떤 중력권에 접근하였다. 의식할 수 없는 미미한 험이 거기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일순일순 그것이 진행함에 따라서 그, 힘은 증가되었다. 드디어 그것이 인력을 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인력권 내로 휘말려들어가버렸다.
모짜르트. 이십 세기의 연주, 다방.
문을 열자 훈한한 열기가 왈칵 그를 에워쌌다. 그는 온기에 환영당하는 자신을 꾸짖을 수 없다.
“어서 오세요I
유난히 눈방울이 큰 아가씨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 그것은 전축에서 울려나오는 어느 음정의 바이올린 소리와 한순간 유니즌을 이룬다.
난롯가의 자리는 차 있었다. 그는 좀 떨어진 자리로 인도되어갔다. 덜컥 몸을 던졌다. 쿠션 밑의 용수철이 낮은 비명을 잠깐 지르며 체중 육십칠 킬로의 그의 몸뚱이를 받아내었다.
“추우시죠.”
“음.”
“혼자세요, 오늘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가씨는 미소를 던져두고 더운 물수건을 가지고 가는 뚱뚱한 여자가 재떨이와 성냥을 가지고 왔다. 그 탐스러운 얼굴에도 주체할 수 없는 환영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우리 집 시계가 오늘은 좀 빠른가봐요.”
원, 참. 겨우 십분 늦은 건데요 뭐. 그리고 내가 몇 세기 전의 철학가나 되는 줄 아시나?“
어제 같으면 했을지도 모르는 응수를 그는 하지 않았다. 대신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더운 김이 나는 물수건에 묻었다. 향기로운 증기가 콧속으로 빨려들어왔다. 온 얼굴의 표피 세포가 자르르 녹아 터지는 것을 느꼈다. 이 짧은 시간, 얼굴에서 수건을 떼고 얼굴에 매인 더운 습기가 증발됨에 따라 빼앗기는 열 때문에 얼굴 표면이 다시 한번 싸르르 상쾌한 감각을 맛보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번뜩 영협스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간단하다. 참으로 간단하게 생겼다. 이 얼굴은. 사람의 얼굴은. 언제까지나 한 개인 코, 두 개인 눈, 한 개인 입, 두 개인 귀. 그것들과 약간의 털과 약간의 기복으로 되어진 것. 이걸 한평생 달고 다닌다. 코가 한 개뿐이라거나, 똑같이 전면으로만 눈이 두 개씩이라는데 대해, 별로 불만을 하지 않으면서. 아침저녁 세수를 할 때, 또 똑같은 그놈의 얼굴이라고 투덜대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언제 내 얼굴은 인제 다 알았다 할 정도로 제 얼굴을 조사 연구해본 적도 없건만―. 그러면서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두어두는 것……? 거울을 들여다보며 좀더 얼굴이 보기좋고 멋있게 생겼더라면…… 하는 기원 가정법의 경우나, 딴 사람 행세를 하고 싶어 얼굴에 복면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제 얼굴과 숙친할 만한 교분을 두텁게 하지 않고서 태연하고 대범하게 이 간단하고 답순한 얼굴의 구조를 내팽개쳐 두고 있는 것은……?
그것은 마치 남녀간의 관계와도 비슷한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얼마나 간단한가. 손을 잡고, 입맞추고, 표면적의 일부를 애무하고, 최후에는 피차의 요철부를 접합시켜 최대한의 접착면을 만들어보고, 그것을 실감하기 위하여 마찰과 이합(離合) 운동을 하고……. 그러다가 사정을 하여 종(種)의 세계가 시작되지만 그것은 딴 문제다. 거기 사랑이 있다지만, 그건 남이 예쁘다고 하는 코를 못생겼다 생각하고, 남이 보기 싫다고 생각하는 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유의 감정과 몇 발자국이나 틀리는 것인가. 한 개인 것이 두 개일 수가 없고, 두 개인 것이 한 개일 수가 없는 기막힌 한정 속에 갇힌 육신들 사이의 관계, 거기에서 생겨나는 행동의 체계와 범위와 성격. 있긴 뭘 있어. 들고 보고, 놓고 보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색채 슬라이드를 만들어 비춰보고, 어안 렌즈로 찍어보고……. 그리고선 봐리아숑이다 차원이다 단계다…….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나는 또 왜“
그는 물수건을 꼭 짜서 더 이상 얼굴이 식지 않도록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그것을 조그맣게 뭉치어 탁자 위에 집어던졌다.
“자, 선생님.”
마담의 두 눈알이 한편 쪽으로 쏠리며 들려온 말이었다. 그것은 그가 앉은 반대편 벽 쪽의 좌석을 홈쳐보는 눈짓이었다.
“저쪽에 앉은 손님 모르세요?”
“누구요?”
“저기 저쪽에 혼자 앉은 분. 아까 선생님을 찾으시더군요. 자주 오시느냐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난롯가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이편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머리털이 보였다. 기름도 바르지 않고 빗질도 하지 않은 터부룩한 머리털. 고개를 좀 숙이고 있기 때문에 가련하게 드러난 목덜미. 밤색 외투깃.
그 사나이였다. 아까의 그의 방문을 차고, 훵 달려나가던 그 분노한 사나이.
“알지요.”
“오셨다고 알려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어라고 물읍디까?”
“글쎄, 자주 오시느냐구…… 매일 오시느냐구,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그렇다고 그랬죠.”
“딴 말은?”
“혼자 오시느냐. 누구하고 같이 오시느냐, 그러더군요.”
“그래서?”
“혼자도 오시고, 여러분이 같이도 오신다고 했죠.”
“여자 얘기는 묻지 않든가요?”
“물어요. 여자 손님하고도 자주 오시느냐구요. 그래, 그럴 때도 있다고 했죠. 그런데 좀, 이상해요.”
“뭐가요?”
“글쎄,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친하진 않으신 것 같은데, 또 꼭 만나야 되겠다는 것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묻는 것이……. 그래 자세한 대답은 피하려고 하는 참인데 크 이상 더 묻지도 않더군요.”
“다 안다는 듯이 말이죠?”
그는 여자에게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어 보여 주었다.
“나 코피 갖다주시죠.”
“네. 그러세요.”
사나이는 구석자리에 앉아 있다. 사나이의 앞엔 창문이 있었다. 맑은 유리로 된 이중창. 거기 드리워 있는 커튼이 두 뼘쯤이나 열려 있었다. 거기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 보일 것이었다. 한 사람의 통행인도 옆 사람의 그늘에 숨거나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의 차체 뒤에 숨지 않는 한, 사나이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고 그 앞을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사나이는 그가 이쪽으로 올 것을 예상하고 거기 좌정하고 기다리며 거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레지가 차를 날라왔다.
“미스 김. 이리 좀 가까이 와봐. 저기 저 창문 앞의 커튼 말야.”
“네? 아 저 혼자 앉은 손님 앞의 커튼 말씀이죠?”
“음, 그거 왜 열어놓았지?”
“그거, 저 손님이 열어놓았어요. 아까 제가 가서 닫으려고 하니까 그냥 두라고 하던 데요.”
“알았어.”
그런데, 이 사나이가 어째 나와 있을까? 아까 뛰쳐나간 후로부터의 시간을 따져보면 제 아내에게는 갔다 왔을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그렇대도 이런 판국에 어째서 제 아내는 혼자 놓아두고 저 혼자서 밖에 나와 있는 건가. 도망이라도 칠까봐 겁은 나지 않았던가. 손발을 결박해놓고 재갈이라도 물려놓았나? 캐비닛 속에 가두어놓고 나은 것이나 아닌가? 알 수 없는데, 이상한데……. 그는 찔끔찔끔. 차를 마셨다. 그는 나가야 했다. 가봐야 했다. 그의 애인이 남편한테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아봐야 했고, 거기에서 구해주어야 했다. 사나이가 여기 있으니, 그녀가 혼자 있을 것임엔 틀림없었다. 그러나 사나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는 혼자서 여기서 나갈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차값을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일어서서 똑바로 문으로 걸어나갔다. 사나이의 시선이 그를 쫓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다방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확 얼굴로 달려들며 전축에선 팀파니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그는 거리로 뛰어나갔다. 눈 쌓인 산마루 위에서 몸을 굴리듯이, 차갑게 얼어붙은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사나이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지는 않았지만 그건 뻔한 일이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추위를 피하여 불기를 찾아들어간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거리. 늘어진 플라타너스 가로수. 늘어진 가지 하나가 검정 타르를 칠한 생철 지붕 추녀 끝에 걸려 있었다. 엷은 달빛에 그 길게 늘어난 손마디의 뼈다귀 같은 가지는 허옇게 얼어 있었다. 그 추녀밑 공간 한구석에 세워진 간판. 이 아무개 행정 대서소. 처마에 쏟아져 녹다가 얼어붙은 고드름 조각들이 눈깔사탕처럼 불투명하게 빛나고 있는데, 그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등위로 십여 미터쯤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는 사나이의 발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귀를 세우고 들어보면, 들리는 건 자신의 발소리뿐이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참았다. 놈은 분명 오고 있다. 달리 볼일이 없다. 나한테, 그리고 제 아내한테 이외엔. 놈은 혹시 나를 약 올리기 위하여, 제 발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와 보조를 똑같이 하여 걷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놈은 나한테 무슨 볼일인가. 할 말이 또 있는가. 물론, 필요 없는 말이지만 놈의 처지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있지. 그렇다면 정면으로 대들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딴 방식으로 내게 보복을 하든지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무언 중에 나를 추적하고 있는 것인가.
