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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출애굽기 4:10-17)
사람들은 잘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잘한다고 다 쓰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쓰고자하는 분의 마음에 맞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구별되어 축구 국가대표로 뽑힌다고 다 시합에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 그 때마다 감독의 의중에 맞아야 하고 마음에 맞아야 합니다.
세계인의 명마, 가장 가치 있고 이름 있는 말은 아라비아말로서 20억-30억이 간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말 100마리를 사서 푸른 초장 언덕에 울타리를 치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좋은 꼴은 주되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삼일 째가 되자 말들이 목이 갈하여 울타리를 부서뜨릴 것만 같습니다. 이때 우리의 문을 열자 말들이 물 냄새가 나는 시냇가로 쏜살 같이 달려갑니다. 물이 코앞에 왔을 때 주인의 ‘멈추라’는 호각을 불었습니다. 대부분의 말들은 그냥 눈앞에 있는 물을 마셨지만 그 중에 3마리만 멈추어 섰습니다. 주인은 이 세 마리의 말을 골라서 훈련시켰는데 이 말이 바로 아라비아 명마입니다. 좋은 말은 잘 달리는 말이 아니라 순종을 잘하는 말입니다. 잘 달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순종 잘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는 실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는 기본기가 안되어 있었습니다. 모세는 처음 40년에 애굽에서 왕자로서 대단한 힘이 있었습니다. 40세가 되던 해에 히브리민족 해방 계획을 세우고 백성들 앞에 나갔지만, 애굽사람과 동족들에게 살인자라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패입니다. 그의 의도는 좋았지만 방법에 실패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40년은 광야 사막에서 목자로서의 40년입니다. 애굽에서 가장 비천하고 손가락질받고 천대받는 목자였고 그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자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대단할 때에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이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있는 그대로 보면 그는 좀 부족한 사람 같습니다. 10절을 보면, 말을 잘해야 될 지도자가, 선지자가 말더듬이요, 말 장애인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보내라며 안 간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이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모세는 지도자가 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부적합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가 대단한 자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된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를 내 일꾼으로 쓰겠다.”
모세의 인생의 절정기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그를 쓰실 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순종하게 될 때 그 40년 동안,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민족을 해방시키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온유함입니다.(민12:3)
온유라는 말은 잘 길들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힘 있는 야생마가 아니라 잘 길들여진 말을 타는 것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말씀으로 잘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고, 구원받은 후에는 쓰임 받기에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온유한 자로 변화시키십니까? 하나님이 가장 많이 쓰시는 방법은 실패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실패하게 하셔서 온유하게 만드셨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실패의 연속입니까? 하는 것마다 안 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그리할 때 쓴물이 단물이 되는, 빈그릇이 차고 넘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가 모든 사람을 온유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실패가 강팍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오히려 독해지고, 반항적이 되고 완전히 망가집니다. 이것은 큰 재앙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재앙입니다. 인간이 질그릇임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 안에 보배를 모시지 않을 때에 이것은 재앙입니다. 실패할 때, 어려움을 당할 때, 내가 원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이때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순종하고 다듬어져서 온유한 자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이 축복입니까? 온유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가야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원칙입니다. 기본입니다. 원칙의 반대는 변칙입니다. 변칙은 잠시는 잘 할 수 있어도 계속 잘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흔들리고 무너지고 맙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시대가 어둡고 혼탁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대로 살아야 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운 이유는 법대로,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이요, 나의 삶을 복되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는 나의 감정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만 주시지 않고, 왜 성령까지 받으라 하십니까? 알면서도 행치 못하고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행할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송명희라는 시인은 전신을 쓰지 못하는 장애자입니다. 말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성령에 대해서 시를 썼습니다. 제목은 ‘성령은 아름다운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아름답게 /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 우리를 대신하여 아름다운 기도하시며 /
은혜의 선물 채우시니 / 성령은 아름다운 분“
자기의 처지와 몸과 상황을 보면 원망불평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에게 깨우치심을 주십니다. ‘고난도 네게 유익이라’ 영이 맑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깨달으면 감사요, 못 깨달으면 원망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동안 감사치 않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깨달음의 은혜 때문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으로 바꾸어지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지만, 변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주님의 섭리가 깨달아진다면 더 큰 은혜입니다. 즉시로 응답을 주심도 귀한 은혜이지만, 침묵과 더딘 응답 속에서도 깨닫는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더 없는 축복입니다. 가시를 뽑아 주심도 은혜이지만 박힌 가시 속에서 말씀하심으로 깨닫게 하신다면 그 가시는 오히려 갑절의 은혜가 됩니다.
