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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9
#중생 #성화
중생한 성도의 삶은, 평소에 믿음대로 잘 살다가 어쩌다가 죄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평소에 무수한 죄 가운데서 정신 못차리고 빌빌대다가, 어쩌다 한 번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뜻을 반짝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성화의 과정은, 믿음의 행위 가운데서 죄를 덜 짓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행위 가운데서 조금씩 하나님의 뜻을 더 순종해 나가는 것이다.
#20200129
#개혁주의 #성령의조명
언제부턴가 '성령의 조명'이라는 용어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생들은 조명이란 용어를 통해서 결국 인도하심까지 아우르는 의미로 쓰셨지만 시간이 흘러 오늘날에 와서는 후자의 의미는 퇴색되고 오로지 지성의 의미만 남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적 지성은 더할나위 없이 탁월한데도 또는 신학적 지성을 열렬히 추구하는데도 정작 교회 밖의 실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지성은 비신자들보다도 더 저열한 신학교수와 목사들을 이래저래 접할 때마다 과연 성령의 조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진정한 성령의 조명이라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해석을 바탕으로 사회 현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나는 성령의 조명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소위 한국의 개혁신학 교수들과 목사들 중에서 정작 개혁주의를 따라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교사들을 몇 명 보지 못하였다. 십중팔구는 자기들이 추구하는 개혁신학에 위배되는 사회 문화 정치적 신념을 따른다. 그런 자들에게 성령께서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조명하시는가? 그래서 적어도 오늘날 한국 개혁주의에서만큼은 성령의 조명을 구분하거나 다른 용어로 대체하거나 해야할 듯 싶다. 내 생각에 성령께서는 어떤 자들에게는 '조명'만 하시고 팔짱끼고 내버려 두시는 반면에 어떤 이들에게는 '조명'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인도'까지 해주시는 것 같다. 그리고 이 후자야말로 나는 진정하고 참된 성령의 조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조명'이라고만 하면 지성주의라는 고정관념에 치우칠 수 있으니, 나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를 아울러서 그냥 '충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이미 성령충만이라는, 지성과 감성을 아우르는 훌륭한 용어가 있었다.
덧) 성령의 조명만 받고 인도를 받지 않은 성경 교사들의 구원 여부는 난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자들의 눈에 보이는 행위를 보면 악귀들이 고개를 숙일 정도이니..
#20170129
#내로남불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하며 하던 말이다. 즉, 자기들이 조상 시대에 살고 있었더라면 자기들은 결코 조상들처럼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이 말로써 그들을 정죄하신다.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의 위인들이 저지른 어이없는 범죄들을 볼 때 흔히 하는 말 또는 생각이다. 그들은 왜 성경의 인물들이 그러한 어이없는 죄를 짓게 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자기의 의를 높인다. 심지어 미숙한 설교자들은 설교 중에 그런 성경의 위인들을 너무나 쉽게 정죄한다. 마치 자기들은 그러지 않을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태도 또한 예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극히 교만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을 뿐이다.
'심지어 그들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나는..'
