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가상칠언을 통해서 본 십자가의 의미 2/ 고린도전서 1:1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pP0a9lY26FM
독일의 화가 슈테른 베르그(Sternberg)는 교회의 요청에 의해 예수님의 여러 모습을 담은 성화를 그리곤 했습니다. 한번은 나체 모델을 그리고 있었는데, 화실에는 그가 그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모델이 “저 그림이 무슨 그림이냐?”고 묻습니다. 슈테른 베르그는 별생각 없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는 장면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모델이 “우리의 죄라고요? 그럼 선생님의 죄도, 나의 죄도 대신해서 죽으셨단 말입니까?”, “그렇고 말고” 그 순간 슈테른 베르그의 가슴이 무너져 내릴 듯 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자신이 대답했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묵상했습니다. 두 손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자신을 위한 죽음이었고, 그분의 고통이 자신을 위한 고통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게 됩니다. 감격과 눈물로 그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케이 호모(Ecci homo-이 사람을 보라)’라는 성화입니다.
십자가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인류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객관적인 사실만 알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개인적인 적용이 되어야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가상칠언(架上七言) 중에 처음 세 마디를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1.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2.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구했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구원을 받아서 그날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3.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고통을 받으시는 중에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졌는데 그 때는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나머지 네 마디 말씀을 연거푸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오늘은 오후 3시쯤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네 마디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나누겠습니다.
4.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마 27:46입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아버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리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사 53:5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찔리셨습니까?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상하셨습니까?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과 단절되고 영원한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며 우리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갈 1:4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몸을 주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 위하여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대속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ὑπέρ(휘페르)라고 하는데 뜻은 ‘~을 위하여, 대신하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사망은 둘째 사망입니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 사망은 지옥 형벌입니다. 지옥은 어둠의 장소입니다. 주님은 ‘바깥 어두운 데’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세상이 캄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3시간 동안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희망도 없고 빛도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어둠 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엄마의 부재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캄캄한 곳에서 자다가 깨면 무서워서 웁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엄마를 찾습니다. 다행히 엄마가 옆에 있으면 어둠도 견딜만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어도 엄마가 만져지지 않으면 그 아이는 공포심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독은 단순한 어두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에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죄인으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5. 고통의 십자가입니다.
요 19:28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예수님이 영으로만 오셨다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셔야 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세월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좀 더 강력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 채찍에는 짐승의 날카로운 뼈와 납덩어리가 붙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셔서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갈대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유대의 갈대는 굵기가 우리 어른들의 지팡이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갈대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거반 죽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양팔과 양다리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신 것은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킹 목사가 버스 스트라이크를 주도하고 있을 당시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테러와 협박에 많이 시달렸습니다. 협박이 너무도 거칠고 험해 킹 목사도 두려움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이 일에서 손을 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기도해야 한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킹 목사의 마음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킹,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결코 너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터이니 싸움을 계속하라.” 킹 목사는 그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겼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킹목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을 이기고 자기 십자가를 지므로 흑인들의 인권이 보장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십자가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어서 고통의 십자가를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라는 이 말씀은 주님이 육체적인 고통을 격고 계심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목마른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대신 목말라 주시고 계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목마른 삶을 살고 있으며 저마다 갈증을 해결하려고 샘을 파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권력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지식과 명성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쾌락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유행의 샘을 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주는 물은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렘 2:13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 웅덩이는 물을 저축할 수 없는 웅덩이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파는 샘은 어떤 목마름도 채워줄 수 없습니다.