깨달음의 깊이가 감사의 깊이이며, 감사의 깊이가 영성의 깊이입니다. 깨달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지만 못 깨달으면 그 어디나 지옥입니다. 깨달음은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라고 굳이 말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를 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의 성공과 실패 그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능력의 원천은 내가 얼마나 많이 배웠고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세는 지극히 평범하고 성격에도 결함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낙심합니까? 무엇 때문에 교만합니까?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다듬어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감으로 주님 안에 존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
모세의 끝없는 변명
출 4: 10-18
출애굽기 3장과 4장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서도 다섯 번이나 변명하고 회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끈질기게 모세를 설득하고 다그쳐서 결국 애굽으로 보내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모세의 첫 번째 변명은, 3:11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그런 일을 하겠어요?” 이 말은 겸손 한 것 같지만 가기가 싫다는 완곡한 거절입니다. 하나님은 거절하는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래 알아, 너더러 뭘 하라는 것이 아니야, 너는 가서 말만 하면 돼, 내가 너와 함께 가서 일을 다 할 거야. 그래도 가지 않을래?”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듣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변명은, 3:13에서 보았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텐데, 누가 보냈다고 할까요?”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를 믿어 줄 리가 없다면서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 야곱의 하나님인 여호와가 보냈다고 하라.” 하시며 모세를 압박하셨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듣지 않았습니다.
4:1에 보면 세 번째 변명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여호와가 네게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네 손에 잡고 있는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고 하셨고, 그것이 뱀이 되게 하셨으며, 모세의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게 하심으로 문둥병이 걸리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친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고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네 번째 변명은, 4:10에서 보게 됩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나는 주님의 기대처럼 말을 잘 할 줄을 모른다는 핑계입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귀머거리나 벙어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이 말씀은, “네게 입을 준 하나님이 말을 주지 않겠느냐, 네 입을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거절만 하느냐,” 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내가 함께 할 테니까 가거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약속을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꿈쩍도 안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얼마나 거절쟁이 일까요?
다섯 번째 변명은, 4:13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가 변명을 하다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하나님 사람 잘 못 고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나는 안갑니다. 나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섯 번이나 변명하고 핑계하고 요리조리 피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나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세의 모습이 보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고 말씀 하시며 보낼 때 하나님은 이미 모세가 하나님의 심부름으로 가면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함께 하시며, 모든 안전을 보장하며 책임질 것을 준비하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둔해서인지, 아니면 싫어서인지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빙빙 둘러보면서 어디 또 핑계꺼리가 없을까 하고 찾다가, 뭐 하나 발견되면 “이것 때문에 못합니다. 저것 때문에 안 됩니다.” 라고 핑계를 늘려갑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명하시는데, 그분의 은혜로 살아있는 인간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마 하시며 무슨 일을 시키시면, 우리가 그 일을 하다가 얼마나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얼마나 큰 은혜를 받게 될 텐데,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핑계만 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못남이요 우리의 불행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 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며 네가 믿는 모든 것이 되어 주마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고, 전능하신 분에게 한번 쓰임 받아야 하겠다는 뱃장도 없습니다. 모세를 사용하셔서 큰일도 이루시고, 모세도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실 때 모세가 얼마나 답답하게 보였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하마’ 하시며 명령하셨다면, 그것은 전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고 하셨을 때,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내가 다 줄 것이고 책임지겠다는 약속입니다. 지혜, 능력, 웅변, 모략, 그 무엇이든지 내가 너와 함께 가서, 책임지고 도와준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도 답답하시어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벙어리 되게 하고 누가 소경이나 눈 밝은 자가 되게 하느냐고 하실 정도로 답답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답답하게 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사야 40: 6-8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인생이 누리는 잠시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인생의 허무함이 아닙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이 부분은 전제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는 대목이 중심입니다. 인생은 풀처럼 마르고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시들거나 마르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그것은 현실이요, 어떤 사람을 불러 어떤 명령을 하셨으면 그 일은 그렇게 되게 되어있는 것이며, 순종할 때 쓰임 받은 그 사람도 위대하게 될 수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쓰시고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명령을 들었을 때, 핑계하지 말고 순종하여 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호와라" 는 말 한마디와 “너는 가서 이렇게 해라.”하시는 명령 한마디를 들으면, 우리는 “예 알았습니다.