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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통화 행 기차에 오르며
비암산을 내려올 때 만난 중국동포들은 맛있는 점심에 대해 한 결 같이 ‘순이 랭면’을 추천해주었다. 왜 순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대림동 조선족 골목에서도 본 간판이 바로 이 순이랭면이었었다. 이곳에서 제일 눈에 많이 띤 곳은 순대국 다음의 냉면집이다. 어제 백두산을 다녀와서 연길 버스정류장에 내려 들른 곳도 바로 그 옆에 위치한 유명타하는 냉면집이었는데 오늘도 냉면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냉면이 화제였는데 오나가나 요즘 냉면이 한국 대표음식인 양 위세가 대단하다. 실제 냉면은 이 북방 백두산 근처에서나 유명하지 한족들은 냉면을 잘 모르고 맛의 진미도 잘 못 느끼는 것같이 보인다.
그런데 이곳 냉면은 장난이 아니다. 거의 세숫대야만 하게 나온다. 보통이 18위안 특이 22위안인데 어제 22위안짜리를 시켰는데 고기 토마토 어묵등등 넣을 것을 다 쓸어 넣어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참이다. 택시기사가 ‘순이랭면’ 건물 앞에 바로 내려주었다. 워낙 유명해서인지 그냥 한국말인데도 그는 바로 알아들었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나도 세숫대야를 또 맞이했다. 이번에는 보통,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꿔바로우’라는 돼지튀김(우리 탕수육과 유사)을 냉면에 곁들여 먹는다. 그 위대함이라니. 이는 위의 대용량을 말한다.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다. 아직도 통화를 갈 차 시각 3시40분까지는 2시간이나 남았다. 나는 용정 시장 통을 찾았다. 길거리 사람들이 우리말을 써 어려움이 없었다. 용정에 조선동포가 60%정도라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보기에 노년층은 거의 100%이고 젊은 층은 반 정도 되지 않나 싶다. 젊은 층이라는 것도 우리말을 잘 쓰지 못해 그렇지 우리 동포라는 생각을 나는 한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의무적으로 중국말을 썼던 세대들이고 노년층은 어릴 적 우리말을 쓴 사람들이다. 장터는 거의 우리 시골동네 수준이었다. 규모도 그러했지만 널린 품목들이 또 그러했다.
나는 걸어서 용정 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심양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한다. 그러니까 용정이 시작점이며 또 종착지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연길에서 심양까지 고속열차를 타면 4시간 반이면 당도하는데 가는 루트가 전혀 다르다. 나중에 짐작한 것이지만 일본 놈들이 내 고향 안양에서도 채석장이니 방직회사에 철길을 놓은 것 같이 임산자원을 착출하기 위해 백두산 주변을 샅샅이 훑는 정거장들을 일찍이 만들어 이 수송로가 심양에 이르도록 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지난 번 여행을 한 대만도 마찬가지, 대만은 철길 따라 연결된 그 폐광촌을 관광지대로 재생시켜 놓았었다. 대단한 일본 놈들이다.
그런데 이곳 용정에서 기차를 타고 갈 시간이 무려 10시간이다. 그렇다고 집안에 당도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서 또 줄잡아 2시간은 가야 집안이 나온다. 내가 장장한 시간을 견디며 집안을 가려 하는지는 여러분들도 아마 잘 알 것이다. 바로 고구려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그렇게 무리해서 거기를 꼭 가야하는가 되물을지 모르겠다. 맞다 내가 생각해도 무리다. 하지만 나의 이런 구상은 보다 큰 의미로부터다. 광개토대왕을 만나러 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애써 그곳을 먼저 정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백두산은 가도 거기는 아예 들를 생각을 안 하든지 가더라도 대부분 백두산 서파 등정 길에 잠시 들러 후딱 보고 이내 총총걸음으로 발길을 돌린다.