T자 갈래길에 나섰다. 똑바로 가면 그녀한테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꼬부라지면 시가지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걸음을 걸어가며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그 망설임이 끝나기 전에 그의 발길은 똑바로 그녀에로 가는 길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놈. 가슴이 뛰겠지. 무슨 사태가 벌어질 것으로 생각하겠지. 애인의 남편에게 뒤딸리면서 애인의 집으로 가는 내가 두렵지나 않으냐. 간담이 서늘하지나 않으냐. 발악을 하기 위한 칼은 갈아 두었으냐. 백열 전구를 매달아놓은 빨간 과자 가게를 지나쳤다. 그 몇 발짝 위에 있는 담배 가게도 지나쳤다. 창문을 뚫고 나은 작은 연통에서 하얗게 중기와 가스가 뿜어나오고 있는 추녀 낮은 기와집도 지나쳤다. 콘크리트 담. 꽈릉꽈릉 소리가 날 것 같은 덩시렁한 철문. 개짖는 소리. 감빛 창문 안에서 연속 방송극이 시작되고 있고, 방범 등이 희미한 전주 옆에선 키큰 사나이가 오줌을 누고 있었다. 낮은 담, 생철 지붕, 녹다 만 눈, 새까만 하늘, 퇴색한 별, 아득한 달, 전선이 그 가운데를 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코는 따뜻한 냄새를 맡기 시작하고 그의 가슴은 훈훈히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에게로 그가 다가가고 있었다. 이십 미터. 십팔 미터. 십오 미터……. 그의 가슴은 설레었다. 그것은, 그의 가슴이 가장 그리운 가슴을 향해 가고 있다는, 그리고 아주 가까워졌다는 신호였다. 그의 코는 연상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하였다. 그러나 들이마셔지는 것은 차가운 대기가 아니고 그녀에게서 끊임없이 풍겨나오고 있는 따뜻한 방향(芳香)이었다. 그리고 내쉬는 것은 그녀에게 온 세계라도 다 주어 버리고 싶은 그의 마음이었다. 거리는 자꾸 단축되었다. 구 미터, 팔 미터. 창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밝은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안에 그녀가 있었다. 어떤 상태로이든, 그녀는 그 안에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 무엇보다도 간절히 그를 원하면서 거기 담겨 있는 것이었다.
두 개의 정방형이 합해진 장방형의 말없는 창. 닫혀 있지도 열려있지도 않고 그냥 있는 창. 그의 손가락이 거기 닿아 소리만 나면 발딱 일어서서 생동을 개시할 귀한 생명.
그러나 그는 그 앞을 그냥 지나쳤다. 똑바로 앞을 바라보며 그냥 걸음을 계속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기다렸다. 그러나 문소리도 나지 않고 사람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분명하게 좀 보조를 빨리한 사나이의 발소리가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는 오른편 골목으로 꼬부라졌다: 검은 지붕마루들 너머로 멀리 맥주 광고의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개가 짖었다. 내리막 길이었다. 그는 결음을 재촉하였다. 놈을 떼어버릴까. 그건 쉬운 일이었다. 자디잔 골목만 몇 개 요리 꼬부라지고 조리 꼬부라지다가, 시가지로 빠져나가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놈에게 피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짓이었다. 놈을 떼어버린대도 결국 그가 가야 할 곳은 그녀한테였다. 놈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쫓다가 놓쳤다 하면 곧장 제 아내에게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랑데부의 약속이 있었더라면 거기로 가는 것은 문제없지만, 그것도 없었다. 그리고 놈이 그냥 제 아내를 놓아두고 나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녀가 자유로이 그리로 나올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런데 그보다도, 저놈은 참으로― 멍텅구리 아닌가. 내가 직접 할 말이 없고, 단순히 내가 아내와 만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면 제 아내의 방에서 아내를 지키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될 텐데, 무엇하러 추운 밤에 죽어라 하고 나를 따라오는 건가. 놈은 나를 뒤쫓을 이유가 없다. 나는 어디로 도망 갈 사람도 아니고, 내 직장이나 숙소를 놈은 잘 알고 있다. 어떤 밀고자가 놈에게 그렇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데 놈은 이유 없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 놈이 혹시 돌아버린 것이나 아닌가. 그래 놈을 미치게 한 원한의 대상인 네게만 눈을 쓰며 따라오는 건가. 놈은 혹시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이렇게 호젓한 골목길에서 왈칵 쫓아와 내 등에 시퍼런 비수를 내리찍는다? 그러면 나는 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는 나자빠지겠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확인하려고 놈은 내 몸을 툭툭 차보겠지. 그러다간, 꼬부장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달빛 아래 드러난 내 눈 감긴 얼굴을 발견하고는 섬찟 놀라,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곤, 펄쩍 뛰어 달아나겠지. 놈은 곧장 제 아내에게로 간다. 여보, 내가 사람을 죽였어. 그놈을 죽였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내 손으로 간부놈을 죽여버렸어, 흐흐흑……. 그때, 내가 나타나는 거다. 가령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더라도 손수건으로 그것을 말끔히 닦고서― 으흠! 아니, 너는 너는……. 흠, 여보게. 연극은 그만 끝내고 가면을 벗지. 자네는 화장만으론 감출 수 없는 자네의 부끄러운 남편으로서의 낯판대기 위에 가면까지 뒤집어씌우고 있었군 그래. 그리고 나는 생가죽 같은 놈의 가면을 벗 겨낸다: 그러 면 우습지도 않을텐데 긴 치근(齒根)까지 드러내고 웃고 있는 놈의 눈같이 흰 얼굴이 형광등 아래 빛나기 시작한다. 이게 진면목인가. 이게 진실인가. 아내를 빼앗긴 남편이 동정받던 시대는 신소설의 시대와 함께 끝났다. 뻥 뚫린 눈구멍을 채워줄 것은 너의 내부에서부터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더러운 대기의 독소를 저항하기 위해 내 기관에 끓어올라 고여 있는 탁한 가래침이다, 탁! 그는 목구멍이 근질근질해옴을 느꼈다. 그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성냥까지 꺼내고는 길 가운데 멈춰섰다. 성냥을 켰다. 빨갛게 밝혀진 자신의 얼굴을 놈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좀 옆으로 돌아서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여유 있게 몇 모금 빨아 담배에 완전히 불을 붙인 다음, 길게 연기를 내뿜으면서 싹 고개를 돌려 사나이 쪽을 쏘아보았다.
이십 미터쯤 뒤, 뚱뚱한 옛날식 굴뜩 옆에 사나이는 서 있었다. 그늘 속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이쪽을 보고 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끝까지 뒤를 돌아다보지 않으려던 그의 계획은 빗나가버렸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끝장을 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 그는 손을 들어 놈에게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신호에 응하지 않는 것은 공범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그는 계속해서 몇 번 더 손을 까불렀다.
“할 말이 있으면 이리로 오란 말이야, 뒤꽁무니만 쫓지를 말고!”
그의 목소리는 꽤 찌릉찌릉하게 글목을 울렸다. 그래도 사나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할 말이 없으면 쫓아오지 말란 말이야. 딴 놈이 훔쳐갈지도 모르니 가서 지키고 있으란 말이야.”
그는 픽 돌아섰다. 그리고 아까보다 좀더 빠른 결음으로 시가지를향해 내닫기 시작하였다.
사나이는 여전히 따라오고 있다. 남편이라는 권리로 사나이는 버틴다. 믿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맞서지 못하리라고.
그러나 건방진 생각은 마라. 그래서 네놈이 따라오는 것을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네가 내 사람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현재로 해서는 내가 너를 멸시할 이유밖엔 돼주지 않는다. 네가 내 사람의 남편이라는 권리쯤은 눈곱만큼도 내게 영향을 줄 수가 없는 일이다. 네게 내게 가할 수 있는 물리적인 방해는. 별문제로 하고. 지금 너는 여전히 따라오고 있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묻기는 싫다. 또 실제로 너는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아니다. 난 나 가고 싶은 데로 가면 그만이니까. 다만 나는 지금 가고 싶은 곳이 없을 뿐이다.
