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산고 근무 시 3학년 담임하면서 쌓은 경험으로 우리 아들들 대학 진학, 경산고 번개모임에서 진밭골 등산
염해일
나는 나의 고향 예천에서 태어나 초, 중, 고를 예천 고향에서 다녔고, 대학은 안동에서 방을 얻어 자취하면서 안동교육대학을 다녔다. 1969년 2월에 안동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69년 3월 1일 자로 나의 고향 면 옆에 있는 풍양초등학교에 첫 발령 받았다. 그 당시에는 버스가 잘 다니지 않을 때이어서 풍양에 방을 얻어 여동생을 데리고 가서 자취하였다. 그 당시에는 지보면과 풍양면 사이에 있는 낙동강에 다리가 없어서 노 젓는 배를 타고 풍양 다니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1
나는 교육대학을 졸업하기 두 달 전인 1968년 12월 25일에 신부집 마당에서 하늘로부터 하얀 선녀님들의 축복받으면서 구식 결혼하였다. 결혼하고 1년 후 신부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는 묵 신행이어서 결혼하고 사흘 동안 신부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식 날에 내리던 눈이 사흘만에 무릎 위까지 내려 우리 집에 올 수 없어 1주일간 신부집에 머문 후 나 혼자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1
내가 풍양초등학교에 발령이 났을 때는 결혼하고 두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집사람을 풍양으로 데리고 와서 살지 못하고 여동생을 데리고 와서 살았다. 그 당시에는 결혼하였더라도 묵 신행일 때는 신부를 데리고 갈 수가 없을 때였다.
1
여동생을 풍양으로 데리고 가서 자취할 때 풍양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친목회에서 전입 교사 환영회가 있었다. 전입 교사 환영회에 참석하여 저녁을 먹고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방문을 여니 방안에 연기가 가득하였다.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 보니 여동생이 저녁을 하여 놓고 자기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밥상 위에 촛불을 켜 놓고 잠이 들었다. 밥상 위의 촛불이 밥상까지 타 내려가 밥상을 태웠다. 그런데 밥상에 칠한 옻 물이 녹아 흘러 촛불을 껐던 것 같다. 촛불을 꽂았던 밥상 아랫부분이 타서 시커멓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남의 집을 모두 태우고 여동생까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1
풍양초등학교 첫 발령을 받은 7월 어느 날 오후에 아이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후 교실에서 국어과 중등교사 자격검정 고시 공부하고 있는데 교무부장 선생님이 교실로 찾아와 나에게 “다른 학교로 이동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어느 학교로 이동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천읍에 있는 동부초등학교나 지보초등학교로 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의 고향 면인 지보초등학교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내 말이 떨어지자 교장 선생님이 “나와 함께 예천 교육청에 들어가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과 함께 예천 교육청에 들어갔다.
1
그때가 점심시간이어서 예천 교육청 장학사가 예천 교육청 바로 옆에 있는 고려식당이란 곳으로 데리고 갔다. 식당에서 장학사님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장학사님이 자기가 써온 A4용지를 주면서 나에게 “그대로 다시 쓰라.”라고 하였다. 그 글의 내용이 내가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뒷산에 야외수업을 나갔다가 학생 하나가 언덕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쳐 학부 형의 항의가 심하여 다른 학교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써주고 풍양초등학교로 돌아왔다.
1
풍양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고 4개월 15일 만인 1969년 7월 15일 자로 나의 고향 면인 지보초등학교로 이동이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1969년 2학기에 경북교육청 교육위원 며느님이 풍양초등학교에 9월 1일 자로 복직해야 하는데 자리가 없었다. 풍양초등학교는 예천군에서 대구 다니기가 가장 좋은 학교이어서 대구에 사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리고 선생님들의 대부분이 풍양이 고향인 선생님들이었다. 그래서 다른 학교로 이동할 사람이 없었다. 나의 고향마을 우리 집 옆에 사는 동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제덕 선수의 작은 할아버지가 근무하였다. 그 선생님은 처가가 풍양이어서 자기 모교인 지보초등학교로 옮기지 않아서 초임 교사인 나에게까지 순서가 와서 지보초등학교로 이동하였다.
1
교사들은 다른 학교를 옮기고 1년이 지나지 않으면 학교를 옮길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첫 발령을 받고 6개월밖에 되지 않는 내가 학교를 옮긴 것은 지금 생각해보니 사고 내신을 내었던 것 같다. 사고 내신을 내면 교감으로 승진할 때 많이 불리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교장 선생님이 도 교육청으로부터 얼마나 압력을 받았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초임 교사를 사고 내신을 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여본다.
