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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청 최초의 수녀회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의 초청과 정착
1. 블랑 주교의 수녀회 초청
1854년경 메스트르(J.A. Maistre, 李. 1808-1857) 신부가 조선에서 처음 시작했던 고아구제 사업(영해회 또는 성영회)은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개항 이후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블랑 주교는 1885년 3월 서울 곤당골(지금의 을지로 1가)에 집 한 채를 구입하여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고아원은 곧 번창하여 설립된 직후에 39명이었던 원아 수가 1886년에는 80명에 이르렀다.
한편 서울에 고아원이 설립된 지 4개월 후인 1885년 7월 2일 블랑 주교는 종로의 동골(지금의 관철동)에 큰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설립하였다. 설립 직후 양로원에는 예상보다 많은 무의탁 노인들이 모여들면서 신청자들을 전부 다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블랑 주교는 고아원과 양로원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이 시설들을 보다 충실하게 운영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심하였다.
‘지난 3월 불안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울에 고아원을 설치했습니다. 그 후 5개월 동안 39명의 어린이들을 받았는데, 그중 13명은 대세를 받고 사망했으며, 지금 26명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유모를 구할 수 있고, 또 한 집에 너무 많은 어린이를 모아 놓음으로써 비신자들의 눈총을 받거나 공연한 의구심을 자극할 염려만 없다면 어린이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좀 더 자유가 있고, 이 고아원을 맡아 줄 몇 명의 수녀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처럼 수녀회가 고아원과 양로원의 운영을 맡아 주기를 고대하였던 블랑 주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Soeurs de Saint Paul de Chartres)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수녀회는 1696년 프랑스의 샤르트르 시 인근 러버빌-라-셔날(Levesville -la-Chenard)이라는 작은 마을의 본당 신부였던 쇼베(L. Chauvet)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수녀회는 동아시아 선교 활동에 눈을 돌려 1848년에는 흥콩, I860년에는 베트남, 1878년에는 일본에 수녀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블랑 주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과 환자 방문 등을 중심으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어 고아원과 양로원의 운영에 적격이라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게다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조선과 가까운 홍콩, 베트남,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분원을 설치하기가 용이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 블랑 주교는 1887년 7월 26일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총장 라 크루아(La Croix) 수녀에게 수녀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조선 정부의 호의적인 대우를 이용하여 지난 4, 5년간 우리는 신자나 비신자를 막론하고 조선 사람들이 겪는 큰 곤란을 덜어주기 위해, 또 우리가 도와주지 않을 경우에 길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70세 이상 남녀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설립 당시에는 33명을 정원으로 하였는데, 현재는 40명 이상입니다. 양로원을 설립하는 동시에 우리는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불쌍한 고아들의 영혼과 육신을 구하기 위해 보육원을 시작하였습니다. 원아의 수는 현재 100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더 큰 사업체를 운영할 능력이 있었더라면 조선 사람으로만 구성된 직원의 수는 두 배로 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남아들과 여아들을 따로 분리해야만 했으며, 건물도 두 배가 있어야 하고 비용도 더 듭니다.
여기에 종사하는 남녀 신자들의 좋은 뜻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고쳐야 할 점들도 많고 개선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훌륭한 정신과 열성과 애덕의 소유자로서 자신들이 활동하는 선교지 주교들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수녀들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총장 수녀님께 우리의 어려운 입장을 고려하시어 우리에게 많은 수녀들을 보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가능한 한 속히 저의 이 청을 받아들여 주실 것을 감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분원이 코친차이나, 홍콩, 그리고 일본과 같은 가까운 지역에도 있기 때문에 제가 제의하는 새 본원 신설은 매우 용이 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녀님들에게 진료소도 병설할 수 있는 양로원의 관리를 맡기고, 두 개의 건물로 되어 있는 보육원을 전적으로 맡기고 싶은데 원하신다면 이것을 하나로 합쳐도 좋겠습니다. 물론 수녀님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새 건물을 신축하는 동안 우리 교회에 속한 집을 한 채 제공하겠습니다‘(블랑 주교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 회 총장에게 보낸 1887년 7월 26일자 서한).