목마른 인생은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와야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난 인생은 어디를 가도 목마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이한 문제는 물이 없어 목이 마른 고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돌변하여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함으로 갈증을 면케 하였습니다. 반석이 깨지고 물이 나온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시키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수를 주었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고전 10:4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물을 구할 수 없었던 광야에서 반석이 깨지고 생수가 터져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생수를 주신 것입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왔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해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날의 사람들은 여전히 목마릅니다. 의식주에 목마르고 물질에 목마릅니다. 명예에 목마릅니다. 자유와 사랑과 애정에 목마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목마름은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암 8:11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사람들이 가지는 근원적인 목마름은 영적인 목마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방법은 생수의 근원이 되시고 생수의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요 4:13-14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목마름을 남자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그 여인의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은 남자를 다섯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남자랑 살지만 마치 소금물을 마신 것처럼 여전히 목말랐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생수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멜 깁슨(Mel Gibson)이 제작한 “The Passion of the Christ(그리스도의 수난)”라는 영화가 전 세계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멜 깁슨의 고백에 의하면 자신이 슈퍼스타로서 많은 돈을 벌었고 많은 것을 누렸으나 내면에 항상 기쁨이 없었고 갈등과 허무함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마약과 도박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다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적인 목마름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는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영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재 2,5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이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이 영화를 제작하는 일에 임하는 우리 자신들이 정결해야만 했기에 촬영하는 동안 매일 오전예배를 드렸습니다. 영화 촬영 중에 신기한 일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장님이었던 사람이 눈을 떴고, 귀머거리였던 사람이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찍을 때 스탭 중 한 사람이 번개를 맞았는데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제작할 때 놀라운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 스탭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팀 멤버로 있던 무신론자들과 모슬렘까지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멜 깁슨의 영적인 목마름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결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영적인 목마름을 해갈하는 데는 전혀 돈이 들지 않습니다. 공짜입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 없이 값 없이 목마름을 해결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목마른 육체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당하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목마름을 해갈 시켜주는 십자가입니다.
6. 속량의 십자가입니다.
요 19:30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나이가 33세였습니다. 33세의 나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말할 나이인데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이것은 죄의 값을 지불한 결산의 선언입니다. 계산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헬라어 ‘τελέω’(텔레오)인데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에서 나온 미래 완료형입니다.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은 그 당시에 네 가지 경우에 사용 되었습니다. ①맡겨진 일을 완수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로써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②흠이 없고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제사장들이 제사 드리기 위해 가져오는 제물을 검사할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제사장들은 그 제물이 눈이 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다른 흠이 없는지 살폈습니다. 이때 제물에 아무 흠이 없으면 ‘테텔레스타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흠과 점이 없는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③작품이 완성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의 예술가들이 사용하던 말입니다. 예술가들은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과 심혈을 기울여 한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테텔레스타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④돈을 모두 지불했다는 뜻입니다. 계산이 끝났다. 지불완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의 죄의 값을 지불완료하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테텔레스타이와 뜻을 같이하는 단어가 ἐξαγοράζω(엑사고라조) 속량입니다. 갈 3:13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은 인질을 석방하기 위하여 지불하는 속전(贖錢)이나 노예를 풀어 주기 위하여 지불된 대금(代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이 주어진 것입니다(롬 8: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량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테텔레스타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속량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었습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운명하시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속량의 십자가입니다.
7. 영생의 십자가입니다.
눅 23:46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죽음 직전에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영혼은 πνεῦμα(프뉴마)로 영을 말합니다. 사람은 육체만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의 몸 안에는 영이 존재합니다. 영이 진짜 나입니다. 사람의 육체는 옷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입고 있는 육체는 유한합니다. 사람의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떨어지듯이 사람의 육체는 죽음 앞에서 무력한 것입니다(벧전 1:24). 그러나 영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한 것입니다.
죽음은 종착지가 아니라 관문입니다. 죽음 후에 종착지가 있습니다. 인간의 종착지는 천국과 지옥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부탁한 것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를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인류의 대표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영원한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들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속량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전제 조건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셨고,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영생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요 3:16). 그리고 죽어서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 어릴 때는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어느 겨울날 하루 종일 동네 꼬마들이 양지 바른 곳에서 구슬치기를 했습니다.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낯선 꼬마가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는 동네 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했습니다. 그 아이가 구슬을 잔뜩 땄습니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지고 춥고 어두워집니다. 하나 둘씩 꼬마들이 손을 털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구슬을 잔뜩 딴 꼬마는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고아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구슬치기를 하는 꼬마들 같습니다. 인생의 밤이 찾아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집으로 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생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여행을 마치면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영적인 고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갈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은 그들의 집이 아닙니다. 그들은 영생의 십자가의 공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가상칠언을 통해서 본 십자가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1.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2.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3.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4.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5. 고통의 십자가입니다.
6. 속량의 십자가입니다.
7. 영생의 십자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