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길(정영희).hwp
* 아시다시피 홍성에서는 풀뿌리자치학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겨울 동안 여러 공부를 했고, 그 첫번째 실천사업으로 홍동면 사거리에 안전한 보행로를 만들자는 데 의견이 모였습니다. 아래 글은 초등학교 아이의 엄마이자 홍성 주민인 정영희 씨가 써주신 글입니다.
저는 이 글만 보면 아무 고민없이 보행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행정기관에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동적이고 아름다우며 절실한 글이니 많은 분들이 읽고 퍼날라주시면 좋겠습니다.
충남 녹색당 강국주 올림
아이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 미래로 통하는 길
“위험한 홍동면 사거리! 안전한 보행로를 만들어 주세요.”
얼마 전 홍동면 사거리 남쪽방면 도로에서 달려내려 오던 차에 치어 여고생이 머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곳은 홍동초등학교 후문이 있는 근처이기도 한데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참 위험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 곳입니다. 민원도 많이 넣었습니다. 초등학교 후문 근처이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을활력소와 한우식당, 정육점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입니다. 홍동면 사거리에서 그곳을 가려면 2백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인데도 차를 타고 가거나 아니면 시속 70~80킬로미터로 달려내려오는 자동차들을 마주하며 차도 옆을 아슬아슬 지나가야 합니다. 인도도, 학교주변이라는 푯말도, 속도를 줄여주는 방지턱도, 횡단보도도 없는 그곳을, 사람들은 매일같이 가슴을 졸이며 지나다니거나 건너다닙니다.
또 얼마전 홍동면 사거리 서쪽 방면 갓골어린이집 근처에서 밤길을 걷던 학생 한명이 턱을 크게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차도 옆 인도를 걷던 그 학생은 걷고 있던 어느 순간 자신의 다리가 허공에 떠 있다는 것과 곧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장 갔는데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곧장 가면 안되는, 인도가 중단된, 곧장 가면 하수가 흐르는 커다란 도랑을 딛게 되는, 길 아닌 길이었던 것입니다. 밝은 대낮이면 사람들은 인도가 끝난 지점에 인도 대신 하수물이 흐르는 도랑이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래서 도랑 옆으로 걷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 역시 걸어가면 안되는 차도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엔 하숫물이 흐르는 도랑이 있고, 차도가 있는데 인도가 없는 것입니다. 차도엔 근처의 레미콘 공장에서 나온 레미콘 차량과 덤프트럭이 그 큰 몸뚱이로 차도를 꽉 채운 채 빵빵거리며 달리곤 합니다. 차한테로 빨려들 것 같아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이면 도랑에 빠지게 되고, 도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차가 조심해서 운전해주기만을 바라며 바삐 그곳을 통과해야 합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동네의 여러 사람들처럼 하수구에 빠지거나 차에 치어 다치게 됩니다. 3살에서 7살까지의 어린 아이들이 그런 길을 걸어 어린이집에 가는 것은 정말 힘들고 슬픈 일입니다.
어린이집을 좀더 지나게 되면 밝맑도서관과 풀무학교생협이 나오고 논을 따라 좀더 걷다보면 풀무학교전공부가 나옵니다. 이제 더 거칠 것 없어진 길을 차들은 더욱 쌩쌩 질주합니다. 논과 도로의 좁은 틈 사이로 스쿨버스를 놓친 어린아이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목숨을 건 등교를 합니다. 차들이 쌩 하고 지나가면 자전거를 탄 아이가 도로 안쪽으로 휘청합니다.