1
지보초등학교로 옮긴 후 4년 6개월간 고향 집에서 출퇴근하다가 예천군의 중심학교인 예천초등학교로 이동하였다. 나는 풍양초등학교에 첫 발령 받으면서 국어과 중등교사 자격검정 고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6년 만에 합격하여 예천초등학교에서 예천군에 있는 용궁 종합고등학교로 전직하였다. 중등으로 전직하면서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고 사고 내신을 내었던 것이 중등교사 이력서에 올라가지 않아 교감으로 승진하고 교장까지 할 수 있었다.
1
용궁 종합고등학교에 2년 근무한 후 예천읍에 있는 예천농업고등학교로 이동하였다. 예천 농업고등학교는 나의 모교이다. 내가 예천 농고에 발령받아가니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은사님들이 많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천 농고에 근무하면서 은사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편안하게 근무하였다.
1
예천 농고에 근무할 때 대구에 사시는 축산 선생님이 함께 근무하였다. 축산 선생님의 아들 결혼식이 있었다. 축산 선생님이 자기 아들 결혼식 하루 전날 대구로 가기 위하여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축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젖소가 축산 선생님을 축사 벽으로 밀어서 장기가 터졌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대구 대학병원으로 가시다가 돌아가시는 사고도 있었다.
1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안동 병설 중학교에 시험을 치기 위하여 공부를 많이 하였다. 그런데 내가 졸업을 하던 해에 안동 병설 중학교가 폐교되었다. 그래서 예천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장학생이 되어 중학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에 농촌이 너무 어려워 초등학교 졸업하는 학생들이 중학교 다닐 수 없을 때이었다. 고향집에서 예천중학교까지 16Km나 떨어져 있어 집에서 통학할 수가 없었다. 예천읍에 방을 얻어 자취하였다.
1
부모님과 처음으로 떨어져 있으니 마음이 불안하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 공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토요일만 되면 몸은 교실에 앉아 있는데 마음은 벌써 고향 집에 가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통지표를 받으니 우리 반 70명 중에서 34등을 하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계속 1등만 하였기 때문에 너무 부끄러워 그 통지표를 아버지 책 속에 숨겨 놓았다. 대학에 들어간 후 아버지 책 속에서 통지표를 찾으니 찾을 수가 없어 잃어버렸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통지표를 모두 모아 놓았다. 100년 후인 2120년 5월 5일 일요일에 개봉하는 염해일의 타임캡슐을 코로나 기간인 2020년 5월 3일 일요일 고향 부모님 산소 옆에 묻으면서 중학교 1학년 통지표가 없어서 아쉬워했던 추억도 있다.
1
나는 2011년 2월 14일에 영천여자중학교 대강당에서 교장으로 정년 퇴임식하고 2월 말로 정년퇴직하였다. 정년퇴직하던 해인 2011년 5월에 순수종합문예지인 월간 문학세계와 한국문학 세상 신인문학상에 정년퇴직 기념 문집 ‘발자국’에 실려 있는 ‘아내의 생일’을 동시에 응모하여 동시에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등단을 하고 1946년에 태어나 내가 살아온 190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시대상을 반영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글의 소재가 풍부한 일상생활을 200자 원고지 40매 내외의 생활 수필을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2,300여 편을 썼다.
1
쓴 수필들은 매주 세 차례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지금은 월, 목요일)에 페이스북과 다섯 곳의 인터넷 카페에 올리고, 나의 글 친구 300여 명에게 카톡으로 보내고 있다. 글을 보내지 않는 화요일,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에는 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키네마스터로 편집하여 유튜브 스튜디오로 올린 유튜브를 나의 글 친구 300여 명에게 보내고 있다.
1
그리고 1년에 두 차례 설과 추석 명절에 수필집을 출간하여 지금까지 스물여섯 권을 출간하였다. 수필집 출간 횟수가 늘어날수록 고향 부모님 산소 옆에 타임캡슐을 묻어야겠다는 생각 하였다. 그러다가 코로나로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던 2020년 2월부터 4월까지 두 달 동안 타임캡슐에 보관할 자료들을 정리하였다. 자료들 정리가 끝나자 인터넷으로 타임캡슐과 타임캡슐에 세울 표지석과 타임캡슐 옆에 세울 와비를 검색하다가 자연장 부부 형 평장 묘를 구경하였다.
