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새해 버킥리스트가 있다.
피아노 배우기, 2월 초, 이사 가는 아파트 상가 2층에 있는 학원도 이미 봐 뒀다.
희색과 검은색의 피아노 건반 배경에 쓰여진 예쁜 간판
사실 오래전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악기를 잘 다뤄보고 싶다는 게 더 맞는 말 같다.
책을 사랑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늘 예술 중 으뜸은 음악이라고 생각해 왔다.
음악의 매력은 글로도, 말로도, 그림으로도 이길 수 없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물론 남들 다 배우던 피아노를 나도 배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엄마의 바람 때문이었다.
얌전하게 원피스를 입고 앉아 마치 날개짓을 하는 나비처럼 피아노 건반을 사뿐사뿐 두드리며 연주하는 딸을 상상했을까.
나는 그런 엄마를 배신하고 몰래ㅑ 학우너을 뺴먹기 이룼였다.
피아노 학우너과 태권도 학우너을 다니고 있었는데, 태권도 학원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서로 붙잡고 구르고 뛰어다니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빠르게 태권도복 허리띠 색깔이 바뀌었지만 피아노 실력은 도통 나아가질 않았다.
엄마는 결국 내 피아노 학원 등록을 포기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봤다.
2000년대 초반 피아노 학원의 풍경을 담은 영상이었다.
그 옛날 피아노 앞에 앉아 시계만 쳐다보며 온몸을 배배 꼬던 그 시간으로 날 데려가는 듯했다.
피아노 하나와 의자 하나만 간신히 들어가던, 베토벤과 모차르트 같은 이름이 붙은 골방 같던 피아노 방,
언제나 완벽하게 세팅된 미스코리아 사자머리에 긴 별벳 원피스 자락으로 온 학우너을 휘젖고 다니던 원장,
피아노 학원 입구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연주회 사진을 보며 저 공주님은 누구냐고 원장에게 물었다가
동일 인물인 줄 알고 너무나 놀랐던 일, 제대로 연습을 하지 않았다며 원장이 볼펜으로 손가락 마디를 톡톡 건드리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그 시간 피아노 학원의 풍경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원장이다.
어느 지방 대학의 음대를 나왔다던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관객의 뜨꺼운 환호와 기립 박수 사이에서 무대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성 연주자.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자 일순간 조용해진 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한다.
가녀린 팔을 들어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리자 피아노 소리가 부드럽게 깊게 울려 퍼진다.
한때는 그도 수많은 세계 클래식 관객의 환영과 환대를 받으며 연주 여행을 다니는 꿈을 꿨겠지.
하지만 어느 상가 건물 2측에 피아노 학원을 자리고 나처럼나처럼 말을 듣지 않는 말썽꾸러기를 혼내고
또 조금씩 나아지는 아이들의 피아노 실력을 보는 그 하루하루가 행복했을까.
삶은 바라는 모든 것을 내어주지는 않는 법 이라는 것을 그때의 젊은 그는 알았을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라는 의미의 '버킷리스트'는 2007년 할리우드 명배우 '잭 니컬슨'과 모건 플먼'이 주연한 영화
'버킷리스트'가 큰 인기를 얻은 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버킷리스트'의 어원은 '죽다'라는 뜻의 속어인 '킥 더 버킷(Kick the Bucket)'이다.
중세 시대에 죄수나 범인의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자살할 때 올라가는 양동이를 걷어차는 의미에서 유래됐다.
이토록 죽음과 가까운 단어가 또 한편 생의 의욕을 다지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니 언제나 생과 죽음의 경계는 아슬아슬하다.
영화 속 두 주인공 역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환자다.
두 사람은 병실을 뛰쳐나간 뒤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실행한다.
최고급 레스토랑과 허름한 두시골목의 문신집을 드나들고, 구형 스포츠카와 피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두 사람은 함께 만든 리스트를 위해 타비마할에서 세링게티까지 열정적인 모험을 시작한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은 무엇일까?'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최고급 샴페인과 캐비어, 비싼 스포츠카가 답이 될 수는 없다.
'삶의 방행성'을 찾는 일은 오감을 만족시키는 것과 다르다.
결국 이 질문은 근원적 자아를 대면할 때, 또 내가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때 답을 찾게 된다.
2026년 올 한 해는 '진짜 버킷리스트를 써보려 한다.
아, 물론 피아노 연습도 하면서. 최여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