블랑 주교는 양로원과 고아원의 운영 상황과 어려움을 말하면서 수녀들의 봉사가 절실함을 피력하였다. 또한 양로원과 고아원의 운영을 수녀회에 전적으로 위임하고, 진료소를 병설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수녀회의 활동에 대한 지원도 약속하였다. 이 편지는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를 통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전달되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 회에서는 블랑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으로 파견할 수녀로 자카리아(Zacharie Heurtault) 수녀와 에스텔 (Estelle West) 수녀를 선발하였다. 라 크루아 총장 수녀는 그들과 함께 베트남 사이공 수녀원의 두 중국인 수련 수녀들을 조선에 보내기로 하고, 이러한 사실을 1888년 5월 초에 블랑 주교에게 정식으로 통보하였다. 자카리아 수녀와 에스텔 수녀는 당시 파리에 있던 뮈텔 신부로부터 한국어 사전, 문법책 등을 받았고, 조선에 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출발 준비를 마친 그들은 1888년 6월3일 마르세유에서 조선으로의 긴 여정에 올랐고, 6월 29일 사이공에 도착하여 중국인 비르지니(Virginie Axung), 프란치스카(Francisa Si Mouille) 수녀와 합류하였다. 자카리아 수녀 일행이 7월 22일 제물포항에 상륙하여 새로운 선교지인 조선에 첫발을 내딛음으로써 조선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수녀회는 샤르트르 모원과 사이공 관구의 재정적 도움을 받다가 1891년부터는 관구로 승격된 일본 관구에 속하게 되었다. 일본 관구의 관구장 마리 오귀스타(Marie Augusta) 수녀는 매년 정기적으로 조선의 수녀원을 방문하였고, 파악한 내용을 모원에 보고하여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의 수녀원은 일본 관구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직접 모원의 총장 수녀와 연락하기도 하였다.
2. 수녀회의 정착
조선 대목구에서는 입국한 수녀들을 위해 서울의 정동에 임시 수녀원을 마련하였다. 임시 수녀원은 조선식 가옥으로, 원래는 교구 경리 책임자인 프와넬 신부의 숙소와 인쇄소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1887년 11월 프와넬 신부가 종현으로 거처를 옮기고, 1888년에 인쇄소도 종현으로 이전되었다. 교구에서는 그 집을 매매하려 하였는데, 수녀들을 파견하겠다는 라크루아 수녀의 회신을 받고 수녀들의 임시 수녀원으로 정하였다.
수녀들이 임시 수녀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동안 교구에서는 종현의 고아원 구내에 수녀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할 곳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프와넬 신부는 고아원의 남아 숙소와 여아 숙소 사이에 있는 낡은 사랑채 건물을 수녀원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건물의 수리가 끝나자 수녀회는 1888년 9월 7일 정동에서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너무 낡고 협소하여 수녀들이 생활에 불편을 겪었기 때문에 수녀원을 신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수녀원 건축 공사에 착수하였고, 목조 2층의 양옥 건물을 완공하여 1889년 9월 8일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수녀원 시설을 확장하였으나 고아원의 원아들과 수녀 및 수련자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면서 건물이 비좁아져 전염병 환자가 발생해도 병자를 격리시켜 치료할 방이 부족하였다. 이에 1897년 8월부터 수녀원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공사를 마무리한 후 1900년 9월 8일에 축성하였다.
이처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조선에 정착하는 데는 수녀원 지도 신부들의 역할이 컸다. 처음 수녀원의 지도 신부로 임명된 이는 코스트 신부였다. 그는 수녀원 경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여 수녀회에 영적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고해성사, 어린이들의 세례 준비와 세례, 병자성사 등을 맡아 주었으며, 한국어에 서툰 수녀들을 위해 통역을 해주기도 하였다. 코스트 신부의 뒤를 이어 샤르즈뵈프(E.Chargeboeuf) 신부, 비에모(M.P.P. Villemot) 신부, 빌렘 신부 등이 지도 신부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수녀회의 정착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수녀들은 낯선 기후와 생활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였고, 고된 일들을 처리해야 했기에 밤낮으로 쉴 틈이 없었다. 게다가 수녀원의 열악한 환경, 영양이 충분하지 못한 음식, 미흡한 의료 시설 등 때문에 수녀들의 건강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1889년 2월 3일에 자카리아 원장 수녀가 입국한 지 6개월 만에 장티푸스로 선종한 것을 비롯하여 수녀들은 피로와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다.