1
자연장 부부 형 평장 묘가 마음에 들어 타임캡슐을 묻으면서 타임캡슐 앞에 우리 부부가 즐겁고 행복한 인생 여행이 끝나는 날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자연장 부부 형 평장 묘도 함께 만들기로 하고 구입하였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2020년 5월 3일 고향 부모님 산소 옆에 100년 후인 2120년 5월 5일(일)에 개봉하는 타임캡슐을 묻으면서 우리 부부의 자연장 부부 평장묘도 함께 만들어 놓았다.
1
타임캡슐에 보관한 것은 내가 그때까지 출간한 열여덟 권의 수필집과 염 해일의 발자취 파일과 작은 컴퓨터라고 하는 외장하드이다. 염 해일의 발자취 파일에는 염 해일의 초등학교 1학년 통지표를 위시하여 정년퇴직할 때 받은 황조근정훈장까지 교육자료 413점과 아버님이 물려주신 12점의 자료들을 담아 놓았다. 작은 컴퓨터라고 하는 외장하드에는 내가 그때까지 쓴 1,476편의 수필과 출간원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찍어 놓은 사진과 동영상들과 타임캡슐에 담아 놓은 자료들을 사진으로 찍어 저장하여 놓았다.
1
2020년 5월 3일 부모님 산소 옆에 타임캡슐을 묻고 나니 나의 타임캡슐을 만들어 보내준 사장님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카톡 내용은 조선일보사에서 100주년 기념으로 조선일보 150주년이 되는 2070년 3월 5일에 개봉하는 타임캡슐에 보관할 자료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타임캡슐에 보관한 자료들을 제출해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의 타임캡슐에 보관한 작은 컴퓨터라고 하는 외장하드 사본과 우리 손주들에게 쓴 편지를 조선일보사에 보냈다.
1
그리고 2011년 11월 10일에 조선일보사에서 다음과 같은 조선일보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봉인확인서를 보내왔다.
“조선일보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봉인확인서
성명: 염해일,
되돌려 받을 사람: 염X민, 염X웅, 염X운, 염X연, 염X형, 염X윤, 염X훈, 염X원
품명: 편지, 외장하드,
주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국채보상로 966-9,
보관기간: 2020년 11월 5일~ 2070년 3월 5일, 캡슐관 No: 독자 16
1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해 대한민국과 조선일보의 역사와 기록을 ‘조선일보 100주년 타임캡슐’에 담았습니다. 이 타임캡슐에는 독자님들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꿈과 사연, 기념품도 함께 담아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했습니다. 독자님의 물품은 2070년 조선일보 창간 150주년을 기념해 봉인을 풀고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11월 5일 조선일보사 사장 방상훈”이란 내용이다.
1
조선일보사 150주년이 되는 2070년 3월 5일에 타임캡슐 개봉하는 식에 지금의 내 나이가 정도가 될 우리 손주 여덟 명이 수장품인 외장하드와 편지를 되돌려 받도록 하여 놓았다. 그런데 예천중학교에 입학시험을 쳐서 장학생으로 입학한 내가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면서 70명 중 34등을 한 통지표가 없어져 타임캡슐에 보관하지 못하고 외장하드에도 없어 아쉬워 했던 추억이 있다.
1
내가 부모님가 떨어져 공부함으로써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하여 생긴 일이다. 그래서 우리 아들들은 나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대구로 이사 가기로 하였다. 내가 예천 농고에 근무할 때 우리 맏아들이 중3, 둘째 아들이 중1,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아들들 교육을 위하여 40여 년간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대구로 이사 가기 위하여 예천 농고에서 영천시로 내신을 내었다.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금호여자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금호여자고등학교에서 1회 졸업생들을 3년간 담임하면서 졸업시키고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무렵에 경산고등학교로 이동하였다.
1
경산고등학교로 이동하면서도 고등학교 3학년을 담임하였다. 고3 담임하면서 대학 진학에 대한 노하우를 많이 쌓았다. 그래서 우리 아들들이 대학 진학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맏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K대 치과대학을 1지망, 전자공학과를 2지망 하였다. 그런데 2지망인 전자공학과에 합격이 되었다. 그래서 맏아들에게 “1년 재수하여 K대학교 치과대학을 다시 한번 쳐 보자.”라고 하였다. 12년 동안 공부하느라고 지쳐서 그런지 “전자 공학과에 그냥 다니겠다.”라고 하였다.