홍동면 사거리 북쪽 방면에는 하나로마트와 농협과 식당 등이 있습니다. 사거리에서 아이와 함께 그쪽을 가려면 역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건물이 있고 건물에 바짝 붙여 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그리고는 차도입니다. 그곳을 지나가려면 건물과 주차된 차들의 좁은 틈을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아예 차도 가운데까지 뛰어들어 그곳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나마 사거리의 신호를 받은 차들이 서거나 혹은 느린 속도로 움직여서 위안을 삼지만 늘 그렇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빠듯한 초록신호에 욕심을 낸 차들이 쌩 하고 지나갈 때는 위험천만합니다. 가끔 사거리 정 중앙에선 그런 차들의 충돌사고가 일어나곤 합니다. 초등학생 아이에게 혼자 하나로마트에 가서 무얼 사오라는 심부름은 좀처럼 할 수가 없습니다.
홍동면 사거리 동쪽 방면에는 다리가 있고 다리가 끝난 지점 까지만 다리 옆에 인도가 붙어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면 고등학교와 중학교가 나옵니다. 등하교하는 아이들은 매일 차들의 눈치를 보며 찻길가를 걸어다닙니다.
사람들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을 ‘한국 유기농업의 메카’라고 부릅니다. 홍동면을 중심으로 한 홍성군에는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한국에서 제일 크게 집중된 200여만 평의 유기농업단지가 있고, 이것을 소비자와 건강하게 유통하는 통로인 생활협동조합이 있으며, 먹을거리를 시작으로 건강한 삶 전반을 고민하는 젊은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또한 홍동면에는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인, 농사와 농업을 교육의 중심에 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고등부)와 풀무학교전공부(2년제 대학과정)가 있고, 생태환경과 교육을 중시하는 갓골어린이집이 80여 명의 어린아이를 길러내고 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습니다. 쉼터이며 샘터 같은 밝맑도서관이 있고 홍성여성농업인센터와 면사무소, 보건소, 농협, 마트, 마을활력소, 상점들이 있습니다. 홍동면 사거리 근방에는 교육, 문화, 상업적 공간들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홍동면에는 희망적이고 대안적인 가치들이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게 꿈틀댑니다. 그래서 그것을 배우기 위해 국내외의 사람들이 연간 3만여 명씩 다니러 옵니다. 사람들은 홍동면 사거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봅니다. 그리고 풀무학교나 도서관이나 생협이나 어린이집이나 마을활력소나, 생태환경이 살아있는 논이나 밭 등 곳곳을 걸어보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걸어서 다닐 길이 없어서 차도로 뛰어듭니다.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찼던 마음이 멈칫하며 작아집니다. 두렵습니다. 뭔가 배울 게 있을까 묻습니다. 다시 올지 망설입니다.
그동안 어른들은 가장 절실했던 먹을거리를 마련하느라, 살 집을 짓고 창고를 짓느라, 먹을 걸 실어나를 자동차를 만드느라, 그 자동차가 편리하게 다닐 길을 닦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너무 고되고 힘겨워 균형이나 안전, 아름다움 같은 것은 한켠으로 밀쳐놓을 수밖에 없는, 어쩌면 사치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지쳤거나 잊어버렸거나 그것을 느낄 감각이 마비되었거나 퇴화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어른들은 그리 불편해하거나 문제라고 느끼거나 그래서 어서 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만 잘 다닐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운전을 하고 다니지만, 아이들은 걸어다녀야 합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넓고 반듯하게 잘 닦여 있지만, 아이들이 걸어다녀야 하는 길은 없습니다. 어른들은 편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늘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어른들은 자동차를 ‘미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미래’라고 말합니다. 미래로 통하기 위해선 ‘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 미래로 통하는 길을 만드는 일이 더이상 지체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길이 만들어진다면 아이들은 그 길을 따라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만나고, 만들고, 짓고, 연결하고, 살찌울 것입니다. 희망과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그럴듯한 대안이 아닌, 정말 그러한 대안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것은 홍성군과 충남에 큰 자랑거리이며 자산이 될 것입니다.
가장 작고 느리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은 많이 늦었지만 공공을 위한 진정한 복지의 시작입니다.
우리 동네 사거리에 안전한 보행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길이 편하고 아름다우며 공평하기까지 하다면 정말 더 좋겠습니다.
홍성군 주민이자 초등학교 아이를 둔 엄마 정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