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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꿈을 해몽하다
창 40:9-23
9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12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6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18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창 40:9-23 / 그러자 왕이 마시는 술을 맡아보던 관리가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하였다. `꿈에서 말이야 내 앞에 포도나무가 서 있지 않겠어? 10) 그런데 그 포도나무에는 가지가 셋이 뻗어 있더군. 그 가지에 싹이 나고 또 꽃이 피더니 그 가지에 포도 송이도 열렸어. 11) 그런데 내 손에는 임금님께서 평상시에 술을 드시던 술잔이 들려 있더군. 그래서 내가 그 포도나무 가지에서 탐스럽게 익은 포도 송이를 따서는 그것을 으깨어 잔에다 그 포도즙을 담아다가 임금님께 갖다 바쳤지' 12) 그러자 요셉이 이렇게 해몽하였다. `포도나무에 뻗어 있는 가지가 셋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사흘을 뜻합니다. 13) 오늘부터 사흘 안에 임금께서 어르신의 명예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르신을 이 감옥에서 석방시킬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르신께서 전에 맡았던 관직에도 다시 오르시어 전처럼 그 일을 맡아 보실 것입니다. 14) 어르신께서 다시 관직에 오르시거든 소인을 꼭 잊지 말고 기억해 주십시오. 다시 임금님 앞에 서시거든 감옥에 갇혀 있는 소인을 생각하시어 임금님께 소인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 그래서 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15) 나는 히브리인들이 사는 땅에서 이곳까지 끌려왔습니다. 그 뒤로 이때껏 이곳 애굽에서 살아왔습니다만 감옥에 갇힐 만큼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16) 왕의 음식을 맡아보던 관리는 술을 맡아 왕에게 바치던 관리의 꿈이 매우 좋은 꿈인 것으로 해몽이 되자 이번에는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요셉에게 하였다. `나도 꿈을 꾸었다네. 엊저녁 꿈에 보니 내가 떡을 담아 두는 바구니 셋을 내 머리 위에 이고 있더군. 17) 그런데 맨 위 바구니에 임금님께 드리려고 온갖 떡과 음식 등을 담아 두었는데 새들이 바구니에 내려앉아 그 음식을 쪼아먹더군' 18)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요셉이 입을 열었다. `그 꿈의 뜻은 이렇습니다. 바구니가 세개라고 하는 것은 역시 사흘을 뜻합니다. 19) 참 죄송스럽습니다만 지금부터 사흘 안에 임금께서 어르신의 목을 치실 것입니다. 그런 뒤에는 어르신의 시신을 나무에 매달아 새들이 그 시신을 쪼아먹을 것이라는 뜻이지요' 20) 사흘 후는 애굽 왕의 생일이었다. 그날 왕실에서는 생일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왕은 자기 생일을 맞이하여 감옥에 가두었던 두 관리, 곧 왕의 술을 맡아보던 관리와 왕의 음식을 맡아보던 관리를 석방하였다. 그래서 두 관리는 왕의 생일 잔치 자리에 나와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명예 회복이 되었던 것이다. 21) 그러나 물론 왕의 술을 맡아보던 관리는 다시 전직에 앉았으나 22) 왕의 음식을 맡아보던 관리는 처형을 당하여 나무에 매달리게 되었다. 요셉이 해몽한 대로였다. 23) 그렇지만 왕의 술을 맡아 보던 관리는 요셉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요셉의 삶은 한 마디로 ‘버림받은 삶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형들에게 버림받고, 보디발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 꿈을 해석해서 복직의 희망을 주었던 술 맡은 관원장에게도 버림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9-22) 술 맡은 관원장이 먼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말합니다. “세 개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가 맺혔는데 자신의 손에 바로의 잔이 있어 포도즙을 짜서 바로에게 드렸다”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이 그 꿈을 듣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 개의 포도나무는 3일이고, 3일 안에 당신이 반드시 복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술 맡은 관원장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복직이 되면 바로에게 아뢰서 나를 꺼내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리고 떡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게 꿈을 이야기 합니다. “흰 떡 세광주리가 내 머리 위에 있고, 맨 윗 광주리에 바로의 음식들이 있는데 새들이 와서 먹었다”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이 그 꿈을 듣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 광주리는 3일이고 3일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나무에 달고 새가 뜯어먹을 것이다.” 22절의 내용을 보면, “요셉의 해몽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었더라(23) 요셉이 꿈을 해석해 주었고, 요셉을 통해 복직하게 되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으로 사랑의 대상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 이 년 후에’라고 말합니다(41:1).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이고, 가장 기다리기 힘들었던 시간이 이 2년일 것 같습니다. 요셉의 인내력이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범사가 형통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이 원했던 시간에, 요셉이 원했던 방법으로 감옥에서 나오도록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 2년의 시간동안 “사람은 의지할 존재가 아니구나!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구나!” 이것을 배우는 마지막 수업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2년 동안 감옥에 있는 일이 없이 곧 바로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30살에 애굽이라는 대 제국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성공에 타락하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요셉은 감옥에서 마지막 담금질을 하면서 “나를 지키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는 것을 뼛속까지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 복이 ‘복’이 되는 사람이 있고, 복이 ‘독’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까요?
