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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자락의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산자락
다산 5길(문안산길) 일시 : 2014.03.05. 인원 : 나 홀로 거리 : 17.3km 시간 : 6시간
벌써 걸었어야 할 이 길을 점점 더 농도가 진해져만 가는 미세먼지 때문에 미루다 오늘 날씨가 좋아진다는 뉴스를 접하고 길을 떠난다. 며칠 전 다친 발목이 시원치 않지만 천천히 걸어볼 욕심으로 나선 것이다. 운길산역에 도착한 것이 9시 15분. 거리가 좀 먼 관계로 서둘러가야 된다고 마음만 급했다. 운길산역에서 수종사 가는 길로 잠시 걷다가 이내 도로로 나왔다. 골목부터 이정표는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도보여행자들에게 숲길, 산길은 걱정되지 않는다. 갈림길에서만 잘 살피며 가면 길을 잊을 염려가 없기때문이다. 그런데, 마을길, 특히 골목을 도는 길은 틀리다. 중요 문화재나 격동의 역사가 내재 되어있는 길, 또는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호젓한 길이라면 또한 당연히 그 방향으로 길을 표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걷도록 유도해야한다.
둘레길, 올레길 등등의 길들은 마을길을 지날 때 포장길 위나 벽에 페인트로 예쁘게 화살표를 장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표시들은 단순한 안내를 떠나 그 자체가 장식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다산길에는 그런 안내가 없다. 그냥 작은 이정표를 때론 너무 많게, 때론 궁금하게, 그리고 시점에서 순방향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게, 그리고 때론 이 사람들에게도 조차 등을 보이게 서있는 것이 많다. 우선 운길산역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길부터 확 눈에 들어오질 않고 특히 논과 논 사이 수로를 이용하여 데크로 길을 만들었는데 이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길을 좌측으로 역이 있는 방향으로 가다가 운길산 수종사로 가는 길을 따르다 우측으로 굽어 가는데 어떤 의미도 없는 길이라면 굳이 이렇게 길을 돌려 빙 돌아오기보다 바로도로를 따르게 해야 시간도 절약하고 길 찾기도 쉬워질 것이란 생각이다.
아무튼, 수종사 입구에서 이덕형선생 별서 터까지 길지 않은 길을 가는데 오목잡골의 나지막한 능선을 넘어서면 황갑골 계곡상부로 난 길을 따르다보면 작은 수로를 건너는 다리가 있고 슬로시티길 이정표가 서있다. 여기서 다산길은 헤어져 지방도로방향으로 내려가고 슬로시티 길은 변협 장군 묘로 진행하는데 다산길을 따라 내려가니 도로가 나오고 도로를 몇 십 미터 걸으니 다시 산 아래로 난 길을 따르란다. 이 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슬로시티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허허 웃음도 나오고 일종에 분노도 슬며시 치미는데 다산길과 변협장군묘역 갈림길에서 처음부터 다산길도 함께 가도록 유도해야 모든 면에서 좋은 길이 될 것을~
변협(邊協) 장군은 1555년(명종 10년)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해남현감으로 왜구를 격파했으며 1587년(선조 20년) 전라우방어사로 녹도·가리포의 왜구를 격퇴했다. 죽은 지 2년 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는데, 선조는 변협과 같은 장수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나중에 좌의정에 추증됐다. 그의 아들 변응성(邊應星)은 임진왜란 때 이천부사로 여주목사 원호(元豪)와 협력하여 남한강 중류 지역에서 적의 보급로 경비대를 섬멸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을 때 용진과 여주 파사 성을 수비했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암튼 다시 길을 재촉하여 가다보니 송촌초등학교로 올라가는 길로 안내표지가 서있어 이를 따른다. 초등학교를 오른쪽에 두고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계곡사거리 도로에 이정표가 나타나고 이를 따라 가다보면 다시 이정표가 사라지고 삼거리에서 헤매는데 오른쪽으로 가야하는지 왼쪽으로 가야 하는지 종잡을 수 가없다. 정면에 있는 고가를 뒤로하고 돌아서서보면 정면에 보이는 집 오른쪽 기둥 뒤로 이정표가 나 여기 있지롱 하고 혀를 날름하며 서있다. 기가 막힌다. 많은 사람들이 후기에 써 놓았지만 이렇게 생각 없이 세워진 이정표는 웃긴다.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정치인으로 동인(東人)과 남인(南人)의 일원이다. 같은 동인이었다가 북인이 된 이이첨은 그와 10촌 형제간이었다. 본관은 광주,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이웃으로 지내온 절친한 친구 이항복과의 평생에 걸친 우정은 생전부터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 화 되었다. 한성부 출신이다. 이 별서 터는 한음이 운길산 자락에 있는 이 곳 대아당에서 숨을 거두고 강 건너 목왕리 야산자락에 묻힌 것이다. 나라의 충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 드신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세상의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아버지를 모시다가 자신도 이곳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별서 터와 돌담장은 가지런히 정돈이 되어 있고 두 개의 정자 중 한 개는 복원되어 있었고 한음 이덕형 선생이 타던 말의 조각상이 새로 만들어져 있었다. 충신의 절개가 400년 지난 지금에도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고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은행나무의 밑둥치에서 두 개의 은행나무가 다시 자라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옛 나무도 관리를 잘 해서 잎이나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옛날 말에서 내릴 때 사용했던 디딤돌을 "하마석(下馬石)"이라고 하는데 하마석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니 좌측으로 표지기가 걸려있어 이를 따른다. 별서지 내에도 눈에 띄는 안내표지는 없고 여기쯤 이정표가 있으려니 짐작하고 내려오니 길을 홍수로 찾았을 뿐이다. 길은 다시 산으로 향하고 능선에서 오른쪽 능선을 따라 국도를 향한다.