1
그래서 맏아들 모르게 시내에 있는 유신학원에 찾아가 상담하였다. 유신학원은 단과반만 운영한다고 하여 유신학원 옆에 있는 일신학원을 찾아갔다. 일신학원은 고등학교 3학년같이 공부하는 종합반이었다. 등록하려고 하니 “성적 증명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성적이 좋지 않는 학생들은 받아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맏아들 모교에 찾아가서 성적 증명서를 발급받아 제출하니 성적이 좋다면서 받아주었다. 그래서 바로 일신학원에 등록하고 집으로 돌아와 맏아들을 설득하여 한해 재수하여 성적이 잘 나왔다. 그래서 K대학교 치과대학에 합격하여 졸업하고 지상철 3호선 수성시장역 네거리에 있는 수성빌딩 4층에 선치과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1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한 해 전에 너무 많이 아파 고향 예천에서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하여 대수술을 받았다. 대수술을 받고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 퇴원하면서 완치하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하여 중, 고등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데 고생을 너무 많이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D대학교 사대 수학과에 합격하여 2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릴 때 대수술한 것 때문에 대구 공항에 있는 공군부대에 방위로 근무하였다.
1
둘째 아들이 방위로 근무할 때 내가 경산고등학교 근무하다가 교감으로 승진하기 위하여 교감승진에 꼭 필요한 벽지학교를 가기 위하여 벽지학교가 많은 문경으로 내신을 내었다. 대구 가까이 금호여고와 경산고에 근무하여 이동점수가 낮아 문경으로 가지 못하고 예천 감천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예천 감천고등학교로 이동하면서 3학년 담임하였다. 가을에 고3 학생들의 수능 원서를 써서 대구에 있었던 경북교육청에 원서를 접수하러 왔다. 원서 접수하러 오면서 둘째 아들의 수능 원서도 함께 써서 가지고 왔다. 집사람에게 “대구시 교육청에 접수시키라.”라고 하고 감천으로 돌아갔다. 집사람이 둘째 아들의 동의를 얻어 둘째 아들의 수능 원서를 대구시 교육청에 접수하였다.
1
둘째 아들이 공군부대에 방위로 근무하면서 파이로트 집에서 애완견을 돌보고 있었다. 그래서 수능 공부를 많이 하였던 것 같다. 둘째 아들이 수능시험을 볼 때 1년에 수능을 두 번 시험 칠 때이었다. 수능 점수가 잘 나와서 교사 발령이 잘 나는 교육대학으로 학교를 바꾸어서 대구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대구 시내에서 부부 교사를 하고 있다.
1
막내아들은 중,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의대가 목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K대학교 원서를 내면서 1지망을 의과대학, 2지망은 그 당시 인기가 좋았던 유전공학과에 하였다. 그런데 유전공학과에 합격이 되었다. 막내아들의 목표는 의대이었기 때문에 1년 재수하여 자기 둘째 형과 함께 수능시험을 쳤다. 수능 점수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의대에 원서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접수 마지막 날 K대학교 의과대학에 원서를 들고 가서 원서를 접수시켰다. 그런데 합격이 되어 의대를 졸업하고 죽전네거리에 있는 동서비뇨기과 피부과를 운영하고 있다.
1
우리 아들들 대학 진학에 많이 도움을 받았던 경산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선생님들의 모임인 번개모임에서 지난 2024년 6월 1일에 회원 H가 그룹채팅방에 “6월 4, 5. 7일 3호선 종점에서 만나 진밭골 갑시다. 1시간 운동하고 식사하면 어떠한지요? 좋은 날 보내세요. 모이는 장소 용지역 대합실”이란 글이 올라왔다. 글이 올라오자마자 “[염해일] 7일은 예약된 모임이 있어 어렵고, 다른 날은 참석할 수 있습니다.”라고 올렸다. 그리고 이틀 후인 6월 3일에 H가 그룹채팅방에 “톡게시판 '공지': 6월 5일 11시 30분 용지역 대합실에서 만나요.”란 안내가 올라왔다. 글을 받자마자 “[염해일] 참석합니다.”라고 올렸다.