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일을 시키실 때 사람에게만 맡기는 법이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저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거든요, 저는 명령 속에 포함된 약속과 보증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드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안 뒤에는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주님께 순종했고, 돕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지라도 혼자서라도 순종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 내가 심히 약할 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였는데, 약한 가운데서 순종할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지나고 보니 그때가 도리어 내가 가장 강한 때였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께 순종하는 사람과 그 사역을 책임져 주시므로 일도 이루시고 사람도 키우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모세 입장에서 생각하면 인간적인 동정심도 생깁니다. 그가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과거에 순수한 생각으로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나섰다가 실수로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서 도망쳤던 그때의 실패가 기억이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애굽에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에서 노예노동을 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내 힘으로 구출한다는 말인가, 도리어 내가 바로에게 잡혀 죽을 일이 뻔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일만은 맡지 않으려고 갖은 변명을 다하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누구기에 그런 큰일을 할 수 있습니까? 동족들도 내 말을 믿어 주지도 않을 겁니다.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이렇게 변명하고 핑계를 하다가, 들어주지 않으시니까 결국은 “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라고 하소연합니다. 자기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왜 이렇게 변명과 핑계만 계속했을까요? 하나님을 잘 몰라서였고, 하나님보다 애굽 왕 바로를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두려운 줄은 모르고 애굽 왕 바로가 두려워서 끝없이 꽁무니를 사리는 것입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가만히 두셨을까요?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1. 모세에게 노를 발하셨습니다. (14)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세상 것을 두려워하여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하나님의 명령을 핑계로 거부하는 사람을 향하여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막을 사람도 말릴 사람도 없습니다. 삼상 2:9에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합니다. 하나님보다 직장 상사를 두려워하고, 여론을 두려워하고, 남보다 뒤쳐질까 두려워하고, 돈을 하나님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돈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욥 4:9에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노여워하시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10:22에는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는 진노하시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에 가득히 가지고 있는 욕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신앙태도로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피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진노를 집행하시지 않고 다시 은혜로 권면하고 함께 하실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출 34:6에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과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과 자비가 너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변명하는 모세를 향하여 진노로 마무리 하지 않으시고 강한 어조로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결국 순종하여 진노를 면했습니다.
그렇지만 끝없이 거절만 했다면 결국은 진노하시어 그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용하여 그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어서 핑계와 변명을 버리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큰일에 쓰임 받는 성도가 됩시다.
2. 형 아론을 붙여 주십니다. (14)
“네 형 아론이 너를 마중 나오리라. 그가 너를 도우리라. 너는 그에게 말을 주며, 그는 네게 대언자가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말을 못한다는 것은, 벙어리라는 것이 아니라 말솜씨가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의 핑계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말솜씨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하고, 순종하는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솜씨가 없어도 진실하게 살며, 진실하게 권면하면 전도가 됩니다. 이웃이 힘들어할 때, 귀찮다고 생각하고 피하지 않고 찾아가서 진심으로 위로하고 진심으로 도와주며 권면하면, 그 사람이 고맙게 여기고 따라 나옵니다. 그러므로 말 할 줄 몰라서 전도하지 못한다고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다시는 핑계할 수 없도록 대변인까지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할 것이며, 큰 권위를 네게 주어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말에 능력을 주고 그들이 하는 말을 책임져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모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일군에게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를 바로와 아론 앞에서 신처럼 높은 사람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높은 사람은 처음부터 높은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높은 사람은 누가 만드시는 것입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가난한 시골 출신이요 노동자들 앞장서서 시위나 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가 지금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노대통령 본인이 짐작이나 했던 일일까요?
바로는 애굽의 왕이고,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아론보다도 높이고, 바로보다도 높여주겠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보이게 모세가 하나님 같아 보이도록 높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높여 주실 때는 뜻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자리를 맡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함부로 행동하면 그 자리를 도로 빼앗아 버리십니다. 단 4:25에 보면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니엘, 요셉, 모세는 포로요, 팔려온 노예요, 버림받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역사의 중심에 세우시고 세계 강대국의 역사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위나 학식이나 말주변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역사의 중심에 두고 그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도 자기의 안일한 생활을 변경하기 싫어서 핑계로 일관하며 거역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자기 체면을 지키겠다고 전도하기 싫어하며 핑계 대는 것도 죄악이고, 자기 넉넉함을 위해서 의로운 일을 위해 헌금하자는데 거절하는 것도 잘못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사는 것도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시다.