나는 그게 실로 못마땅했다. 누구는 무슨 개소리야 할지 모르지만 나의 뚝심은 바로 그런 거다. 우직함은 고구려의 상징이다. 나도 그 우직함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돈키호테가 바로 이렇지 않았던가. 내가 평소 좋아 하는 말은 ‘생각은 햄릿처럼 행동은 돈키호테처럼’ 이라는 말이다. 앞뒤 생각 없이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돈키호테는 조금 앞서 탄생한 사색적이고 우유부단한 햄릿과 대비돼 인물 유형의 기준이 되고 있다. 뜻이 있어 의미를 갖는다면 바로 돌격 앞으로! 그만한 가치가 어딘가 하고 나는 그렇게 주장하는 바이다. 그럼 돈키호테의 이런 행동이 과연 괜찮은 걸까?
나는 누구든 돈키호테 같은 삶을 동경한다고 본다. 원하는 것에 미쳐서 살다가 행복하게 죽는 건데, 그보다 더한 삶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뜻은 좋은 데 그게 과연 될까! 하는 식으로 돈키호테를 신봉하기는커녕 절대 그를 신뢰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스꽝스런 몰골의 대명사로 낙인을 찍어두고 있다. 돈키호테의 본 이름은 ‘알론소 퀴아노’다. 그는 많은 기사소설에 심취해 머리가 돌았으며, 책의 내용대로 행하려는 순진함(?)은 이미 지나가버린 중세의 기사를 모델로 삼았으니 현실에서는 미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 아래 이글거리는 라 만차(La Mancha) 지방의 들판을 걷고 있는 그의 머리는 작동을 멈추니, 이내 우리가 알고 있는 엉뚱하고 재미있는 돈키호테가 된다. 머리를 채웠던 이성은 열에 끓더니 말라버리고, 대신 열정으로 채워진 심장은 힘을 받아 삶을 불사른다.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양떼를 백만 군졸(軍卒)로 착각해 돌격하며, 비를 피하기 위해 놋대야를 둘러 쓴 이발사를 보고 황금 투구를 쓴 기사(騎士)라고 공격한다. 풍차를 흉악한 거인으로 몰아 달려들고, 길 가는 수도사들에게 공주님 납치범이니 응징한다고 덤비는 등 그의 황당한 좌충우돌 행각은 끝날 줄 모른다.
누구든 이 비정상을 제 정신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이 괴상망측한 황당함은 바로 사회라는 제한 때문 더욱 그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이점을 노려 역발상으로 풍자적으로 글을 묘사하였을 것인데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일정한 규칙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선들이 존재한다. 과하게 넘어버리면 사회에 속할 수 는 없는 것이다. 자칫 자기당착이나 과대망상으로 취급돼 사회에서 왕따 내지 이탈되기 십상이다. 내가 돈키호테와 엇비슷하다 싶은 것은 바로 이 점일지 모른다. 뜻 자체도 자기당착이기 쉽지만 아무튼 정의를 찾자는 돈키호테나 고구려를 찾자는 나나 취지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뜻이 아닌가. 하지만 엉뚱한 행동으로 뜻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봉착하고 만 점에 있어서는 거의 다를 바 없다.
사실 고구려를 보자고 내가 집안을 향할 때 무턱대고 길을 나선 것은 아니다. 짐을 줄여 배낭을 하나 들고 가자하는 생각부터서 나로선 꽤 치밀했다. 짐을 줄이기 위해 우선 나는 외출복 바지 대신 잠잘 때 입는 츄리닝을 아예 외출복으로 선정했다. 한마디로 겸용으로 쓰자는 속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츄리닝을 외출복으로 입고나선다면 고개를 갸우뚱 할지 모르지만 이곳은 바로 중국이 아닌가. 14억 인구라지만 나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 또한 츄리닝 차림으로 흔히들 어디든 간다는 현실적 상황이 나에게는 큰 보탬이었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나는 홍콩이나 상해에서 나도 그들처럼 런닝 차림으로 한번 활보하고 싶다. 그리고 간단한 세면도구와 화장지를 챙겨 넣고 가서 볼 유적지 사진을 준비했으며 휴대폰 배터리를 마저 챙겼었다.