1
오늘은 경산고등학교 근무할 때 선생님들의 모임인 번개모임에서 진밭골 등산을 가는 2024년 6월 5일 수요일이다. 오늘도 새벽 4시 30분 모닝콜 소리에 일어난다. 주방으로 가서 보온물통을 들고 서재로 간다. 서재에서 꿀에 절인 생강과 홍차가 들어간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17년 전 간이식 후 내가 직접 개발한 새벽 온몸운동을 책상과 의자를 이용하여 실시한다. 두 시간 동안 새벽 온몸운동을 모두 마치고 샤워한 후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받아 책상 아래 갖다 놓는다. 양동이 속의 따뜻한 상하 목장 우유를 한잔 마시고 족욕을 하면서 아침 글을 쓴다.
1
오늘 아침 글은 ‘운경 대학, 곽병원 이정화 외과 과장의 어르신 건강관리’란 글을 쓰다가 중단하여 놓은 글을 이어서 쓴다. 글을 완성하여 바탕화면에 있는 인터넷에 올릴 글 모음에 저장까지 하고 아침을 먹는다. 아침을 먹고 오늘 아침에 완성한 글로 지난 금요일 ‘운경 대학, 곽병원 이정화 외과 과장의 어르신 건강관리’강의를 동영상으로 찍어서 편집하여 놓은 여섯 편의 키네마스터에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1
여섯 편을 모두 작성하고 나니 10시이다. 경산고 번개모임에 나갈 준비를 한다. 등산하면서 마실 물과 사진과 동영상을 찍다가 스마트폰 배터리가 바닥이 나면 충전할 보조 충전기를 가방 속에 챙겨 넣는다. 그리고 버스와 지상철을 타면서 오늘 찍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키네마스터로 편집하기 위하여 무선 이어폰도 가방 속에 챙겨 넣고 10시 30분에 우리 집 앞에 있는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나간다.
1
버스정류장에 나가 조금 기다리니 524번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버스에 올라 나의 글 친구 300여 명에게 카톡을 보내기 위하여 스마트폰을 낸다. 오늘 수요일은 내가 쓴 글이 아닌 내가 만든 유튜브를 보내는 날이다. 유튜브 스튜디오에서 오늘 보낼 유튜브를 찾는다. 오늘 보낼 유튜브는 ‘1 정월 집안 윷놀이’이다. ‘1 정월 집안 윷놀이’유튜브를 한 번에 열 명씩 300여 명에게 모두 보내고 나니 경북고등학교 앞이다. 버스 기사에게 “3호선 지상철을 타려면 어디서 내리면 탈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 동아백화점수성점 건너편에서 내리면 탈 수 있다고 한다.
1
지난해 경산고등학교 번개모임에서 수성못 모임이 있을 때는 경북고등학교 앞에서 내려 시내버스 100번으로 갈아타고 과학고등학교 앞에서 내려 3호선 지상철 어린이 세상 역으로 걸어가 용지역으로 가는 지상철을 탔다. 오늘은 기사님이 이야기하는 동아백화점수성점 건너편에서 내리기로 한다. 경북고등학교에서 얼마 가지 않아 동아백화점수성점이 나온다. 동아백화점 수성점 건너편에서 내리니 바로 지상철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합실로 올라간다. 대합실에서 계단을 걸어 용지역으로 가는 승강장에 도착한다. 곧바로 용지역으로 가는 지상철이 들어온다.
1
지상철에 오르니 다음 역이 용지역이다. 용지역에 내리니 약속 시간보다 15분이 빠른 11시 15분이다. 계단을 걸어 모임 장소인 대합실로 내려가니 회원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니 안내하는 자원봉사자가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묻는다. 모임 회원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조금 전에 회원을 기다린다는 사람이 승강장으로 다시 올라갔다고 한다. 우리 회원인 것 같아 올라가니 우리 회원이 아니었다. 그다음 지상철이 들어오는데 우리 회원이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대합실로 내려오니 우리 회원들이 대합실에 기다리고 있다.
1
L이 오지 않는 회원 H에게 전화한다. 버스를 타고 오는데 다 와 간다고 하나 보다. 조금 있으니 H가 대합실로 들어온다. 회원 K는 오늘 참석하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회원들이 모두 모이니 대합실에서 내려와 횡단보도를 건너 진밭골을 가기 위하여 범물 제일 교회 쪽으로 걸어간다. 도로변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숲이 우거진 시원한 골안골이 나온다. 골안골 길을 걸어 진밭골로 가는 도로변을 따라 올라간다. 회원 L이 나에게 “진밭골을 잘 알지 않느냐?”고 묻는다.
