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44
12월19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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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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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Npp46KrZdkw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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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하느님께서는 다양한 측면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대림 시기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기여한 여러 인물을 소개하며,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그들의 덕행을 본받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분은 마리아요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닦은 세례자 요한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부모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랄까 아픔이 있었으니,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불가능이란 없는 법, 그분께서 두 노인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시어, 상상을 초월하는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해주셨는데, 당시 그 사건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당사자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설마? 그럴 리가?’하고 고개를 저을 정도로 경천동지할 일이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인생역전의 예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제대로 만난다면 그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가 단1 퍼센트도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축복과 은총이 생겨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난다면, 세속적, 인간적 축복도 큰 은총이지만,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 그로 인한 구원이라는 선물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온몸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헛된 삶의 방식이란 공허하고 의미 없는 삶, 허영심 강하고 천박한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 여기고 살아갑니다. 때로 자신도 모르게 지극히 비인간적인 규범과 틀에 사로잡혀 그릇된 것을 참이라 여기고 목숨 걸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 어이없는 규정 혹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에 갇혀 허우적거리며 살아갑니다. 지나친 율법 지상주의, 과도한 완벽주의, 지나친 자기 비하와 죄책감이 그러합니다.
때로 구원이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헛된 규범, 엄격 주의, 완벽주의, 자기혐오,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일 수도 있습니다.
조만간 새롭게 탄생하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우리의 속박과 굴레를 풀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엄격함도 원치 않으십니다. 지나친 자기 비하나 학대도 결코 바라지 않으십니다. 매사에 자유로워지기를, 모든 대상으로부터 편안해지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다양한 측면의 결핍과 나약하지만 주어진 현실 안에서 이 세상을 만끽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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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나니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응답이었고, 너무 늦은 감이 드는 응답이었지만 하느님의 응답에 기쁨과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남편 즈카르야는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한 평생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로 법이 없어도 살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무수히 많은 율법 계명과 규정들이 백성들을 괴롭혔지요. 그 모든 계명을 다 지켜나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정녕 숨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 사람은 그 모든 율법과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켜나갔습니다. 한 점 흠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성전에서 봉사하며 하루 온 종일을 기도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자식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했었지만, 끝까지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습니다. 둘 다 이젠 자식을 희망할 수 없는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많은 후손’처럼 큰 축복은 없었습니다. 자식 많은 것은 축복 중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대로 자식이 없다는 것은 축복의 반대 개념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노년에 손자손녀를 안아보는 기쁨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평생의 결실, 뿌듯함과 흐뭇함의 대상이 아들이요, 손자손녀이지요.
명절이 다가오면 외로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집집마다 찾아온 아들들, 며느리들, 손자손녀들로 복잡한 이웃집이 부러웠습니다. 밤늦도록 왁자지껄 떠들면서 먹고 마시는 모습들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오직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집만이 적막감이 감돌았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원망도 많았습니다. 섭섭함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도대체 뭘 잘 못 했길래?” 하는 억하심정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성전에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항구한 신앙, 충직한 종의 모습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도 인간의 능력을 내려놓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만나고 진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주도하시는 흐름에, 그분의 물결에 그냥 내 존재 전체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하느님은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체험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비참한 곳까지 내려가 외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험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이제민, 제3의 영성, 바오로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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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과 거짓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상해 망명 시절, 한 동지의 16세 된 아들 생일 축하 자리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전에 왜경들이 이 소식을 듣고 집 주변에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독립운동을 함께하던 동지들도 참석을 극구 반대하며 말렸습니다.
“선생님, 이번에 가시면 체포되십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애들 생일잔치인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십니까?”
“작은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그곳에 가서 왜경에 체포되고 맙니다. 이 어리석으리만큼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 행동은 그분이 평생 지니고 살았던 4대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알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그 첫 번째 정신이 ‘무실(務實)’입니다. 무실은 말 그대로라면 노력해 열매를 맺자는 것이겠지만 實은 ‘진실’이란 뜻도 있습니다. 즉, 무실은 진실이란 뜻이고 그 반대는 거짓입니다.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화하여라.”
그 두 번째 정신은 ‘역행(力行)’입니다. 알면 행하라는 뜻입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분은 다만 행한 것뿐입니다.