신자들이 성경에서 성경의 위인들이 범죄함을 읽을 때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성경의 위인들은 기본적으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신앙을 가진 분들이다. 따라서 그런 분들 조차도 까딱하면 죄를 저지르는데, 그분들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감당못할 우리들이야말로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하스
유다 왕 아하스(히스기야의 아버지)는 앗수르 왕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을 때, 거기서 본 앗수르의 제단의 모습과 제사법을 베껴서 제사장 우리아에게 보내어 만들게 한다. 그리고 귀국한 후에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제단과 기물들을 치워버리고 앗수르의 제단과 기물들로 대체하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한다. 아마도 아하스는 기존에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들보다는 당시 최고 강대국인 앗수르의 제사가 훨씬 더 웅장하고 화려해 보였던 것 같다. 때문에 그는 앗수르의 제사를 본받으면 자신도 앗수르와 같이 강대국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아하스가 도입한 앗수르의 제사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훨씬 더 웅장해 보이고 화려하며 무언가 능력이 있어보일지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의 규례를 어긴 것이었다. 때문에 그것은 자신과 사람들 보기에만 좋아보일 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제사로서의 효력은 1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아하스의 행태는 요즘 교회들이 예배에 여러가지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것들을 덧붙이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아하스가 자기 만족과 사람들의 눈에 보기 좋게 하기 위해 이방신의 제사법을 도입했듯이, 많은 교회들은 교인들의 눈과 귀에 보고 듣기 좋은 것들을 예배에 덕지덕지 붙이고 있다. 아하스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법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듯이,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소홀히 여기고 번폐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의 그러한 '자의적 제사'를 받지 않으시듯이, 많은 교회들이 자행하는 '자의적 예배' 또한 역겨워하시고 받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
#20210129
#민수기 #Numbers 32:1-42
요단 강 동쪽 지파들(신 3:12-22)
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2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3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4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5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모세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은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요청한 것은 그저 불의한 탐심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어보인다. 그들이 그 땅을 요구한 이유는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두 지파는 다른 지파들에 비해서 유난히 가축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던 것 같다. 그들의 조상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서 말한 바와 같이, 가축들은 조금만 무리해서 데려가면 힘들어서 떼죽음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두 지파로서는 이 수많은 가축을 데리고 요단 강을 어떻게 건너며, 건넌다 해도 이방 족속을 물리치기까지 그 시간 동안에 가축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등의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에 봉착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아무리 40년 전에 정탐했던 가나안 땅이 비옥하고 넓다 하더라도 40년이 지난 지금의 자기들의 규모를 볼 때 다른 열 지파들에게 돌아갈 땅의 몫이 그만큼 작아질 것이라는 배려섞인 우려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때마침 막바지 행진을 하면서 물리쳐 온 족속들의 땅을 보니 자기들이 거느린 수많은 가축을 먹이기에 비옥하고 넉넉해보여서 큰 고심 끝에 어렵게 결정을 내리고 모세에게 그 땅을 달라고 요청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모세에게 말하기를, 자기들이 모세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요단 강 건너기 전 이 땅을 달라고 매우 정중하게 요청하였는데, 이는 그들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그제서야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공경할 줄 알았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부터 장장 40년 동안 끊임없이 수시로 모새를 대적해 왔으며 심지어는 바로 직전 까지도 에돔 땅을 우회하면서 독한 말로 원망과 불평을 내다가 불뱀 재앙을 당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랬던 백성들이 이제는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 모세에게 위협적이거나 완악하게가 아니라, 지극히 높은 어른을 대하듯이 최고의 공경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모세를 진정으로 공경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단 며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막바지에나마 자기들의 완악함을 꺾고 온순하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나, 좀 더 일찍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히 있다. 오늘날 교회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같은 국가 지도자를 두고 여전히 독한 말로 저주하고 비방하며 악담을 퍼붓고 있는데,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처럼 자기들의 완악하고 독한 성품을 꺾을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8 너희 조상들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9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10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11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1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다 끊어졌느니라
14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15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 두 지파가 정중히 이 땅을 요청했어도 모세에게 있어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청천벽력 같은 터무니 없는 무리한 요구로 들릴 수 밖에 없었다. 모세가 그들의 요청에 굳이 40년 전 정탐 후의 배역과 심판을 언급한 이유는, 이제 조금만 있으면 40년 간의 고된 방황을 마치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들로 인해서 또 백성들이 동요하게 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여호와께서 진노하심으로 인해 그간의 고생들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누구는 목숨을 걸고 싸워서 땅을 얻어야 하는데 누구는 편하게 땅을 얻는다고 배아파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두 지파들에 대한 모세의 심한 질책과 호통은 매우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16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17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18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19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
어지간하면 그러한 모세의 호된 질책에 자기들의 요청을 철회할 법도 한데, 르우벤과 갓 자손은 물러나지 않고 다른 자손들이 기업을 차지할 때까지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이 군사를 지원하며 그것도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조건을 제시한다. 아무리 성읍을 튼튼하게 잘 짓는다 하더라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울 군사가 없으면 그 성읍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두 지파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요단 강 이편 땅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들의 요청이 절대로 사사로운 탐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 뿐만 아니라 전체 지파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확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읍에 남겨진 자기들의 여인들과 어린 자녀들을 전적으로 여호와의 보호하심에 위탁하는 결단을 모세에게 제시한 것이었다.