1
그러면서 L이 내가 쓴 집안 윷놀이 모임을 진밭골 식당에서 한 내용에 관한 이야기 한다. 내가 오늘 아침에 보낸 집안 윷놀이 유튜브를 시청하였나 보다. 나는 대구에 사촌과 오촌 조카들이 많이 살고 있다. 내가 대구에 집을 산 후 사촌들과 오촌 조카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집 떨이하였다. 그 후로 사촌들과 오촌 조카들이 자기 집을 알린다면서 초대하여 한 바퀴 돌았다. 집 집마다 한 바퀴 돌고 난 후 해마다 설날이 지난 첫 주 일요일에 팔공산에 있는 식당에 모여 윷놀이하고 있다.
1
그런데 2년 전인 2023년에 팔공산에 있는 윷놀이하는 식당에서 리모델링 한다고 하여 진밭골에 있는 식당에서 윷놀이하였다. 그때 윷놀이하면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키네마스터로 편집하여 유튜브를 만들어 나의 글 친구 300여 명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L이 그 유튜브를 시청하고 그런 말을 하나 보다. 그러면서 염 교장의 집안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한다. 요사이는 핵가족화가 되어 그런 집안이 잘 없다고까지 한다.
1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도로변을 따라 올라가니 814번 시내버스 종점이 나온다. 시내버스 종점 위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연못인 대덕지가 나온다. 대덕지 둑에 체육시설, 육각 정자, 힐링 숲, 명상의 숲, 진달래 군락이 안내된 진밭골 산림공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진밭골 산림공원 안내판 옆에 ‘진밭골 둘레길’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진밭골 둘레길 안내판에는 대덕지에서 출발하여 진밭골 야영장, 글 쓴 바위, 안산 대룡 폭포, 백련사 입구, 산림욕장 입구, 야외무대, 운동시설, 청소년 수련까지 등산로가 자세히 안내되어 있다.
1
그리고 진밭골 산림공원 안내판 중앙에 진밭골의 유래를 읽어본다. “진밭골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피하여 경주, 전주 최씨 일가들이 정착하면서 이루어진 부락으로서 맨 끝 동네 진밭골과 약 3Km 지점에 위치한 가락골로 이루어져 있다. 진밭골은 농지가 매우 질어서 논밭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수전 또는 이전이라 부르다가 진밭이라고 불러졌으며, 가락골은 정확한 유래가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주변 계곡이 아름다워서 가곡으로 불리다가 가락골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란 설명이 되어 있다.
1
안내판을 읽고 대덕지 둑을 걸어가면서 대덕지 둘레에 심어 놓은 꽃들을 바라본 후 연못의 귀퉁이에 연못을 건너는 나무다리를 건너간다. 연못 둘레를 돌아 산책로로 올라가니 산책로에 의자가 놓여 있다. 의자에 앉아 연못의 파란 물과 연못 둘레에 활짝 핀 울긋불긋한 꽃들을 구경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1
휴식을 취하는 곳에 진밭골 산림공원과 진밭골 야영장(진밭골 둘레길)로 가는 길 안내가 되어 있다. 그중에서 우리는 진밭골 야영장(진밭골 둘레길) 가는 돌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가는 길이 오르막 내리막길로 이루어져 있다. 산책로에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시원하면서 공기가 맑고 깨끗하다. 한참을 걸어가다가 의자가 놓여 있는 곳에서 2차 휴식을 취한다. 2차 휴식 후 진밭골 야영장을 향하여 걸어간다.
1
한참을 걸어가니 산책로 옆에 돌로 둥굴게 여러 층으로 쌓은 탑들이 나온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정성스럽게 쌓은 돌탑들이다. 돌탑 맨 위에 붉은 글씨로 위험이라고 쓴 글 아래에 손대지 마세요란 글이 있다. 돌탑 위로 누군가 올라가서 돌탑을 무너뜨릴까 걱정이 되었나 보다. 돌탑을 지나니 과수원이 나타난다. 과수원에는 파란 사과들이 알알이 맺혀 있다. 과수원 아래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산책로 곳곳에는 산책로 아래로 떨어지 않도록 나무로 가로막을 만들어 놓았다. 산책로 곳곳에 야자수 멍석도 깔아 놓았다.
1
우리나라는 지방자치제가 잘 되어 있어 지방자치 단체장들이 다음 선거를 위하여 자기 지역에 시민들을 위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다. 시민들이 운동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진밭골 산책로와 같은 산책로가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 나는 50여 개국의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우리나라같이 시민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는 나라가 드물다. 우리나라같이 아기자기한 경치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별로 없었다. 미국이나 유럽을 여행하면 관광지 하나를 관람하기 위하여 산이 보이지 않는 끝없이 펼쳐지는 허허벌판을 몇 시간씩 달려가니 지루하였다.