수없는 밤을 술을 마시며 드새기도 했고 노름을 하며 새기도 했다. 이미 마련된 아내와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문 밖에 나가 돈쓰는 일을 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다행스런 친구들이 먼지가 쌓이듯이 살쪄가는 밤에 나는 견딜 수 없어 내 두 손을 돈의 통로로 만들고 내 내장은 술의 통로로 만들었다. 그 바람에 기계 국수 가닥처럼 말라 가지고 부러지고 부서져나가는 내 신경의 줄을 세어보면서, 쓰잘데 없는 내 젊음을 짓뭉개고 있었다.
철없는 약혼녀는 먼 코탑 위에 있고,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받아야 하는 월급을 받기 위해 나는 이 늪지대에서 얼마 안 되는 내 지혜와 기억을 팔아먹으며 붙박이 노릇을 해야 했다. 먼 앞날을 위하여? 그건 할 수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무엇을 준비하기 위하여 살 인생은 나에겐 없다. 지금 살고 있는 게 곧 사는 것이다. 단 하나밖에 없는 캔버스에 풍경화를 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추상화를 그리고 싶다. 풍경화를 지워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먼젓것을 지워놓고 나서 손병신이 되어버린다면…… ? 또, 다시 그려봤더니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된다면……? 노 지우고 또 그리나? 생애란 습작기인가? 천만의 말씀. 캔버스는 단 하나다. 시간의 종말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한번 그린 그림 이 마음에 들지 않건만 가만히 그것만 들여다보며, 억지로 싱글벙글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 길은 있다 새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먼젓 그림을 지우는 것이다. 단, 먼젓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보다 그 그림을 지우는 과정에서 더 많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경우에―. 그렇지 않으면 그 그림을 지우다가 죽는대도 눈곱만한 유한도 없이 죽어갈 수 있는 각오가 서 있을 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영구히 남을 치욕의 군더더기 그림이다. 그것도 저것도 안 된다면, 한터치 한터치 개칠이라도 해서 고쳐가는 것이다. 다행히도 오일페인트는 먼젓것이 마른 위에 칠하면 거의 완전히 제구실을 다 할 수 있으니까―. 혁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머지 사람은 고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이다. 걸작에 감동받고 후닥닥 망치와 정을 블고 대리석에 달려드는 기개도 장하지만, 진흙덩이를 가지고 끈기 있게 이겨 붙이고 떼어내고 하는 노력도 귀한 것이다. 아무것도 부수지 말고, 깨뜨리진 말고 ―.
설희는 나를 위해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 남편을 위해서 출생된 것도 아니다. 어쩌다가 생겨났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설희를 좋아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저 좋아졌다. 설희 쪽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설희를 갖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가져지니까 가진 것뿐이다.
달없는 밤, 우리는 강가를 거닐었다. 나는 설희의 마음속을 알 수 없었고 설희 역시 그러했다. 우리는 서로 딴 생각을 하며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 서로 싫어하진 않는 남녀가 호젓한 길을 걸을 땐 손을 잡고 걷는 것이 괜찮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손을 뻗치니까 잡히는 것이 있었다. 설희의 손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나는 설희의 손이 만지지가 좋아서 꼭 쥐어주었다. 설희도 가끔 그 짓을 했다. 앞에 큰 바위가 있어서 우리는 멈춰섰다. 어둠 속에 사람들이 서 있을 때는 마주 서 있는 것이 좋았다. 설희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두운 두 눈 속에 별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설희의 손을 쥐지 않은 손으로 설희의 턱을 만져보았다. 설희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내 얼굴도 설희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내 얼굴을 설희의 얼굴에 가져갔다. 내 입술에 설희의 입술이 닿았다. 일초쯤. 그때 나는 설희의 입김 냄새를 말았다. 고개를 들어 대기를 들이마시고 두 가지 냄새를 비교해 보았다. 좋고 나쁘고를 구별할 수 없었다. 나는 또 한 번 맡아보고 싶었다. 그래 다시 얼굴을 가져갔다. 나는 위에서부터이기 때문에 꾸부릴 수 있었지만, 설희는 아래로부터이기 때문에 꾸부려 올라올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위로 올라온 것은 그녀의 발돋움 때문이었다. 두 입술이 닿았다. 조금 더 꼭 닿았다.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입술에 틈이 생긴 것과 내 입술에 틈이 생긴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건 참 좋은 것이다, 하고 나는 감격하였다. 가슴속이 찌르르 아파오며 그것이 번갯불처럼 퍼져나갔다. 나는 그 아픔을 참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설희의 몸을 굳게굳게 끼어안았을 뿐이다.
나중에 나는 수진이와 입맞췄을 때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둘을 비교해보았다. 감각으로 평가해볼 때, 둘 사이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난 설희와는 그것이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설희와의 입맞추고 싶어도 수진과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게 바로, 진상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원리인가보다.
사나이는 여전히 따라오고 있다. 나는 비교적 행복한 축에 드는 생각을 하고 있다. 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괴로운 생각을 하고 있을 게다. 그러나 그런대로 그 나름으로 해서는 최대한으로 행복한 상태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가장 쾌락을 많이 주는 생각을 그는 하고 있을 테니까. 마치 아까 그가 내 방문을 차고 나간 것이 안 나가는 것보다는 더 나으니까 나갔던 것처럼 ―.
나도 마찬가지다. 그때 그때 처지에 따라 가장 마음에 들고 편리한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어떤 목적이 있어 체계적인 사고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게 고마운 의식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내가 놈이 따라오는 것이 불쾌하다 생각할 때엔, 다른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그 생각을 하는 것이 그 순간으로 해서는 최대한의 쾌락을 주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쾌락은…….
첫눈을 우리는 산사(山寺)에서 맞었다. 우리만 남겨두고 모든 것을 가리워주는 밤이 모자라서, 우리는 일요일 낮에 닥치는 대로 시외 버스를 집어타고 오십원 어치를 갔다.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 우리가 모르는 자연. 그 속에서 우리끼리는 더 친했고, 말 한 마디 안 해도 두 사람의 내부는 한 사람의 것처럼 소통하고 있었다. 낮선 사람들은 부러워하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대견스러운 태도로 부끄러움없이 산에 올랐다. 낡은 절마당가의 노송 아래서 우리는 첫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을 맞으며 산길을 걷다가 흙 냄새 나는 산지기의 방에서 점심을 시켜 먹었다.
우리는 거기서 산〔生〕 것이다. 지난날을 결산한 것도 아니고 앞날을 위한 예비 행위를 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때를 살았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두고 온 것도 없었고, 다시 가야 할 곳도 없었다. 거기에 뚝 떨어진 사람들처럼 살았고, 거기에서 훌쩍 없어지는 사람들처럼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살았다, 우리는. 과거는 기억이다. 지금 설희가 없어진대도 나는 그 과거를 잊을 수 없고, 또 과거를 잊지 않는 것으로 해서 없는 설희를 내 힘으로 있게 할 수는 없다. 꿈은 없는 것이다. 있는 건 기억뿐이다. 그 기억은 아무 실용성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가지 생겨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기억 속의 꿈이 좋은 것이었을 때, 그 꿈을 더 꾸고 싶고 더 연장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것은 더 많은 좋은 기억을 축적해두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오지도 않는 미래를 그러한 과거의 색깔로 도장해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끊임 없이 생겨났다가 끊임 없이 사라져가는 현재들을 위한 욕망이다. 그것은 기억에 남은 꿈 속에 살고 싶은 욕망이 아니다, 해서 가장 좋았던 그 일을 지금 당장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욕망이란 참 늦게 생겨나는 것이며 또 그래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설희를 원한다. 또 설희도 나를 원한다. 그러나 앞으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그럴 수 있는 준비 인생으로서는 눈곱만큼의 시간도 살고 있진 않다. 따라서 아무도 우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악의가 없으니까. 우리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누구의 간섭도 원하지 않는다. 내 뒤를 따르고 있는 놈이 설희를 원한다면, 내가 설희하고 해서, 설희에게 기쁨을 주었던 일보다도, 더 큰 기쁨을 주는 일을 해가지고 설희를 되찾아가면 된다. 수진은 내가 설희를 좋아하는 것이 싫으면, 설희가 내게 줄 수 있었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게 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설희는 남편을 다시 사랑하게 될 테고, 나는 수진과 결혼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변해버린 지금에 와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는 이렇게 마음이 변하게 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고 또 무엇을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저희들이 사랑한다는 사람들을 놓아두기만 했던 저희들의 어리석음이나 탓하고 않았을 노릇이다. 그러니까 주책없이 어두운 밤길에 뒤꽁무니를 따라다닐 생각은 하진 말고,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아내 앞에 또는 약혼자 앞에, 훌륭하고 매력적 인 사람으로 나타나 그 마음을 다시 사로잠을 수 있게 되도록 노력을 하든지…… 사필귀정을 믿고 조용히 기다려보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저주하다가 그 효과로 우리가 불행해지거든 손뼉을 치든지 할 것이지, 부질없이 우리의 눈앞에 어릿거리지는 말 것이다. 그런다고 내가 설희를 싫어하게 되지도 않고 설희가 나를 미워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며 또 우리 사이엔 아무런 계약도 한 것이 없으니 너희들 앞에 해약해 보여줄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사나이는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때, 이심전심은 불통의 이치다. 다리를 건넜다. 군밤장수가 있었다. 천막때기 하나 걸쳐놓지 않은 불안정한 노지(露地)에서 방한모를 쓴 노파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느 도시에 나 있는 전통 오랜 직업. 변화는 화력이 숯불처럼 십구공탄으로 바뀌어진 것뿐. 돈주머니를 뒤져 잔돈을 꺼내는 동안 그는 흘깃 다리 위를 쳐다보았다.