20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만일 이 일을 행하여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우되
21 너희가 다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22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 앞에서나 이스라엘 앞에서나 무죄하여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소유가 되리라마는
23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24 너희는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양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라 그리하고 너희의 입이 말한 대로 행하라
25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주의 종들인 우리는 우리 주의 명령대로 행할 것이라
26 우리의 어린 아이들과 아내와 양 떼와 모든 가축은 이곳 길르앗 성읍들에 두고
27 종들은 우리 주의 말씀대로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
르우벤과 갓 자손의 다짐을 들은 모세는 그제서야 그들의 진정성을 확인하고서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한 번 그들이 했던 말을 상기시키면서 그대로 행할 것을 엄중히 명령한다. 이에 르우벤과 갓 자손은 모세를 주라 부르면서 반드시 이행할 것을 맹세한다.
28 이에 모세가 그들에 대하여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수령들에게 명령하니라
2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30 그러나 만일 그들이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너희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니라
31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행할 것이라
32 우리가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나안 땅에 건너가서 요단 이쪽을 우리가 소유할 기업이 되게 하리이다
모세에게나 이스라엘 전체에게나 르우벤과 갓 자손의 요청은 이스라엘의 흥망을 결정하는 매우 중차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모세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모든 수령들을 불러 모으고서는 르우벤과 갓 자손의 요청 건에 조건부로 받아들일 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모세는 여기서 만약에 그 두 지파가 약속을 어기더라도 그들을 배신자나 적으로 간주하지 말고 가나안 땅에서 함께 기업을 얻도록 받아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모세의 지시는 훗날 이스라엘이 가나안 점령을 마치고 그 두 지파가 복귀하면서 요단 강 가에서 제단 하나를 세우는 것을 보고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지휘관들을 이끌고 와서 그들에게 우상숭배를 하려거든 가나안 땅을 같이 나누자고 한 말에서도 이어진다. 물론 그 두 지파가 다른 제단을 세운 것은 비느하스의 우려대로 우상숭배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한 형제라는 징표를 삼고자 함이었다.
33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나라와 바산 왕 옥의 나라를 주되 곧 그 땅과 그 경내의 성읍들과 그 성읍들의 사방 땅을 그들에게 주매
34 갓 자손은 디본과 아다롯과 아로엘과
35 아다롯소반과 야셀과 욕브하와
36 벧니므라와 벧하란들의 견고한 성읍을 건축하였고 또 양을 위하여 우리를 지었으며
37 르우벤 자손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기랴다임과
38 느보와 바알므온들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바꾸었고 또 십마를 건축하고 건축한 성읍들에 새 이름을 주었고
39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자손은 가서 길르앗을 쳐서 빼앗고 거기 있는 아모리인을 쫓아내매
40 모세가 길르앗을 므낫세의 아들 마길에게 주매 그가 거기 거주하였고
41 므낫세의 아들 야일은 가서 그 촌락들을 빼앗고 하봇야일이라 불렀으며
42 노바는 가서 그낫과 그 마을들을 빼앗고 자기 이름을 따라서 노바라 불렀더라
모세는 르우벤과 갓 자손 외에도 므낫세 지파의 절반을 그 두 자손과 함께 요단 강 이편 땅에 거하라고 했는데, 아마도 므낫세 지파도 처음에는 가나안 땅을 얻고자 하였으나 르우벤과 갓 자손처럼 가축이 너무 많아서 모세가 절반만 남기도록 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르우벤과 갓 자손이 가나안 정벌을 완수하고 복귀할 때 요단 강 가에 제단을 쌓아 징표를 삼은 것처럼, 므낫세 지파를 둘로 나눠 한쪽은 요단 강 이편에 두고 다른 한쪽은 요단 강 건너편에 둠으로써 르우벤과 갓 자손이 비록 요단 강 이편에 있더라도 여전히 이스라엘 한 족속이라는 연결고리로 삼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요단 강 이편에 남은 지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땅 원주민들의 이방신들을 간음하듯이 우상숭배를 하다가 앗수르 왕 불과 디글랏빌레셀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하봇야일이란 성읍을 지은 야일은 므낫세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4백여 년 전 므낫세의 친자가 지금까지 생존했을리는 없으므로, 마길의 자손처럼 므낫세의 아들인 야일의 자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또한 이 야일이 사사기에 기록된 일곱번 째 사사인 야일과 동일인물이라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야일 전에 이미 여섯 명의 사사들이 있었고 그들의 통치 기간과 중간중간에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핍박 받던 기간을 따져봐도 족히 2백년은 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곱 번째 사사인 길르앗 사람 야일은 므낫세의 아들 야일과 동명이인으로서 이방 족속에게 빼앗겼던 처음 하봇야일을 되찾은 것이 아닐까 싶다.
