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경당(892~942)은 사타족 출신으로 오대십국 시대 후진을 건국한 인물이다. 산서성 태원의 사타족 출신으로 부친 석소용은 이극용을 정벌한 공으로 허베이성 명주자사로 임명되었다. 어린 시절 이사원에게 인정받아 그의 사위가 되었다. 부친이 석씨 성을 쓰게 된 유래는 분명치 않다. 926년 위주 방위를 맡았고 장인과 함께 후당의 장종을 토벌하는 반군에 가담했다. 이사원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보의, 선무, 하동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명종이 죽자 933년 삼남인 이종후가 민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934년 봉상절도사 이종가에게 목숨을 잃었다. 말제 이종가는 낙양에 입성해 군대에 하사할 은상을 확보하기 위해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당연히 민심이 싸늘해졌다.
말제가 두려워한 것은 석경당이었다. 그를 태평절도사로 옮기기로 하였다. 근거지인 태원에서 떼어놓기 위한 계략이었다. 석경당은 참모들과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주상께서 죽을 때까지 태원에서 옮기지 않도록 약조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가 난을 일으키지 않으면 조정에서 출병할 것이니, 어찌 속수무책으로 길에서 죽겠는가?” 장서기 상유한이 거란족에게 원군을 요청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말하기를 “거란이 가까이 운주와 응주에 있으니 정성을 들이고 절의를 굽혀 섬기십시오. 만일 위급한 일이 있으면, 아침에 부르면 저녁에 올 것이니, 어찌 성공할 것을 근심하십니까?” 석경당은 지원의 대가로 거란의 수장을 부친으로 자신을 신으로 칭하겠다고 약조했다. 노룡 1개 도와 안문관 이북의 여러 지방을 할양하겠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거란은 크게 기뻐하며 조만간 달려가 구원하겠다고 허락했다. 거란은 5만군을 남하시켜 진양을 공격하고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후당의 말제는 현무루에 올라가 불에 타죽었다. 황후와 황태후도 뒤따랐다.
936년 석경당은 후진을 건국하고 다음해 도읍을 낙양에서 개봉으로 옮겼다. 거란은 석경당에게 “너의 기운과 풍모, 견식과 도량을 보니 참으로 중원의 주인이다. 너를 천자로 세우고자 한다”고 권해 황제로 즉위시켰다. 약체 정권의 한계로 매년 30만 필의 비단을 국호를 요로 바꾼 거란에 바쳤다. 연운 16주도 요나라에 할양했다. 현재의 베이징 주변의 영토를 넘긴 것이다. 상유한은 황제에게 ”정성을 들이고 번진을 달래며 거란을 받들고, 병졸을 훈련시키고, 농업과 양잠을 힘써서 창고를 충실히 하며 상거래를 촉진해 재물을 풍족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왕조가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도읍을 개봉으로 천도한 것도 상유한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북쪽으로는 연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장강과 회수와 통하므로 물자가 풍부하다는 이유였다.
여러 신하들이 출병해 북방의 옛 강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군대에서 자랐다. 전쟁에서 백성이 겪은 피해는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정도다. 저들의 백성이 편안하면, 우리 백성 또한 편안할 것이니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요나라에 대한 외교를 놓고 조정이 갈렸다. 성덕절도사 안중영은 오랑캐에게 아첨하는 것을 배척하는 내용의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상유한은 비밀 상소에서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군사를 기르고, 백성을 쉬게 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고, 백성에게 여력이 생기기를 기다린 연후에, 틈을 살펴서 움직인다면, 반드시 뜻을 이룰 것입니다.” 황제는 신중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942년 석경당이 죽었다. 풍도와 경연광이 논의해 국가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장자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아들 석중예 대신 제왕 석중귀가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경연광이 권력을 잡았다. 그는 대요 강경론을 주장했다. 요에 보낸 서한에서 신이라 칭하지 않았다. 요는 이를 비난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강온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이송은 “몸을 굽히는 것은 사직을 위함이다. 무슨 치욕이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946년 요는 남하해 국도 개봉을 함락시켰다. 요의 황제 야율덕광은 석중귀를 포로로 삼고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건국 11년만에 후진은 멸망했다.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561405800668102230
첫댓글 얘가 한 선택을 옹호까진 아니더라도 변론 가능할까요...?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5대 10국이라는 난세에 살면서 한 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식으로 "이해"는 할 수 있다 봅니다. 근데 이해를 하는 것과 그 사람의 행동과 선택이 불러온 결과에 대한 비판 혹은 부정적 평가를 하는 건 별개니까요.
@배달의 민족 오삼계랑 비슷한...?