있다. 술취한 청년들이 달을 우러르며 괴상한 노래를 고함쳐 부르면서 건너가는 저편, 깊은 강물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모습으로 서 있는 사나이.
그는 잔돈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얼른 오른편으로 꾸부러져 냇가의 포도를 따라 냇물을 역류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왼편에 골목만 있었더라면 그는 그리로 꼬부라져 들어갔을 것 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골목이 없었다. 듬성한 판자 울타리 사이로 길보다 낮은 대지에 선 살림집 안채 대청에 환하게 불이 밝혀진 것을 엇볼 수 있었다. 그는 내처 걸음을 내디뎠다. 측백나무 생울타리를 지나고, 무슨 여인숙이라는 희미한 간판을 지나자, 골목이 있었다. 그러나 그땐 이미 뒤따르는 사나이가 군밤장수 앞을 돌아 이쪽으로 오는 중일 것이므로 꼬부라져 들어간대도 사나이를 따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그리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꼬부라져 따버리자면 못 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사나이를 따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채이는 것은 더욱 불쾌한 일이었다. 그래그는 이번에는 보조를 늦추어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하였다. 미행을 당하는 경우 그런 줄 알고만 있으면 미행을 당하는 편이 미행하는 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기 마련이다. 미행자에겐 한순간의 방심도 용서되지 않는 까닭에 얼어붙은 냇물 위에선 달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군데군데 얼룩져 구멍난 곳에서는 검은 물흐름이 소리없이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다 대고 지저분한 소리를 내며 긴 포물선의 얼음 같은 물줄기를 내쏟고 있는 자연의 옆을 지나자 왼쪽으로 또 골목이 있었다. 제법 군데군데 불빛이 새어나와, 훤한 골목이었다. 그 첫집이 대폿집이었다. 그는 드르륵 문을 열고 그리로 들어섰다.
카운터도 아니고 목로도 아닌 큰크리트 부뚜막 같은 것이 딱딱하게 그를 맞았다. 그리고 거기에다 만들어놓은 화덕의 연탄불 속으로 들어갈 듯이 꾸부리고 있던 어린소녀가 화닥닥 놀라 허리를 폈다.
“어서 오세요.”
열댓 살쯤 돼보이는 소녀는 빨간 손을 앞치마 속으로 감췄다.
“아줌마! 손님 오셨어요.”
소녀의 고함 소리를 귓결에 홀리며 그는 유리창 밖올 흘깃 내다보았다. 아무도 그 앞을 어른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 앉으세요.”
그는 문 쪽에 둥올 대고 판대기 의자에 앉았다. 화덕에선 쌔애한 탄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이구, 미안합니다, 손님.”
소녀와 엇갈리어 굉장히 짙은 화장을 한 ‘아줌마’가 나오고 있었다. 역할 정도의 천한 향기가 물씬 코를 찔렀다.
“약주 잡수시게요?”
“아, 예, 막걸리 한 잔.”
그는 문 여는 소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일부러 열심히 해보는 기우(杞憂)는 으레 진짜 기우임이 실증된다는 항례를 생각하면서도 또 스스로에게 그것을 생각 않는 척 해보이변서. 그래도 문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냥 지나쳤나보다. 놈이 그를 찾아 이쪽저쪽으로 골목길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우스웠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안주는 뭘 드릴까요?”
“안준 뭐. 한 잔만 마실걸.”
“아유, 괜히 그러시네에. 맛있는 것 드릴게요. 은행을 구워드릴까요?”
“그만둬요.”
그는 주머니에서 군밤을 꺼내놓았다. 여자는 쭈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화덕 위에 놓았다. 주전자 바닥의 불결한 물기가 치지직 튀었다. 다음에 그의 옆엔 구정물 두 방울이 얼어붙은 젓가락이 놓여지고, 검붉은 깍두기 그릇의 뚜껑이 벗겨졌다.
“참, 뜨거운 국물을 좀 드려야겠군. 바깥날이 춥죠, 아저씨?”
“좀 춥군요.” 하려다가 그는 그만두었다. 역시 값싼 양은양재기에 콩나물국. 저녁을 먹지 않은 뱃속이 고픈 것은 아니었으나, 된장 냄새가 구수하게 구미를 돋우었다. 그래 그는 여자가 내미는 숟가락을 받아 콩나물과 함께 국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을 벌려 막 그 국물을 먹으려고 했을 때, 드르륵 문 여는 소리가 나고 다음 순간 찬바람이휘이 몰려들어 그의 등을 휩쓸었다.
“어서 오세요오!”
“여자는 웃으며 금방 들어선 사람을 반기는 시늉을 하고 있고, 그는 국물을 뜬 숟가락을 들고 있는 채였다: 그리고 들어선 사나이는 문을 닫기 위해서 뒤로 손을 뻗치면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일순 자세를 경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스파이 영화의 예고편에서 일순 정지한 극적 장면과 같은 광경이었다. 그는 카메라의 렌즈의 위치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하는 여자의 말과 함께 화면은 와르르 동작으로 돌아갔다. 서너 걸음의 묵직한 발소리가 끝나고, 두 개의 다리가 판대기 의자의 안쪽으로 넘어오는 동작이 끝나고, 그가 앉아 있는 의자의 널판이 콱 내려앉는 소리를 내었다.
“나 대포 한 잔 주시오.”
위엄있는 사나이의 호령에 여자의 표정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까짓 큰소리쯤 얼마든지 좋아……. 여자의 얼굴은 오히려 여유있는 미소까지 띠우는 것이었다. 거무죽죽한 입술 사이로 제법 예쁘게 들어선 하얀 치열을 보이면서까지.
“그러세요. 손 시려우시죠? 여기 불 좀 쪼이세요.”
그는 어느덧 국그릇 속에 숟가락을 놓아버리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들어왔나 사나이는 불 위로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냥 외투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있는 채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궁둥이 밑의 널판으로는 사나이 쪽으로부터 약한 진동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사나이의 몸은 떨리고 있는 것이었다. 흥분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마음의 불안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나이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나이는 섣불리 미쳐 날뛸 정도로 침착하지 못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두 홉들이 글래스에 담긴 막걸리의 표면을 웅시하고 있었다. 사나이의 앞에도 잔이 놓여지고 국물이 놓여졌다. 그 다음에 김치보시기와 젓가락이 놓여진 다음에 희뿌연 막걸리가 쭈그러진 주전자 꼭지로부터 잔 속으로 쏟아져들어갔다. 그 표면이 잔의 중간쯤 올라오는 것을 시계(視界)의 한 귀퉁이로 보다가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반들반들 넘쳐흐르려는 윤택한 수면을 이지러지지 않게 모셔다가 입술에 대고, 가만히 두어 모금 잔을 기울였다.
그 다음에 잔을 입에서 떼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하다가 홱 사나이를 향하였다.
사나이는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떡가래, 계란, 사과 따위가 들어 있는 찬장의 손잡이쯤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눈빛으로 보아 사나이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 듯했다. 그 프로필은너무도 간명했다. 비극적으로 큰 눈이 쌍꺼풀 져가지고 깊은 번뇌의 빛을 띠고 있었다. 너무나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그는 다시 자기 앞을 향했지만 사나이의 동정을 요하는 표정을 얼른 묵살할 기분이 되지 않았다. 동양인치고는 전후가 좌우보다 좀 긴 정격의 두개골. 정상 규격의 코와 인중과 꽉 다물려 약간 얇은 입술. 게으름에서 나왔을 군살 때문에 좀 둥그므레한 턱. 귓바퀴는 모양 좋게 둥글었으나 섭섭하게도 너무 얇아보였다. 그리고 뺨과 턱 언저리엔 면도한 지는 얼마 안 되어보이는데 깔깔한 수염이 일제히 돋아나기 시작하여 엷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거기다 가볍게 곱슬머리며 일어서 있는 섬세한 머릿결, 손질만 하면 과히 남부럽지 않을 미남형의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자란다는 아쉬운 느낌을 주는.
“아이, 약주 좀 드세요. 식 기 전에 국드 좀 드시고……. 제가 서비스가 모자라서 그러나봐, 호호호.”
사나이를 향하여 수선을 떠는 여자의 목소리에 몰려 그는 자신이 얼른 잔을 들었다. 그리고 반도 넘게 남아 있는 술을 쉬지 않고 쭉 마셔버렸다.
