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3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땅에 무엇인가 쓰고 지우고 하셨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시골에 살면 가지고 놀거나 공부할 수 있는 학습재료들이 정말 별로 없었습니다. 가정에서 책상이나 의자도 귀해서 밥상에다 올려다 놓고, 등잔불을 가운데 두고 여러 명이 함께 겨우 공부를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어머니가 바느질하시고, 나머지 자리에 동생들하고 앉아서 그나마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할머니께서 야단을 치셨으니 억지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마분지 공책(노트)이라도 잘 쓸 수 있었으니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행복한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공책이나 연필, 종이도 귀해서 언제나 가장 욕심나는 것은 하얀 모조지를 예쁘게 잘라서 노끈으로 촘촘히 묶어서 공책으로 쓰는 것입니다. 연필심이 왜 그렇게 잘 부러지는지 속이 상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도 노트를 쓰다 말고 버리는 것은 전부 잘 모아두었다가 아이들에게 쓰라고 내 놓고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연필을 가느다란 대나무 토막을 구해다가 몽당연필을 꽂아서 끝이 보일 때까지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전천후 필기구가 있었는데 곱돌이었습니다. 곱돌로 땅 바닥에 쓰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곱돌은 납석(蠟石: agalmatolite)이 원말인데 하얀 것과 담갈색인 돌입니다. 우리 집 뒷산자락에는 곱돌이 많이 나는데 조각을 할 수도 있고, 쉽게 가루를 낼 수도 있어서 단단한 마당이나 땅에다 직접 글씨도 쓰고, 발로 지울 수가 있어서 아주 편리한 필기도구였습니다. 지금 학교에서 수업할 때 쓰는 분필과 같이 하얀 색깔을 내는데 무척 단단해서 책 보따리에는 언제나 곱돌이 두어 개가 보통 들어 있었습니다. 한문공부를 할 때 쓰기 연습을 할 때나, 갑자기 곱하기나 나누기 같은 셈을 할 때 귀하게 쓰는 것이 바로 곱돌이었습니다. 곱돌로 쓰면 바로 비벼서 지울 수 있었는데 때로는 “00는 바보”라고 쓰기도 하고, “00랑 00가 연애한다.”고 땅에다 써놓기도 하면서 친구들은 낄낄거리며 웃고, 그 친구가 오다가 그것을 보고 발로 막 지우면서 얼굴이 빨갛게 되어 화를 내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떠들고 웃고 하는 요술 곱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문 공세를 받으시고, 고소할 건더기를 찾으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쓰시고 또 지우시고, 다시 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어릴 때 곱돌을 가지고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지웠던 옛 기억이 새롭습니다. 왜 예수님은 땅 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계셨을까? 이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땅에 썼다가 지우는 글씨처럼 잠시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간음하여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여인의 죄는 잠시 땅에 쓰여진 글씨처럼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지워지고 또 발로 비비기만 해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도 성령의 입김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그분의 작은 손길에서도 흔적도 없이 용서받고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처형하기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람들이 너무 문란하고 완고해서 법을 정해 주었을 것입니다. 간음하였다면 분명 남녀가 같이 처벌 받아야 하는데 여자만 데리고 와서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모세의 율법도 조금은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만들어진 법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법망을 피하여 사람들이 간교해지니까 점점 조문도 확대되고, 구속력도 확대되어 구체적으로 법이 만들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성문법과 불문법이 서로 대치했을 때에는 성문법에 의하고, 신법과 구법이 상치되었을 때는 신법에 의한다는 이론이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판결은 불문법이고, 신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처럼 판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만이 모든 법의 원천이시며,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율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수 있고, 모세의 율법의 정신을 옳게 해석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돌을 들고 치려고 덤벼들던 사람들이 나이 많이 먹은 사람부터 돌을 놓고 모두 가 버린 사태는 인간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 돌을 버리고 자신을 반성하며 돌아가도록 이끌어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