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 아름다운 축복이며 거룩한 생명의 씨앗
다니 13,1-62; 요한 8,1-11 / 사순 제5주간 월요일; 2023.3.27.;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는 수산나라는 부인에게 성폭력을 저지르려던 이스라엘의 두 원로가 다니엘의 지혜로운 재판으로 들통나서 처벌받은 이야기였고, 복음은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끌고와서 예수님께 판결해 달라는 올가미를 던졌는데 예수님의 기지(機智)로 그들과 군중은 돌아갔고 그 여인은 무사히 풀려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된 이유는 지도층의 타락 때문이었거니와 끌려가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그 바빌론에서조차도 오늘 독서에 나오는 두 원로는 재판관으로서 의로운 판결을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음욕을 채우려고 지위와 명성을 악용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주님을 경외하며 깨끗하게 살아온 수산나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을 뻔 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바친 수산나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으셨고, 다니엘이라는 젊은이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거룩한 영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로 강간미수 행위에다가 거짓 증언까지 자행한 그 사악한 원로들의 죄상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의 상황에서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초막절 축제에서 생명의 물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밤에 올리브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가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성전에 가서 군중을 가르치셨는데, 이런 예수님의 동선(動線)을 미리 파악해 놓았다는 듯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그분이 가르치시는 자리로 끌고 와서 무례하게도 판결해 달라고 다그쳤습니다.
원래 간음과 간통죄는 남녀 모두 처벌 대상이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와 간통하면, 곧 어떤 남자가 자기 이웃의 아내와 간통하면,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10). “어떤 젊은 처녀가 한 남자와 약혼을 하였는데, 성읍 안에서 다른 남자가 그 여자와 만나 동침하였을 경우, 너희는 두 사람을 다 그 성읍의 성문으로 끌어내어, 그들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그 처녀는 성읍 안에 있으면서도 고함을 지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치워 버려야 한다”(신명 22,23-24).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인만 데려다 놓았습니다. 더군다나 묘하게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시간에 맞추어 그렇게 했습니다. 초막절 축제 때에 생명의 물에 관련된 논쟁을 벌이다가 성전 경비병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었으나 무위(無爲)에 그친 전 날의 일을 마저 해치우려는 듯이, 간음 현장에서 붙잡아 왔다는 여인을 인질로 삼아 그 여인을 사형 선고하라고 협박하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그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머쓱해진 저들이 줄곧 재촉하자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하시고는 다시 쓰기를 계속하셨습니다. 평소에 율법을 잘 지키기로 자부하던 저들이 이상하게도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고 도리어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가 버렸습니다.
양심을 억누르고 수산나를 모함하려던 원로들에 대항한 다니엘이 받은 거룩한 영이나, 양심에 찔려 감히 돌을 던지지 못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에 맞서 여인을 감싸신 예수님의 처신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성(性)은 생명을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창세 1,28). 성은 생명의 씨앗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내리신 축복대로 성을 대하면 보기에 아름다운 생명의 천국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축복의 질서대로 행하지 않고 성의 자유를 남용하면 인간은 타락하고 세상은 즉시 지옥으로 변합니다. 다니엘이 받은 거룩한 영은 이 축복을 지키고자 주어진 것이었고, 예수님의 처신은 이 축복 대신에 저주를 받을 뻔 했던 무고한 여인을 지켜주신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재판과 예수님의 재판은 아름다운 성과 거룩한 생명을 수호하는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듯 성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사회 질서로서 법이 올바로 기능하면, 법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법이 보호해 줄 때, 법은 하느님의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법이 제 구실을 다 하지 못할 때에는 다니엘과 예수님의 경우에서처럼 하느님을 대신하는 양심과 용기의 힘이 법을 대신하여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법 현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법조인들이 존경하는 ‘사도 법관’이 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에 살았던 김홍섭 바오로입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오는 4월 1일 ‘사도 법관 김홍섭’을 기리는 미사를 봉헌합니다. 뜻있는 국민들이 흔들리는 사법질서를 우려하고 있는 이때, 이 미사는 법과 정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올곧은 법조인들과 함께 성과 생명을 수호하려는 양심적 의인들을 격려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