1
우리나라 고속도로를 달려가면 아기자기한 산과 들판이 나타나서 관광객들이 지루할 시간이 없다. 고속도로에 있는 휴게소 화장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다. 잘 산다는 유럽의 화장실은 돈을 주고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도 화장실이 형편없고, 깨끗하지도 못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진밭골 야영장 후문에 도착한다. 후문으로 들어가면서 스마트폰을 내어 진밭골 야영장을 검색하여본다.
1
진밭골 야영장은 개발제한구역 환경·문화사업에 공모·선정되어 조성한 야영장으로 접근성이 우수한 도심 야영장으로, 약 4,900㎡ 규모로 2018년에 완공하였고, 2019년 봄에 개장하여 사전 예약을 통해 카라반, 오토캠핑장, 데크 사이트를 야영 취향에 맞춰 즐길 수 있다. 그 밖에도 취사장, 샤워장, 화장실 등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1
진밭골 야영장은 도심을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환경 휴양시설을 갖춘 최적의 야영장이다.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가족과 함께 도시 숲속에서 힐링할 수 있는 야영장이다. 수성구에서 마련한 또 하나의 도심 속 가족 단위 휴식 공간이다. 바로 옆 계곡과 간단히 산책을 할 수 있는 진밭골 산림공원·삼림욕장이 인근에 있어 멀리 가지 않아도 숲속 야영을 즐기며 힐링을 할 수 있다.
1
진밭골 야영장 시설은 카라반 사이트 5동, 오토캠핑장 사이트 9면, 데크 사이트 11면, 취사장 2동, 샤워장 남, 여 각 1동, 화장실 2동으로 되어 있고, 그 외에도 육각 정자, 계곡과 평상, 목교 분수, 바닥분수, 관리사무실 등이 있다.
1
카라반 사이트는 6인용 카라반으로 캠핑 장비가 없어도 캠핑을 즐기실 수 있다. 카라반 내부에 기본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다. 화장실 및 샤워실이 설치되어있고, 각 카라반 별로 전용 테이블과 전용 그릴이 제공된다. 침대, 샤워, 화장실, 그릴 1대가 준비되어 있다. 카라반 사이트별 차량 1대를 주차할 수 있다. 기준정원(최대) 6인이고, 이용객 외 방문객(초대) 출입을 금하고 있다. 카라반 사이트 입실 시간: 14:00부터 (미리 입장 불가) 카라반 사이트 퇴실 시간: 11:00까지 (입·퇴실 시간을 지켜주어야 한다.)
1
오토캠핑 사이트는 사이트 바로 옆에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야영장이다. 텐트 설치 장소는 7mX4.5m 크기의 파쇄석으로 되어 있고, 주차장을 접하고 있다. 1 사이트 이용 시 자동차 1대만 주차할 수 있다. 오캠핑장은 이용객이 직접 캠핑 장비를 가져와서 캠핑하는 곳이다. 기준정원(최대) 6명이다. 이용객 외 방문자(초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오토캠핑 사이트 입실시간: 14:00부터 (미리 입장 불가)이고, 오토캠핑 사이트 퇴실 시간 : 11:00까지 (입·퇴실 시간을 지켜주어야 한다.)
1
데크 사이트는 사각형의 나무 데크 (6mX4m 크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야영객이 준비한 텐트를 직접 설치하여 숙박하는 시설이다. 데크 사이트는 지정된 곳에 주차를 따로 하고 캠핑하는 사이트이다. 1 사이트당 1대만 주차 할 수 있다. 텐트 야영장은 캠핑 장비를 직접 가져와서 캠핑하는 곳이다. 지정된 주차장에 주차한 뒤, 장비를 들고 데크 사이트로 이동하여 캠핑하는 곳이다. 이용 기준인원 6인/ 최대 6인이다. 이용객 외 방문자(초대) 출입을 금지한다.