그가 잔을 놓자, 사나이가 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본을 따라 쭈욱 들이키고 있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잔 더 하실까요, 아저씨?” .
“음.”
그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빈 뱃속에 막걸리는 기가 막히게 영합되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뱃속의 후련함을 그는 의식하였다.
“여기도 한 잔 더 주시오.”
“네에, 네.”
그의 잔에 술을 채운 주전자는 사나이 쪽으로 옮아갔다. 그는 젓가락으로 깍두기 한 쪽을 집어 입에 넣었다. 차가운 감촉 뒤에 독한 미각이 왔다. 으지직 한 번 깨물자, 씁쓸한 짠맛이 온 입 안을 채웠다. 그는 땅바닥에 깨어진 붉은 무쪽을 배앝아버렸다.
“지독히도 짜구나?”
“어머나, 그렇게 짜요? 그럼 이 동치미를 드릴게요.”
그는 술 한 모금으로 입 안을 부셔서 뱃속으로 넘겼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여자가 재빨리 성냥을 켜 대주어 불은 거기에다 당겼다. 그리고 몇 번을 계속해서 빨아 진한 연기를 길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길게 내뿜었는데, 그것은 곧 사나이를 곁에 두고 마음속에서 하는 그의 이야기의 서두였다.
도대체 어쩌자고 따라오는 거야. 미행하는 것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여기까지 따라오는 건 대체 무슨 이유냐 말이야. 나를 어떻게 하고 싶어서 그러나? 나를 때려주고 싶어서 그러나? 자진해서 맞아아 주겠다고 나서기를 기다리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아직 폭행 사고를 저지른 만큼 흥분이 덜 되어서 볼수록 미워지는 나를 자꾸 보아서 용맹심을 복돋우려 하는 것인가. 내가 사죄하기를 기다리는 건가. 그렇지만 설희를 미워하게 되도록 개심하지 않는 한, 네가 그 남편이라 해서 쉽사리 사죄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내 아까의 이야기하는 태도로 알았을 텐데. 그리고 또 아까 나는 말했다. 우리 둘이서 같이 할 일은 없다고. 최악의 생각이라도 좋으니 우리는 서로 따로따로 그 생각을 하는 편이 적절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그런데 이렇게 따라다니면 무엇하는 거냐. 나 하나를 하룻밤 열심히 따라다니는 것쯤으로는, 아내에 대한 남편으로서의 열의가 실증되지 않는 것인데……. 그리고 또 그것이 실중되고, 내가 그것을 납득한다 하더라도, 그게 아무 소용없는 일이란 말이야. 그렇다고 내가 억지로 설희를 싫어하게 될 것 같은가. 내가 설희에게 작별의 손을 내밀 것 같은가. 설사 그런다 하더라도 설희가, 내가 하게 될 거짓말을 정말로 치고서, 내가 싫어지지도 않았는데 우리 사이의 좋은 일을 못 하게 하려는 자네를 다시 사랑하게 될 것 같은가. 안 되네, 안 돼. 무리한 이야기야. 아무리 인간의 감정이 믿을 것이 못 되고 변화 자재한 것이라 해도, 그렇게는 되는 것이 아니야.
그는 술잔을 들어 또다시 주욱 들이키었다. 사나이도 그를 따라 술을 마시는 모양이었다. 그는 동치미 한 쪼각을 입에 넣고 우둑우둑 씹었다.
소용없는 짓은 않는 게 좋아. 모멸감만 더해갈 뿐이야. 그런데 참, 도대체 설희는 어떻게 하고 나온 거야. 아까의 내 추측처럼 묶어 놓고 왔나, 그렇지 않으면 캐비닛 속에 가둬두고 나왔다. 혹 설희는 어디로 도망친 것이나 어딘가. 그래 이 사나이는 혹시 내가 어디다 감추어두지나 않았나 하여 내 뒤를 쫓는 것인가. 혹시 우리끼리 정해놓고 만나는 비밀리의 장소라도 있는가 해서. 아마 그런 것 같군. 그렇다면 오해야. 우린 그런 것은 없어. 한 번 실행할 의사는 전혀없이 심심풀이로 그것을 물어본 적은 있지. 첫눈이 내리던 날, 산지기의 집에서, 산지기 부인한테 말이야. 겨울철에 수양을 좀 하려고 그러는데, 이런 곳에 방 좀 빌려줄 수 있느냐고. 그러니까 대답하더군. 그럴 수 있다고. 자기네도 아이들이 있고 방 두 개는 모자라지만, 그래도 우리 같은 점잖은 부부에게라면 끝방을 빌려 주겠노라고……. 방세는 한 달에 오백 원만 주면 된다고.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쓸쓸하게 웃었지. 우리는 그 정도까지는 여유있게 행복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각각 마음속에서 말해주면서.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거야. 더구나 거기는 여기에서 버스로 한 시간 가서 다시 삼십분이나 결어야 하는 곳이야. 우리는 참말로 그럴 만큼 행복하지는 못하단 말이야. 그게 궁금한 건가? 그럼 말을 해야지. 물어야지. 내 아내를 어디 갖다 숨겼느냐고……. 그렇지만 이 사나이는 묻지를 않아. 아냐, 그것도 아냐. 정말 그렇게 돼서, 우리의 비밀의 거처를 알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면 몸을 숨겨가지고 따라오지, 이런 식으로, 나는 너를 따라가고 있으며 절대로 놓치지는 않겠다는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아. 참 괴상한데, 괴상한 사나인데……. 모르는 척하면서, 또 바로 옆에 앉아서 말없이 술만 마시고…….
그는 또 자기의 앞의 잔을 들어 쭉 마셨다. 사나이도 그대로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또 동치미 한 쪼각을 우둑우둑 씹는데, 사나이는 젓가락도 들지 않고 있었다. 여자는 이번에는 말을 하지 않고 눈치만 살펴보곤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여자도 두 사람의 사이의 이상한 기미를,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것만은 눈치챈 모양이었다. 대포 몇 잔에 홍떵홍떵 값싼 농담이나 지껄이다 갈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정도로. 그래 여자는 아주 멋대가리 없는 표정으로 돌아가서 화덕 부뚜막에 팔굽을 짚은 채, 어디에서 찢어냈는지 종잇조각을 하나 손톱으로 오려 배배 노끈올 꼬고 있었다. 길이 십 센티미터쯤의 노끈이 되고, 그것이
다시 비틀려가지고 두 겹이 되어 새끼줄이 꼬아지고 나자, 그는 왈칵 치미는 무료함을 느꼈다.
도대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설희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누님 집 에서는 수진과 누님 이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무슨 계책을 세우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여기 이렇게 한가로이 앉아 있단 말인가. 말할 수 없는 초조감이 그의 가슴속을 거꾸로 밀고 올라왔다. 얼굴로 피가 왈칵 몰려올라옴을 그는 느꼈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여태까지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앞만 웅시하고 있는 사나이의 옆 열글을 다시 한 번 아까처럼 쏘아보았다.
도대체 설희는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 거요?
그러나 그것은 그가 사나이에게 물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리에 어긋난 질문이었고, 설희에 관해서 그 사나이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그 이상 더 그 대폿집 안에서 할 일을 잃어버렸다. 사나이가 혼자서 더 앉아 있거나 말거나, 그건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일초라도 빨리 그 집에서 나와야 했다. 주머니에서 백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여자 앞에 던져놓고 그는 또다시 거리로 뛰어나갔다.
그가 미처 스무 발자국도 걷기 전에 또다시 그의 뒤를 따라오는 사나이를 발견하고, 이번엔 그는 성이 왈칵 나버렸다. 이젠 사나이가 따라오는 이유나 목적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마디로 싫었다.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리고 미웠다. 더 생각할 것이 없이 이번에 놈을 골목길로 유인했다가 따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여 이발소 모퉁이를 돌아갔다. 거기서 십 미터쯤 되는 곳에 오른편으로 골목이 있고 왼편으로 또 작은 골목이 나 있었다. 그는 간장 가게와 대중식당 사이로 난 오른편 골목을 택했다. 마침 식당에서 나오는 대여섯 사람의 패거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잽싸게 그들의
등 뒤로 돌아 몸을 숨겨가지고 깜깜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흐릿한 달빛은 있었지만 발밑은 잘 보이지 않는 담과 집 사이의 좁은 길을 전에 다니던 대중으로 거의 뛰다시피 걸어나갔다. 곧 외둥이 환하게 켜진 여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들어가버릴까 하다가 나중에 쑥스러울까봐 그만두고, 그냥 큰거리로 나섰다. 거기엔 제법 사람이 많았다. 또다시 오른편으로 꼬부라지며 뒤를 보았는데, 사나이의 모습은 골목 안에 보이지 않았다. 그냥 잰걸음으로 주욱 나가다가 또다시 오른편으로 꼬부라졌다. 아까 술을 마신 대폿집이 저쪽 편에 보였다. 몇 걸음 가자 오른편으로 골목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맨 처음 들어선 골목이었다. 한 바퀴 뺑 돌은 셈이었다. 간장 가게를 지나고 대중식당을 지났다. 국수 공장을 지나고 우중충한 대폿집 몇 개를 지났다. 그리고 다시 십자로에 나섰다. 잠깐 걸음을 늦췄다가 또다시 오른쪽으로 꼬부라졌다. 바퀴차에 안경, 라이터 등을 놓고 파는 이동 노점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저쪽 편에서 두리번거리며 오고 있는 사나이를 발견하였다. 그는 휙 왼편으로 몸을 돌려 길가 칼국수집우로 쑥 들어갔다. 주인이 인사를 했지만 그는 본척만척하고 그 집 변소가 있는 뒤꼍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후문이 있었다. 그리고 나가자 다시 T자 길이었다. 그는 사나이와 만났던 골목의 반대 방향인 오른편으로 꼬부라졌다. 머리 위에 큼직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문향’ 그 집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별로 잘못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어차피 설희를 만나기는 틀린 일이었다. 집이라고 가봐야 괴로운 얼굴들과 잠 오지 않는 밤이 있을 뿐. 거기다 내일은 일요일이었다. 에따 술이나 좀 마셔두었다가 정신 없이 곯아떨어져버리자.