사람은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죄악되더라도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악을 행해도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십니다.
< 설 교 >
환난은 축복의 첩경이다
창세기 40:9-15
서 론
요셉의 인생은 마치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와 같습니다. 그만큼 인생의 기복이 심했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시절 채색옷을 입은 것은 올라갔을 때지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갇히고 노예로 팔리게 된 것은 내려갔을 때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가정 총무가 된 것은 올라갔을 때이고,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 것은 내려갔을 때입니다. 감옥 속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옥에게 은혜를 입어 감옥의 제반사무를 담당하기도 했고,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수종을 들다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었지만, 그가 요셉의 은혜를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은 내려갔던 롤러코스터가 올라가다가 중간에 멈춰 고장이 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0장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이처럼 젊은 나이에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육신적, 정신적 환난이었습니다. 먼저 육신적인 환난은 노예생활을 하고 감옥살이를 하며 고생한 것입니다. 시편 105편 17~18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을 쇠로 묶었으니 움직일 때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적 고난도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술 맡은 관원장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었습니다. 요셉은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면 자신도 풀려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졌지만, 그는 2년 동안 완전히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소망이 끊어지고 낙심과 실망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당한 정신적 환난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소망이 꺾이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요셉은 절망 가운데 자기 연민에 빠져 인생을 함부로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생의 쓴 뿌리를 품지 않았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을 정도로 은혜스러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가운데 요셉이 당면한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요셉에게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억지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두 번이나 겹쳐서 꾸게 하신 거룩한 비전이었습니다. 요셉에게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를 향해 절을 하게 되리라는 거룩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자기 인생에 어떤 환난이 있어도 이 환난은 축복으로 나아가는 첩경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Ⅰ. 환난의 원인
요셉이 환난을 당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이 환난을 당하게 되는 원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결과로 찾아오는 환난이 있고, 의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환난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해서 당하는 환난은 축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죄를 해서 당하는 환난은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4장 19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환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환난은 하나님이 돌보시고 축복의 첩경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경주석가인 메튜 헨리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은 영적인 진보를 이루어준다”(Sanctified afflictions are spiritual promotions)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셉은 육신적인 환난을 당했고 정신적인 환난도 당했지만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다가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에도 요셉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형들이 잘못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했을 뿐입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고 구덩이에 갇히고 노예가 된 것도 그저 꿈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두 번 겹쳐 꾸게 하신 것을 말했다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감옥에 가게 된 것도 전혀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유혹의 현장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9절에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옷을 빼앗기면서 도망을 간 것이 원인이 되었을 뿐입니다. 죄나 허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유혹에는 맞서 싸워야 할 유혹이 있고, 도망가야 할 유혹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충성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성경을 읽지 말라!”, “헌신하지 말라!”고 유혹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사단아 물러가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외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유혹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었습니다. 이런 유혹은 피해야 할 유혹이고 도망가야 할 유혹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 “음행을 피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행의 자리에 있지 말고 피해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음행의 죄에 빠질 수 있는 현장에 그대로 앉아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요셉은 옷을 잃어버리면서도 유혹의 자리를 피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옷을 붙잡고 늘어져도 옷을 빼앗길지언정 죽기 살기로 유혹의 자리를 피했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옷을 잃어버리는 것이 낫고 양심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순간의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셉이 정신적인 환난과 실망을 겪은 것도 그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꿈 해몽을 해줬을 뿐입니다. 