세 번째 정신은 ‘충의(忠義)’입니다. 충성과 신의를 나타내는데, 맡은 일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동지들에게 이렇게 씁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몸부터, 우리 집부터 고치는 것을 큰일로 보지 않는 이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세상을 속이는 사람이요 우리 스스로가 속는 사람이외다.”
그리고 마지막이 ‘용감(勇敢)’입니다. 도산은 ‘용단력과 인내력’이란 글에서 이렇게 씁니다. “일이 옳은가 그른가, 이 일을 할까 말까 방황하고 주저하면 거기에는 고통이 생깁니다. 또 결국은 낙망합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째서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분에 대한 짧은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지금까지 지키지 못한 많은 약속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그분은 중학교 학력밖에는 없는 분이셨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확실한 신념을 지니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맙시다. 그리고 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도록 합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 부부에게 아들이 생기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자신과 아내가 나이가 많고 지금까지도 자녀가 없었다는 말을 하며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즈카리야는 아들이 출생하여 할례를 받을 때까지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만약 즈카리야도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같은 신념으로 살았다면 주님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요? 물론 믿기 어려웠을 테지만 ‘나도 거짓말을 안 하는데 하느님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실 수 있을까?’ 하며 결국 믿지 않았을까요?
사람은 무엇이든 믿어야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믿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 믿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을 우리는 ‘교만’이라 부릅니다. 이 교만은 아담과 하와를 죄에 빠뜨리기 이전에 이미 사탄의 무리를 죄에 빠뜨리게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의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교만과 거짓말과 믿지 못하는 것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좀처럼 믿기 힘들지만, 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남을 믿기는
더 힘듭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거짓말을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믿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을 더 증가시킵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서부터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거짓이 내 믿음을 갉아먹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만큼 우리 자아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나 자신을 죽여 믿음을 더 증가시켜야 합니다. 가장 구체적이고 좋은 방법은 내 입에서 거짓이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길 약속을 하는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합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믿음도 증가하고 그 안에서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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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대부분 성당에는 그동안 있었던 신부님들의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습니다. 제가 미사를 도와주는 퀸즈 정하상 바오로 성당에도 신부님들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 안상인 요셉 신부님, 김인성 요한 비안네 신부님, 서상봉 다니엘 신부님, 이가별 가브리엘 신부님’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지금은 김문수 엔듀류 신부님이 있습니다. 내년이면 본당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초대 신부님은 공동체의 씨를 뿌렸습니다. 서울교구 신부님들은 공동체에 물을 주었습니다. 잠시 머물렀던 예수회 신부님은 공동체에 거름을 주었습니다. 브루클린 교구 신부님들은 공동체가 꽃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끄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사진이 걸려있지는 않지만 홈페이지에는 역대 신부님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신부님들이 모두 헌신적으로 신문사를 위해서 일하셨고 신문사는 창립 35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문사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세종대왕은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다른데 글은 중국 글자를 사용하니 백성들의 고충이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말을 우리의 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였습니다. 그것을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 또한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준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라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주님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성탄 무렵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세례명을 참 좋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때로 날개 잃은 천사가 되어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저의 세례명처럼 주님의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서의 일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저의 세례명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이룬 일로 정해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독재자’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따라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선구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밤을 새워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는 그런 사람들이 밝힌 길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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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25: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고는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고, 게다가 둘 다 아이를 낳기에 너무 늙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기를 못 낳는 엘리사벳의 몸에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천사의 발현은 참된 사제가 오시리라는 것을 알리는 하느님의 현현(顯現)이다. 천사는 기적적인 출생과 아이의 이름에 대해 예고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13절) 한다. 요한의 경우에는 그의 생부인 즈카르야에게 천사가 나타나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요셉에게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찾아온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지어 준 아기 이름 요한은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 은총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은총,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세상에 선포하러 왔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했고 하느님 은총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미 은총을 선포한다. 때문에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찬 분이다. 어머니 배 속에서 뛰어놀아 주님의 오심을 알렸다.(루카 1,44 참조) 엘리야와 요한은 둘 다 독신이었다. 두 사람은 다 거친 옷을 입었고 광야에서 살았다. 두 사람 다 정의를 지키다 왕과 왕비에게 박해를 받았는데, 엘리야는 아합과 이제벨에게(1열왕 19,1-3 참조)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받았다.(마태14,3 참조) 엘리야는 불 마차를 타고 하늘에 오름으로써(2열왕 2,11 참조) 사악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요한은 순교를 당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사악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17절) 백성들을 불신에서 신앙으로 돌려놓았다. 