물론 중국어는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 그곳은 초행이며 도착시간이 깜깜한 오밤중이라 도착해서 어찌 할 것인지 하다못해 잘 숙소조차 여전히 깜깜하다는 것 등등은 무데뽀 돈키호테를 연상시키기 꼭 맞으며 무리함이 크기 때문 계획할 당시의 호기는 사라지고 닥칠수록 두려움은 밀려왔다. 거기에 나는 혼자가 아닌가. 이는 황당함이고 큰 경을 치룰 수도 있는 상황이다. 앞선 글에서 여행은 돈키호테 같은 발상이 필요하다는 둥 돈키호테 력이 창조의 시발 운운하며 떠든 괜한 칭송 때문 애먼 내가 죽어 나자빠질 판국이다.
침대칸 선택은 그나마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는 순전히 용정에 중국동포 역무원 덕분이다. 그런데 훤한 대낮에 잡이 올 리 없다. 그렇다고 따로 할 일도 없어 그냥 누워 있는데 옆에 자리한 중국청년의 조짐이 좋지가 않았다. 한 둘 녀석에게 다녀가더니 나중에는 떼거지로 몰려 왔다. 그 중 한 놈은 당차게 내게 손짓으로 제안을 해왔다. 표를 보이는 게 자기자리하고 바꾸자는 것이 아닌가. 미친놈도 저런 미친놈이 있나 싶었다. 그냥 의자에 걸터앉는 옆 동네 칸 좌석하고 맞바꾸자 하니 아니 그런가. 화가 낫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생글생글 웃으며 NO!하고 단호하게 대꾸해주었다. 그런데 그후부터서 문제가 발생했다. 녀석들이 맥주 한 박스를 들고 와서는 백산이라는 역( 통화 바로 전 역)에 도착할 때까지 나의 단호한 표현에 대해 농성이라도 하는 듯 쉼 없이 떠들고 마시며 흥청거렸다. 참 한심한 나라가 중국이다 싶었다. 침대칸이라 하면 잠을 자는 곳인데 어느 누구 한 사람 그들을 조용히 하라고 따독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눈을 감았지만 중국 특유의 말투 한 옥타브 오른 왕왕 소리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도착지 통화라는 곳은 과연 어느 동네일까. 집안을 가자면 꼭 들려야 하는 이곳은 지난번 장춘 역에서도 택시기사가 통화를 간다고 외장을 쳤었다. 사실 통화라 하는 곳은 익히 내가 아는 어느 한 사실로부터 막연하지 않으며 두렵지는 않다. 서간도의 중심지역인 통화는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곳이다. 특히 1869년(고종6) 대기근 이후 많은 평안도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 이주하였는데, 1897년(광무 1)에 통화·환인·관전 등지로 이주한 사람은 이미 37,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용정이 북간도라 한다면 통화는 서간도의 중심인 셈이다.
거기에 1896년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제천 의병 계열 인물들이 평안도 지역을 경유하여 통화현 오도구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이 지역이 항일운동 기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는데 1910년 강제병합 이후 망명자는 더욱 늘어나 왕산 허위(許蔿, 1855∼1908)의 형 성산 허겸(許蒹, 1851∼1939)이 허위의 처와 자식 등 일가족을 거느리고 1912년에 통화현으로 망명했다고 전한다. 나도 한 가족을 잘 알고 있다. 내 친구 이종걸의 할아버지가 바로 그 분이다. 그러니까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된 직후인 1910년 12월, 어느 일가 50여명이 압록강을 건넌다. 말 100여필, 마차 수십대가 따르는 대규모 이주였다. 이들은 급하게 집안의 전답과 가옥을 팔아치워 마련한 40만원의 독립자금을 들고 만주로 향했다. 요즘 가치로는 6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이어 안동의 이상룡·김동삼 집안이 그 뒤따랐다. 이상룡은 1911년 1월 6일, 홀로 고향을 떠나 신의주에 머물면서 전후 사정을 살핀 다음 가족에게 연락하였다. 그 며칠 후인 50여 가족단이 신의주에 도착하자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단동(丹東)에서 마차 두 대를 마련하여 새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섰다. 긴 망명의 여로 끝에 영춘원(永春源)에 잠시 머물렀다. 먼저 도착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선생 등이 20리 떨어진 추가가(鄒家街)에 살면서 이상룡을 찾아와 앞일을 의논하였다. 그분들뿐 아니라 매일같이 이상룡을 찾아드는 동포들이 줄을 잇자, 그곳 현지인들은 이들 조선의 망명 가족단을 경계했다.