3. 이적의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17)
“이적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4장 첫 부분에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 하여 뱀이 되게 하셨을 때는, 일회적으로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세가 기적을 직접 행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 기적으로 바로를 제압하도록 모세에게 당신의 권세를 위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모세가 언제라도 써 먹을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말씀에 순종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십니다. 마10:에 보면, 주님은 12제자들을 불러 전도하러 보내실 때, 그들에게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들은 가서 전도하면서 병자들을 고쳤고 귀신을 내어 쫓았노라고 보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눅10:15-18).
시골의 농부들도 일군들에게 일을 맡길 때는 일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주고 일을 시킵니다. 밭을 갈 때는 쟁기를 주고, 밭을 맬 때는 호미를 주고, 벼를 벨 때는 낫을 주어 일을 시킵니다. 농부 중에 대학원을 나온 박사가 많지 않지만, 맨손으로 일하라고 일시키는 농부는 한 명도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맡기시면서 맨손으로 하라고 하실 리가 있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시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 그 능력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주어 보내셨습니다.
4. 모세는 결국 순종했습니다.
이쯤 되면, 어떻게 더 이상 버티겠습니까? 어떻게 더 이상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애굽으로 떠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1) 하나님이 한번 작정하신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경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절하거나 변명으로 회피할 길이 없습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순종해야합니다.
2) 하나님은 변명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순종만 했던 이삭은 평안과 부요를 얻었고, 순종치 아니한 야곱은 그렇게 머리를 짜냈지만 고난과 역경의 삶을 살았습니다. 순종한 아브라함은 복의 조상이 되었고, 불순종한 요나는 땅의 뿌리까지 내려가서 빗장 지른 절망을 맛보고서 다시 사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변명을 하고 불순종하다가 매를 맞고 결국 순종하게 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순종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인되었으면, 팔을 걷어 부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명령을 깨달았고 들었습니까? 웬 행복입니까?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복 주시려고 나를 선택했다는 것을 안다면 팔을 걷어 부치고 순종해야 합니다. 길가의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고, 지팡이 하나로도 이스라엘을 넉넉히 인도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사람이 없어서 우리를 부르시고, 아쉬워서 우리한테 내 일을 좀 하라고 사정하시겠습니까? 복을 차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즉시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종이 선포하는 말씀을 듣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도하라, 이웃을 도와주라, 선교를 위해 헌신하라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놀라운 행운입니다.
말씀을 듣다가 마음속에 어떤 감동을 받아보았습니까?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의심하지 말고, 변명하지 말고, 머뭇거리지 말고, 팔 걷고 순종하는 성도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능력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임장
출 4: 10-20
여러분, ‘모세’라는 이름을 들으면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아마도 위대한 영웅의 이미지가 떠오를 겁니다. 혹시 명배우 찰톤 헤스톤이 주연한 영화 「십계」를 보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런 이미지가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을 쭉 읽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관련된 사건 몇 가지만 떠올려도 충분히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 홍해가 갈라진 사건 등 ... 실제로 모세는 구약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누누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스라엘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여러분, 모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위대한 영웅의 이미지와 잘 어울립니까? 전혀 그렇지 않죠? 오히려 왜소하고 초라한 모세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한때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의 모습으로 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망자로 미디안 광야에 피신해 양치는 목부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라!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명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빠져나갈 구실을 내세웁니다. 출애굽기 3장부터 계속 그런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출3:11 보면 모세가 무라고 하나님께 대꾸합니까? “ ...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로부터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끈질긴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오늘 본문 10절에도 보면 모세의 핑계가 나오죠. “ ...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나님의 설득이 거듭되자 또 한 차례 핑계를 댑니다. 13절이죠. “ ...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그러나 하나님이 포기하실 리 없죠. 어르고 달래는 하나님 앞에 모세는 결국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애굽을향해 출발하는 모습이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 ” 여러분, 어떻습니까? 모세의 모습이 ... 한 마디로 그 당시 사막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목부의 모습입니다.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흔히 모세의 위대한 모습에만 주목하다 모세의 작고 초라한 모습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절대 놓쳐서 안 되는 장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양면적 모습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보는 시각입니다.