그는 그 집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양쪽으로 늘어선 방 사이의 복도가 텅 비어 있었다. 조용했다. 잘 된 건가, 잘못된 건가.
“에헴!”
그가 헛기침을 크게 울리자 한 방문이 드르륵 열리며 여자 둘이 뛰어나왔다. 그를 보고는 아주 반색을 하였다.
“아유 오랜만에도 참 오시네요, 선생님. 어서 올라오세요.”
“좀 오래 됐나?”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척 태연하게 반문으로 응수하고 복도 위로 올라섰다. 앞에 있는 권 양은 벌써 그의 팔을 잡는데, 뒤에 섰던 박 양이 그의 어깨 너머를 보며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오세요오. 혼자신줄 알았더니 두 분이시군요.”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그의 뒤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뒤를 따르던 사나이였다. 개 같은 놈. 그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권 양의 등을 밀었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안내해!”
“어마마, 급하시기두 참. 이리로 들어오세요I.”
개를 닮은 놈. 용케도 따라오는구나. 저놈을 따버리는 일이 또 남았구나. 체엣. 금방 성난 얼굴이 되어 그가 방바닥에 덜퍽 주저앉는 바람에 놀란 것은 권 양이었다.
“아이 참, 선생님도. 오버나 좀 벗고 앉으세요.”
그가 그냥 앉은 채로 팔소매를 빼는데, 문을 막는 그림자가 있어 올려다보니, 뻔뻔스럽게도 놈은 박 양의 부액을 받으며 그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아니, 이건…….”
그는 기가 막혀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와는 다정한 친구로 같이 술을 마시러 온 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시침 뚝 따고 박 양에게 외투를 벗기우고는 그의 맞은편 방석 위에 주저앉는 것이었다.
그는 참으로 입맛이 썼다. 뿐만 아니라 당장 쏴 죽이고 싶도록 놈이 미웠다. 구러나 여기까지 쫓아들어온 놈의 비윗장올 가지고, 그가 나가라고 소리친다고 쉽게 나갈 것 같질 않았다. 싸움이라도 벌일 심산이라면 해보겠지만, 설희를 보기 전엔 놈과 정면 충돌은 피하자고, 아까 놈이 그의 방에서 나가고 난 뒤에 작정해둔 바 있었다. 더구나 말 많은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술집에서. 그는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심해라 조심. 우선 놈을 무시해버리자. 그러다가 하는 짓을 보아 정히 못 참겠으면 해내버리는 거다. 좀더 참자. 저절로 못 참게 될 때까지는 참아보자.
“술상 차려야죠?”
권양이 상냥하게 그의 곁에서 물었다.
“물론이지. 술은 독한 걸로.”
“떨어지지 않았나 원……. 제가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래 안주는 손쉬운 결로 두어 가지 놓고 우선 상부터 빨리 들여와!”
“네에 네. 알아 모시겠나이다.”
권 양은 남색 바탕에 황금빛 무늬가 혼란스러운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와스락와스락 소리를 내면서 방에서 나갔다.
박 양은 잔뜩 뿔이 난 얼굴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나이의 무릎을 펴주느라고 극성을 떨고 있었다.
멋도 모르고 수선이로구나.
“박 양. 화투 좀 내놔!”
“아이 참, 깜빡 잊었네. 여기, 여기 있어요.”
잊긴 뭘 잊어. 빌어먹을. 더럽게도 천덕스럽게 생긴 것이.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화투목을 쥐었다. 박 양이 성냥을 켜다대었다. 사나이는 두 무릎을 그냥 고집스럽게 세운 채로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놈에게 눈을 흘겨주었다.
이건 신판 결작의 오월동주(具越同舟)로구나, 쳇.
그는 딱딱 소리를 내며 신경질적으르 화투를 쳤다.
“언니 들어오거든 우리 넷이서 고스틉 해요, 선생님.”
“그런 건 할 줄 몰라.”
“아어, 요전에 오셨을 때 배우시구서.”
“가르쳐주고 돈 따먹으려구? 천만의 말씀이다.”
“어마나……. 누굴 타짜꾼으로 아시나봐아.”
“누가 속인댔어 ? 서투르니까 않는다는데 왜 이렇게 나서는 거야. 그만두고 나하고 육백이나 치자.”
“그건 칠 줄 아세요?”
“것도 조금 배웠지. 하여튼 난 단둘이서 하는 것이 좋단 말이야.”
“그럼 해요. 내기예요?”
“뭣내기?”
“신탄진 한 곽 내기.”
“좋다. 하자.”
선을 보아, 그가 선을 쥐고, 화투장을 나누고 벌여들고 하는 동안 사나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이놈이 갑자기 멍충이가 됐나, 반편이 되었나, 먼산 바라기가 되었나, 왜 저렇게 청승이야. 하기야 도리어 한몫 낄 수가 없이 되어 있긴 하지만…….
“여깄다. 국진 열끗짜리를 우선 잡아놓고…….”
“하하, 이거 야단났는데……. 무슨 패를 이렇게 주셨어요 그래? 하나도 없으니 내놓고 제껴야겠네.”
그때, 권 양이 들어왔다.
“있대?”
“네, 상도 거의 다 됐어요.”
“빨리 가져오라구 해. 중고품 안주라도 좋으니 주섬주섬 늘어놓지 뭐.”
“아니 선생님 오늘은 웬 폭언을 그렇게 하세요, 그래?”
“폭언? 척하지 말아. 폭언이 어디다 쓰는 말인데……. 옛다 팔공산이다. 대포 하나 해보아야지.”
“엇다 쓰는 말예요? 가르쳐주세요.”
“수다 떨지 말아! 노름 방해돼. 옳지 청단은 자르고…….”
권 양은 돌처럼 굳어 있는 사나이에겐 아랑곳없이 화투판만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사나이가 담배를 꺼내물자, 재빨리 성냥을 켜대주고는 금방 도로 화투판으로 정신을 모았다.
이렇게 3대 1의 비율로 분위기는 이분된 가운데, 화투는 진행되었고, 시간은 흘러갔다. 그래서 박 양의 점수가 삼백십 점, 그의 점수가 사백구십 점까지 올라갔을 때 문이 열리고 술상이 들어왔다.
상은 큼직한 교자상이었지만 올려놓여진 안주는 별것 아니었다.
“훔 밤탕에 도미조림이다. 멋진 조화로군. 하여튼 아무렇게나 먹어보자.”
“그런데 오늘은 선생님, 유난히 말씀을 많이 하시네요. 자, 잔 받으세요.”
그래 그래. 남실남실하도록 가똑 부어라. 말이 많다고? 그렇게 됐지. 이런 말이라도 지껄이지 않고 있다가 대전투가 벌어질 판이었다. 박 양은 사나이의 곁에 앉아 술을 부어주고 있었다. 사나이는 묵묵히 잔에 채워지는 술을 보다가, 주전자 끝이 잔가에서 떨어지자마자, 홀짝 들이마셔버렸다. 박 양은 그냥 들고 있는 그의 술잔에다 또 술을 따랐다. 그는 홀짝 마셔버렸다. 아무리 방울만한 잔이긴 하지만 이러기를 다섯 번하고, 여섯 번째에야 받았던 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박 양이 안주를 집어주었지만 사나이는 완강히 손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좀 머쓱해진 박 양은 잠깐 눈알을 굴려보더니 사나이 앞에 정색을 하고 다가앉았다.
“인사드리겠어요. 저, 박미야라고 불러주세요.”
“아참 인사가 늦었군.” 권 양도 한몫 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권옥회라고 합니다. 앞으로 많이 아껴주세요.”
사나이는 대답도 하지 않고 눈도 끔벅이지 않았다.