3. 조선인 수녀의 양성
블랑 주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조선에 정착하기 전부터 조선인 수녀의 양성을 계획하여 신자 가정에서 바른 지향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몇 명의 처녀들을 지목하고 만일 입회할 의향이 있으면 주선해 주려고 생각하였다. 1888년 7월 자카리아 수녀 일행이 조선에 입국하자, 블랑 주교는 자카리아 수녀에게 조선인 수녀의 양성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블랑 주교는 지목해 둔 처녀들에게 통지를 보냈고, 1888년 7월 29일 5명의 처녀들이 임시 수녀원으로 찾아왔다. 이들 첫 지원자들은 김해겸(마리아), 김순이(金順伊, 마리아), 김복우지(마리아), 박황월(朴黃月글라라), 심 바르바라였다. 그녀들은 당시 나이가 15〜17세 사이였고, 순교자의 후손들이었다.
지원자들은 다른 선교 수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미사 및 전례 생활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들은 고아원의 각 부서에서 일손이 필요한 대로 일을 하며 분주한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교육 과정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녀가 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에 1889년 제2대 원장 스타니슬라(Stanislas Joseph Chauvire) 수녀는 샤르트르의 모원에 수련장의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1889년 9월 초에 내한하였을 당시, 지원자들이 수련장도 없이 생활하는 것을 보았던 일본 수녀원의 마리 오귀스타 수녀도 모원에 수련장의 파견을 촉구하였다. 모원에서는 이 문제를 논의한 후, 엘리사벳(Sainte Elisabeth) 수녀를 수련장으로 선임하기로 결정하였다. 1890년 3월 3일에 엘리사벳 수녀는 뱅상(Vincent Fourne-aux) 수녀와 함께 서울 수녀원에 도착하였고, 이로써 수련원이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수련원의 개원은 수녀원이 설립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의 일로, 일본보다도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에 수녀원이 설립된 것은 1878년으로 조선보다 10년이 빨랐지만, 수련원의 개원은 1898년으로 오히려 조선보다 늦었다.
지원자들은 수련장으로부터 수도회 규칙, 기도문, 프랑스어, 성가 등을 배웠다. 이와 함께 수녀원 내의 업무, 고아원의 원아들을 돌보는 일등을 하면서 수녀들을 도왔다.
1890년 8월 15일에는 입회한 지 만 2년이 넘은 7명의 지원자들이 청원복을 받는 예절이 있었고, 이때 청원 수녀들은 각각의 수도명을 받았다. 이어 1894년 6월 30일에는 청원 수녀들이 수도복을 입고 수련 수녀로 받아들여지는 착복 예식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898년 8월28일에 박황월(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 김해겸(쎈뿔) 수녀, 최복동(골롬바) 수녀가 첫 서원을 하였다. 1888년에 입회했던 5명의 지원자 가운데 3명은 도중에 선종 하였고, 박황월 수녀와 김해겸 수녀만이 10년 만에 서원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수녀 지원자들은 계속 늘었고, 수련자들을 위한 착복식과 서원식이 계속 거행되었다. 조선인 수녀 외에 외국인 수녀들도 기한이 되면 서원을 하였다. 1888년 7월 자카리아 수녀와 함께 입국했던 두 중국인 수련 수녀들은 1892년 4월 18일에 첫 서원을 하였다. 또한 유럽인 수녀들 가운데 유기 서원자로 왔던 수녀들은 기한이 되었을 때 종신 서원을 하였다. 그리하여 샬트르성 바오로 수녀회는 1911년 당시 지원자 9명, 청원자 14명, 수련 수녀 9명과 서원 수녀 33명(한국인 21명, 외국인 12명)의 수녀회로 성장하였다.