#20200129
#창세기 #Genesis 26장.
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우리나라 같은 지형과 기후에서는 어지간한 골짜기에는 항상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른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던 지역의 지형과 메마른 기후에서는 골짜기라 하면 물도 없는 험한 경사지에 불과하므로 평지보다도 못한 곳이었을 것이다. 이삭이 아비멜렉의 요청을 따라서 그랄 골짜기에 거류하였다는 것은 기존에 머무르던 곳보다도 더 척박하고 험한 지역으로 내몰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골짜기로 이주하기 전에 이삭은 아비멜렉과 맞먹을 정도의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가솔들과 가축들을 보살피기에는 골짜기는 너무나도 좁고 열악해서 그 어떤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골짜기에는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파놓은 우물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과 이삭을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꼴도 보기 싫다 하여 도로 메워놓긴 했지만 그래도 그 우물을 다시 회복하면 물을 얻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삭은 이 우물들에서 다시 물을 얻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의 돌보심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블레셋 사람들도 발견하지 못했던 샘 근원을 이삭의 종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이는 심마니가 백 년 넘은 산삼을 발견한 것 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생명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삭이 샘 근원을 얻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블레셋 사람들은 억지로 그 우물을 강탈한다. 기존에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이야 워낙에 증거가 명백하니까 감히 뺏을 수는 없었어도 이삭이 새로 발견한 샘 근원 우물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삭은 그들의 억지에 억울함과 분통이 터질만 한데도 순순히 그 우물을 양보하고 만다. 그리고 블레셋은 이삭의 우물을 두 번이나 강탈한다. 대신 이삭은 그 두 우물을 블레셋에 넘겨주면서 각기 이름을 붙이는데 이는 아마도 그 이름을 통해서 자기의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신원하여 달라는 뜻일 것 같다. 이 이방인들이 사는 땅에서는 도무지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하늘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판단해 달라는 간구함이 있었을 것 같다.
이삭은 그렇게 억울한 상황을 두 번이나 당한 후 세 번째 우물을 파고서야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이 세 번째 우물도 빼앗을 수 있었을텐데 왜 이삭이 소유하도록 내버려 뒀을까. 이는 아마도 이삭이 세 번씩이나 물이 나오는 우물을 연달아 얻는 것을 보고서야 저 이삭이야말로 정말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수 밖에 없어서였을 것이다. 사실 하나의 우물을 얻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두 번까지는 그래도 희박하게나마 우연으로라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여겨서 빼앗았을 것이다.그러나 이삭이 세 번째 우물도 얻게 되자 그들은 이삭 너머의 하나님의 존재를 볼 수 있었고 저 우물까지 빼앗았다가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을 수 있다. 그래서 우물 두 개 빼앗은 것으로 만족하며 이삭 앞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가 의도치 않게 억울한 법적 소송에 휘말려 누명을 쓰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게 된다면,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물어줘야 해서 당장 생계가 막막해지는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탁월한 신자라도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억울하게 두 번이나 당해야 한다면 십중팔구는 홧병에 걸리게 되지 않을까. 사실 나도 그런 상황을 맞닥뜨릴 자신이 없어서 제발 그런 일이 닥치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건 교인이건 할 것 없이 금전적인 갈등과 문제 앞에서는 사회 법정까지 끌고가 기어이 내 소유를 악착같이 지키려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에 대한 모범답안으로 이삭의 에피소드를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예수께서는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고 오 리를 억지로 끌고가는 자에게 십 리를 동행해주며 겉옷을 강탈하는 자에게 속옷도 내어줄 것을 가르치신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사회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무지하고 부끄러운 일이므로 교회 내에서 판단할 지혜자가 없다면 차라리 손해를 보라고 권면한다. 