그래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17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나이, 백발이 된 머리카락, 힘을 잃어버린 몸을 떠올렸다. 또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래서 장차 일어나리라는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시는 “말씀”을 잉태하실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25절) 나이 많아서 갖게 된 아들 때문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 엘리사벳은 요한을 잉태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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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앞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배치한 까닭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배열 순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와 역할을 반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자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구절은 13절입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에게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는 예언을 듣습니다. 이어서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르도록 지시합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보여주셨다.”라는 뜻을 가진 ‘요하난’에서 유래합니다. 천사를 통하여 전달된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자비가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아이를 못낳는 여자 엘리사벳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고(1,58 참조), 그분의 자비는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도 베풀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역할 수행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천사의 예고에 따르면, 태어날 아기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로 인도하는 설교자,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자 파견된 예언자입니다.(1,15-17 참조) 그 아기는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므로 그의 출생은 많은 이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만, 그 기쁨과 즐거움은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탄생에 관한 천사의 예고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천사의 선포를 거부한 즈카르야의 부정적 반응은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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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하느님께 의탁하는 이에게 허락되는 선물>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출생에 대하여 하느님의 사자인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즈카르야가 대답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이고 제 아내는 나이가 많습니다."
성실하고 신심이 돈독한 노부부, 자녀가 없어 한때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던 시기도 이미 한참이 지났습니다. 자식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지만 주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비에 뽑혀 성소에서 분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느님의 사자인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자식에 대해 이미 희망을 품을 수 없는 나이이기에, 그래서 더는 간구할 수도 없었던 노부부이기에, 그 놀라움은 그만큼 컸을 것입니다.
아기! 그것도 보통 아기가 아닌, 많은 사람이 기뻐할 아기를 주신 다니......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미리 즈카르야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나 봅니다. 이렇게 묵상하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은 즈카르야 노부부의 의롭고도 돈독한 신심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연만한 이 부부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계획하셨을 거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한없이 의탁하는, 돈독한 신심의 경건한 노부부를 인정하고 복을 주시는 주님!
즈카르야 노부부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우리는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주님께 끝없이 의탁해야 하는 성실과 경건함에 대해 다시 한번 자극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주님게 끝까지 의탁하는, 성실하고도 경건한 생활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축복과 선물이 있음을 명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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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사람의 일, 하느님의 일>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구약의 삼손 그리고 신약의 세례자 요한의 탄생 과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살펴보면 다 불가능한 이야기들입니다. 태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태어난 인물들의 이야기지요.
인간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삼손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이 놀라운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삼손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은 사람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삼손의 어머니 마노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여인을 돌계집이라고 부르는데 어느 날 주님의 천사가 마노아를 찾아와 말합니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판관13,3)
이 말을 듣고 마노아는 남편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천사의 예고대로 아들을 낳아 삼손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삼손과 들릴라>라는 영화를 연상하여 방탕한 삼손만을 떠올리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삼손은 위기의 시기에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위대한 인물이지요.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지만 마지막에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였기에 어려운 시련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위기의 이스라엘에 돌계집을 통해 구원의 인물을 보내주셨음을 삼손이라는 인물의 일생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탄생 과정을 자세히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며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던 사제 즈카르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고 이제는 내외가 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지요. 이런 즈카르야에게 주님의 천사가 찾아와 이야기합니다.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루카1,13)
천사는 아기의 이름까지 지어주지요. 그러나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자식을 보기 위해 평생 수많은 기도와 노력을 해왔던 즈카르야로서는 당연한 반응일지 모릅니다.
이제는 아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그것에 대해 잊어버린 지 오래된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대뜸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즈카르야가 반문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1,18)
당연한 불신이지요. 즈카르야는 하느님보다는 자기 인생의 경험을 믿은 것입니다. 일생 동안 이것도 저것도 다 해보았지만 불가능했던 것을 천사의 말 한 마디로 믿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믿고 하느님의 계획을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의 이런 불신과는 상관없이 당신의 일을 이루시지요.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왜 우리에게 불가능한 탄생들을 전해주고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도 열심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ㅈ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밝혀주고자 한 것이지요.