4. 제물포 수녀원의 설립
서울의 수녀원이 자리를 잡아 갈 무렵인 1892년 제물포에도 수녀원을 설립하자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수녀회가 조선에 정착한 지 불과 4년 만의 일인데, 설립 동기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원장 신부인 르게(M. Legue)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893년 3월 6일자의 서한에서 확인된다. ‘조선의 당가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가 있는) 박(Bac) 가(街)에서 우리와 함께 가진 대담을 주교님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엘리사벳 수녀의 건강 상태가 우리의 서울 수녀들과 사이공의 캉디드(Candide) 수녀로 하여금 제물포에 요양소로 사용할 자그마한 집을 빌릴 생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캉디드 수녀는 이 기회에 임대하는 대신 우리의 비용으로 아담한 요양소를 개설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캉디드 수녀로부터 이러한 제의를 받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샤르트르에서 이러한 의도에서 상의를 했으며, 제가 이 계획 외에도 자그마한 영해회 집과 조출한 경당을 짓는 데 필요한 대략적인 비용에 대해 당가 신부의 의견을 물어보기 위해 박가로 갔던 것입니다. 당가 신부는 대단히 기뻐하며 주교님께 즉시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교님의 회답과 주교님의 생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캉디드 수녀에게 그녀의 견해에 찬성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제물포에다 요양소를 개설하게 되면 비르지니 수녀를 한국에 다시 불러들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마리오귀스타 일본 관구장 수녀에게도 이러한 생각을 알렸습니다.
이나르(F. Hinard, 1850-1917) 신부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욕심이 많습니다. 이나르 신부는 무크덴 대신 만주 포교지에 수녀를 줄 수 없느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방면이 한국 수녀들에게 가능한 진출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신입 회원인 베트남인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잠시 후면 일본인들)은 우리가 그토록 많은 사업을 이행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울의 수련 수녀들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해 보는 것입니다. 이 신출내기 수녀들은 우리의 수녀들이 우리에게 보내준 예쁜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주었으니만큼 더욱 그러합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모든 점에서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주교님께서는 웃어버리고 말겠지만, 엘리사벳 수녀가 수련원이 된 제물포에 있게 된다면, 엘리사벳 수녀와 함께 마리 엘리즈(Marie Elise) 수녀를 선생 자격으로 제물포에 파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물포 수녀원의 설립 동기는 첫째, 질병을 앓고 있는 수녀들을 위한 요양소를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서울 수녀원은 수녀들의 건강 문제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이에 서울 수녀원의 스타니슬라 원장 수녀는 수녀들을 위한 요양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 문제를 샤르트르의 모원과 당시 서울 수녀원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사이공 관구의 캉디드 수녀와 협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 수녀원에 있는 수녀들의 건강을 염려하던 캉디드 수녀는 이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르게 신부도 요양소 설치 계획에 동의하면서 영해회 건물과 경당도 세우는 방안을 뮈텔 주교에게 제안하였고, 뮈텔 주교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러한 논의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는 수녀들을 위한 요양소를 설치하려던 계획이 수녀원의 설립으로 귀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녀원이 설립될 장소로 제물포를 선택한 이유는 "바다의 미풍이 피로나 혹은 병으로 인하여 약해진 수녀들이 보다 나은 건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둘째, 수련원을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만주 지역에서 선교하던 이나르 신부가 선교 수녀의 파견을 샤르트르의 모원에 요청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모원에서는 만주 지역의 선교를 조선인 수녀들이 맡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서울 수련원의 확장을 계획하였고, 그 결과 제물포 수녀원의 설립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뮈텔 주교는 수녀회로부터 제물포 수녀원의 설립을 제안 받고 이를 수락하였다. 그는 수녀원의 설립이 제물포 성당의 건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제물포 본당은 1889년 7월 1일에 설립되었지만, 변변한 성당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0 달러를 교구에서 선금으로 지원해 주어야 하는데, 교구에서는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지원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수녀회로부터 수녀원 외에 고아원 및 경당도 설립할 것이라는 계획을 듣자, 이를 수락하였던 것이다. 수녀회의 제안대로라면 교구의 자금을 들이지 않고도 제물포 성당을 건립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제물포 수녀원의 설립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서울 수녀원은 1893년 4월 12일 수녀원 및 부속 시설의 건축 공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제물포 성당의 부지 3,212평 가운데 일부분을 수녀원 부지로 하고 1893년 7월경부터 수녀원 건립을 위한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제물포 본당의 3대 주임이었던 마라발 신부의 감독 하에 수녀원의 건립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의 여파로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이미 제물포로 파견될 수녀들이 그해 3월 29일 조선에 입국하여 서울 수녀원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수녀들의 제물포 파견을 무기한 지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수녀원 건물이 아직 완공되기 전인 8월 18일에 원장으로 임명된 마리 클레망스(Marie Clemence Fontaine) 수녀와 함께 엠마누엘(Emmanuel Lariviere) 수녀가 제물포에 파견됨으로써 제물포 수녀원이 설립되었다. 수녀원 건물은 이후에 공사를 재개하였는데 완공된 건물은 수녀 20여명이 거주하기에 충분한 서양식 3층 벽돌 건물이었다.