요셉은 감옥 내에서 제반사무를 처리하게 되었는데, 마침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요셉은 이들의 꿈을 해석해 준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에게 삼일 후에 전직을 회복하게 되리라는 해석을 해주었지만 떡 굽는 관원장에게는 삼일 후에 죽게 되리라는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의 근심을 살펴주고 밝은 비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런 은혜를 베풀었으니 억울하게 붙잡혀 오게 된 나를 생각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을 2년 동안이나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요셉은 의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상을 받기는커녕 견디기 어려운 환난만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나이 17세 때부터 30세가 될 때까지 13년 동안 계속 환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인생을 30세까지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은 비판적인 말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런 악한 사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요셉의 인생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남은 인생도 있고, 내세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보는데, 17세부터 30세까지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보지 않고 성급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보셨을 때 요셉이 바로 왕 앞에 서기 위해서 이런 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들이 요셉으로 하여금 해와 달과 열 한 별에게 절을 받는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첩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이 당한 환난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닥치는 환난은 축복의 첩경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요셉에게 이토록 모진 환난을 겪게 하셨습니까? 요셉의 젊은 시절 13년 동안의 이력서를 작성하면 17세: 구덩이 속, 17~28세: 노예, 28~30세: 감옥 속. 이같은 비참한 이력서가 나오는 청년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요셉에게 환난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Ⅱ. 환난의 목적
1.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열 명의 형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돌아다니면서 형 자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형님들을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에게 아무리 형들이 많아도 형들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저는 어린시절 친구들 가운데 자기 형 이야기를 하는 아이가 항상 부러웠습니다. 제가 장남이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참으로 형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형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제 친구들은 항상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에게 형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또한 요셉은 오늘날 이집트의 국방부장관과 같은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가 되었을 때, 애굽의 시위대장이었던 보디발을 의지하고 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보디발도 결정적인 순간 부패한 아내의 말을 듣고, 요셉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술 맡은 관원장의 말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가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 좋은 일을 했지만 3일 만에 전직을 회복하고도 너를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계속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라시는 것입니다.
시편 60편 11~12절에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시편 118편 8~9절에도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을 의지하고 있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이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배경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힘이 되십니다. 메튜 헨리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작게 기대할수록 좋고, 하나님께는 많이 기대할수록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많이 기대해도 우리를 실망시키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환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시편 91편 9~10절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처로 삼고 살아갑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가 미치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의 장막에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세월호 사건 때문에 구원파라고도 하는 ‘복음침례회’에 대해 많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기독교한국침례회’와 혼돈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조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침례교회는 17세기 초에 영국에서 시작된 교단입니다. 그 후로 미국 최대의 개신교단을 이루었습니다. 미국 남부 바이블벨트(Bible Belt)의 큰 교회는 대부분 침례교단 소속의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50여 년 전에 세운 이단인 ‘복음침례회’가 침례교회라는 말이 웬 말입니까? 비교하는 것조차 매우 불쾌한 일입니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한국침례회는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기원도 다르고, 지도자도 다르고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이단들도 활동할 수 있습니다. 무당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밥 먹고 살아야 합니다. 점쟁이, 이단도 핍박하면 안 됩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단이 범죄를 저지르면 상황은 다릅니다. 범죄는 확실히 처벌해야 합니다. 범죄자이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것이지 이단이기 때문에 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범법을 하고 사람을 죽게 만든 행위는 벌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기독교한국침례회는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에 비해 교세가 약하지만 미국에서는 최대교단인 것입니다. 한국에서 다른 교단보다 교세가 약한 이유는 침례교 선교사들이 초창기 북한에서 많은 활동을 했고, 한국전쟁을 통해 남북이 분단된 이후 북한에 있는 선교기지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한국침례회는 한국에 있는 복음주의 교단 중에서도 가장 복음적인 교단입니다.