<이전의 조선인들은 남부여대로 산전박토나 화전을 일궈 감자나 심어 연명했는데, 이번에 오는 조선인들은 마차 수대나 말 수십 필에 살림을 가득 실어 오는 걸 보면, 이는 반드시 일본과 야합하여 우리 중국을 치러 온 게 분명하니 빨리 조선인들을 몰아내 주시오.>
이러한 현지인의 고발에 따라 청국 관리와 군경 300명이 이 마을에 들이닥쳐 조선 망명 이주민의 집을 일일이 조사하고 "너희 나라로 도로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그런 뒤 각지에 군사를 시켜 수비케 하고, 조선인에게는 절대로 집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여 망명객들은 한동안 노숙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이상룡은 중화민국 국회와 봉천성 유하현 지사에 진정하여 조선인의 거주를 허용해 줄 것과 중국 민적(民籍)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곡히 청원하였다한다.
<저희들은 적인(敵人, 일본인) 손에 욕을 당하며 죽느니, 차라리 군자의 뜰에서 영광스럽게 죽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존엄을 무릅쓰고 한 목소리로 호소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합하(閤下, 여기서는 유하현 지사)께옵서는 애타게 울부짖는 신들의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특별히 물에서 건져주는 인정(仁政)을 베풀어 주소서. - <석주유고(石洲遺稿)> 상권 549~552쪽 축약>
다행히 이회영 집안과 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선대부터 깊은 세교가 있어 이에 이회영은 총리대신 위안스카이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고, 이상룡은 유하현 지사에게 간곡히 청원한 끝에 동포들의 입적과 토지 매매 문제가 원활히 해결되었다한다. 이로써 독립지도자들은 통화, 회인, 단동 지방에 여관을 설치하여 동지들의 활동과 국내에서 뒤따라오는 망명객들의 이주를 도울 수 있었다. 이들은 독립군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경학사 신흥강습소 등 수십개의 민족교육기관을 만주에 설립하고, 상하이와 만주를 오가며 임시정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일가의 맏형인 우당 이회영 선생은 1932년 일본 관동군 사령관 암살과 한중 아나키스트 공동유격대 결성을 위해 만주로 향하던 중 다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숨진다. 향년 66세였다. 바로 그 통화다. 통화에서 북쪽 유하를 향해 올라가면 중간쯤에 삼원포가 있는데, 그 서쪽에 우당 이회영 일가가 정착했던 추가가가 있다.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합니하, 지금은 광화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통화에서 출발하면 서광촌(새벽빛이 비치는 마을)이란 마을을 지나 심산유곡에 있다고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0년간 졸업생 3500여명을 배출해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나는 문득 이놈의 기차가 10시간 동안 도대체 어디를 지나가는 지가 궁금해졌다. 이름을 안다고 알 것은 아니고 바로 그 독립군의 소재지가 있는가 싶어서였다. 그래서 지나가는 승무원을 불렀다. 그는 영어를 전혀 못 알아들었는데 딱 두 단어는 알고 있었다. next와 name이란 단어 ‘룡정 next next next...the end 선양, station name’ 손빗을 하며 반복 말을 하자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자기가 갖고 있는 정차 역 시각과 이름이 적힌 작은 쪽지를 가져 왔다. 나는 사진을 바로 찍었다. 그런데 암만 봐도 내가 찾는 이름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들은 통화⟶삼원포⟶고산자⟶합니하⟶집안 ━ 신흥무관학교, 순으로 이어진 길목으로 이 기차역과는 무관하다.