모세라는 한 인물 안에 공존하는 두 모습, 어떻게 보면 서로 모순같이 보이는 두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실이었고, 그 둘을 조화시키고 연결해 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다시 20절을 함께 읽습니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그의 초라한 모습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보입니다. 그의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민수기에 나타난 모세의 모습을 보면 항상 이 지팡이가 함께 등장합니다. 그는 그 지팡이를 붙잡고 애굽에 가서 바로를 이겼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켰고, 가나안 땅을 향한 광야 40년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모세의 손에 들려졌던 지팡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애굽 같은 죄악 세상을 이길 수 있을 텐데 ... 광야 같이 거친 세상에서 넉넉히 승리할 수 있을 텐데 ... 그렇죠?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막대기로 만든 지팡이가 그대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무 지팡이가 아니라 ‘영적인 지팡이’를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세의 지팡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면 영적인 지팡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디 모세가 비록 평범하고 초라한 사람이었지만 위대한 인생으로 승리했던 것처럼 우리도 연약하지만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모세의 지팡이, 하나님의 지팡이 : 하나님의 신임장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평소 그가 목부로 갖고 사용하던 막대기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20절 다시 보면, 그 지팡이를 뭐라고 지칭했습니까? 하나님의 지팡이! 모세의 지팡이인데 굳이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애굽에 가서 백성을 구원하는 사명을 거부할 때 하나님이 지팡이를 주시면서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실제로는 모세가 그대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팡이를 주셨다는 것은 지팡이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과연 그 지팡이에 어떤 새로운 의미를 담아주셨을까요? 출4:1~4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4:1 보면 이때도 모세가 하나님께 핑계를 댑니다. 그가 애굽에 돌아간다 해도 백성들이 모세 자기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증거를 대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이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출4:2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 모세의 지팡이를 지적하신 겁니다. 그리고 출4:3~4 보면 놀라운 기적을 연출해 보이십니다. 지팡이를 던져보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뱀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해서 순종했더니 뱀이 다시 지팡이로 변화됩니다. 여기서 뱀의 꼬리를 잡으라는 것은 비상식적입니다. 그렇게 하면 뱀에게 물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신 것은 모세의 믿음과 순종을 테스트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쨌든 모세는 자기 눈 안에서 벌어진 기적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본래 모세의 것이었지만, 이제는 의미가 부여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겁니다.
물론 그 지팡이의 재질이나 모양이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겉보기에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그 지팡이에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된 것입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자기가 본래 갖고 있던 지팡이지만 이제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로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리죠.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군대에 가야 합니다. 여자를 사랑하기에 결혼을 제의합니다. 여자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약속한 것을 증표로 남기기 위해 남자는 링 반지를 하나 사서 여자에게 끼워 줍니다. 14K 링 반지는 기껏해야 2~3만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이 생긴 링 반지는 금은방에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약속을 하고 끼워준 그 링 반지는 더 이상 보통 반지가 아닙니다. ‘그 남자의 반지’인 것입니다. 여자는 그 반지를 바라볼 때마다 그 남자를 기억하고 결혼 약속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모세의 막대기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해서 그 막대기 자체에 무슨 특별한 마력이 생긴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신임장’에 비유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하나님의 신임장’이라 붙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임장이 뭔지 잘 아시죠? 신임장은 왕이나 대통령이 대사 등 외교관에게 주는 발령장이요, 일종의 신분증명서입니다. 외교관은 이것을 받으면 힘이 팍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외교관으로서의 사명을 부여하고 동시에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입니다. 외교관은 신임장을 받아서 외국의 국가 원수에게 제정하고 대통령의 대리자로서 힘 있게 활동하게 됩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꼭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신임장으로 그것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 신임장은 모세 자신에게만 유효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유효했고, 심지어 바로 왕과 애굽 사람들 앞에서도 유효했습니다. 출4:29~31을 보십시오. 애굽으로 돌아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들 앞에 가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출애굽의 계획을 전합니다. 그러나 뜬금없이 나타난 모세를 호락호락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때 모세가 그들 앞에서 지팡이를 던집니다. 그랬더니 뱀이 됩니다. 그리고 뱀 꼬리를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가 됐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백성의 대표들은 경악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또 출7:9 이하를 보면 바로 왕 앞에 나아간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전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요구를 바로 왕이 들어줄 리 만무하죠.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고대 국가에서는 노동력이 중요합니다. 바로 왕은 노예로 부역을 하는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거부하죠. 그런 바로 앞에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를 던지며 이적을 연출합니다. 그런데 애굽의 마술사들이 비슷한 흉내를 냅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모세와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마술사들의 지팡이가 변해서 된 뱀들을 다 잡아먹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유일성과 전지전능성을 증거하며, 모세가 하나님의 종임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지팡이 신임장에 담긴 약속 : 임재, 능력, 사명
모세가 손에 잡고 있던 그 지팡이, 하나님의 신임장은 과연 어떤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그 중에서 세 가지 내용만 간추려 말씀드립니다.
