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연필을 깎으며
(『플라스틱 행성의 기후변화이야기』 발간 후기)
우 승 순
글을 쓸 때 나의 리추얼(ritual)은 연필 깎기다.
글을 쓰면서 늘 마음 한편엔 허전함이 있었다. 평생 동안 공부하고 직업으로 종사해왔던 환경 분야에 대해 책 한권 쓰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자연스럽지 못했다. 2년 전 은행장으로 퇴직한 친구가 비재무 분야를 강조한 『은퇴설계, 이렇게 하면 된다(이덕수)』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내 이야기를 사례로 소개한 적이 있었다. 환경을 전공하고 연구 분야에 종사했던 내가 은퇴 후에 전혀 다른 장르인 수필가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 얘기를 써준 고마움에 그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면서 나도 환경 분야에 대한 에세이집을 쓰겠다고 약속했고 이번에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작가는 은퇴 후 한림대학교 객원교수와 은퇴디자인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목사 안수를 받을 만큼 왕성한 은퇴 후 생활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환경에세이집의 소재는 플라스틱과 기후변화로 정하였다. 당초에는 플라스틱만으로 책 한권을 만들려 했으나 지루할 것 같아 지구촌의 화두인 기후변화를 병행키로 했다. 현직에 있을 때 환경 분야에 관한 연구논문은 여러 편 써봤지만 에세이로 쓴다는 것은 생소하고 버거운 일이었다. 우선 과학적인 깊이를 어느 수준에 맞추어야할지 결정하기 쉽지 않았다. 너무 깊게 파고들면 연구논문이 될 것 같았고, 너무 얕으면 오염현상이나 첨단기술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전문용어나 통계자료에 대한 낯설음을 어떻게 문학과 연결시킬 것이지 대한 고민도 많았다. 환경문제는 기업과 시민의 입장이 다르고 정치적으로도 호불호가 확연히 차이나는 분야가 많아서 이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때로 열심히 자료조사를 해서 쓰고 나면 정책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게 수정하고 나면 몇 개월 후에 이해당사자들의 반발로 다시 유예되는 정책도 있었다. 책이 출간되기 1주일 전에 정책이 변경된 경우도 있었다. 더하여 환경문제에 문학적 형상화와 재미를 가미하는 것은 내 실력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를 수없이 하였고 결국 출간하고 보니 교양서적도 아니고 에세이집도 아닌 어정쩡한 책이 되고 말았다.
돌아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간을 허비했고 지난해 5월부터는 거의 1주일에 한 편씩 완성해야 했다. 작품의 편수를 맞추기에 급급하다보니 지식의 전달에만 치중되어 문학적 형상화와 철학이 많이 부족했다. 11월 30일인 발간 일을 가까스로 맞추고 책을 수령하였다. 춘천수필문학회를 비롯해 기타 문학단체, 지인 등 250여 곳에 우편발송 등으로 배포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연말이 되었고 새해를 맞았다. 어렵고 힘든 한 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성과도 있었다. 문헌참고와 자료조사를 하면서 기후변화와 플라스틱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무미건조한 통계자료를 에세이로 엮기 위해 잠들기 전까지 고민해야 했고 새벽에 깨면 다시 문헌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체득된 경험들은 내 몸 어딘가에 잠재력으로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기를 바란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은 것으로 위안을 삼고 싶다.
2022년에는 색다름도 있었다. 특히 ‘동네지식인’이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춘천문협 장승진 회장님 덕분에 보람 있는 한 해를 보냈다.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삶과 죽음’이란 주제로 토론하며 철학적 깊이를 더 할 수 있었던 특별한 시간이었다. 연말 송년회 때는 음악과 출판과 문학상에 대한 플래카드를 걸고 꽃다발까지 마련하여 뜻있는 기념회까지 열어주어 크게 감동받았다. 문학이든 삶이든 장 시인은 나보다는 한 차원 높은 친구다. 가끔씩 글을 쓰다가 힘들 때마다 술 한 잔에 기타치고 합창하며 격려 해준 H, M, P, Y 친구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우울과 번아웃(burnout) 증후군이 찾아왔을 때도 친구들의 위로가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주로 새벽에 독서나 글쓰기를 한다. 대신 밤 10시경이면 잠자리에 드는데 학창시절에도 초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곤 했다. 간혹 늦잠을 자다가 시험을 망치기도 하였는데 그 실수에 대한 압박감이 얼마나 컸던지 요즘도 가끔씩 시험을 망치는 꿈을 꾸며 가위에 눌리기도 한다. 글감이나 영감은 독서를 통해 얻을 때가 많다. 독서를 하면서 감동이 있는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거나 순간적인 착상을 메모해 두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독서하기 전에 연필을 깎는 습관이 있다. 연필 깎기는 나만의 리추얼 같은 것이다. 비유를 든다면 신전 앞에서 향을 피우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가느다란 육각기둥을 돌려가며 뽀얀 연필밥을 사각사각 저며 내면 꼭꼭 숨어있던 까만 지혜가 반짝반짝 빛난다. 뾰족하게 다듬으면 게을러터진 미네르바의 올빼미도 서서히 날개를 편다.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인생도 결국은 문장으로 남는다. 그동안 살아온 발자취로 기록될 수도 있고, 남은 인생에 또 다른 흔적을 남겨 새로운 문장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문장으로 기록될까? 그 한 문장을 위해 나는 다시 연필을 깎는다.
첫댓글 글을 쓰기에 앞서 기도하는 자세로 연필을 깎으며 정성을 기울이는 마음 존경스럽네요. 잘 읽었습니다. ♡♡♡
유행가 가사에도 있듯이, 연필로 쓰면 지우기가 좋지요.ㅎ
댓글 감사합니다.^^
우작가님의 글을 대하면 삶의 깊이가 느껴지기도 하고 철학적 가치관이 담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럽습니다.
늘 격려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