마리아라는 처녀가 잉태한 사건은 의심이나 불신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믿음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일입니다. 삼손과 즈카르야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며칠 남지 않은 이 때 삼손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 과정을 보면서 내 경험과 내 지식 그리고 나를 믿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우리는 금방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믿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학 만능 시대이자 물질 만능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고 중의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쉽게 말하면서도 우리의 사고방식은 과학과 수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그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런 것으로는 결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임마누엘", 즉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사건은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초월하고 내 능력 밖에서 오직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과 지식의 테두리가 좁다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한결같이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을 돌보아주시며 그에게 은총 또한 내려주신다는 것을 구세주의 성탄을 기다리는 지금 다시 한 번 강조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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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천사가 사제인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해 말해 주는 장면입니다.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기에, 약 2만 명의 사제들을 24개 조로 나누어서 조별로 한 주일 동안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조의 차례가 되면 복음에서 보듯이 제비뽑기를 하여 분향할 사제를 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는 중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이를 본 즈카르야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예의와 존경의 태도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인은 과연 누구를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세계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입니까? 아니면 핵무기나 지진입니까? 누구를 더 존중합니까? 하느님입니까? 권력과 재물입니까?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실 누구라도 갑자기 주님을 뵙는다면, 그 누가 두려움에 떨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분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늘 겸손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했다면 이미 하느님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꾸준한 양심 성찰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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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앞서 한 사람>
루카 1,5-25(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주님 앞서 한 사람>
홀로 오실 수 있는
주님이시지만
홀로 오시지 않는
주님이시기에
오시는 주님 앞서
한 사람 늘 있답니다
주님께서 앞서 보내신
주님 모신 사람 말이에요
그러니 주님을 모신 내가
주님 앞서 그대에게
그러니 주님을 모신 그대가
주님 앞서 나에게
오시는 주님 맞이할
설레는 마중길 되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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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의 별은 여전히 있다>
밤하늘이 유난히 빛났습니다. 별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기온은 뚝 떨어졌지만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어서 상쾌했습니다. 가끔은 아름다운 하늘을 보고 주님을 찬미할 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먹구름에 가려져 별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별은 별의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내가 별을 볼 수 없지, 별이 아주 완벽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은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내가 그분의 은총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풍요로움으로 여전히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흔들 비쭉입니다. 기대하는 바가 채워지면 호들갑을 떨고,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면,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넉넉함으로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은총이 왜 꼭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주어져야 하나요? 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손을 털고 주님께 맡긴다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신”(요한 3,16) 그분께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을까요?
즈카르야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면서도 기도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13)고 하였지만,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하며 보이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천사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루카 1,20) 하느님 앞에서 의롭고 흠 없이 살아온 즈카르야, 엘리사벳에게도 시련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시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요?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고 그분의 은총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시건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왜 그리 힘든지요! 간절히 청하고는 그저 그분의 처분을 바라는 삶, 그리고 그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둠에 갇힌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별이 없는 것이 아니듯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은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일깨움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 후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은총은 언제나 넉넉히 우리를 기다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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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0년 전, 남미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남미 선교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지요. 3박 4일의 모임 일정을 마치고, 힘들게 이곳에서 언제 다시 올지 몰라서 같이 갔던 신부들과 페루 관광을 갔습니다. 수도인 리마로 갔다가 다시 쿠스코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쿠스코는 잉카 문명의 고대도시인 마추픽추에 가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입니다.
쿠스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오로지 힘들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고산병 증세였습니다. 며칠에 걸쳐 천천히 올라와야 하는 길을 비행기로 단숨에 3,399m 높이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때 산소의 중요함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산소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이 어렵지 않아 그 고마움을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산소량이 부족한 곳에 오니 평상시에 느끼지 못했던 ‘산소’가 얼마나 중요하고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산소가 바로 하느님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상시에는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께 대해 감사의 마음을 잘 갖지 않습니다. 또 자기에게 중요한 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겪는 순간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면서 힘든 시간을 겪게 됩니다. 불평불만을 외칩니다. 하느님을 불합리한 분이고, 차별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질투의 하느님이라며 원망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였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도저히 혼자 살 수 없음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즈카르야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 잉태 소식을 듣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기보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면서 하느님의 능력이 세상의 기준보다 높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믿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즈카르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상태에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제대로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소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입니다. 이렇게 꼭 필요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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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인간의 소원을 구원의 기회로 삼으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은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을 낳아 줄 즈카르야와 그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이 둘은 삼손의 부모와 같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신세인데 오늘 즈카르야는 아이가 생길 거라는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이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입니다. 그러니까 즈카르야가 아이를 달라고 빌었다는 얘기인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게 합니다. 자기 아내가 돌계집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얘기인지, 젊었을 때의 청원이 이제 받아들여졌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늘그막에도 아이를 달라고 빌었다는 얘기인지.