그런 걸 보게 되기까지 그의 마음은 상당히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고, 그 사나이의 존재 따위는 무시하고 멋대로 권 양과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저쪽 선생님께선 처음 오셨나봐요. 그런데 어쩌면 저렇게 돌부처처럼 앉아만 계실가. 얘, 박 양. 술 좀 권해드리고 재미있는 말씀 좀 하시게 좀 해.”
“정말…… 선생님 너무 하세요. 말씀 좀 하시고 제게도 한 잔 주셔야죠. 그런데 참 선생님 성씨가 누구신지도 좀 가르쳐주시구요.”
그래도 사나이는 꼼짝 않고 있었다. 박 양은 자꾸 물어도 대답이 없으니까 그럼 제가 발견해보겠노라고, 사나이의 가슴 앞으로 기어들어가며 양복 윗도리 자락을 제쳐보려 하였다. 그러다가 사나이가 그녀를 밀어치우고, 그녀가 밀려나는 서슬에 저고리 소매로 상 위의 술잔을 쳐버렸다. 술은 좌르르 사나이의 바짓가랑이로 쏟아졌다. 순간 사나이는 손을 들어 번개같이 박 양의 따귀를 갈겨버렸다. 찰싹 소리와 함께 박양은 뺨을 싸쥐고 방바닥에 푹 엎드려 버리고 다른 두 사람은 이게 또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겨끔내기로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권 양이 점잖게 먼저 한 마디 박 양을 나무랬다.
“네가 잘못 했지. 그래 손님의 성함을 알자고 옷깃을 뒤집으려 하면 쓰니? 선생님,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용서하세요, 네 ? 아직 어려서 모르고…….”
“어려서, 모르고?”
박 양이 발딱 일어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손을 뗀 뺨에는 빨간 손자국이 나 있었고, 두 눈엔 눈물이 가득히 고여 있었다.
“내가 뭐 자기 이름 알고 싶어서 그랬나? 하도 딱딱하게 앉아 있기에 그걸 풀어주려고 일부러 그랬던 건데……. 뭘 그리 잘났다고―.”
“얘.” 권 양이 말을 막았다. “그게 무슨 말버릇이나, 손님한테 ?”
“흥, 손님. 두 번만 손님이었다간 사람 잡겠네. 정말 이 선생님과 같이 온 사람만 아니었더라면 콧등을 싹 할퀴어줘버렸을 텐데……. 비위 거슬려 못 앉았겠네.”
말을 마치자 박 양은 발딱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뒤이어 권 양이 정중히 사과를 했다. 그래도 사나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언제 내가 누굴 때렸더냐는 식으로 처음과 마찬가지로 번뇌에 찬 눈을 큼직하게 뜨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앉아 있올 뿐이었다.
흠. 네가 내 덕을 하나 보았구나. 그런데 도대체 알 수 없는 놈이로군. 인상이야 최악의 것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더이상 흉해질 수는 없겠지만, 도무지 욕을 먹 거나 사과를 듣거나, 귀머거리처럼 잠잠하니 저게 도대체 성한 사람인가? 에따, 어디 내 말 좀 한번 들어봐라. 그래도 네가 옴짝도 않나.
“권 양. 내 저 손님 좀 소개를 할까?”
권 양은 대답은 않고 궁금하다는 표정만 짓고 앉아 있었다.
“저 손님과 나는 동서(同嫡)간이야.”
“그러세요오? 그러면 두 분 사모님께서 형제간이시겠군요.”
“형제간? 흐후후. 그보다 더 가깝지.”
“형제보다 더 가까우면…….”
“한 사람이란 말이야. 즉, 저 손님의 부인이 내 애인이란 말이야.”
“어마나, 농담을 하셔도 분수가 있지.”
“그래, 그래. 농담이라고 치고 들어봐. 재미있을 테니. 물론 나는 아직 저 손님의 장모님의 정식 사위는 못 되었지. 그렇지만 사위격 이니까·….”
한 사람의 정식 사위와 사위격의 남자 사이니까 그냥 동서간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동서격 관계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려나? 알아듣겠어? 나는 저 손님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저분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 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세상 어떤 여자의 남편보다 저 손님은 나하고 가깝고, 또 나는 세상 어떤 여자의 애인보다도 저 손님에게 가깝지. 자기 부인의 애인이니까. 안 그래 ?”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권 양이 사나이를 흘끔 쳐다보며 묻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여전히 변치 않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술잔을 들어 쭉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권양이 얼른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랐다.
“하여튼 희귀하게 촌수가 가깝지.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빙탄 불상용이란 말이야. 누가 얼음이고 누가 숯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하자면 우리는 사랑의 적이지. 그렇게 말하고 보면 또 세상 원수보다도 가증스러운 원수들끼리야. 그런데도 이렇게 한 방에서 술을 마시게 되니 세상은 가히 말세가 아니라 천당 이상의 진세(眞世)란 말이야. 알겠어?”
이놈. 그래도 끄떡없나? 사나이는 고주파 전류에 감전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다. 그때 실례합니다, 하는 소리가 문 밖에서 나고 문이 열렸다. 채 양이었다.
“오, 채 양 마침 잘 오는군. 난 딴 데로 가버렸나 했지.”
채 양은 입을 삐죽해 보이고 권 양은 너무 그러지 말라는 눈짓을 그에게 보내주었다.
“자, 내 술 한 잔 받고.”
그는 채 양이 앉기가 무섭게 잔을 권하고 자기 손으로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채 양은 거짓말쟁이로군.”
“왜요?”
“인제 오니까. 채 양은 풍문에 돋자니까 이 못난 나를 굉장히 사모하며 또 사랑하고 있다더군. 또 채 양 자신도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지. 그런 내가 왔는데 인제서 보충병으로 들어오다니…….”
“아이참.” 채 양은 얼굴을 붉혔다. “손님이 안 계시기에 잠깐 양장점엘 다녀왔어요.”
“진정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올 것은 육감으로라도 알아차렸어야 할 톈데…….”
채 양은 더욱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못 들었다.
“하여튼, 그건 그렇고, 오늘 채 양에겐 반가운 손님이 와 계셔. 왜 반가운 손님 인지는 내가 설명을 좀 해주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두고 보면 알 거고. 본론으로 들어가서―음. 술 한 잔 하고, 자 이번에는 권 양.”
그는 또 권 양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채 양이 듣기엔 좀 섭섭하겠지만, 나는 사실 채 양보다 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채 양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니까. 그래서 그동안, 별로 오지 않은 거지. 그런데 그 여자하고 제일 가까운 분이 바로 채 양 곁에 있는 손님이란 말야.”
채 양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권 양은 반신반의의 표정을 짓고 있고…… 그런데 사나이는 여전히 그 자세, 그 표정이었다. 다만 한 번도 남에게 술을 권하는 법 없이 비교적 자주 홀짝홀짝 잔을 비우고 있을 뿐이었다.
“쉽게 말해서, 친하다는 것은…… 이 손님 이 바로 그 여자의 남편 되는 분이야. 그러니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고 아주 친한 관계에 있는 걸, 이 손님이 싫어할 것은 뻔하지. 내가 그 여자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채 양이야. 그러니 이 말을 들은 지금, 이 손님은 네게는 여복이 많아서 채 양같이 아름다운 여자도 있으니 나는 채 양을 다시 택하고 자기 부인은 자기에게 돌려주었으면 하고 있을 게 아냐? 그러고 보면 내가 채 양과 친해지고 가까운 교분을 맺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이 손님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이며 협조적인 동지가 되어주실 거라 믿어요. 두 분께서 잘 상의 좀 해보시도록.”
말을 끊은 그는 또다시 술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어 넘기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사나이의 표정은 죽을상이었다. 인제야 천신만고로 터져나오려는 분노를 참기 위하여 좀더 진지하게 표정은 변화되어 있었다. 채 양은 치욕감 때문에 몸이 떨리진 않고 있었으나, 극도의 수치심을 삼켜넘기기 위해서 윗니로 아랫 입술을 피가 날 지경으로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권 양은 여전히 불신의 눈초리로 상 위의 한 점을 응시하며 한 손으로는 술 주전자를 만지고 있는데, 그 불신에는 그의 이야기에 대한 불신 이외에 그의 사람 됨됨이 전체에 대한 의혹의 빛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이 손님을 잠깐 소개하자면, 성함은 차차 알게 될 테고…… 현재 무직의 자유인이지만 엄친이 상속해주신 상당한 액수의 주권을 가지고 있어 의식주는 불편이 없는 편이고…… 과거에 착한 부인을 미워하여 딴 여자를 들이고 별거 생활을 해왔는데, 최근에 누구의 짓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여깃 사람 하나가 부인과 나의 관계를 상세히 밀고한 까닭에 부인의 부정(不貞)을 규탄하고, 간부를 처리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이 누지를 찾아내려오신 거란 말이야. 암행어사 출두는 하셨는데 수령방백이 만만치 않고, 나랏님이 내려준 마패도 신용을 안 해, 일대일 싸움은 안 되겠고, 법률에 호소하여 두 사람의 직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자기 부인은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내 신세는 삭 망쳐놓고 싶은데, 증거 불충분이라. 우호국이 있다면 원군을 청해다가 우선 때려부수고 싶겠지만 원병보내줄 사람은 없는 모양이고, 그래 결심하신 거야. 아무데 가도 놀구먹는 판이니 어디 한번 이놈의 목구멍 에서 신물이 나도록 뒤 좀 따라다녀보리라 하고. 그래서 난 꿈에도 술 한 잔 하시라고 한 적이 없는데 비위와 억지를 선두로 여기까지 들어오게 된 거야. 이만하면 대개의 상황은 알았겠고……. 어디 술 한 잔 또 마시고.”
