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제주 4. 3 70주년에 부쳐
해외여행이 드물었던 시절
그 섬엔 어딜 가나
갓 식을 올린 젊은 부부들로 넘쳐난다
노오란 유채꽃 향기와
검은 돌하루방과
길쭉한 이파리를 넘실거리는 야자나무들
눈 덮힌 한라산의 아침은 희고
푸른 바닷가에서 지는 해는 붉어
그 섬 어디서나 사랑을 해도 좋을 듯 했다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그 바다 그 들판 그 동굴
그 풍광 좋은 섬의 산기슭을 뒤덮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그림 같던 바닷가에 흐르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못했으므로
산책을 하고 입을 맞추고
그 섬에 살고 싶다고
아름다운 섬이라고 웃고 떠들었다
입을 다문 돌에게
숨을 죽인 바람에게
그 붉은 기억을 울컥거리는 동백꽃에게
뭍에서 온 외지인들이 함부로 말했다
그때도 그랬다 함부로
그 섬에 뭍에서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
젊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들이 죽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도 죽었다
가족이었기 때문에
한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그냥 운 나쁘게 거기 있었기 때문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남아 있었기 때문에
여자와 노인과 갓난아기도 죽었다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죽었다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고 대문이 없다는 섬
평화롭고 순박한 섬
땅이 귀하고 물이 귀한 섬에서
척박한 화산섬에서
유채꽃처럼 피어났기 때문에
흐드러진 생명이었기 때문에
그 섬사람이기 때문에 죽었다
시작은 4월 3일이 아니었다
그 끝도 4월 3일이 아니었다
해방으로 인한 기대감에 부풀었기 때문에
일제에 부역했던 경찰에 다시 치안을 맡기는
미군정의 강압적 지배에
불신이 커져갔기 때문에
생필품이 부족하고 콜레라가 만연하고
대흉년이 겹쳐
아, 그저 살기가 어려워
민심이 흉흉했기 때문에
안제나 그래 왔듯 서로 의지하고 힘을 모아
헤쳐나가려 했기 때문에
아니, 어떤 죽음에는 이유가 없다
빨갱이라고
폭도라고 부르기만 하면
죽여도 됐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 죽었다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이 3분의 1이 넘었다
대부분이 뭍에서 온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글거렸던 섬의 대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물들어
고문당하고
겁탈당하고
학살당하고
그리고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 바다 그 들판 그 동굴
온 섬이 유적지 아닌 곳이 없고
수습되지 못한 살과 뼈 위에서
감자가 무락무럭 자랐다
꿀꺽꿀꺽 죽음을 삼킨 바다는
살 오른 물고기 떼를 토해 냈다
비명과 통곡조차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은 이들이 살아남아
한날한시에 제사를 올렸다
그 섬 바람 많은 섬
침묵으로 빚어진 거대한 울음덩어리
항쟁이라 할까 학살이라 할까
이름도 갖지 못하여
그저 사건이라고들 부르는
70년의 밤들로 이루어진 섬
겨울 초입 11월부터 새순이 움트는 4월까지
짠바람과 폭설을 맞으며
그 섬을 에워싸고
저 뭍을 향해 붉은 눈을 치뜨는 동백의 고향
저기 저 캄캄한 바다 한가운데
부모를 잃은 갓난아기가
백발 성성한 노인이 된
70년 세월이 묻힌
거대한 무덤 하나가
웅크리고 있다.
카페 게시글
문학
그 섬 이야기/ 이미혜
시너먼
추천 0
조회 9
23.10.09 10:46
댓글 1
다음검색
첫댓글 제주 4.3 항쟁
https://naver.me/F7CFPo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