수녀원이 설립되었으나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정식으로 수련원이 설치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제물포 수녀원에 수련 수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894년에 수련 수녀였던 박황월 수녀가 프랑스인 수녀들과 함께 제물포 수녀원에 파견되었고, 이후에도 수련 수녀들이 그곳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는 수련 수녀들의 사목 실습을 위해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수련원이 설치되지는 못 하였으나, 계획대로 고아원의 병설을 추진하여 1896년 8월 15일에 고아원 건물을 낙성하였다. 이러한 영해회 사업은 수녀원 설립직후부터 전개한 무료 진료소 운영과 함께 제물포 수녀원의 주된 활동이 되었다. 한편 제물포 본당은 수녀회의 기금 지원을 받은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1895년 8월 11일에 정초식을 가졌고, 공사를 마무리하여 1897년 7월 4일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제5절 교회의 사회 복지 사업
1. 영해회 사업의 재개
영해회 사업이 조선에서 시작된 시기는 1854년경부터였다. 이는 고아를 맡아 키우기에 적합한 신자 가정을 선발하여 아이를 맡긴 뒤 양육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조선교회는 영해회 본부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859년에는 43명, 1862년 11월에는 78명의 고아들을 양육하였다. 이처럼 영해회 사업이 점차 확장되자, 베르뇌 주교는 서울에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에 대한 양육과 교육을 동시에 실시하려 하였으나 병인박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영해회 사업은 중단되었다.
영해회 사업은 1870년대 말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면서 재개되었다. 충청도와 전라도 일부 지역을 사목하던 두세 신부가 블랑 주교에게 보낸 1884년 4월 21일자 보고서에는 1883년부터 1884년 4월까지 영해회 어린이 4명의 부양비로 124냥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경상도 지역을 사목하던 로베르 신부도 1885년부터 영해회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영해회 활동은 선교사가 파견된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블랑 주교가 1885년 3월 서올 곤당골에 고아원을 설치하였다, 이는 영아들에게 체계적인 양육과 교육을 실시하려 하였던 베르뇌 주교의 계획을 23년 만에 실현한 것이었다. 블랑 주교는 원아의 수가 점차 늘어나자 1887년 9월경에는 종현에 새 고아원 건물을 매입 하였는데, 곤당골의 고아원은 이 시기쯤 종현으로 이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에 앞선 1887년 7월 26일에는 고아원을 보다 충실하게 운영하기 위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1888년 7월 22일에 4명의 수녀들이 조선에 입국하였고, 9월 8일에 정식으로 고아원을 인수받았다. 수녀회가 고아원을 인수한 후, 자카리아 원장 수녀는 고아원의 운영과 경리를, 에스텔 수녀는 여아부를, 프란치스카 수녀는 남아부를 맡았으며, 비르지니 수녀는 세탁일과 주방을 담당하였다. 이들과 함께 조선인 수녀 지원자들도 고아원의 각 부서에서 일손이 필요한 대로 수녀들을 도우며 분주한 생활을 하였다. 수녀들은 영해회 사업의 목적에 따라 원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세례와 종교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서울 고아원에서는 적지 않은 숫자의 세례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예컨대 1896년도 통계에 따르면 임종대세 21명을 합쳐 모두 232명이 세례를 받았다. 수녀들은 일요일이 되면 원아들을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 종현 성당의 미사에 참여시켰고, 기도문과 성가도 가르쳤다. 이 밖에도 국문, 한문, 산술, 재봉, 세탁 등의 기초교육과 실업 교육을 병행하였다.