지루하고 고된 시간이 한참을 지났다. 술을 박스 채 마시던 녀석들은 곪아 떨어져 코를 곤다. 이제는 그 코고는 소리 때문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더니 점점 기차 밖에 불빛이 간간이 비추기 시작한다. 어느 도시가 가까워진 것이다. 어딜까. 시간을 보았다. 시간상으로는 바로 통화 전 도시, 백산이다. 그렇다면 저 녀석들이 내려야 할 곳인데 인기척이 없다. 문득 백산이란 곳이 혹여 백두산에서 높다는 의미인 頭만 뺀 백두산 근처가 아닌가 싶어진다.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인터넷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통화에서 백산시까지 거리는 56km정도다. 백산시내를 지나면서 매캐한 연기와 함께 커다란 굴뚝이 보이기 시작하고 가끔 나타나는 쌓여있는 석탄 언덕이 나오고 커다란 굴뚝이 보이는데 화력발전소다 백산시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남동부에 있는 도시이다. 동쪽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서쪽으로 퉁화[通化]와 맞닿아 있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국경을 이룬다. 1959년에 훈장시[渾江市]가 되면서 지린성에 포함되었다. 1994년 1월 바이산[白山]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산이 많은 지형이며, 지린성에서 가장 기온이 낮은 도시이다. 연평균 기온 4.6℃, 연평균 강수량 883.4mm이다. 일교차가 매우 심하며, 여름은 짧고 비가 많고, 겨울은 길고 건조하다. 백두산(白頭山)을 포함한 창바이산자연보호구[長白山自然保護區]가 있다.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고 풍경이 아름다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퉁화시 ~ 백산시 ~ 임강시(중강진) ~ 압록강 600리길 ~ (김형직군) ~ (김정숙군) ~ (삼수) ~ (갑산) ~ 장백현(혜산시) ( )는 강건너 북한 지명, 거 리 : 456km>
백산에서 조금만 가면 바로 혜산시란 말이 아닌가. 정말 아쉬운 땅들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김일성과 모택동은 압록강 수계를 북.중 국경으로 한다는 합의에 따라 백두정간의 산줄기와 국내성(집안). 임강. 장백현 3개 도시가 묻혀 그야말로 도매금으로 넘어 간 것이다. 백두산 낙원봉에서 발원이 된 백두정간은 압록강을 따라 단동 시 못 미쳐 박작성까지 뻩어내린 큰 산줄기는 한반도가 차지할 정도의 국경 라인이었다. 정말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나는 몰지각한 녀석들이지만 그래도 녀석들에게 착한 면을 보여주기로 했다. 툭툭 쳤더니 부스스 한 놈이 일어난다. 그리고 녀석은 바로 알아차렸다. 그런데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내리니 시끌벅적하여 자연 알 상황이다. 그리고 30분도 채 안되어 도착한 통화역, 도착 시각 1시 14분, 역 앞에만 불빛이 보일 뿐 온 사방이 캄캄하다. 백산 시와는 전혀 다른 역 풍경에 이내 기가 죽었다. 이 무심한 시각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외장치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 이른 바 번개차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책을 안 잡히려 그 동네 사람인양 무심한 척 지나쳐 역 광장으로 나왔다. 츄리닝 복장이 많은 도움을 준다 싶었다. 중국에서는 아닌 척 해도 영락없이 한국인을 금세 알아본다. 그러면서 성가시게 군 적도 많았다. 이번에는 전혀 그런 낌새를 못 차린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다.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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