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 육군본부 작전국장이었고, 그 후 합참의장을 지낸
張昌國(장창국) 장군은 <문교부 통계에 의하면 휴전까지 5만 여 명의
學徒兵이 직접 전투에 참전하였고,그중 7000여 명이 戰死했다>고
자신의 手記에서 밝혔다.
전쟁기념관 6·25 전쟁실에는
학도병 코너와 함께 전국 349개 중학교(1950년엔 6년制 중학이 있었고,
고등학교가 따로 없었다) 출신1976명이 戰死한것이 기록된 동판이 걸려 있다
학도병 戰死者가 많은 중학교 랭킹
군산중학교가 97명으로 전국 最多, 다음으로 경북中 53명,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과 군산 상업中 각 45명,
순창 농림中 37명, 서울中 30명 순으로 戰死者가 수가 기재돼 있다.
이 자료는 1955년 문교부와 중앙학도 호국단에서 발간한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서 발췌한 것으로 밝혀졌다.
군산중학교 출신인 文精一(문정일)씨는
몇 년간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발굴에 앞장서 온 사람이다.
현재 군산중학교 교정에는 學徒兵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文씨를 비롯한 군산중학교 동창들이 母校 출신 학도병 戰死者와
參戰者를 발굴하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세운 것이다.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戰死者를 당시 학적부와 대조해 확인한 결과
전쟁기념관 동판의 전사자 수보다는 적은 63명의 학도병 전사자를 확인했다.
군산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전국 최다 學徒兵 戰死者가 발생한 것일까?
당시 군산중학교 4학년이던 崔榮九씨는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던 1950년 7월14일자로 입대했다.
이즈음 인민군은 대전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느 소령 모병관이 사병 몇 명을 데리고 군산에 왔습니다.
7월10일경 학생들을 군산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18세 이상은 지원입대하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때 군산中 전교생이 2500명 가량 되었는데
4학년 이상을 위주로 거의 500명 정도가 입대했을 겁니다.
신체검사도 없었고, 17세가 되지 않은 사람도 많았어요."
군산중학교의 崔씨를 비롯 군산 상업中, 군산 영명中, 군산사범학교,
전주남中, 전주북中 등 전북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기차로 군산역을 출발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훈련을 제대로 받을 겨를 없이 이들은 곧
낙동강 방어선인 포항전투와 하동전투 등에 투입되었다.
정부가 대전까지 피란을 내려온 7월 초,
비상학도대 외의 다른 한 무리의 학생들은 '의용학도대'를 조직했다.
7월19일 대구에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는 통합,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하여 활동했다.
당시 국군 10개 사단 중에는 대한학도의용대를 통하여 출정한
학도의용군이 없는 부대가 없을 정도였다.
學徒兵들은 개전 초기에
안동, 낙동강, 다부동, 안강, 영천, 포항 등 국군의 최후 교두보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거나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대구농림중학생으로 참전했던 柳亨錫씨는
"당시 중학생들의 의식수준과 긍지는 오늘날의 대학생보다 한 수 위였고,
당시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였다"고 말했다.
중학생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에 대한 봉사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1950년 가을 총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아군은
약 20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당시 모병이 가능한 지역은 경남북 일대.
정부는 경남북 일대 곳곳을 다니며
18~30세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강제로 입대시켰다.
전쟁 당시 안동 농림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林一宰씨는
"안동농中 배속장교의 연설을 듣고 參戰을 결정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 전국 학교에서 두 번째로
많은 戰死者(53명)를 낸 것으로 기록된 경북中 학생들은
거의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學徒兵으로 입대했다.
경북中 32회 졸업생 중 學徒兵으로 나간 사람은
盧泰愚 前 대통령을 비롯 鄭鎬溶 국방부 장관, 權五琦 前 부총리,
정신과 전문의 李時炯 박사의 형 李暾炯씨 등이 있다.
당시 慶北中 조귀순 교장의 아들 조성환씨는 學徒兵으로 지원해
6사단 2연대에 배속되었으나, 초산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탈출했으나 국군에게 붙들려 인민군이 수용된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時 풀려났다.
대구에서 경북中 다음으로 많은 21명의 학도병 희생자를 낸 대구商中은
6·25 이틀 전에 전국고교야구를 제패했다.
청룡기 깃발을 들고 왔던 야구부 주장 朴相浩군도 참전하여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戰死했다.
낙동강 방어 전선으로 달려가는 學徒兵들이 줄을 잇고 있을 때,
포항과 맞닿은 경주 쪽 사정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金三洙씨는 당시 경주중학교 5학년으로 17세였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는
경주중학교가 48명의 戰死者를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경주 문화中, 경주 공업中에서도 많은 學徒兵 戰死者가 났다.
<이 글은 月刊朝鮮 2004년 12월호 '심층취재,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상흔 기자)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