국도를 만나는 곳, 다시 웃었다. 나는 정면으로 국도를 보면서 내려왔는데, 국도에 서 있는 이정표의 화살표는 그냥 국도의 오른편과 왼편을 향해 있었다. 만일, 역주행으로 이곳까지 온 사람들은 당연히 이 화살표를 보며 운길산역으로 국도를 따라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도에서 잠시 진행을 멈추고 대성리로 향하는 국도변까지 나와서 물 1병과 막걸리 한 병을 사가지고 다시 원위치 한다. 이 국도에서 문안산 코스로 올라가는 새재기 고개까지도 7km인데, 류량선생 묘로 들어가는 마을길까지 4km는 국도를 따라 걸어야 한다. 도로에 약 1m정도의 곁길만 만들어도 편안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차량 주행에 신경 쓰며 걸어야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중간에 잠시 농장입구에서 도로를 벗어나 개울 옆길로 걸을 수 있어 약 1km정도 도로를 벗어나니 수월한 길이다. 그렇게 잠시 도로를 벗어난 길을 걷고 다시 송촌3교를 건너 국도로 나와 송촌교를 지났고, 시우 3교를 건너 조금 걸으니 시우리 마을 표석을 지나 시우 2교를 건너자마자 길은 갈라지는데 국도를 그대로 따라가면 머치골을 지나 고개 넘어 월문리로 가는 길이다.
시우리 교회 앞에서 좌측 길을 취하여 진행한다. 여기서 류량선생 묘역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고려 말 조선 초기 문신인 류량(柳亮: 1355~1416)의 묘이다. 류량은 고려 밀직사(密直使) 계조(繼祖)의 아들이고, 자는 명중(明仲), 본관은 문화(文化),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조전서(吏曹典書)를 역임하였으며, 조선왕조 개국에 협력한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404년에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예문관 대제학도 겸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ㆍ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413년 부원군에 오르고 1415년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했다. 조선왕조의 건립 과정에서 군사 활동과 왕조의 초기 제도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한다. 유량선생 신도비를 지나 걸어가다 보면 송어횟집을 좌측에 두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데 고갯마루에서 점심으로 가져온 바나나 6개 중 세 개를 먹으며 막걸리 반병도 함께 마신다. 고개를 내려서는데 재제기 마을이다. 마을전체가 별장식으로 지어졌고 촬영소도 있다.
이제부터 새재기 고개까지는 마을안길이다. 다시 20여분 걸어 오르니 고개와 이정표가 보였다. 이제부터는 산을 올라야 하기에 여기서 나머지 바나나와 막걸리를 마시고 잠시 쉬다가 출발한다. 잠시 걸어 올라가니 정상까지 아래와 다른 거리를 표기한 산림청 이정표가 보였다. 능선을 따라 4km를 걸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발목이 약간 시큰거리지만 안갈 수도 없어 출발하는데 오름 길에서는 무리 없이 오른다. 이미 12km 가까이 걸어 왔는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잠시 걸어 올라가면서 뒤돌아보면 고래산이 뾰족하게 보이고 그 아래 해비치CC 필드가 보인다. 세 번째 봉우리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내려다보면 영화촬영소가 보이는데 아주 오래전 다녀갔던 곳이다. 바람이 점점 세게 불어온다. 마침 날씨도 더워지는데 상쾌한 기분으로 능선 길을 걷는다. 걷다가 처음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방금 물을 마시고 걸어서 차한잔하라는 권유에 감사를 표하고 그대로 통과한다.
능선 상에서 조망은 참 좋았다. 창현리 고속도로 진입로부근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있고 오른쪽 북한강 푸른 물길에 눈길을 던지는 재미도 일품이다. 첫 번째 정상 헬기장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잠시 걸으니 문안산 정상. 정상에서니 북한강 건너 멀리 용문산이 백운봉이 나에게 눈길을 보내고, 더 멀리 좌측으로 봉미산이 빼어난 모습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있다. 마석 쪽으로 눈을 돌리면 천마산 아래 여기저기 아파트 숲을 이룬 화도읍 일대가 시원하게보이고, 아주 작게 보이지만 천마산 터널과 하얀 선으로 역사가 보인다. 오늘 저곳까지 가야하는 몸이다. 정상에서 주변 경관에 취하여 한참을 쉬다가 하산을 시작한다. 아픈 발목에 신경이 쓰여 조심조심 걷는다.
30여분 내려오니 인공폭포 시작점이고 바위를 돌아서 잠시 더 내려가면 춘천고속도로 서종대교가 가까이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사유지라 돌아가라는 묘역을 빙글 돌아, 인도하는 길을 따르니, 하이마트 모텔이 보였고, 도로가 있었다. 도로를 따라 잠시 대성리 방향으로 걷다가 좌측의 하수도 정수장으로 방향을 바꿨고,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피아노폭포가 보였다. 그리고 5코스 종점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났다. 여기서 폭포와 화장실 사진을 담고 관리실에 버스시간을 물어보니 15시경에 있단다. 시간을 보니 거의 올 때가 되어 잠시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한다. 냉큼 올라타고 잠시 졸다보니 마석역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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