돌계집이라는 것을 알고도 아이를 달라고 했다면 진짜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도 늘그막에 청했다면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심합니다. 그러므로 즈카르야의 청원은 아내가 돌계집인 줄 모르고 청한 것이고, 젊었을 때 청한 것이 거의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주님의 탄생이 733년 전 아하즈에게 한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요한의 탄생은 즈카르야의 오랜 소원이 뒤늦게 이루어진 겁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게 되는 것은, 요한의 탄생이 즈카르야의 청원의 결과인지, 하느님의 앞선 계획 그러니까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의한 것인지, 그 점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요한의 탄생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의한 것이지, 한낱 즈카르야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불임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일환이었고,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의 인간적인 소망도 구원의 기회로 삼으신 겁니다. 개인의 소망을 인류 구원의 기회로 삼으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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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사랑의 ‘신비가神祕家’로 삽시다-
“내 입은 님의 찬미로 가득 차 있고, 진종일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시편71,8)
오늘은 대림2부, 셋 째날인 12월19일입니다. 주님 오실 날도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오! 옛세의 뿌리여(O Radix Jesse)”로 시작되는 간절한 M후렴도 반갑고 고맙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해야겠다는, 하루하루 사랑의 신비가로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오 옛세의 뿌리여, 만민의 표징이 되셨나이다. 주앞에 임금들이 잠잠하고 백성들은 간구하오리니, 더디 마옵시고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요즘 성탄에 임박하여 많은 분이 고백성사 차 수도원 제 집무실을 찾습니다. 보속으로 다음 똑같은 말씀 처방전을 써드리며 충고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 형제님(필립4,4)” 성구를 써드린 후 꼭 당부하는 충고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꼭 일주일 남았습니다. 일주일만은 화내지 않고, 짜증 내지 않고, 큰소리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기쁘고, 평화롭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시다 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비상한 신비가가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의 기쁨과 감사의 신비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불행과 비극은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잊은 데에 기인합니다. 하느님을 잃었는지, 잊었는지 구별이 애매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잃어, 잊어, 삶의 중심과 삶의 의미를 잃고,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며 표류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오소서, 주 예수님!”을 뜻하는 “마라나타”를 호흡에 맞춰 되뇌며 바치기를 권하는 명상기도 제 강의록 중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이 명상기도 또한 깨어 늘 주님의 신비가로, 관상가로 살기 위한 영성 훈련입니다. 30년 전에 쓴 내용인데 오늘날도 여전히 새롭게 읽힙니다. 신비가로 불림 받은 우리 신자들에게 적절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명상기도는 수도승 영성이 보편화하는 시대에 깊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단순하고 평범한 기도로서 결코 신비롭고 유별난 기도가 아니라 참사람眞人’으로 살아가기 위한 단순하고 평범한 수행의 한 방법이며 순간순간 소중히 지내며 하느님의 현존인 사랑 안에서 깨어 살기 위한 기도이다. ‘행함의 기쁨(the joy of doing)’을 누리는 시간이 아니라, 존재의 기쁨(the joy of being), 관상의 기쁨(the joy of contemplation)을 누리는 시간이며, 생각을 멈추고 사랑의 침묵안에 머무는 시간이다.