@paul1117 재미(?) 있는 건, 실제로 둘이 세트로 언급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
달로(오랑캐)를 몰아낸 뒤, 우리 민족의 국가를 광복시킬 것이다. 감히 석경당 오삼계와 같은 짓을 하는자, 천하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으리!
驱除鞑虏之后,光复我民族的国家。敢有为石敬瑭、吴三桂之所为者,天下共击之!
- 1906년 《中国同盟会革命方略》 중에서 -
@배달의 민족 근데 그럴만 하긴 한...
@배달의 민족 그렇군요. 또 하나 배웠습니다.
사마씨 왕들만 장성 이북의 북방인들을 불러들였는 줄 알았더니 석경당 이라는 인물도 있었군요. 연운 16주 할양의 인과관계를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고려거란전쟁 드라마 때문에 알고리즘이 여기까지 오게되었네요.
이극용이나 석경당 모두 원래 북방인인 투르크계 사타족이라, 한족 명망가 출신이었던 사마씨와는 다르긴하죠.
중원의 황제가 되서 그랬으니 중국인 입장에서는 비난하겠지만, 얼마전까지만해도 말타고 당나라 약탈하고 다니던 애들이라 거란과 그게그거죠.
@jyni 네. 엄격히 말하면 그렇게 볼수도 있으나 이미 팔왕의난이 3세기말의 일이고 그 때 북방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혼혈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16국시대, 수당시대, 5대10국의 500년의시간을 지나는 동안 중국문화권에 동화되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니 장성 이북은 그들에게 북방의 오랑캐라는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벤트에서 주목한 것은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외국의 무장력을 끌어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장성 이남의 화북 땅 일부를 할양했으며(충격적임) 돈으로 평화를 떼우려했다는 점, 더욱이 연운 16주에 살던 당시 사람들은 전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그들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것 같고 석경당 일당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것 같아요. 이러한 상황을 몰랐는데 고려거란전쟁때문에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고려 태조께서 중원이나 만주세력의 간섭없이 한반도 내에서 후백제와 사투를 벌이는데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배경도 함께 이해할 수 있었네요.
@jyni 사타부나 초기 5호는 이전부터 중국 정권의 부용세력이라서 거란과 차이는 있습니다. 이들은 종족은 다르지만 왕조 개창 이전에도 이미 중국의 구성원이었던 존재라서 이들의 정권 탈취는 거란과 달리 외부 세력의 침공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young026 티벳이 강할때는 그쪽에 합류하기도 하고 이극용은 반란까지 일으키고 했던걸 보면 완전 부용세력은 아니고 서진이 끌어들인 남흉노와 크게 다르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거란도 당이 강성할때는 복속되었던 적도 있죠.
그 유명한 연운 16주가 석경당 때문에 거란에 넘어갔군요 잘 보고 갑니다
1. 저 16주를 넘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중화사상 때문만이 아니라 북방 유목민족을 막는데 긴요했던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그냥 넘겨줬기 때문입니다. 후대에서 손쉽게 거란이 후진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장성 안에 이미 강력한 군사거점의 구축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당대인들이 이걸 탈환해야 한다고 난리치는 것은 유목 세력을 장성 밖으로 몰아내지 않으면 국경선의 안전 보장을 확보하기 매우 어려웠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2. 일단 송대에도 저 16주의 탈환 자체는 실패했는데(이후 전연의 맹) 전연의 맹 이후에도 국경지대에서 타초곡기라고 불리우는 노략질은 계속되었습니다. 대규모 전쟁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소소한 국경분쟁은 일상이었던 거죠.
후진에서 강경파가 득세한 것은 뭘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식으로 거란이 심각하게 노략질을 하는 등의 행위를 반복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 물론 표를 올릴 때는 국가의 치욕이니 뭐니 명분론 들고 오지만..)
마지막으로.. 석경당이 애초에 자기 왕조 창출할 역량이나 준비가 있었냐면.. 그건 좀.....
그냥 개인의 권력욕구가 가장 크게 작동하긴 했죠.. 빈말로도 석경당이 현실주의자이거나 정치적 감각이 좋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재물만 줘도 충분한 전략을 고용할 수 있는 것을 황제 되겠다고 "너무 과하게" 퍼줬죠.
반대의 경우 서희가 아예 영역으로 확보한 강동 6주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선으로 동작합니다. 유명한 홍화진과 통주 / 귀주 / 곽주 등 개경과 서경 방어에 가장 중요한 1차 방어선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델카이저 그러네요. 연운16주는 장성 이남 교두보로서 매우 가치 높은 곳
우리로 치면 서경 이북 서북면 6주를 거란에게 내준꼴
6주 먹고도 처절히 싸운 마당에 방어가 잘 될리가...
이렇게보니 1차때 할양론 운운한건 ㄹㅇ 역적질이었네요
저 상유한은 거의 거란스파이 수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