① 하나님의 임재 약속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해 냈고, 광야에서 40년 가까이 인도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모세 개인의 역량으로 한 게 아닙니다. 모세 혼자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아론이 있어도 보조일 뿐 별 게 아닙니다. 모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바라볼 때마다, 붙잡고 그 감촉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이 임재와 동행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굳게 의지했습니다.
출3:12을 보면 그 약속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핑계 대며 사명을 거절하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모세가 못 가겠다고 버티니까 하나님이 함께 해 주고 동행해 줄 테니까 가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명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이십니다. 인간이 없어도 하나님은 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혼자 있어도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없으면 더더욱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제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안개와 같고 풀과 같습니다. 쇠하고 사라집니다. 이런 사실을 숫자로 비유하면, 인간은 0(무)이고, 하나님은 1(전부)입니다.
미국의 한 명문 신학교의 초창기 일화입니다. 재정이 너무 부족해서 학교 당국자들이 코너에 몰렸습니다. 급히 이사회가 열렸는데 뾰족한 수가 없는 가운데 이사장이 먼저 말을 꺼냅니다. “더 이상 우리를 도울 후원자가 없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후 이사 한 분이 말을 꺼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십만, 백만의 후원자가 있습니다.” 그러자 모두 놀라서 그게 무슨 소린가 묻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입니다. 마치 0과 같죠. 우리끼리 고민해봐야 0은 여러 개를 붙여놓아도 0인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1과 같이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 앞서 행하시면 100000, 1000000이 되는 게 아닙니까?” 그 말에 이사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믿음 없음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눈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큰 도움이 있었습니다. 정말 후원자들이 나섰고 학교가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대단해도 하나님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인간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면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하나님의 능력 약속 :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계속 핑계를 대며 거절하자 마지막으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7절에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지팡이를 갖고 가면 하나님이 능력으로 도우셔서 이적을 행하게 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바라볼 때마다 그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응답하셔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모세는 이런 식으로 40년 동안 온갖 고비를 넘기고 승리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왕을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보내줄 것을 요청할 때 거부당하자 재앙을 하나씩 내립니다.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께 간구하면도 나일 강과 하수가 핏빛으로 변하고, 개구리가 나타나고, 파리가 들끓고, ...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홍해가 앞에 가로막혔을 때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자 바다가 갈라져서 이스라엘이 육지처럼 건너게 됩니다.
③ 하나님의 사명 약속 :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다 겪었습니다. 그 중에서 정말 인간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비애감을 느꼈겠습니까? 그도 사람인데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지팡이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지팡이를 주면서 명령하신 사명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내할 수 있었고, 마침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 문턱에 까지 인도하고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며 인생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3]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팡이 : 성령과 말씀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팡이’는 어떤 것일까요? 물론 막대기 지팡이는 없습니다. 혹자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구약 시대 성도들처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기회가 많으면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팡이를 주면 더 잘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오히려 번거롭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신다면 여러분 의자 앞에 지팡이를 죽 걸어놓았겠죠. 끝나고 일일이 챙겨가야 합니다. 두고 가면 또 다시 와서 갖고 가야 되고, 여기 저기 갈 때마다 갖고 다니려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을 겁니다. 막대기 지팡이는 오히려 안 주시는 게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대신에 더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휴대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일꾼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신임장으로 성령과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합니다.
① 성령 :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은 이미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성령은 항상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별도로 지팡이나 다른 어떤 장치가 없어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후1:21~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② 말씀 :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말씀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모든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붙들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 몇 개만 봐도 그런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하나님의 임재)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 체험)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사명과 주님의 임재)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험한 세상 살면서 과연 무엇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조건으로 가능하다가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의 궁궐에 있을 때, 왕자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갖고 있을 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지팡이 하나만 쥐어 주셨습니다. 그 지팡이 하나로 모세는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팡이요, 하나님의 신임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조건들로 승리할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능력과 승리가 있기에 그분의 임재와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이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도 모세처럼 승리하는 생애를 넉넉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