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꽃 / 이양선
사막뿐이었던 두바이는 세계 최고라는 명성을 여러 가지 갖고 있었다. 상업 중심지답게 마천루가 즐비한데도 도처에서는 끊임없이 건물을 올렸다. 끊임없는 것은 미니버스 뒷자리 소음도 매한가지였다. 통, 반장으로 구성된 중년 여성 팀 세 명의 목소리가 시종일관 소란했다. 갈수록 안내원 해설 듣기가 불편해지자 일행들이 슬그머니 앞쪽으로 옮겨 앉았다. 안내원이 점잖게 부탁해보지만 마이동풍이었다.
이틑날 아침, 두바이 공항은 경유하려는 세계인들로 혼잡했다. 여정이 더해갈수록 구성원들 사이엔 가족 같은 유대감이 생겼다. 수속이 끝날 때마다 안내원은 반드시 인원수를 확인했다. 그런데 먼저 통과한 통장 팀이 온데간데없었다. 탑승구까지는 이동 과정이 복잡하다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녀 걸음이 사방으로 길어질수록 우리들 우려도 높아갔다. 속절없이 발이 묶인 채 고스란히 삼십여 분을 흘려보냈다.
하는 수 없이 우리 먼저 인솔한 뒤 안내원은 서둘러 되돌아갔다. 두바이 특유의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면서도 그들 행방이 줄곧 마음 쓰였다. 탑승 시간 즈음 약속 장소로 돌아왔을 땐 예의 팀이 태연히 웃고 있었다. 주변의 염려쯤 아랑곳없는 듯 보무도 당당했다. 앞으로는 꼭 함께 이동해 달라는 안내원의 간곡함으로 일단락되었다.
체고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 도착하자 뜻밖에 한글이 먼저 우리를 반겼다. 낭만의 도시라는 프라하는 내게 달콤한 시절의 감수성을 살려줄 것만 같았다. 수화물을 찾은 일행이 속속 모였으나 이번에도 통장 팀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자유와 방종을 혼동한다며 여기저기서 혀를 찼다. 잦아지는 일탈에 앞으로의 일정을 헤아린 날숨들이 길게 새어 나왔다. 스물세 명의 눈동자가 일제히 공항을 훑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내내 귀에서 떼지 못하던 안내원 목소리가 한순간 예민해졌다. 그들은 이미 공항을 나가 다른 볼일을 보고 있었다. 서둘러 합류한 버스에서 그럼에도 침착하게 안내원은, 유럽은 관광객을 노려 원정 온 소매치기가 많으니 가방을 앞으로 메시라,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식탁에 올리거나 사진 찍어달라고 건네지도 말라는 주의를 당부했다. 그 새를 비집고 주파수 맞지 않은 라디오처럼 통장 팀 소리가 산만했다.
중년의 세월이 내세울 관록은 아닐진대 공공연히 질서를 거스르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의기양양했다. 그네들이 상식과 거리가 있다는 걸 깨닫는 데도 첫날 소란으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곧 다수 정서에 동화되리라 밑고 싶었다. 그 믿음이 씁쓸했지만 일행은 말을 아꼈다. 모종의 동류의식이었으리라. 달갑잖다고 정색하며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만이 옳은 처사는 아니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성숙함이 아쉬웠지만 어쨌든 함께 돌아가야 하는 공동체였다.
프라하 성을 향해 한 시간쯤 달렸을 때, 갑자기 통장이 하얗게 질려 안내원에게 뛰어갔다. 급기야 무슨 사고가 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카드가 끼워진 휴대폰을 공항에 두고 온 것이었다. 삽시간에 버스 안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운 대상은 아니어도 아득할 심정에 연민이 솟았다. 돌아간들 이 대명천지에 있으랴만 어느 일정에서 합류키로 하고 그 팀이 내렸다.
한편 체코는 오랜 설움을 겪은 역사가 우리와 비슷해서 애틋함이 갔다. 혹독한 성장통을 겪었기에 프라하 성과 카렐교가 이리 기품 있을까. 이들의 예스러움은 시시각각 전 세계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 민주화로 희생된 '프라하의 봄'을 환기시키려는 듯, 순간순간 분실된 휴대폰이 마음에 물살을 일으켰다. 예까지 와서 명소를 놓치는 것도 걸렸다. 블타바강의 동화 같은 반영에 잠시 빠졌을 즈음 예의 팀이 돌아왔다.
통장은 한껏 상기되어 휴대폰을 높이 흔들었다. 풀죽은 모습을 상상했던 우리를 한순간에 부엉이 눈으로 만들었다. 모두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려는 듯, 이내 영웅담을 풀어놓았다. 청소하던 여직원은 경험상 분실물임을 알고 통화 목록대로 문자를 전송했다. 전파는 한국과, 미국 유학간 아들에게, 또는 유럽을 떠돌다 가까스로 돌아가던 통장 팀에게 닿았나 보다. 놀란 가슴 쓸어니래며 답례로 수중의 몇십 유로를 건넸으나, 기꺼이 사양까지 했다는 말에 훈훈함이 밀려왔다. 가뜩이나 금품 탐하는 손길이 잦다는 곳에 이런 아름다움이 있을 줄이야. 아무리 세상이 삭막해도 어디선가 꽃은 피고 있었다. 피부색은 달라도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리는 한가지임이 분명했다. 이름 모를 민간 외교관의 선행이 구시가지를 관광하는 내내 가슴을 데웠다.
우여곡절 끝의 미담은 의외의 반향을 불러왔다. 그 사건 이후 그들의 눈길이 순해지고 소음도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대열에서 벗어나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바른 심성은 이기적 사고를 닦아내어 결국 맑은 창을 내었나 보다. 프라하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어서만은 아니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