신비가는 소수의 영적 엘리트에게 해당된 명칭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도달해야 할 본래 모습이요 모두가 그리로 불림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저명한 신학자 칼 라너는 '21세기의 문턱에 선 현대는 새 문명이 잉태되기 위한 다 전환기로서, 머지 않아 영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열릴 것이며 그때가 오면 신자들은 신비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말한다.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 시대인 오늘날, 많은 이들은 외적 풍요와 편리함에 비례하여 극심한 영적 갈증을 겪고 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 영혼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지 못한다. 명상기도는 생명의 샘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요한15,4) 생명수를 흡수하여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는 기도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현실입니다. 오히려 영적 갈증은 날로 심각해집니다. 얼마 전 친애하는 도반인 신부가 본당 신자들이 너무 좋아한다 하여 판공 시 보속으로 나눠주겠다며 수백 장의 행복기도문을 가져갔습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주님의 사랑의 신비가가 되고 싶은 깊은 갈망이 잠재해 있음을 봅니다. ‘행복기도’ 혹은 ‘예닮기도’로 일컫는, 신비가의 고백처럼 생각되는 기도문 전문을 다시 소개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2018.10.16.
참 많은 분에게 사랑을 받는 기도문입니다. 대림 2부, 주님 오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매일 바치며 주님을 닮은 사랑의 신비가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서의 인물들 평범한 듯 하나 실상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했던 비범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어제 복음의 주인공인 성 요셉이 주님을 만난 신비가였고,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계된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 역시 주님을 만난 신비가들입니다. 또 제1독서 판관기의 참 소박한 마노아와 그 아내 역시 주님을 만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중심의 수덕생활에 한결같이 지극히 충실할 때, 때가 되면 주님은 이들을 찾습니다. 수덕신비생활입니다. 수덕의 기반 위에 비로소 꽃처럼 피어나는 신비생활입니다. 복음의 노부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 대한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바로 때가 되자 이들 신비가인 노부부를 방문한 주님의 가브리엘 천사였고 세례자 요한 아기의 출생이 예고되고 마침내 엘리사벳은 아기를 잉태하고 감격에 벅차 고백합니다. 요한은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를 뜻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의 선물이 바로 요한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주셨구나.”
그러니 태교는 물론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키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했을 신비가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입니다. 판관기에서 마노아 부부를 통해 삼손의 출생도 신비스럽습니다. 이들 부부의 충실한 삶을 눈여겨보신 주님의 개입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됐는데 이를 읽어보면 두 부부가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기도의 사람이자 신비가였던지 잘 알아챌수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에게 하느님 체험은 아주 일상적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잊고, 잃고 사는지, 경종이 되는 성서의 가난한 신비가들입니다. 마노아의 아내 역시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마침내 주님의 천사가 아들의 출생을 예고합니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마침내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을 낳고 삼손이라 하였고,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히브리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느님은 이 부부에게 태양같은 아들 삼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삼손의 출생,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통해 새삼 우연한 존재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의 신비가로 잘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주여, 내 믿는 데 당신이시고
어려서부터 나의 희망 주님이외다
어미의 품안에서부터 님은 나의 힘,
모태에서부터 님은 내 의지시오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믿었나이다.”(시편71,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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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루카1,13)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자!'
오늘 복음(루카1,5-25)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곧 탄생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었고, 그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73권)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예시(豫示)'하고,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직접 선포'합니다.
임박한 주님의 탄생에 앞서 두 가정의 모습이 반복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가정은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이며, 또 한 가정은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가정'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루카 1,6)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성경 전체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사악과 레베카에게,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에게,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쏟아졌습니다. 모두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들이었고,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쏟아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들이 바로 '이사악과 야곱과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십니다.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읍시다!
그러려면 나의 몸과 마음이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로 향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온전한 믿음과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큰 은총을 입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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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Dokdgtslg2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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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 25)
기다림과
기다림을
이어주시듯
먼저 주님께서
다가오시고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굽어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놀라운 일들의
연속입니다.
자식이 없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수치와 모욕을
없애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청원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주님이십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대답할
차례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기다림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조바심입니다.
한바탕
세찬 눈보라가
지나가면
고요해지듯이
기다림은 조바심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비워 내야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우리를
볼 수 있습니다.
비워 내야
기다림의 눈물까지
닦아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 조여오면
하느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강박(强迫)을
뒤집듯이
가장 알맞을 때에
세례자 요한이
탄생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게 하는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께 돌아오는
기다림과
우리의 기다림을
굽어보시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기다림은
하느님의
계획이며
탄생은
우리가 기다린
최고의 선물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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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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