수녀회가 고아원의 운영을 담당한 이후 원아들이 증가하여 1886년에는 80명이었으나 1888년에는 175명에 이르렀다. 이에 시설 확충에 나서 고아원 건물을 신축하고 1889년 9월 8일에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원아들이 계속 증가하였기 때문에 수녀 회는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해야 했다. 이와 함께 남녀 원아들이 한 건물에서 생활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그리하여 1894년 스타니슬라 원장 수녀는 약현 본당 부근에 남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지만, 재정적인 문제 등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대신 남아들보다 여아들을 주로 수용해갔고, 1901년 4월 1일부터는 남아들의 신규 수용을 중지하고, 고아원에 있던 남아들도 신자 가정에 위탁하여 양육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와 같이 원아들을 보살피고 교육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넉넉해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다. 고아원 운영에 필요한 주요한 재원은 프랑스 영해회의 지원금이었다. 프랑스 영해회 본부는 파리 외방전교회를 통해 1885년부터 1906년까지 매년 약 2만 7,505프랑을 조선 대목구에 지원하였다. 이 밖에 샤르트르의 모원에서도 사업비를 지원하였고, 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유럽인들도 의연금을 모금하여 뮈텔 주교를 통해 수녀원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에도 재정적인 어려움은 이어져 1893년에는 스타니슬라 원장 수녀가 주한 프랑스 공사관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녀들은 당시 손탁 호텔(Sontag Hotel) 혹은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빨랫감을 세탁해 주고받은 돈으로 부족분을 충당하였다.
한편 제물포에서도 1894년 8월 18일 수녀원이 설립된 직후부터 수녀들이 고아들을 받아들여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수녀회는 15명의 어린이들을 받아 들였는데, 이것이 제물포 고아원의 시작이었다. 수녀회는 원아들을 위해 고아원 건물을 신축하고 1896년 8월 15일에 축성하였다. 그리고 고아원 외에 탁아소도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고아원에 위탁된 영아들을 외부의 유모에게 보내어 양육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1909년에는 새로운 고아원 건물을 신축하여 수용 공간을 확충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개항기에 재개된 영해회 사업은 신자 가정에 맡기는 기존의 위탁 양육 방식과 함께 고아원을 운영하는 방식이 병행되었다. 이러한 영해회 사업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원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영해회 본부의 지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졌다. 그러나 1888년 6월에 일어난 ‘영아매식’의 유언비어 사건과 같은 천주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고, 선교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굶주린 어린이나 고아들을 구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원아들에게 교리 교육, 기술 교육 등을 통한 전인적 교육을 시행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양로원의 개설
블랑 주교는 1885년 7월 2일 종로의 동골에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개설하였다.
‘서울에서는 성모님의 보호 아래 매우 필요한 사업을 시작했는데, 우리 주님의 마음에 드는 흡족한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 집은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입니다. 7월 2일 이후 이 집에 들어온 남녀 노인들의 수는 20여명에 달하며, 현재 입원 신청자의 수도 상당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고아원의 경우처럼 어떤 불행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열성을 좀 조정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동냥으로 연명하거나, 비신자 집에 살면서 죽을 위험에 있어도 성사마저 받을 수 없는 불쌍한 노인들의 사정이 얼마나 딱한지요!’
신자나 비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까닭에 많은 무의탁 노인들이 양로원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운영을 담당할 인원과 수용 공간이 부족해서 양로원에 들어오고자 하는 노인들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블랑 주교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고아원과 양로원의 운영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고, 1888년 7월 22일에 수녀회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수녀들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고, 양로원이 수녀원이 있는 종현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수녀들이 직접 양로원의 노인들을 돌보기가 어려웠다.
양로원은 개설된 직후부터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영해회 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고아원과는 달리 양로원의 재정은 오직 교구에서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재정난은 해결되지 못한 채 계속되었고, 결국 1893년 9월경 양로원이 폐쇄되고 말았다. 뮈텔 주교는 양로원으로 쓰던 관철동의 집을 팔고, 양로원의 비품을 종현의 인쇄소 옆에 있는 집으로 옮겨 두게 하였다.