두 여자는 그가 하도 엉뚱하고 중대한 이야기를 마구 해대니까 이것을 곧이들어야 할지 곧이듣지 말아야 할지를 모르는 채 인젠 덩두런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사나이의 몸뚱이는 이젠 벌렁벌렁 떨리고 두 눈은 광인의 그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상관없어. 다만 저 손님이 무엇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몹시 흥분한 것 같아 큰일이야. 술 더 가져와! 얘기를 하기를 난 별로 원치 않지만 이왕 얘기 나온 길에, 한번 저 손님과 의논을 할 테니 방청객이 되어 주시도록. 자 또 거푸 마시라는 거야? 좋아.”
그는 잔을 비웠다. 그리고 무슨 엄숙한 성명의 서두라도 내놓을 때처럼 한참 동안 여유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내 아침에는 그랬지만 취소하겠으니, 우리 할 이야기 있으면 같이 좀 해봅시다. 그런데…… 가만 있자. 아무래도 못 참겠어. 잠깐 다녀와서 얘기를 합시다.”
그는 매우 급한 듯이 아래단추를 방에서부터 끄르기 시작하면서 뛰어 나갔다.
외투를 방에다 벗어놓고 나와, 그냥 양복바람의 몸에 바깥 날씨는 찼다. 그러나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조심조심 슬리퍼 소리를 죽여 가며 집을 삥 돌아 현관으로 와서 자기의 구두를 찾아 신었다.
미안하다. 순서가 좀 이상하지만 가봐야겠다. 정말 이러고 싶지는 않았었다. 이렇게 입 안으로 중얼거리고 그는 토끼처럼 골목 밖으로 뛰어나갔다.
설희! 설희!
그는 달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불렀다. 지금 현재 설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의식이 더욱더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가. 그 곰 같은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질러놓았는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불은 아까 켜져 있었는데……. 불은 켜져 있었는데…….
괜히 빈 방에 불이 켜져 있을 리는 없었다. 그 안에 설희가 있긴 있었을 것이었다. 어떡허고 있나. 아, 설희는 나로 인하여 평생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리지나 않았나?
녹다 만 눈이 다시 얼어붙은 빙판에서 그는 두 번이나 미끄러져 나둥그러져가며 설희의 방 창문 밖에 다다랐다. 발짝 소리와 가쁜 숨소리가 노크를 대신해주었다. 종이로 바른 창호에 설희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는 뒤이어 노크를 했다.
“저 여기 있어요.”
조용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떡허고 있어 ?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는 거야?”
“괜찮아요.”
“어서 나와서 대문을 열어요.”
“안 돼요.”
“왜?”
“어떻게 돼서 혼자 오실 수 있었죠?”
“술집에 놓아두고 왔어. 오버를 놓아두고 왔으니까, 십분 정도는 변소에 있는 줄 알 거야. 그런데 왜 문을 못 열지?”
“그 사람은 나가면서 그러더군요, 당신이 항복하고 물러설 때까지는 지옥 끝까지라도 한시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고 쫓아다니겠다구요. 그러구…….”
“그러구?”
“저보군 굶든지 죽든지 이 방 안에서 꼼짝 말라고 하곤 옷이란 옷은 모조리 캐비닛 속에 집어넣고 잠그고 난 뒤, 열쇠는 우물 속에 던져버렸어요.”
“그럼 지금 벗고 있는 거요?”
“거의 그런 거죠. 속치맛바람이니까.”
그는 답답했다. 그는 검은 그림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왜 진취력이 없나.
“아니 그럼 안집 주인네 옷이라도 좀 빌려 입고 나와야지 그렇게 꼼짝 못 하고 감금당하고 있소? 하여튼 문 좀 열어요!”
“안 열겠어요.”
“왜? 속치맛바람이라서?”
“아니, 그것 말고 또 있어요.”
“무어야. 방문이 밖에 잠겼나?”
“아녜요. 보시겠어요?”
“뭐요. 봅시다.”
“안 보시는 것이 좋을 텐데요.”
“괜찮아. 무엇이라도 좋아. 못 견디겠어. 뚜드려 부숴야겠어.”
“그러지 마세요..”
“하여튼 무어야? 왜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는 거야Γ
설희의 실루엣은 부동의 자세였다. 밝은 창호에 검은 손이 큼직하게 나타났다. 그것이 작고 분명해졌다. 밖으로 밀어 여는 창문이 활닥 열렸다. 거기 또 하나의 설희의 실루엣이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그 또 하나의 실루엣을 본 순간 그는 악! 하고 소리칠 만큼 놀랐다. 그것은 실루엣이 아니라 설희의 실물이었다. 그 얼굴이 깜깜하게 물들여져 있었다. 온통 빈틈없이 눈의 흰자위만 하얗고 입술 부근만 불그스름하고 온통 잉크빛이었다.
“이런 천하에 죽일 놈. 이놈 당장에 가서―.”
“가지 마세요, 아무렇게도 하지 마세요.”
“아니 그래 그렇게 온 얼굴에다 잉크칠을 해놓도록 가만히 있었단 말야?”
“가만히 있은 게 아니죠. 완력, 폭력이죠. 지금 온 방 안이 잉크투이에요.”
“설희!”
그는 손을 뻗쳤다. 그녀의 손이 잡혔다.
“대게 이게 무슨 꼴이야? 응? 참말로 기가 막혀!”
“어디 짤라진 건 아니니까 자꾸 씻어내면 지는 날이 있겠죠.”
“설희, 이리 나와요. 담요라도 두르고 나와버려요. 내가 곁에 있어서 지켜줄 테야. 나하고 삽시다.”
“이 이상 더 어떻게 할라구요.”
“그걸 누가 알아? 그 야수 같은 놈이 무슨 폭행을 할지 누가 알아?”
“그렇지만 아직 이 이상은 안 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무슨 결단을 내리면, 지금까지의 궤도에서 훌떡 이탈해버리면, 그건 폭행을 당하고 난 후와 마찬가지 결과가 되는 거예요. 아니, 오히려 나쁠지도 모르죠. 그런데 아직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까지의 일은 별것 아녜요. 아무것도 깨치지도 마시고 부수지도 마세요. 불지 말고 다치지 말라는 말은 당신이 하고 왜 오늘은 그렇게 홍분하시죠?”
설희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검푸른 얼굴에서 새하얀 이가 쑥 드러나니까 오히려 무기미하고 불쌍한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되어나가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하는 수가 없이 깨어지게 되면 그때는 사력을 다해서 우리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일이 또 되어봐야죠. 또 모레가 돼봐야 하고……. 참 서울서 누구…… 왔다죠?”
“음, 그런데 두 사람을 다 여기 끌어온 것은 우리 누님 짓 같아. 수진이는 적접 데려오구. 그 오죽잖은 두뇌와 좁아빠진 소견을 가지고서, 뭘 어쩌구……. 그런데 한 가지만은 결정한 게 있어, 누님과의 인연은 끊어버리는 것.”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그는 말을 끊었다.
“가세요. 올 거예요.”
“알았어. 춥지? 창문 닫아요.”
“네, 먼저 가세요.”
“내일이면 다 빠지나?”
“내일 아니면 모레. 모레 아니면…….”
“곰들의 세계야, 곰들의 세계.”
“불지 말고 다치지 마세요. 그러면 우리도 곰이 돼요.”
“그렇지. 나는 설희의 얼굴이 영영 그렇게 돼버렸대도 그 얼굴을 싫어하는 사람은 될지언정 곰은 안 되겠어.”
“네.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다 잃어버린대도 나 하나만은 남아요. 그나조차 없어진다면 그땐 남아 있는 내가 없으니까 문제가 다르구요. 어서 가세요. 곰한테 먹히지 않을 만큼은 저도 컸으니까 안심하시구요.”
멀리서 또 사람들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구 참.”
“뭐?”
“약속해주시겠어요 ? 깨어지기까지는 아무것도 부수지 말 것.”
“나한테 해주겠어요?”
“네.”
“됐어. 나도 문제없어. 웃어! 검둥이!”
깜깜한 설희가 하얗게 웃었다.
-끝-
2016년 11월 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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