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멸망하게 되어 고통 속에 있게 된 것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악을 저질렀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까닭입니다. 그러한 징계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징계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그 고통과 징계에서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빗댈 존재는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지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그 공의로우심에 따라 진노하시고 징계하시지만, 그 진노를 거두시고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구원하셔서 회복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서로 어긋나서도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로 인하여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호소하였고, 이로 인해 눈물이 마를 길이 없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당하는 고초와 재난을 호소합니다(19절). 쑥과 담즙(膽汁)은 예레미야가 겪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전혀 희망이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는 낙심이 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러한 고통과 낙심을 호소하다가 갑자기 그러한 고통과 아픔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21절). 21절에 나오는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라는 표현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라고 번역했습니다. 고통과 아픔 속에서 깊이 묵상해 보니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가 고통과 절망감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한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긍휼하심”이었습니다(22절, 23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는 철저히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공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인자와 긍휼하심도 무궁(無窮)하신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22절에 나오는 인자(仁慈)는 히브리어로 “헤쎄드”(חֵסֵד)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헤쎄드는 인자(仁慈), 자비(慈悲), 긍휼(矜恤), 사랑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Loving Kindnesses(NASB), Mercies(KJV), Great love(NIV)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긍휼(矜恤)은 히브리어 원어에서 “라암”(רַחַם)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깊이 사랑하다”라는 뜻으로 긍휼이란 의미이고, 영어성경에서는 Compassion, Mercy 등의 단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예레미야는 기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은 끝이 없어서 아침마다 여전히 우리를 향하시고 있을 것이기에 진멸되지 않을 희망이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합니다(24절).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면서 간구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셔서 결국 구원하셔서 회복하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24절~26절). 그래서 절망 속에 빠져 있지만 말고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다리겠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유다 왕국은 고통과 치욕, 그리고 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멍에를 묵묵히 감당해야 할 때라고 고백합니다(27절, 28절). 그리고 하나님께 회개로 나아가고, 지금 당하는 고통과 모욕을 그대로 감당하라고 권면합니다(29절, 30절). 입을 땅의 티끌에 댄다는 것은 회개의 표현입니다. 바벨론이 마치 뺨을 치듯이 유다 왕국을 유린(蹂躪)하였어도 유다가 지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톡톡히 그대로 감내(堪耐)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고생하고 근심하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33절). 그러나 사람들이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기에 결국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고백합니다(34절~39절). 죄악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화(禍)를 내리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들에게 복(福)을 내리시는 분은 모두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38절).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심(本心)은 사랑이시기에 영원히 버리시지 않으시고 풍부하신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따라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분이시기에 소망이 있다고 고백합니다(31절, 32절).
22절부터 26절의 말씀은 절망 속에 빠져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으니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소망이 있으니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메시지는 희망의 빛줄기를 비추는 실낱같은 소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도 결국 긴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이스라엘과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회복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때 우리에게 이뤄지는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라고(24절), 하나님께 구하라고(25절),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라고(26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들에 대해 진노하시고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하게 하시길 원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누리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심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구원과 회복을 누리고, 삶의 참된 소망을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