쉽지 않은 어려운 일이지만, 교회와 신자들이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이삭처럼 차라리 손해를 보되 우물에 이름 짓듯이 그리스도께서 판단해주십사 믿음으로 기도를 드린다면, 설령 이 땅에서 셋째 우물 르호봇과 같은 보답은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와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소망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삭과 아비멜렉의 계약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비멜렉도 이삭의 이 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 같다. 아비멜렉이 생각하기에도 이삭이 세 번이나 연달아 물이 나오는 우물을 얻었다는 것은 자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이삭에게는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전능자가 동행하신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비멜렉은 그런 결론에 도달하였더라도 그저 이삭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생각 하지 않고 내버려 둘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고 서둘러 자기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하여 이삭을 만나러 친히 나선다. 이는 아비멜렉이 이삭을 얼마나 크고 존귀한 인물로 인정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삭의 앙금 섞인 질문에 아비멜렉은 블레셋 왕이라는 존엄도 내려놓고 자기 보기에 한낱 이방인 나그네에 불과한 이삭에게 자기들을 해하지 말아달라는 계약을 맺자고 한다. 이는 아비멜렉이 이삭을 통해서 크고 두려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상상할수도 이해할수도 없는 광경인 것이다. 그제서야 이삭은 마음의 앙금을 풀고 아비멜렉 일행들을 위해서 화해의 잔치를 베푼다. 이튿날 아비멜렉 일행이 이삭과 서로 맹세한 후에 평안히 돌아갔다고 하는데 여기의 평안이 아비멜렉에게 있어서 단지 이 땅에서의 평안함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녀로서의 평안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나로서는 후자였으면 하는 기대가 있을 뿐이다. 애굽의 바로는 아브라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보았으면서도 그를 애굽에서 쫓아내었고 후대 바로는 고센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성해지자 위기를 느껴서 그들을 핍박하고 남자아이들을 수없이 죽였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건드리지도 않았고 이삭을 선대하였으며 무력이나 위협을 사용해서 쫓아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삭의 하나님을 믿고서는 이삭 앞에서 겸손하기까지 한 것으로 보아 나로서는 어쩌면 그도 하나님의 백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삭이 아비멜렉과 화해하고 화친하자마자 공교롭게도 또 하나의 우물을 얻게 된다. 이는 아마도 아비멜렉을 용서한 이삭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하늘을 소망하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이 땅에서 바로 상급을 주시기를 바라지만 이를 바로 주실 지 나중에 주실 지 또한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권한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조금 더 날마다 높여서 설령 이 땅에서 상급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냉수 한 그릇에도 상급을 주시리라는 주님의 언약을 의지하며 하늘 상급을 바라보도록 해야겠다.
에서의 이방인 아내들
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에서의 망령된 짓은 한 그릇 음식에 장자의 명분을 넘겨준 것에 그치지 않고 아내를 맞이하는데 있어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자기 족속 중에서 한 명의 아내를 찾은 것이 아니라 이방 헷 족속의 두 여인을 아내로 삼음으로써 신앙이 아니라 세속적 기준으로 아내를 삼은 죄와 일부일처제를 위반한 죄를 동시에 지었다. 물론 헷 족속은 선대 아브라함에게 무상으로 사라의 매장지를 내어주려 할 정도로 호의적이었어도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맛보아 알지 못하였고 육신의 소욕에 사로잡힌 족속들이었다. 따라서 그 이방 족속에게서 아내를 찾았다는 것은 모든 삶의 습성이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 땅에 매여있음을 의미한다. 그 여인들의 시부모인 이삭과 리브가로서는 아들이 원하니 어쩔 수 없이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는 해도 신앙의 눈을 전혀 갖지 못한 그들에게서 만족을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에게 알게 모르게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무시무시해서 천하의 지혜자인 솔로몬조차도 이방 여인 아내들로 인해 말년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정도이다. 따라서 가뜩이나 우둔한 에서로서는 이방 여인 아내들을 맞아들임으로 인해서 더욱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에서가 연이어서 잘못되고 망령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선택되지 못하고 미움을 받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오늘날 신학 교수건 담임목사건 장로건 집사건 직분 없는 교인이건 간에 누구든지 교회 구성원이라 칭하면서도 교회에서나 일상에서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선택을 한다면 이는 우연이 아니라 자기의 악한 의지가 드러나는 것이므로 그의 구원의 확신이나 신앙고백은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을 가능성이 현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