3. 의료 활동
블랑 주교는 1886년경 양로원의 노인들과 일반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양로원에 진료소를 병설하였다. 1850년대에 선교사들이 영해회 사업의 일환으로 시약소를 설치하여 의료 활동을 전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진료소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의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양로원은 계속해서 신자들과 비신자들로 꽉 차 있습니다. 성교회의 자녀가 되어 이 세상을 하직하는 노인들을 보며 우리는 위안을 받고 있으며, 다만 영양실조로 길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양로원에 들어오는 노인들도 있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이 양로원 사업에 다른 목적을 추가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즉 이 양로원은 진료소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젊을지라도 중한 환자이면 이 진료소에 입원시켜 치료해 주고 있는데, 환자들은 너무 가난한 자들이거나 비신자인 부모 밑에서 임종대세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신자들입니다.’
이러한 의료 활동은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조선에 정착하면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고아원에서는 재정적인 한계로 입원을 희망하는 아동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병약하거나 죽을 위험에 처한 이동들을 선별하여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것이 수녀회가 의료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서울 수녀원의 초대 원장이었던 자카리아 수녀는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Martinique, 서인도 제도 남동부의 프랑스령 섬) 지방의 선교 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고, 1894년 제물포에 파견되었던 마리 클레망스 수녀도 베트남 통킹(Tonking, 베트남 북부 홍강의 삼각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야전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수녀들이 고아원을 운영하며 의료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다.
수녀회의 의료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894년 여름부터였다. 제물포 수녀원이 설립된 직후부터 수녀들은 진료소를 개설하여 무료 진료 활동을 시작하였다. 제물포 수녀원의 제2대 원장이었던 줄리 엔(Julienne de la Croix Martin) 수녀가 뱅상 수녀와 함께 환자들의 무료 진료에 임하였다. 수녀들의 의료 활동이 알려지면서 진료소에 환자들이 몰려들었는데, 1898년5 월부터 1899년 4월 사이에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가 5373명 이었고, 수녀들이 직접 방문하여 치료한 환자가 435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는 진료소에서 하루 평균 14.72명의 외래환자를 진료하고, 1.19명의 환자를 방문해서 치료한 셈이었다. 이처럼 외래환자의 수가 방문환자보다 훨씬 많았지만, 1909년경을 전후해서는 방문 진료에 중점을 둠으로써 외래환자의 비율이 감소한 반면, 방문환자의 비율이 높아졌다.
한편 1899년경 서울 수녀원에서도 진료소를 개설하여 무료 진료에 나섰다. 그러나 개설 초기에는 제물포 수녀원의 진료소에 비해 그 활동이 상대적으로 저조하였다. 이것은 당시 서울 수녀원의 주력 사업이 고아원의 운영이었고, 진료소는 일종의 부수적인 사업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 서울의 진료소는 꾸준히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1909년에 이르러서는 외래환자 진료수가 제물포의 진료소보다 많아졌다.
수녀들은 질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영혼 문제도 중요하게 다루었다. 수녀들은 환자의 영혼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외래환자를 치료하는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방문하여 진료하였고, 임종을 앞둔 환자들에게는 대세를 베풀어 주었다. 이러한 수녀들의 의료 활동은 비신자들이 세례를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896년, 원장이며 환자 방문 일을 맡은 십자가의 줄리엔 마르탱 수녀와 보육원 출신 한 명이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줄리엔 수녀는 조선말을 몇 마디 할 수 있게 되자 곧 고통 중에 있는 조선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는 거리를 오가면서 집들을 찾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의 건강에 대해서 열심히 물어보았는데, 몇 달 후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조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집들은 매우 낮기 때문에 허리를 반쯤 굽혀야만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의자도 침대도 모르는 조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즉시 바닥에 앉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들이 나에게 그들의 육체적 병이나 어려움을 말하면 나는 힘을 다하여 그 어려움을 고쳐 주려 합니다. 나는 그들의 영혼을 잊지 않고 그들의 영혼의 문제도 도와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열고 자기들이 하느님에 대해 가진 생각을 말합니다. 몇몇 비신자들은 벌써부터 나에게 세례 받고 싶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생각을 격려하며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와 기도에 대해서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이처럼 수녀들에게 치료를 받았거나 혹은 치료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수녀들의 애덕에 감명을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수녀들은 그들이 믿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움을 주었다.
당시 교회의 의료 사업은 그 규모나 시설, 의료 행위의 수준에 있어서 부족한 면이 많았다. 수녀들은 전문 의료인이 아니었고, 진료소도 전문적인 의료 기관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의료 사업은 조선 사회에 근대 의술이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무료 진료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많은 환자들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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