1
데크 사이트 입 실시간: 14:00부터 (미리 입장 불가) 데크 사이트 퇴실 시간: 11:00까지 (입·퇴실 시간을 지켜 주어야 한다) 데크 사이트 부대시설은 야외 평상(2mX2m) (목교 건너편 위치) 캠핑 장비(텐트, 화로 등 모든 장비)는 가져와야 한다 (화로가 제공되지 않음)
1
스마트폰으로 진밭골 야영장을 검색한 후 야영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점심을 먹기 위하여 야영장 후문의 반대편에 있는 정문을 나와 넓은 도로를 따라 식당을 찾아간다. 조금 내려가니 도로변 옆에 감나무 집이란 커다란 식당이 있다. 감나무 집으로 들어간다. 식당 안에 들어가니 1층 홀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가득하다.
1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에도 손님이 가득한데 우리가 앉을 자리가 비어 있다. 빈자리에 앉아 식사 주문한다. 능이백숙/오리를 주문한다. 주문하고 나니 김치전이 나온다. 김치전이 나오니 막걸리를 주문한다. 김천전으로 막걸리 한잔하면서 경산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하였던 선생님들의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1
그 당시 같이 근무하였던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나오니 그 당시 선생님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런데 벌써 여러 명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우리 모임을 잘 만들었다고 하여본다. 이런 모임이 있으니 한 달에 한 번씩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모임이 없으니 같은 대구 시내에 살아도 서로 만날 수가 없다고 하니 정말 그렇단다. 나도 42년간 초, 중, 고에 근무하면서 같이 근무하였던 선생님들의 모임을 하고 있다. 모임에 나오는 선생님들은 한 번씩 만나 얼굴을 보고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모임에 나오지 않는 선생님들은 같은 대구에 살아도 만날 수가 없다.
1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주문한 오리 능이백숙이 중 불에 끓여서 냄비에 담겨 불판 위에 올려진다. 능이 오리백숙에 능이버섯, 마늘, 부추, 오가피가 들어 있다. 직원이 다시 센 불에 끓여서 회원 각자에게 한 그릇씩 담아준다. 시원한 능이 오리 국물에 오리 다리와 오리 살이 가득 담겨 있다. 밥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1
식당 벽에 능이버섯의 효능에 대한 글이 붙어 있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게 해주는 효능이 있어 심혈관 질환 또는 각종 성인병 예방에 효능이 있다. 또한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능이 오리백숙의 맛이 너무 좋다. 능이오리 백숙을 먹고 나니 힘이 절로 나는 것 같다.
1
식사가 끝난 후 내가 1층 홀로 내려가 감주와 커피를 가지고 와서 회원들에게 나누어준다. 회원들이 너무 좋아한다. 감 주와 커피를 마시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후식으로 감
주와 커피까지 마시고 식당 밖으로 나온다. 넓은 식당 마당 나무 아래 쉼터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용지역으로 걸어간다. 용지역에서 3호선 지상철에 오른다. 나는 용지역 다음 역인 동아백화점 수성점에서 내린다. 동아백화점을 구경한 후 524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리 집 앞 버스 정유소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온다. 거실에 담요를 두 장 깔고 척주관 협착증 운동인 공굴리기를 서른 번을 실시한 후 샤워한다. 샤워 후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받아 책상 아래 갖다 놓는다.
1
족욕을 하면서 오늘 경산고 번개모임에서 찍어온 사진과 동영상들을 키네마스터로 편집한다. 편집 마치고 지난번 운경 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찍은 동영상으로 편집하여 놓은 아홉 편의 키네마스터에 작성하여 놓은 시나리오를 녹음하여 저장하면서 유튜브 스튜디오에 유튜브로 올리고 저녁을 먹는다.
1
저녁을 먹고 유튜브 스튜디오에 올린 유튜브 중에서 회원들의 사진을 찍어 유튜브로 만든 ‘7경산고, 번개모임 진밭골 등산’을 경산고등학교 번개모임 그룹채팅방에 올린다. 올리고 조금 있으니 경산고 번개모임 그룹채팅방에 회원 L로부터 댓글이 올라와 있다.
1
사랑 봉사 희생 헌신을 실천하신 염 박사님 존경합니다. 당신께서는 사진 찍느라 먹는 것도 제때 자시지 못하고 다 식은 음식 드시니 천사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네요. 좋은 추억을 동영상을 가요를 넣어 편집하여 보고 듣게 한 기술 대단합니다. 고마움을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댓글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경산고등학교 그룹채팅방에 보냈던 ‘7경산고, 번개모임 진밭골 등산’유튜브를 나의 그룹채팅방 열 곳에 모두 보내고 L이 보낸 댓글도 10개의 그룹채팅방에 함께 보내고 꿈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