17세기 위대한 침례교 목사 가운데 존 번연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성경 다음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유명한 ‘천로역정’의 저자입니다. 존 번연 목사님은 영국국교회였던 성공회의 신앙이 아닌 침례교 신앙에 대해 설교했다는 이유로 12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존 번연 목사님이 1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전옥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옥이 목사님에게 이따금 외출증을 끊어주어 밤에 집에 가서 가족들과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존 번연을 핍박하는 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외출증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존 번연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핍박하는 자들이 감옥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전옥을 불러다 “번연이 감옥에 있느냐?”고 물었고, 번연이 있는 것을 확인한 핍박자들이 아무 소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전옥이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핍박자들이 올 줄 아셨습니까?” 이 질문에 번연 목사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2.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을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지키심을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될 사람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은 보통 훈련으로 감당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시편 105편 17~19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13년 동안 요셉을 강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저는 1978년도에 공군 소위가 되었습니다. 제가 훈련을 받다 보니까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장교로 임관한 후에도 일을 아주 잘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훈련을 받아야 할 시간에 갖은 핑계를 대며 훈련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장교로 임관한 후에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공연히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불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훈련을 잘 받아야 좋은 장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27세에 노예에서 해방되었거나 28세에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면 가나안 땅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형들이 나를 팔아먹어서 이렇게 되었노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야곱은 요셉의 형들을 책망했을 것이고, 가정은 엄청난 위기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요셉의 꿈도 실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총리의 훈련기간은 13년이었습니다. 13년의 훈련시간을 채우니 모든 일을 감당할 지혜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한 청년이 목사님에게 기도요청을 했습니다. “제가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그래서 목사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 청년에게 많은 환난을 보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고, 기도소리를 들은 청년은 목사님에게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데, 왜 환난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하느냐고 묻자, 목사님은 “환난이 인내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하며 “환난이 있어야 인내심이 생길 수 있는 것이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환난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환난은 도리어 축복의 첩경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Ⅲ. 환난을 대하는 요셉의 자세
요셉이 환난을 당할 때에 어떠한 정신으로 환난을 맞이했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은 의를 행하였지만 하나님이 상을 주시기는커녕 계속 환난만 보내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환난이 오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올바로 살려고 애쓰는 나를 어찌하여 괴롭히시느냐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4절에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을 완악한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환난 가운데서도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두 가지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1. ‘은혜스러운 정신’(Gracious Spirit)이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이었음에도 그는 은혜스러운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감옥에서도 은혜스러운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 참으로 많은 환난이 있습니다. 배가 엎어졌다더니 열차가 충돌했다고 합니다. 갖가지 환난이 많습니다. 환난이 많아서 그런지 한국 사람들의 정서가 너무 거칠어지고 사나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제 친구 가운데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친구가 이야기하기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사와 환자사이에는 권위와 신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환자가 의사를 향해 욕을 하고 대드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고, 진료비가 나오면 왜 이렇게 비싸냐고 따지며 도둑놈이라고 소리친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정서가 너무 거칠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은 환난 중에도 은혜스러운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죄수이면서 다른 죄수를 돌보고 도와줍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도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보고 그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스러운 마음입니까? 빌립보서 2장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은혜스러운 정신은 하나님과 주의 일꾼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요셉은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0장 8절에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합니다.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내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 물어서 꿈 해석을 알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불신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꿈 해석이 있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거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기는 무엇을 아느냐?”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은혜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석방되거든 자신을 돌아봐달라는 부탁을 하면서도 자기 형들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40장 15절에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님들이 나를 팔았고, 보디발의 아내가 나를 유혹했으며, 지금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말하지 않고 그저 담백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요셉이 은혜스러운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속에 은혜스러운 정신을 소유하셔야 합니다.
2. 요셉은 ‘믿음의 정신’(Believing Spirit)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40장 14절에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삼일 후에 전직을 회복할 사람이고, 바로 왕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고, 그에게 말을 하면 감옥에서 풀려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2년 동안이나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믿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낳은 어미가 혹 자식을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잊어버리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결 론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우리 사회에 참으로 환난이 많습니다. 환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 환난 중에도 우리는 은혜스러운 정신, 믿음의 정신을 소유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환난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갈라진 것은 합쳐서 은혜스러운 결과가 나타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